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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7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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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방문 강연자료]5.18민중항쟁의의와 한반도 정세, 그리고 운동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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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1-05-12 00:00 조회2,27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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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민보 이창기 발행인 방미기념 강연회 자료]

[미주방문 강연자료]5.18민중항쟁의의와 한반도 정세, 그리고 운동방향


[자료]

자주민보 이창기 발행인은 2001년 5월11일 로스엔젤레스에서 민족통신과 김양무열사정신계승미주사업회에서 개최한 [5.18민중항쟁 제21주년기념 강연회]에서 <한반도의 정세와 해내외운동의 전망>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이날 발표한 논문자료를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

*글: 이 창기[월간 자주민보 발행인]




차례



1. 5·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

2. 한반도의 본질적인 문제는 북미관계

3. 제네바 합의의 의의 및 페리보고서

4. 6·15공동선언이 가져다준 운동상의 변화

5. 민족민주운동의 방향

6. 승리의 보검은 단결

한반도의 정세와 해내외운동의 전망

들어가며

jaju.01.jpg나는 자주민보를 만들면서 한반도와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 에서 가까운 몇해안에 반드시 조국을 통일하고 자주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담보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담보는 바로 "북미제네바합의"와 "6·15공 동선언"입니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얼마나 열열한 신심을 가지고 양심에 기초하여 자주로운 민족을 건설하기 위한 실천에 주저없이 나서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1. 5·18 광주민중항쟁의 의의
우리가 꿈에도 그리운 자주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의
의의를 해내외 동포들의 운명과 결부지어 정확히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매년 5월
이 오면 의례적으로 짚어보는 의미가 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빛고을 광주항쟁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서는 해내외 동포들은 결코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월 27일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가 야수들에게 붇잡힌 한 기동타격대 전사는 88년
고려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곧 공수부대가 침탈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와
동지들이 도청을 빠져나올 수 없었던 것은. 이제야 알게 된 진짜 적들에게 등을 보일 수 없
었기 때문이다. 그 미국놈들에게 우리가 도망쳤다는 역사를 후대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광주항쟁은 우리의 자주로운 삶을 억압하는 제국주의가
바로 미국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이제는 민족의 자존을 지켜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던 해방
이 되었어도 친일경찰들이 오히려 살판치고, 일제가 약탈해간 우리 농토의 대부분을 미군정
이 만든 신한공사 손아귀에 들어간 것만 보아도 미국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 민중 모두가
그 때 이미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것을 알아차린 진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애국자들을 빨갱이라는 몰아 수백만명이나 죽였습니다. 미국의 본질을 알았던 참된 민족의
양심들을 거의 다 죽인 셈입니다. 저의 자주민보에서 출판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쏴라"
라는 책을 보면 그 과정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이유도 없었습니다. 실정법을 위반한 아무런
행위도 없었습니다. 45, 6년 약 2년 정도는 시위도 하게 하고 잡아가더라고 금방 풀어주면서
미군정은 애국적인 인물들을 충분히 파악했습니다. 특히 일제 경찰들을 앞세워 일제시대 독
립을 열망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빽빽히 작성해 두었다가 4.3항쟁부터 모조리 죽이기 시작하
였습니다. 단지 앞으로 미국을 반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잡아가서 재판도 없이 처형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국가보안법에 근거한 예비검속에
의한 처형이었습니다. 무조건 예비하는 차원에서 잡아서 죽인다는 것이지요. 오로지 미군들
의 무력을 이용하여 이렇게 죽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미국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씨를 말리
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렇기에 해방과 전쟁 이후 민족운동을 이끌어갈 양심들이 남녁에는 많지 않을 수밖에 없
었습니다. 4.19 혁명과 같은 전 민중적인 항쟁에서 반미와 통일 구호가 나왔지만 전면적으로
내세운 구호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미국을 바로 보지 못한 이 항쟁도 미국에서 부랴부랴 내
세운 친일 관동군장교 박정희의 쿠데타로 좌절되어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되었습니다.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이런 박정희가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그는 결국 초상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민족의 봄은 오지 못했습니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을 들락거리던 전두환
노태우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를 단호히 거부해 나선 우리 민중을 서울에서 짓밟
더니 결국 광주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야수적 살인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짖밟히면서도 광
주민중들은 부산항에 들어온 미군항공모함이 살려줄 것이라고 기뻐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항공모함에서 학살을 지령했다는 것을 광주 민중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서야 공수부대를
투입할 수 있는 군작전지휘권을 주한미군사령관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
습니다.
그 광주 민중의 아름다운 저항과 미국의 잔인한 학살을 보면서 그제야 우리 민중들은 이
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것입니다. 주한미군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결코 초보적인 생존
권과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을 물리치고 민주적 권
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광주민중
을 간첩의 선동에 동조한 빨갱이로 몰아붙이기 위해 현 김대중 대통령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제야 아프게 깨달았습니다. 통일 운동이 없이는 국가보안법도 없앨
수 없고 주한미군을 쓸어내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왜 미제가 민족의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씨를 말리려고 했는지,
왜 4·19가 미완으로 끝났는지 하는 것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반미투쟁과
통일운동이 몰계급적이라는 둥 민족주의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둥 하는 반론도 있었습니
다. 하지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항쟁의 역사를 보면 결국 전세계패권을 누리려는 미국이
주한미군의 무력을 이용하여 민중의 해방을 짖밟아 왔다는 엄연한 사실앞에 이성이 있는 사
람이라면 반미와 통일의 기치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반미운동을 하는 사라들은
가장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늘에 와서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과반수
이상이 미국을 제일 싫어한다는 설문조사가 보수일간지에 버젓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광주
민중의 피값은 바로 소중한 자주와 통일운동을 통해서만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한민족의
얼굴을 지닌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2. 한반도 본질적인 문제는 북미관계
jaju.03.jpg이러한 광주의 가르침에서도 나타나지만 우리가 강대국의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주롭
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미관계와 주한미군의 철수에 대해서 명확한 관
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한미군이 없으면 극우 보수 세력까지도 더는 맥을 출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과거야
어떠했든지 남북해외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민족의 편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카터 전 미대통
령이 선거 공약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내걸자 그 친일친미 민족반역자 박정희도 부랴부랴 이
후락을 북부조국에 보내서 결과적으로 7.4남북공동성명에 서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숨겨진 역사를 보면 그런 이후락이가 꾸중을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북에 보낸 것 자
체에서 우리는 당시 정권이 외세공조에서 민족공조로 기울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주한 미군은 미국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실질적이며 물리적 담보입니다.
91년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그만 두고 92년 북부조국의 고위 관리와
협상을 하게 되자 그 여파로 광주의 살인마 노태우도 북부조국과 남북합의서라는 통일에 한
걸음 다가선 합의를 하였습니다. 98년 북부조국에서 인공위성을 단방에 성공시키자 미국은
99년 완성도 되지 않은 페리보고서를 발표하며 북을 인정하겠다는 식의 긍정적인 정책방향
을 내비쳤고 그 여파로 2000년 6·15공동선언과 북미코뮤니케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런 두가지 사례는 북미관계가 풀리면 결국 남북관계도 풀리게 되어 자주적 민족통일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왜 이렇게 북미관계가 풀리면 반도에 봄바람이 부는
가? 그것은 바로 북미관계의 진전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왜 북미관계가 좋아지면 이런 지긋지긋한 주한미군이 철
거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한미군의 주둔 이유가 바로 북
이 테러국가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주한미군의 주둔 이유는 공산주의 소련을 막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소련이 해체되어 레닌그라드에 째즈 음악과 야리꾸리한 춤판이
벌어지자 이 주둔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중국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미국은 이미
애첩 대만을 버리고 핑퐁 외교를 통해 중국과 수교를 맺은 상태여서 그런 중국인민을 죽이
기 위해 미군을 중국 코앞에 주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군을 주둔시킬 유일한 이
유가 바로 북부조국이 테러국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북미관계가 봄바람을 타게 되면 당연히 이 근거가 사라져 주한미군이 더는 한반도
에 존재할 명분을 잃게 됩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극악스런 친일, 친미 독재자들도 북미관
계가 호전되면 민족의 편에 서려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민족
의 편에 서더라도 그런 독재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고 정의로운듯한 분통을 터트릴 수 있
지만 그것은 민중의 행복은 오직 자주로운 민족의 품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미처 알지
못한 정의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6·15공동선언이 발표되자 그 지긋지긋한 거머리같은 국가 보안법이 맥을 추지 못
추게 되었던 2000년 여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사라지면 민중들은 마음놓고 노
조를 만들고 정치에 참여하며 참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민족보다는 계
급을 우선시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국가보안법철폐가까지 지어부르며 목이 메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깨뜨리려고 몸부림쳐도 끄덕 없던 국가보안법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2000년 여름에 6·15 통일선언이 나오자 국가보안법이라는 똥개가 깨깽거리는 만화
를 한계레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단언하건데 국가보안법철폐 자체를 천년만년 외운다고
그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의 근거가 분단이기에 이 뿌리를 잘라야 국가보안법
이 말라죽게 됩니다.
결국 6·15공동선언도 북미관계가 발전하여서 나오게 된 것이니 한반도 변혁의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북미관계의 변화에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저는 그런 북미관계가 머
지 않아 좋아질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제네바 합의서"입니다. 이것은
무척 흥분할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제네바 합의의 의의 및 페리보고서
이 글의 내용은 객관성이 생명이므로 어투를 평서형으로 바꿉니다.

북미관계 진전은 조국통일의 중요한 담보
2000년 7월9일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93, 94년에 한반도
에서 전쟁일보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방송했다. 이 방송에서 한승주 당시 외무
부 장관은 “좀 위기의식이 있었다. 사실 잠이 안 올 때도 있었고 이러다가 전쟁나는 것을
방지하지 못하는 책임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할 지경이었다”라고 말했다. 제
임스 레이니 당시 주한미대사도 “허세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너무도 위급한 상황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고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역사학 교수)도 “1994년 6월 당시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이었다”라며 긴장된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그 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될 한반도 이남 사람들만 이 사실을 몰랐다. 단지
문화방송 보도국 국제부 정홍보 기자는 걸프전쟁으로 주가를 높인 씨엔엔방송사로부터 긴급
지원 협조요청이 왔었다고 말했다. 그 내용은 한반도 전쟁가능성에 대비해서 씨엔엔측이 휴
전선 근처에서 위성 생중계를 준비하고 있으니까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도 당시가 아닌 7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알려지고 있다.
물론 당시에 라면을 사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미국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친척으로
부터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것
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전쟁을 하고말고를 우리 나라가 결정할 수 없고 그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죽음을 당해도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
는 것이다. 왜 이런 운명에 처해있는가. 그것은 바로 한반도 운명의 실질적인 통제자는 미국
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앞서 말한 방송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국인은 진지하게 스스로에
게 물어보아야 한다. 언제쯤이면 이같은 전쟁의 볼모상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말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작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
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북미관계
전 미국방장관 레스 아스핀이 걸프전이 난 직후에 미국의 미래 군사작전을 계획해 놓은
문서 ‘레스 아스핀 문서’를 보면 그 첫 페이지에서 타도해야 할 악의적인 국가로 이북과
이라크를 지명하고 있었으며 이북을 상대로 한 전쟁시나리오가 구체적으로 계획되어 있었
다. 이를 보면 미국은 언젠가는 이북을 이라크처럼 한번 공격해 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양대 리영희 교수도 "93년 이제 웬만한 가상의 적은 지구상에서 사라졌
다. 미국 군사력이 이제 해야할 일은 이북에 대해 김일성을 없애는 것이다. 미국 군사력을
쓸 대상이 없어졌다. 어디다 쓸까. 이북 하나만 남았다”고 말했다.
미국은 군산복합체적 자본주의 나라이다. 경제에서 군수산업의 비중이 아주 높은데 이 군
수산업은 무기가 소모되어야 활성화된다. 이런 무기를 소모할 전쟁이 없어서 스웨덴,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는 전차나 전투기 개발생산을 중지했다. 미국의 군수산업체도 자국에서 개발
생산한 최신 무기를 미군에게만 팔아가지고는 채산성을 맞출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워싱턴 포스트’지 기자였고 현재 ‘롤링스턴’지 편집장인 윌리엄 그라이다가 1998년 출
판한 ‘Fortress America’라는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미국은 끊임없이 전쟁
에 개입해 왔다. 200년 밖에 안된 나라가 300여번의 전쟁을 치렀다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
다. 소련과 동구권은 무너지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북을 군사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고 판단
되었으며 중국도 개방으로 갔고 있었기에 이북의 충실한 지지자로 자처할 수 없는 처지였
다. 거기다가 이북은 지독한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미국의 정권이
얼마나 짜릿한 흥분을 느꼈겠는가!
원래 91년 부시정권 말기만 하더라도 이북과 미국의 관계는 아주 많이 좋아졌었다. 미국
이 핵공격 상정 군사연습인 팀스피리트훈련 중지를 발표했고 1991년 9월27일에는 한국으로
부터 전술핵무기 철수를 선언했다. 그렇게 대학생들이 반전반핵 구호를 외치며 핵무기 철수
를 주장할 때는 나몰라라 하더니 이때 알고보았더니 천여기의 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해 놓
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핵융단을 깔고 살았던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미국의 조
치에 대해 이북은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다는 회답을 주었다. 이렇게 순조롭게 이북과 부
시정권간에 관계가 호전되었다.
91년 12월13일에는 남북간 불가침협정이 체결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92년 1월에는
이북의 고위 관리가 뉴욕을 방문하여 회담하였다. 하지만 92년 선거에서 부시가 떨어지고
클린턴이 당선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 것이다.

선전포고 누가 먼저 했나
북미간의 관계 호전에 가장 먼저 찬물을 끼얹은 발언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무국장 브릭
크스(스웨덴인)의 입에서 나왔다. 클린턴 취임 1개월후 2월25일 국제원자력기구는 이북의 군
사시설을 신고에서 누락된 핵시설이라고 트집잡아 전례없는 특별사찰을 요구했으며 클린턴
은 3월에 그 위험한 핵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를 한국에서 재개시켰다.
국제원자력기구가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온 배경에는 미국의 뒷충동질 때문이었다는 주장
이 있다. 1995년 4월 ‘워싱턴 포스트’지에 연재된 장문의 기사를 보면 클린턴은 미 중앙
정보국을 시켜 국제원자력기구의 사무국장 브릭크스를 미국 의향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들라
고 명령했다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이런 기사가 아니더라도 국제기구에 가장 큰 영향을
행사하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알고 있었던 이북은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 압력에 강력히 반발했으
며, 특히 팀스피리트훈련 재개는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이북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
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나라에 대해서는 전세계 그 어
떤 나라도 핵위협을 가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북미간에 일정정도 공감대가 형성되
어 핵공격 훈련인 팀스피리트훈련을 미국이 그만두었기 때문에 이북은 ‘핵확산금지조약’
에 가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북으로서는 이러한 미국의 팀스피리트 훈련을 다시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선
전포고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특별사찰을 이북이 거부한다면 국제원자력기구 위원
들은 투표로 강제사찰을 결정하게 되는데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국제기구의
대부분은 친미인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이북이 동의한 기구의
합법적 결정을 통해 강제사찰을 명한 것이고 이를 거부하는 이북에 대해서는 국제적 지원을
등에 지고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된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는지 단
한번도 부당한 간섭에 대해 물러선 적이 없던 이북은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

한반도 전쟁, 누가 막았는가
앞서 말한 문화 방송을 보면 당시 김계관 북측 수석대표는 서방기자와의 담화에서 “원래
합의한 핵시설과 관계없는 군사시설을 사찰하겠다고 하는데 우린 그거 접수 못한다. 그 입
장에선 변함이 없다. 똑똑히 알라”고 단호히 말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압력이 고조되자 급
기야 이북은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를 선언한다. 한마디로 먼저 이북이 미국을 한방
먹였다. 왜 그런가 하면 이 탈퇴가 불법적이라면 미국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더욱 많이 받으
며 이북을 궁지에 몰수 있는데 너무나 합법적으로 탈퇴하면서, 국제기구의 투표를 통한 강
제사찰 결정을 아예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이다.
이 조약 제10항을 보면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나라는 국제사회의 부당한 압력에 대
해 자위적 조치로써 탈퇴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에 이 조항을 들어 합법적으로 탈퇴했
던 것이다. 아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조약에 가입할 때 이 항목을 눈여겨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북은 곧바로 전군, 전민에게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신혼여행가던 부부들
까지 군대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전세계 모든 기자들은 백악관으로 몰려갔다. 이제 전쟁을 하고 말고의 선택은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순식간에 이북이 강제사찰을 받느냐 마느냐 상황에서 미국이 이북을 공격
하느냐 마느냐의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이북의 외교에 대해 리영희 교수는 기막힌
묘수이자 예술이라고 했다. 그때 클린턴은 단호히 전쟁을 결정했다고 한다. 전쟁 결정을 내
리고 착착 진행하다 5시간 전에 그만 두었네, 60분 전에 그만 두었네 하는 이야기들이 99년,
2000년이 되어서야 간간이 오르내렸던 것을 보면 클린턴은 이 지구상의 최후의 사회주의 나
라, 반미운동의 선봉장인 이북을 가만 두기 싫었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공격을 포
기했다.

이북의 미사일 앞에 무릎꿇은 미국
국제원자력기구의 강제사찰을 강요에 ‘자위적 조치’로써 1993년 3월8일, 이북은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혀를 내두르던 미국에게 정신을 차릴 기회도 주지 않고
이북은 곧바로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 이에 다급해진 클린턴 정부는 ‘연변핵시
설’폭격을 실전에 옮기기로 결정함으로써 세상이 다 아는 ‘93년 한반도 전쟁 위기’를 연
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보다 이북이 한 발 앞서서 공격적인 단호한 조취를 취하였다.
김명철의 저서‘김정일의 통일전략’을 보면 “미군에 대한 공격을 상정한 군사연습과 미
사일 발사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미군은 이 사실을 공표하는 것을 피했다. 주한미군에 대한
공격을 상정한 군단 수준의 군사연습은 1993년 3월16일 전선에서 실시, 미군사 정찰위성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에 행해졌다. 4일 후인 3월20일, 클린턴 정권은 허겁지겁 북조선에
교섭을 요청해 왔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북이 자신들의 군
사력을 보여 미국 스스로 전쟁을 포기하도록 종용한 것이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화력을 보
여주었으면 미국이 깜작 놀랬을까! 김명철 선생은 상상을 초월한 화력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연속타격을 가한 것이다. 약 두 달뒤인 5월29일 이
북의 미사일 3발이 하늘을 가르며 한 발은 일본 노토반도 앞바다 공해상에(조선일보 1998년
10월23일자에 이 미사일 발사 시험이 공개되었다.), 두 발은 하와이 앞바다 근처 태평양 공
해에 떨어졌다. 이북이 목표라고 공개한 지점에 정확히 명중하였다. 이북은 그 어떤 미사일
금지 조약에 가입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공개할 필요가 없다. 그런
데 이북은 이를 공개하였다. 미국이 잘 볼 수 있도록.
미국은 200여년의 역사동안 다른 나라 땅에서는 수도 없이 전쟁을 치루었지만 남의 침공
을 받아, 자국민이 피를 흘린 적은 없다. 그런데 동방의 작디 작은 나라, ‘조선민주주의인
민공화국’이 만든 미사일이 태평양을 건어 자신들의 코앞에 떨어졌다. 만약 단 한 발의 이
북 미사일이 미국의 도시 근처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타격하면 원자폭탄
1만5천개이상이 터진 것과 같은 참화에 휩싸인다. 이런 무기를 가진 나라와 군사적으로 대
결하는 것을 좋아할 미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이북과의 협상을 미국국민들은 정부에
촉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잔인한 일이었다. 국민들에게는 숨겼지만 미국의
수뇌부는 다급해졌다.
그래서 이북의 미사일 발사 실험 성공 3일 후인 1993년6월2일부터 11일까지 제1차 조미
회담이 뉴욕에서 열렸다. 이북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3개월 뒤에 이 탈퇴가 성립되어
자동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기한인 6월12일이다. 이 기한이 촉박해지면서 미국은 서둘
러 이북과의 협상을 개최하였다. 그 이후 카터가 이북을 방문하고 북미대표들이 협상을 계
속하여 마침내 1994년 10월21일 북미핵합의 즉 ‘제네바 합의’가 발표되었다.

이북은 협상을 원했다.
결국 미국이 이북과 협상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북의 강력한 군사력 때문이라
고 말할 수 있다. 1999년 9월15일자 모든 한국 일간 신문에 발표된 미국의 대북정책 조정관
페리 보고서 발표 내용을 보면 북·미간의 전쟁은 곧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대화
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이북과 주된 회담을 담당했던 미 국무부 차관보 로버
트 갈루치는 “일단 북·미간에 군사충돌이 생기면 그것이 짧게 끝나거나 인명피해가 미미
한 정도로 끝나리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군사 충돌은 아주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페리나 갈루치의 발언이 이남 국민과 이북 동포들이 죽을까봐 걱정한 말이라고 생각
하는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도 자신들의 군작전을 위해서라면 노근리
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아이건 임산부건 뻔히 눈에 보이는 데도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그 사실이 밝혀진 지금까지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2000년 1월의 파주사태만 보아도 이러한 미국의 자기 중심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반경 1
킬로미터를 날려 버릴 수 있는 폭탄이 미군기지에 매설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미군을
재빨리 군부대에서 철수했는데 파주시청에는 철수하고 난 후 7시간이 지난 뒤에야 통보했었
다. 같이 빠져나가면 혼잡스러워 미군의 철수가 어려울까봐 그랬다는 것에 파주시민들은 분
통을 터트렸었다.
이런 것을 보면 미군은 자신들의 피해가 심각할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전쟁을 그만두고
협상으로 돌아 선 것으로 밖에는 다른 해석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북의 군사력과 미사일
기술이 전쟁을 막아 주었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겠는가.
여하튼 이북은 1953년 정전협정을 맺은 그 날부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북미관
계를 정상화하고자 노력해 왔는데 그 꿈을 제네바 합의를 통해서 이루게 된 것이다. 이 합
의가 발표되었을 때 많은 언론들은 하나같이 이북은 원하는 것은 다 얻었고 미국은 손해만
보았다고 말했는데 왜 그런지 그 합의문을 살펴보면 짐작을 할 수 있다.

중요부분을 요약하면
첫째, 미국은 2003년을 목표시한으로 총 발전용량 약 2,000MW의 경수로를 북한에 제공하
기 위한 조치를 주선할 책임을 짐(대체에너지 중유를 연간 50만톤까지 제공). 그리고 북한은
흑연감속로 및 관련시설을 동결하고 이를 해체함. 둘째, 양측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함. 셋째, 양국은 핵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노력함.
첫째 항목은 원자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만들 수 있는 이북의 흑연감속로식 원자력 발
전소를 해체하는 대가로 경수로식 발전소를 건설해주며 그 건설 기간 생산하지 못하는 전력
만큼 중유를 연간 50만톤 이북에 공급한다는 합의이다.
미사일을 보유한 이북이 핵까지 갖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에 영변 시설을 동결시키는
것에서는 미국이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으나 원래 이북의 영변핵시설은 플루토늄 생산
용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이므로 5MW짜리 대신 2000MW를 건설해주니 경사가 날 일이
다. 거기다가 중유도 공급된다니 금상첨화다.
그런데 더욱 주목해야 할 항목이 둘째 항목이다. 정치·경제적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이북이 꿈에도 염원하던 일이다. 관계정상화는 북미수교를 의미하며 북미 평화협정을 깔고
있다. 이북은 계속 이 주장을 해왔는데 미국은 이북이 테러국이란 이유로 거부해 왔다. 그
근본이유는 수교를 맺게 되면 이북이 테러국에서 해제되고 주한미군 주둔 이유가 없어지게
되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되며, 태평양을 자신의 호수처럼 만들려는 계획에 차질
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북은 주한미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까운 돈을 군사비에 투입하느라 사람들의 복지
생활에 있어서 곤란을 겪어왔다. 이제 이북도 다리 뻗고 잘 수 있게 된다. 특히 강대국 미국
의 눈치를 보느라(요즘은 많은 유럽국가들이 북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유럽국가에서 이북과
수교를 하지 못한 관계로 이북은 이런 나라들에게 지하자원을 수출하거나, 자신의 탁월한
과학기술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국제시장 경쟁에 뛰어들 수 없었는데 북미관계의 정상화는
이북과 서방 자본주의 전체와의 정상화로 가게 되어 이북 경제력의 비상한 발전을 일으키게
된다.
이남 내에서 미국은 자신들과 수교를 맺은 이북을 이남의 적이라 말할 수 없게 되고 자연
스럽게 국가보안법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어 이남에서도 전면적인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게
된다. 이런 한반도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조항이 바로 두 번째 조항이다.
더욱더 놀라운 지점은 첫 조항에 2003년까지 이 합의내용을 미국이 책임진다고 그 시한을
못박았다는 것이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에도 북미간에 평화협정을 맺고 이남과 이북에서
외국군대를 철수한다는 합의를 했지만 언제까지 하겠다는 시한을 명기하지 않음으로서 이북
에서 중공군은 다 철수했지만 이남의 미군이 오히려 증강되어도 이북에서는 법적으로 대응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에는 바로 2003년이라는 못이 박혀 있다. 이것이 2003년
한반도 통일을 확신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면 이북이 왜 미국과만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오게 되고 통일이
이룩될 수 있는가? 그건 첫머리에서도 보았듯이 북미간 정전협정은 언제든지 선전포고 없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기에 평화협정을 체결해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이남 정부의 대통령에게는 군작전지휘권이 없다. 물론 육사졸업식에서 표창장을 줄 수 있
지만, 1개 중대에게 이동명령조차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광주항쟁의 진짜 주범은 미군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된 것은 미군 사령관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며
만약 당시 공수부대 책임자인 노태우, 전두환이 허락없이 움직였다면 미군사령관은 이들을
군법에 회부하여 총살을 시켜야 한다. 그런데 미국은 이 두 사람을 대통령으로 인정해 주었
다. 어느모로 보아도 미국의 사주라는 것이 드러나는 사건이 광주항쟁이다. 이런 정부가 이
남 정부인데 그 정부와 이북이 평화협정을 맺은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1953년 정전협정의 주된 당사자가 이북의 김일성주석과 미국이다. 그러므로 잠시 전쟁을
중단하고 있는 정전협정을 영구히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려면 이북과 미
국이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평화협정을 맺으면 더이상 미군이 주둔 이유
는 없다. 80년대까지 미군의 주둔근거는 대소전진기지였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소련이 해
체되고 중국도 개방으로 가면서 오직 이북이 테러국이란 이유만으로 미군을 주둔시켜왔다.
그러므로 주한미군의 철수는 한반도의 영원한 전쟁종식을 의미하며 곧 통일로 연결된다.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주한 미군 철수는 이미 시작되었다.’ ‘김정일의 통일전략’의 저자 김명철 군사외교
평론가는 월간 ‘자주민보’ 2000년 11월호에 이런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투고했다. 그 핵
심 근거로 제네바 합의문을 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지금 이북은 제네바 합의에 입각해서 영변 핵발전소를 모두 해체했
다. 그런데 미국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만들고 이북에서 경수로 공사를 하고 있지만 실
제 너무 늦장을 피웠기에 2003년까지 약속을 지키기엔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미국이 이렇
게 늦장을 피웠던 이유로는 이북 붕괴설을 들 수 있다.
94년 제네바 합의문에 도장을 찍을 당시에 미국은 10년 안에 이북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소련과의 물물교환 방식으로 많은 양의 석유를 확보해 왔던 이북은 92년 소련 해
체 이후 어렵게 되었다. 거기다가 홍수와 가뭄이 이북 농경지를 초토화시켰기에 미국으로서
는 저런 조건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나라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 이북 스스로 93년에서 99년까지를 고난의 행군시기라고 부르며 맞받아쳐 왔다. 고난
의 행군 막바지 98년에 이북은 경이적인 첫 인공위성을 단방에 성공시키며 오히려 강성대국
을 표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미국은 자신의 운명을 180。로 바꿀 수
있는 제네바 합의서에 도장을 꾹꾹 찍은 것이다.
붕괴할 줄로만 믿었는데 결국 붕괴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깨닫고 이북에 대한 이러한 정
책 변경을 미국이 공식 선언한 것이 99년 페리 보고서이다. 보고서는 이북이 미사일 개발만
중지하면 점차적으로 제재를 풀고 정상적인 관계로 가겠다는 정책을 담고 있으며 2000년 북
미간에 체결된 북미 공동성명에는 북미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머지않
아 북미관계가 정상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해주었다. 이는 주한미군 주둔의 근본토대가
무너진다는 의미이다.
실제 뉴욕대학 전쟁·평화·대중매체연구소 홈페이지에 발표된 뉴욕 타임즈지 군사담당
기자인 리차트 하로란의 논문을 보면, 미군은 앞으로 5년 이내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미
군배치현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중에 있다고 한다. 또 한국에서 철수했을 경우,
미군은 주로 해군 함선과 공군, 긴급전개부대에 의거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부시도 다른 대안이 없다.
혹자는 부시정권은 공화당 정권이기 때문에 이러한 북미 평화관계의 진전에 난관이 조성
될 것으로 보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미국의 역사에서 오히려 전쟁을 일으킨 쪽은 민주
당이었고 수습한 쪽이 공화당인 경우가 많다.
6·25전쟁이 그렇고 월남전쟁이 그렇다. 그리고 91년 부시 공화당 정권도 이북과의 관계
를 급진전시켰었고 그에 따라 남북이 서로 인정하는 ‘남북합의서’까지 나왔었다.
이를 보았을 때 공화당이기 때문에 북미관계가 결국 파탄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의 어떤 정권이건 ‘제네바 합의’이행 완료 시기인 2003년에 가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가지 이다.
첫째는 이북에 전쟁을 도발하는 길이고,
둘째는 그냥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제네바 합의’를 무시하는 길이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못 다 이룬 합의사항에 대해 미국이 사죄를 구하고 충실히 이행하여 북미
평화협정을 맺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길이다.
이중 첫째는 전세계의 공멸을 가져올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미국 위정자들이 정신병자가
아니고서는 선택하기 힘들다. 특히 핵무기를 사용한 전쟁은 더욱 그렇고 상용무기만 사용할
경우에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북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이북은 이 전쟁을 막기 위해 허리띠 졸라매며 50여년을 준비해 왔다. 미국의 오인동 박사는
전쟁이 나면 110초 안에 주한 미군과 미국인이 10만명이 죽을 수 있다고 했다.
둘째는 미국이 2류 국가로 전락하는 길이다. 제네바 합의의 무시는 93, 94년 전쟁 일보직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며 이북과 협상으로 문제를 풀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세계에 공
표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합의와 약속마저 깨는 비도덕적 국가로 지탄받을 것은 뻔한 일이
며 이북은 이에 따라 원자폭탄, 수소폭탄 개발을 공식 선언할 것이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발사 실험도 꽝꽝 해 낼 것이다.
그러면 미국을 세계의 경찰국가로 여기던 나라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도 믿
을 수 없다’라는 말들이 터져 나오며 패권국가로서의 자격을 잃게 되고 더 이상 미국을 믿
지 못하는 일본이나 대만 등 여러나라에서 핵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자신들만 핵을 보유
하여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구도를 파탄내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핵과 미사일을 보유한
이북과 적대관계를 고수하려는 지도자를 미국인들은 절대 대통령으로 뽑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까딱 잘못하여 전쟁이 나면 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용한 대안은 세 번째 밖에 없다.

우리 민족끼리 손잡고 전쟁을 막자
누가 보더라도 평화를 바라는 사람에게 무력을 들이대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그러한 사
람에게 전쟁을 도발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북이 전쟁을 원하는 세력이라면 얘기가 달라
지겠지만 스스로 간절히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 이남도 하루빨리 미국이 세 번째 길에 들어
서도록 촉구해야 한다. 이남이 미군을 반대하고 이북과 공존통일을 주동적으로 열어간다면
2003년이 아니라 2001년, 2002년에도 조국을 통일하여 전 세계를 선도하는 찬란한 민족의
새세기를 열게 될 것이다. 그 통일이 어느 일방이 타방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
이를 인정하는 연방제 방식의 통일임은 두말 할 것도 없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하여 미국이 페리보고서를 발표하자 역시 한반도에서는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였
다. 6·15공동선이 바로 그 봄바람이다. 미국을 대화로 끓어들이면 항상 한반도에는 봄바람
이 불었다. 그런데 이번 봄바람 심상치 않다. 벌써 수없이 많은 진달래 개나리가 이 봄바람
에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4. 6.15 공동선언이 가져다 준 운동상의 변화

6·15 이후
이 선언이 나올 때 남부조국의 민중들은 미처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6.15 공동선언의 의미를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의 북송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아서 판문점을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저 휴전선이 무너질 수 있는가 북송
이 이루어진 후에도 한동안 얼떨떨 했던 것이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경의선이 복
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혈맥을 잇는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경의선철도를 복원하는 과
정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한반도의 변혁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경의선 철도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비무장지대 관할권을 남쪽정부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남과북이 자주적으로 교류하게 되면 점점 미국은 우리나라에서 손
을 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며 지금까지 남부조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미국이었
다는 것을 입증해주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가슴뛰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의선복원
사업은 실질적인 남부조국의 관할권자가 미국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한 것 외에도 우리
의 자주적 교류가 미국을 점점 몰아내는 일을 같이하게 된다는 일깨워준 것입니다.
물론 북부조국과 미국관계만 좋아지더라도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는 사라지고 한반도에 봄
바람이 불게 됩니다. 그렇기에 미국은 어떻게든지 북미관계를 파탄시키려고 몸부림치는 것
이며 부시 미 대통령이 저렇게 쫀쫀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통해 남북간의 교류를 확산해 간다면 더는 미국이 기댈 언덕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
렇게 미국이 기댈 언덕을 허물어버리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더욱 빨리 앞당기는 일이 6·
15공동선언의 실천입니다.
우리민중은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일부 운동권에서는 이런 6·15공동선언의 의미를 재대
로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우리 민중은 신명이 났습니다. 야! 이제는 뭐가 되려나
보다 하시며 한 궁벽한 농촌의 우리 아버지도 "글씨 니가 했던 말이 맞는 말인갑다"하시며
이 말썽꾸러기 아들을 고무해 주셨습니다. 96년 연대항쟁 이후 돌아섰던 나약했던 사람들도
술잔을 붙잡고 뭔가 해야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을 하더니 여기저기서 청년단체들이 우후죽
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은 과감히 직장을 정리하고 운동판에 몸을 내던지기도 합니
다.
거기다가 범청학련과 같은 이적단체가 민화협의 신년하례식에 참석하여 그 보수적이던 사
람들에게 칭찬도 들었습니다. 아직은 활발하지 않지만 이렇게 정치권과 함께 통일행사를 하
게 된다면 더욱 대중들의 통일운동의 참여도가 폭발적으로 늘어갈 것입니다.
내가 만나본 통일맞이 나성(로스엔젤레스)포럼 송현정 회장도 6·15공동선언이 다시한번
생명수를 뿌려주어 자신이 용기를 얻어 이런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성에
사는 몇몇 청년들이 범민족대회를 위해 북에 갔을 때 빨갱이라고 찔러대던 언론인들도 평양
에서 나성으로 온 북부조국 예술단을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1000석이나 되는 공연장이 꽉
차게 되어 서서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국자들 사이에서 그 지긋지긋하던 분열의 상처들도 아물고 단결의 새살이
돋아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를 묻지말고 공통점에 기초하여 단결 단합하자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꽃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불문", "구동존이" 이런 말들을 이제 운동을 하
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상식적으로 아는 말들이 되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파
세력 자기주도권만 추구하는 세력들이 있다면 훗날 초라한 자신의 몰골을 보게 될 것입니
다. 왜냐면 이제는 운동권 몇몇이서 아웅다웅하며 운동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6·15를 가슴에 품은 사람들은 과감히 대중속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6·15 공동선언의 의의와 나아갈 길
6·15공동선언은 이렇게 해내외 동포들에게 통일에 대한 희망과 신심을 불러일으켰습니
다. 문제는 이 선언의 의미를 똑바로 알고 이런 변화된 정세에 맞게 운동을 진행하는 데 있
습니다. 6·15공동성언 1항과 2항은 역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 1항: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하여 자주적
으로 해결해나가기로 하였다.

물론 남북합의서에 나와있는 "자주적"이라는 말을 미국과 극우세력들은 남북 당사자로 해
석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당사자라는 해석은 자주적이라고 하여 외세를 거부
한다고 하여 괜히 우리의 존엄하신 미국형님에 대해서는 감히 건드리지 말고 국군통수권과
군작전지휘권도 없는 똘마니인 나와만 얘기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평화협정을 체결
하여 그에 따라 남북의 무력을 감축시켜서 북을 무장해제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기 감축이 당사자인 남북으로 국한되기 때문에 주한미군은 여전히 강화될 수 있게 됩니
다. 이런 유치한 주장을 북부조국의 외교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정
말 남부조국 당국이 진정한 당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미군으로부터
군통수권과 군작전지휘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북부조국에서도 얼마든지 남을 당사자
로 인정하고 평화협정과 무력감축을 허심하게 얘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언의 각 항목 중에서는 자주적이라는 말 외에도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하여
통일하자", "우리가 주인이다"라는 말들이 들어있는 이 제 1항의 의미가 깊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남과북이 힘을 합쳐 평화협정체결하자고 했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
서 김대중대통령이 김포공항에서 북으로 출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걱정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6·15공동선언 제 1항에는 통일이라는 말이 못박혀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한
미군이 있건 없건, 군 작전권이 있건 없건 남과 북이 힘을 합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통일
할 수 있으며 통일을 하려는 행위 자체가 자주적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통일
이 되면 더는 주한미군도 버틸 근거가 사라지게 됩니다.

제2항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6·15공동선언이 통일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마침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통성이
라는 말은 양쪽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북측의 낮은 단계연방제안의 내용도 제
2항에 들어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북부조국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연방제통일방안의 근
본 정신은 높은 단계이건 낮은 단계이건 변할 수 없습니다. 그 정신은 바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남북의 양쪽의 정부와 통일연방정부의 권한에 있어서 폭과 심도
에 따라 그 결합의 수위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제 2항을
열열히 환영하게 된 것입니다.
또 이 제 2항에 의해 북부조국이 사회주의라 하더라도 남부조국에서 그 사회를 공조해야
할 한 민족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으로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을 적으로 해서
존재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깨갱거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6·15공동선언의 의의를 잘 알고 있는 수구세력은 김대중대통령이 독단을 부렸네
어쨌네 하면서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느니 하면서 이런 6 ·15 공동선언을 무효화하려고
날뛰고 있습니다. 지금 대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특히 미국에 계신
형님이 조금 설쳐대자 석달 가뭄에 단비 만난 개구리설쳐대듯 페스티벌을 벌리고 있습니다.
민족민주운동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정황이 쉽지 않은 정황이라는
것을 감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한총련 친구들이 왜 저렇게 6·15공동선언 파탄내려는
미국을 반대한다고 하면서 30일이라는 죽음의 단식농성을 하는지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미국을 쳐야 남북통일의 문이 열린다는 주준높은 진리를 그네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수
준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애국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6·15공동 선언 실천으로 떨쳐
나서야 합니다. 그것도 몇몇이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전국민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수구세력들이 국민투표 하자고 하면 자신있게 덤벼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6·15공동선언이 가리키는 실천 방향은 두가지입니다. "단결"과 "대중속으로"입니다.
애국자들이 단결하여 대중속으로 들어가는 이 힘을 막을 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점점 경
의선복원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조금 되찾았던 민족자주권이 차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가면
서 우리는 찬란한 태양이 빛추는 승리의 영마루에 어느덧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 김대중정
권의 실정이 어쩌내 저쩌내 해도 6·15공동선언만 실천하면 우리는 이긴다. 배짱을 가지고
지혜로운 민중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속에 답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5. 해외민족민주운동의 방향

1) 현황
저는 해외동포들의 운동에 대해서 솔직히 잘 몰랐었습니다. 단순히 국가보안법이 없는 곳
에서 운동하니 좋겠다. 북에도 쉽게 드나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
다. 하지만 여기 나성에 와서 애국적인 삶을 살고자 애를 쓰시는 어르신들과 청춘들을 직접
만나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국내보다도 더욱 보수적인 분위기의 대중들 속에서 민족민주 운동을 펴나가야 하는데 적
당한 교재도 없지 가져다 쓰는 책들이 대부분 남부조국의 책이요 노래를 불러도 남부조국의
노래를 부르는데 정서도 맞지 않는데다가 "우리가 통일운동을 왜 해야 하나요", "통일되면
나성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나요"하는 반발에 어찌할 바를 찾을 수 없었던
암담했던 지난날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일운동, 반미운동보다는 나성에서 대중
들이 느낄 수 있는 인종차별이나 사회복지문제를 들고 싸워볼까 하는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 단체 저 단체가 갈라져서 주도권 싸움을 하기까지 할냥이면 떡심이 탁
풀려서 하나 둘 직장으로 가정으로 발걸음들이 흘러가게 된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백인들의 등살에 가뜩이나 먹고 살기가 조련치 않은데다가 차 한 대 없이는 움
직일 수도 없는 나라에서 식당 웨이터에 주유소 총잡이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이 전전해야 하
는 나성의 젊은이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2) 희망
그러는 와중에서도 제가 취재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든든한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대중
적인 전문 노래패를 준비하고 있는 정은경 선생은 "우리가 후배들을 키우지 못해서 그렇게
잘 나가던 "우리문화공동체"가 해체되었다. 그렇게 나도 직장에 다니게 되었지만 정말 소시
민적인 삶으로 빠져드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과거를 반성하고 좀더 대중적이고 전문적인
노래패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 가고 있다.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은경 선생이 소시민적인 삶으로 빠져들어가기 싫었다는 말속에서 지금은 직장에서
고생하고 있을, 한 때 조국을 사랑한다는 노래를 불렀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여전히 불
씨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문화공동체"의 소식지였던 "열림"이라는 소박한 월간 소식지를 서로 돈을 모아 만들어
가는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열림" 회장 김정열 선생은 "솔직히 칭찬보다도 "이런 것 왜 만드
는지 모르겠다.", "너무 대중적으로 흐르는 것 아닌가"하는 말들 속에서 실망도 하지만 그래
도 꿋꿋하게 해나가는 것은 그동안 정들었던 사람들과 우리의 삶을 던져버리기엔 너무 아깝
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60만명 중에 10만명의 나성 동포들을 독자로 만들겠
다는 야무진 포부도 밝혔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도 없고 전문적인 능력도 없었으며 대
중들과의 교감하는 이치도 잘 몰라서 어떻게 보면 자기만족적이라는 느낌도 갖게 하는 잡지
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야 고민하고 반성하면서 보완해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의지입니다. 불씨입니다. 그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여기 최초의 상근자인 통일맞이 나성포럼 일꾼 하용진 선생은 구체적인 희망을 저에게 피
력하였습니다. 6·15공동 선언의 힘도 느끼고 있었으며 대중에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
리고 실제로 2001년 4월 28일 나성포럼 정세토론회는 나를 적지 않게 들뜨게 했습니다. 이
선주, 오인동, 김현환 선생의 발제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 속에 우리 민족민주 운동의 현황
과 나아갈 길이 구체적으로 담겨있었습니다. 이런 좋은 토론회를 저는 남부조국에서 쉽게
볼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분명히 내가 배
운 것이 많았습니다.

3) 해외 운동의 기초
내가 여러 나성 청년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것이 많은데 그중에 국내보다 여기 해외에서
민족의 의미를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을 조국에 들어가면 자
주 말할 것 같습니다. 한울림 풍물패 대원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나는 해외에서 사는 2세
3세들도 우리 민족 문화를 자랑스러워하고 싶어하며 그 문화를 접했을 때 너무도 좋아 한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국내에 살고 있는 청년들이 왜 미국을 따라가려고 하는
지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민족주의의 기치
이것이 저는 해외운동의 중요한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해서 해외민족민주운동이 발
전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우리 한민족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기우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그 위에 우리민족을 자랑스럽
게 여길 수 있는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래 우리는 소수민족이다.
너희 미국이 인권을 존중한다고 하니 우리 소수민족의 인권도 보장해 다오" 하는 마음이 아
니라 "우리는 자랑스런 한민족이다. 그러니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 이렇게 당당히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공세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많은 대중들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실례로 나는 한국바로알기행사를 주관하는 전진경선생을 통해서 그것을 더욱 절실히 깨
달았습니다. 전진경 선생은 남부조국에 가서 농촌봉사활동을 하면서 그 헤어지기 싫어하시
는 농민들을 보고서 공동체적 집단주의가 얼마나 인간적인 문화인지를 절실히 느꼈다고 했
습니다. 배를 먹어도 나주 배가 세계 최고였고 회를 먹어도 여수의 회감이 최고였다고 했습
니다. 물론 수백명의 실직자들에게 밥을 해주며 조국의 아픈 모습도 보았지만 그 실직자들
이 휘발류 떨어진 지포라이터까지 선물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조국의 아름다운 마음을 느꼈
다고 했습니다. 이런 민족적 자긍심은 결국 해외민족민주 운동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
습니다. 그러한 우리 민족의 통일과 부강번영을 동포라면 누구나가 당연히 바라게 되지 않
겠습니까!
누구나가 자기 민족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얼굴이 우리민족의 얼굴인 이상, 부모
님의 뿌리가 우리민족인 이상 누구나 이 탯줄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돈
이 많아도 그 민족의 뿌리마져 사고 팔 수는 없습니다. 하기에 자신의 민족이 부끄러우면
자신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고 자기 민족의 문화가 자랑스러우면 자신도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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