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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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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기 대결을 통해 본 중미관계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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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1-05-04 00:00 조회2,38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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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일시대
미국은 중미 공조의 꿈에서 깨라

강진욱 | 연합뉴스 기자

4월1일 미 해군 정찰기 EP-3기가 남중국해 일대를 정탐하다 이를 저지하려는 중국 전투기
를 들이받아 추락시킨 사건이 발생하면서 과거 미소 냉전과 유사한 ‘중미 신냉전’체제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신냉전론’이 두 나라 관계와 한반도 주변 정세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서는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자칫 미국의 파워를 절대시하면서 중미 관계의 적대성을 지
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두 나라 관계의 역동적인 변화 가능성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공내전과 6·25 항미원조(抗美援朝) 이후 계속된 중미 양국간 적대관계가 개선된 계
기와 이후 관계를 면밀히 고찰해 보면 두 나라는 공동의 이해를 향한 ‘공조’ 관계를 유지
해 왔다는 사실에서 두 나라 사이의 적대성은 크게 평가절하 돼야 마땅하다.
또 두 나라 관계가 ‘공동의 적’(소련)을 겨냥한 공생 협조 관계에서 ‘미국의 적’(북조
선)을 겨냥한 ‘미국의 반북대결정책에 대한 중국의 방조’ 관계로 격하 또는 변질돼 왔다
는 사실도 ‘중미 신냉전론’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다.
흔히 ‘중미 신냉전론’의 발생기로 인식되고 있는 89년 천안문 사태 및 90년 소련 붕괴 이
후 90년대 10년간은 북미 50년 대결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시기였다. 다시 말해 90년대 중미
관계는 ‘북조선’이라는 신흥세력의 등장을 억제하려는 미국의 정치군사적 이해관계에 중
국이 편승해온 것이었다.
이북은 소련이 91년 소멸한 이후 10년간 계속된 중미 두 나라의 포위망에서 ‘사실상’ 완
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더구나 김정일 총비서의 잇단 방중(2000년 5월,
2001년 1월)이 상징하듯 이북은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중미 사이의 틈새를 벌이
고 있다. 이는 미국이 가까운 장래에 이북과 중국을 함께 상대하거나 두 나라와 ‘삼각 평
화공존’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중미 관계의 근간이 ‘미국의 반북 고립 책동’이라면 ‘중미 신냉전’은 ‘북미 열전’의
하위 질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북미 대결구도가 존속하는 한 중미 냉전은 없다고 봐야
한다. 미국이 중국과 이북이 공유하는 사회주의를 용인하면서 진정한 평화공존의 개념을 깨
닫기 전까지는 동북아 신흥 강대국들과 미국의 갈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지만 최근 10년간의
정세변화에 비춰 볼 때 2001년 이후 미국 지배력은 후퇴일로를 걸을 것이다.

70년대 : 중미관계 정상화
중미 양국간 적대관계가 개선된 것은 흔히 ‘핑퐁외교’의 산물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당시
중국에 기대기 위해 먼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위선적인 수사일 뿐이다. 중미
관계 정상화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소, 중, 북 공산주의 봉쇄’를 기반으로 15년간
유지해 온 ‘패권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대중 유화정책을 수립하면서 시작
됐다.( 미국의 세계정책을 ‘패권주의’ 또는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라고 말하
지만 이는 의도적으로 가치판단을 중립화한 표현으로 미국 대외정책의 반인륜성과 호전성을
은폐한다. 미국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가 미국 외교정책을 비판한 것만 놓고 보더라도 ‘깡
패주의’가 객관적 표현이다)
60년대 말 시작된 베트남전에 미국은 손발이 묶이고 달러의 남발로 인한 외환위기와 재정적
자로 주한미군 2사단 7천명을 철수하는 상황으로 몰린다. 결국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통
해 ‘공산주의 봉쇄정책’을 수정, 중국에 손을 내밀게 된다.
72년 닉슨의 ‘역사적인 방중’으로 시작된 중미 관계는 이후 2000년 대선에 부시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30년간 사실상 ‘공조’라는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닉슨에서 포드, 포
드에서 카터(76-80년), 레이건(81-88년), 부시(89-92년), 클린턴(93-2000년), 부시(2001년) 등
으로 미국 정권이 이어지는 거의 모든 집권자들은 대통령 선거전 ‘미국식 자유 민주’의
가치와 어긋나는 ‘공산 중국’의 ‘반민주, 반인권’을 문제삼고 ‘전통 우방’ 대만과의
관계 증진을 외치지만 집권 후 이들은 한결같이 중국 공산당과 타협, 화해와 공존의 관계를
이어왔다.(미중관계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내용은 James Mann "About Face : A History
of America"s Curious Relationship with China, from Nixon to Clinton에서 인용 또는 착안
한 것임. 아래 중미 관계의 구체적 내용도 이 책에 의거함)

80년대 : 중미 유착기
중미 관계의 심화와 한반도 남북에 대한 미국의 악영향이 극성기에 달했던 때는 ‘레이건의
80년대’이다. 이 시기는 레이건에서 부시로 이어지는 미 공화당권력이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면서 소련과 이북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
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하는 때이다. 중국은 등소평에서 화국봉 조자양에 의해 계승된 친
서방노선에 따라 미국의 대소봉쇄정책에 편승한다. 이러한 가운데 한반도에는 레이건-나카
소네-전두환체제가 형성하는 한, 미, 일 삼각동맹이 짙은 전운을 몰아온다.
80년대 중미 유화국면 속에서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질서를 외면하는 사
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을 뿐 아니라 한반도를 ‘힘의 대결장’이라고 공언하
며 해마다 군사훈련 강도를 높여간다. 이 시기 발생한 의문의 ‘아웅산 사건’이나 ‘김현
희 사건’ 등은 50년 6·25전쟁 남침론과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뤄 남쪽 주민들의 마음속
에 ‘북한 악마성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킨다. 또한 이 ‘북한 악마성 이미지’는 한,
미, 일 삼국의 대북 적대전선의 ‘근본철학’으로 자리잡으면서 남북화해를 방해한다. 2000
년 남북정상회담을 3개월 앞둔 시점에서 미얀마 외무차관의 입을 빌어 아웅산사건이 다시
회자된데 이어 200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거듭 회자됐고, 2000년 국
면과 비슷했던 1994년 10월에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필리핀 방문을 앞두고 이북의 농산물
운반선을 시비하며 아웅산을 상기시켰다. 반북적대감은 남북통일을 방해하는 반통일(=친미)
세력의 주요한 무기이다.
80년대 중미 유착관계는 79년 중소 분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하면서 소련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연합전선’의 성격이 강했다. 실제로 이란의 친미 팔
레비왕정이 전복되면서 상실한 미국의 대소 레이더기지를 중국이 제공한 것이 결정적인 계
기였다.
그러나 80년대 미국의 대중 접근 양태를 보면 이 시기 중미 관계는 미국이 ‘이남 지배-이
북 고립 압살’을 포함한 세계 지배 전략을 위해 중국을 포섭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80년 들어선 레이건 정부는 전략방위구상(SDI, 일명 별들의 전쟁 계획)으로 소련에 대한 압
박을 강화하면서 중국에 고급 군사장비는 물론 고위 장성과 미 중앙정보국 요원들을 수시로
보내 중국 군사력을 증강시킨다. 80년 12월 스탠스필드 터너가 미 중앙정보국 국장으로는
처음 중국을 방문한 이후 윌리엄 케이시와 로버트 게이츠, 윌리엄 웹스터 등 중앙정보국 국
장들의 중국 방문이 계속 이어진다. 이들의 중국 방문은 베이징 외곽의 중국 공군기지를 이
용할 만큼 중미 당국의 철저한 보안 속에 이뤄졌다. 임동원 통일부장관이 국정원장 재직 시
절 대북정책을 총괄지휘했던 것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주중 주한 미
국대사는 거의 대부분 중앙정보국 출신이 맡고 있다.
이에 앞서 미국은 카터 정권 말기인 79년 12월 등소평을 초청하고 윌리엄 페리 국방부 군사
연구팀장을 중국에 보내 중국 군사력 증강을 위한 지원 준비에 착수한다. 그는 이때 미국
고위 장성들을 대거 이끌고 중국내 주요 군수 공장을 돌아본 뒤 미국의 대중 군사 기술 지
원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페리보고서’를 작성한다. 그의 이 보고서는 미국 정권이 카터
에서 레이건으로, 즉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넘어간 뒤 실행에 옮겨져 레이건 시절 미국의
대중군사적 유대 강화의 마스터플랜 구실을 한다.
99년 6월 이북을 방문한 뒤 페리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의 대북정책 방향을 ‘고립-압살’
또는 ‘붕괴로의 연착륙’에서 ‘평화공존’으로 전환시킨 윌리엄 페리가 79년 미중 군사전
략적 제휴 관계 심화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수학자이면서 군사, 무기
분야 전문가로서 스텔스폭격기 제조에도 참여했던 그의 경력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
다. 2001년 부시 정부는 80년대 레이건 정부가 그랬듯이 미국 최고의 군사전문가가 이북 군
사력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평가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82년 5월에는 부시 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데 이어 그 해 8월17일 두 나라는 공동코뮤니케
를 발표,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제한을 약속한다. 82년 6월 슐츠가 국무장관에 임명되고 83
년 초 레이건의 방중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 84년 그의 방중이 이뤄진다. (당초 레이건의 방
중은 83년 11월 이남과 일본 방문 때로 잡혔으나 83년 11월에는 이남과 일본만을 방문한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 미, 일 삼각관계와 한 통속이라는 인식을 꺼린 중국의
소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83년은 칼기가 소련 공군기에 의해 격추되고(9월1일) 버마(미얀
마) 아웅산사건(10월9일)이 발생하는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한, 미, 일 3국의 유착이
극에 달했던 때이다. 또 이 사건으로부터 2주일 뒤 미국은 중남미 약소 사회주의국 그라나
다를 침공, 현지 총리를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세계의 지탄을 산 것도 중국에게는 부담이
었을 것이다. 레이건 방한 당시 “제나라 대통령도 제대로 못지키는 경호 수준의 나라에 미
국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미 정부는 이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
았다. 당시 이남 정부는 아웅산 사건의 책임을 물어 대대적인 문책성 인사를 단행하지만 경
호실장과 안기부장은 유임시켜 대내외의 비판과 의혹을 샀다. 칼기 격추사건에 대해서는 미
국과 이남 정부의 공식 견해와는 달리 당시 사고기가 미국의 대소 정보수집에 동원됐음이
분명하다. 당시 레이건은 이 사건을 계기로 소련을 ‘악마의 제국’(Evil Empire)라고 비난
했으나 정작 ‘악마의 제국‘은 힘없는 이남 민항기를 소련 영공에 밀어넣은 미국이었다.-
이삼성 가톨릭대 교수 <미국은 우리의 희망인가>)
특히 83년2월 슐츠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무기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한
다. 그 해 5월 레이건 정부는 말콤 볼드릿지 특사를 중국에 보내 군사적 목적으로의 전용이
가능한 신기술 판매를 약속하고 83년 후반, 원인불명의 끔찍한 사건이 계속되는 와중에 와
인버거 국방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중국이 81년부터 줄기차게 요구해온 32개 군사 관련 품목
에 대한 수출에 합의, 미중간 국방협력이 한층 심화된다. (이때 아미티지(2001년 현재 국무
부 부장관)와 월포위츠(현 국방부 부장관), 콜린 파월 합참의장(현 국무장관) 등이 와인버거
와 동행했다. 중국과의 군사적 유대 관계 속에서 성장한 이들이 2001년 들어선 신 부시 정
권 아래 다시 모였다. 이들이 중국과의 신냉전 전선을 형성할 수 있을까?)
미국은 이때부터 89년 천안문사태와 소련 붕괴로 양국관계가 틀어지기까지 6년간 중국에 대
한 각종 무기와 무기 도입을 위한 자금을 지원한다. (2001년 4월1일 미 해군 정찰기 EP-3이
들이받아 추락시킨 중국 전투기 F-8을 최첨단 전투기로 탈바꿈시킨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중국은 80년대 중반까지 소련제 미그-21을 개량한 F-8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80년대 후반들
어 미국과의 군사전략적 제휴관계가 깊어지면서 이 전투기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미 군수업
체 그럼만(Grumman)사의 첨단항법장치 제공을 미국에 요청한다. 미국은 찬반 양론 끝에 중
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89년까지 ‘Peace Pearl’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은밀하게 F-8 개
량을 도와줬다)
84년 4월 레이건 대통령에 이어 85년 10월 부시 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 등 중미 관계는
계속 가까워진다. 86∼87년 중국의 대 중동 미사일 판매로 양국간 신경전이 벌어지지만 오
래가지 않는다. 미국은 87년 5월에는 양상군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과 대규모 중국 군
부 인사들을 초청해 호놀룰루와 진주만 군사기지, 오마하 전략공군사령부와 샌디에고 잠수
함 등을 시찰하게 하는 특전을 베푼다. (양상군이 미국을 방문한 지 6개월만인 11월29일 대
한항공기 폭파사건이 발생한다. 갈루치가 중국을 방문한 때는 88서울올림픽이 열리는 때였
다. 미국의 대중 접근이 집요하던 때 한반도 냉전구조를 심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83
년이나 87년 경우만이 아닐 것이다)
88년 9월에는 프랭크 갈루치 미 국방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난다. 미국은 이때까
지 서방 동맹국에게만 수출하던 상업용 인공위성 수출을 허용해 주는 대가로 중국의 대 중
동 미사일 수출 중단 약속을 받아낸다. (최근 미국이 이북을 상대로 벌이는 미사일 수출 중
단 게임은 이미 80년대 중후반 중국과 치렀던 게임의 재판에 지나지 않는다. 게임의 규칙도
게임 진행 경과도 대동소이하며 결과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은 이북도 알고 미국도 안다. 당
시 미국은 이미 사정거리 1000km 미만의 단거리 미사일 수출 문제를 놓고도 중국에 수많은
양보를 해야 했으며 사실상 게임에서 졌다. 이북을 상대로 한 게임에서도 사실상 손을 든
판국이며 국가미사일방위체계 계획은 치욕스런 패배선언에 대한 모욕감을 감추기 위한 마지
막 몸부림일 것이다. 다만 당시 중국과의 미사일 게임에서 미국이 양보하는데는 ‘이북 미
사일 개발 억제를 위한 중국과의 공조’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미국의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북조선’을 용인하면 자칫 ‘중국과의 공조’ 틀 마저 상실, 미국은 중국
과 이북을 함께 상대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다)

89년 천안문사건에서 90년대 초까지
89년 부시 정부가 들어선 직후 89년 천안문사태와 90년 소련 붕괴 등 역사의 획을 긋는 사
건을 계기로 중미 관계는 한동안 대립국면에 접어들지만 이 국면 또한 오래 가지 못한 것은
바로 "북조선"이 신흥 핵-미사일 강국으로 떠오른것 때문이었다.
89년 6월4일 천안문사태로 미국 정부와 의회 국민들은 키신저-닉슨 이후 20년간 대중정책
의 도그마였던 "공산 중국의 민주화"가 한낱 "주관의 오류"였음을 깨달으면서 한동안 당혹
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주관의 오류‘란 바로 키신저의 대중 접근 이후 견지해 온
‘중국 정치체제 변화’ ‘개혁, 개방’에 대한 일종의 자기최면을 말한다. 84년 4월 레이건
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소위 공산주의 국가 중국”(so-called communist China)이라며 중
국은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비아냥거린 것은 이런 오류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인민민주주의독재가 곧 무너질 것이라는 미국의 판단은 ‘미국식 자유민주주
의 만능’에 대한 맹신에 의한 것으로 중국 정치체제의 변화에 대한 이들의 환상은 곧 환멸
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90년초 윈스턴로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는 “3
년내 더 온건하고 인간적인 정부가 (중국에) 들어설 것”이라고 말했고 최근에도 국내 언론
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당시 중앙정보국장 로버트 게이츠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무너지
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정일 체제 개혁 개방’론 역시 마찬가지
이다. 미국 매파와 이들과 연대하는 이남 극우반북세력의 각성이 요구된다.)
또 이 해를 전후한 소련 붕괴는 미국으로부터 첨단무기를 들여오던 중국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은 러시아제 첨단무기들을 헐값에 들여오면서 미국의 심기를 자극했고 이에
미국 정부는 ‘공동의 적’(소련)이 사라진 마당에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며 중
국에 대한 각종 제재조치를 취하면서 제 나름의 일탈을 시도해 본다.
미국은 그러나 천안문사태 직후 "중국의 인권 탄압"을 내세워 발동했던 제재조치를 6개월이
못돼 해제하기 시작한다. 89년 12월 스코크래프트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이글버거 미 국무차
관을 중국에 보내 미국 수출입은행의 대중 차관과 휴즈 항공사의 인공위성 대중 수출을 약
속하고 중국은 90년 1월 천안문 사태때 발동한 계엄령을 해제해 미국의 유화정책에 화답한
다. 미국은 이어 90년 7월 대중 차관을 전면 허용한다.
미국은 89년 사건을 계기로 그네들의 ‘자유’와 ‘민주’ 이데올로기에 따라 대중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중국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
시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서 유엔에서의 중국 지지를 받아야 하는 한
반도 외적 요인을 우선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80년대 후반 핵-미사일을
개발한 이북이 88년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협상테이블에 끌어 온 이후 90년대 들어 대미-
대남-대일 관계개선을 빠른 속도로 진행하던 상황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90년대 초 미국의 대중 접근과 92년 한중 수교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미국의 대한반도정책과
대중정책, 이에 편승하는 중국의 기회주의 정책 사이의 연관성이 좀 더 분명해진다. 당시 미
국의 대한반도정책은 90년 유엔 개별 가입이 상징하듯 소위 남북분단 고착화를 위한 ‘교차
승인론’으로 나타나며 이남은 소위 ‘북방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미국의 분단관리정책을
추종했고 실제로 한러 관계 정상화와 한중 수교라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이 한반도 분단관리전략과 이에 대한 중국의 ‘관대한 무관심정책’(benign neglect
policy)은 93년 이북의 중장거리탄도미사일(MRBM) 3기 발사를 전후한 때와 이후 북미 협
상이 계속돼 94년 북미 제네바핵합의로 귀결되는 와중에도 어렴풋이 드러나며 96년 미국이
남, 북, 미, 중 4자회담을 강력히 밀어붙일 때 더 확연해진다.

94년 제네바합의 전후
88년 시작된 북미 대화국면은 90년과 91년 미국의 북핵 의혹 제기로 위기국면이 조성되고
93년초 이북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3월12일)으로 맞서면서 고비를 맞지만 이북의 중
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5월29일)를 계기로 미국은 마침내 6월11일 역사상 처음으로 이북과
의 평화공존을 확약한다. 이어 94년 10월 미국은 "대통령의 이름을 걸고 미국의 책임하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이북으로부터 핵 공업 개발을 중단한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이 쇠퇴하는 과정이었다.
이때 미국은 중국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한층 노골화하면서 중국을 지렛대 삼아 이북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려 했다. 심지어 93년 8월에는 중국이 또다시 파키스탄에 미사일을 판매
한데 대해 경제제재를 발동했다가 서둘러 이를 해제하면서 이북 핵 개발 억제를 위한 공동
전선 구축에 나선다.
94년 제네바합의가 나온 직후인 10월31일부터 11월2일까지 이남을 방문한 이붕 중국 총리
(현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일행들은 31일과 11월1일 잇따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설파, 이남 정부를 당혹케 했다. 그러나 중국측의 입장은 이남 당국이 당혹해 하는
만큼 분명한 것은 아니었고 이북과 미국의 입장을 두루 살핀 중립적인 것이었으며 오히려
남북대화가 북미 제네바합의 이행의 필수라는 미국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붕 당시 총리는 2001년 5월24일 전인대 상임위원장으로 두 번째 이남을 방문할 예정이
다. 북미 관계가 획기적 전환기를 맞을 때마다 그가 방한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의 발언이
주목된다. 94년 북미 제네바핵합의 체결 직후 이남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이
북간의 양다리 걸치기식 태도를 취하겠지만 7년간의 북미 세력관계의 변화가 그의 발언 속
에 반영될 것이다. 93년 중장거리탄도미사일이 98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발전하면서
이북의 대미 협상력은 한결 커졌다. 중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 1년 뒤 남북정상회담 국면이
조성됐고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후 근 2년만에 다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던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94년과 2000년 남북관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남북통일이 가시권에 들어왔고 동
북아 정세변동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남은 지난 10년간 미국의 "남북 이간 책동"에 놀아나
이북 핵-미사일을 "대남적화통일의 무기"로 인식해 왔다. 그토록 경원해 마지않던 이북의
핵-미사일이 미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킬 때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될 수 있었고 실질적인 대
화가 가능했다. 또한 93년과 98년을 비교할 때 그 기술이 발전해 사거리가 늘어날수록 남북
관계는 안정되고 통일과 평화를 향한 화해의 기운이 높아진 것은 분명 역설이다. ‘미사일
패러독스’(Missile Paradox)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96년 4자회담 국면
96년 4자회담 국면에서는 중국의 이런 이중적 태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96년 중미 관계는
대만 문제로 미 항공모함이 발진하는 등 표면상 갈등이 첨예화되며 이 때 일은 지금도 ‘중
미 신냉전론’의 근거로 인용된다. 그러나 당시 미사일과 항공모함이 동원된 중미 양국의
대결분위기는 사실상 ‘중미 협잡’의 의혹이 들만큼 모호한 측면이 많다. 즉 미국과 이에
동조하는 중국이 한반도 정세 변화를 4자회담 국면으로 몰아가기 위해 벌인 쇼가 아닐까 하
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미국은 94년 제네바핵합의 이후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자 중국을
끌어들여 한반도 분단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4자회담을 고안한다. 미국은 그 해 1월 국
가안보위원회 회의를 시작으로 4자회담을 본격 추진하며 2월초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
담당보좌관이 제주도에서 당시 유종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2박3일간 이를 논의한다. 4월
16일 제주도 한미 정상회담에서 정식으로 이를 발표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미국은 이어 같은달 27일 평양에 정책전문가들을 보내 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북은 이
미 닷새 전인 2월22일 미국에 대해 ‘북미 잠정평화협정’을 제의한 상태였으며 3월8일 조
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비망록을 통해 “낡은 정전체제 포기를 위한 주동적 조치를 취하겠
다”고 선언, 미국의 4자회담 제안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기정사
실화하는 태도를 취한다.
바로 이날 중국은 대만해협에서 미사일 발사 시험을 개시하면서 대만 주식시장과 외환시장
을 일대 혼란에 빠뜨린다. 중국의 무력 시위는 96년 3월23일로 예정된 대만총통 선거일까지
계속되며 미국은 이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인디펜던스’와 ‘키티호크’ 항공모함 두 대
를 발진시킨다. (이때 항공모함을 한 대가 아닌 두 대를 보내야 한다며 전례없이 강경한 입
장을 취했던 사람은 바로 페리였다. 중국과의 군사적 유대 강화에 앞장서온 그의 입장과 전
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쇼’였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중국이 4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질서를 분할 관리하기 위해 타협했을 가능성을 시사
하는 것은 중국이 대만에 대한 무력시위를 시작하기 며칠전 국무원 외사판공실 주임 류화치
(외무차관급)를 미국에 급파한 것과 이로부터 며칠 뒤 윈스턴 로드 미 국무부 아태담당차관
보의 말이다. 그는 이해 3월14일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며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문제에 대해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는 중국과 미국이 대만을 사이에 둔 ‘표면상 군사적 대결’을 끝낸 23일 로버트
아인혼 국무부 부차관보와 함께 중국을 방문한다. 그는 또 한미가 4자회담을 선언하고(4월
16일), 미일이 안보공동선언을 발표(4월17일)한 지 3개월 뒤 다시 중국을 방문 전기침 외교
부장과 장쩌민 주석, 이붕 총리 등과 연쇄회담한 뒤 중미 동반자관계를 선언한다. “중국을
21세기 세계지배체제의 파트너로 존중할 것”이 선언의 요지였다. (이에 앞서 4월4일 이북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는 대변인 담화를 발표,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를 유지·관리할
업무를 포기한다”고 선언, 미국의 4자회담을 전면 거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약 한
달 전에 취했던 독자적인 ‘평화체제 구축 기정사실화’ 작업에 들어간다)
결국 중미 신냉전의 첫 징조로 일컬어지는 96년 대만해협 위기는 중국과 미국간의 ‘협동작
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96년 대선에서 클린턴이 재선한 직후인 12
월8일 미 정부가 츠하오티엔 중국 국방장관을 초청해 국방부 산하 국립전쟁학교와 핵시설인
뉴멕시코주의 산디아 연구소를 돌아보게 한 것도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
미국은 4자회담 카드를 97년과 98년 내내 활용하면서 이북의 북미 평화협정 공세에 저항했
지만 4자회담을 통한 한반도 분단체제 구축에는 실패했다. 98년 8월 이북이 대륙간탄도미사
일 ‘광명성 1호’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다시 북미 평화협정을 통한 남북통일과 북미 평
화공존의 기운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이후 99년 미국은 새로 조성된 국면을 받아들이지 않
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광명성 2호’ 발사를 무마하는 선에서 이북과의 평화공존의
길에 들어선다. ‘페리보고서’(1999년 10월)에 이어 ‘남북정상회담’(2000년 6월)과 북미
공동코뮤니케(2000년 10월)의 절차가 그것이었다.

2001년 이후 중미 관계
앞서 살펴봤듯이 중미 관계는 90년 이후 신흥 핵-미사일 강국인 ‘북조선’을 상대로 하는
공동전선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이북은 이 공동전선에도 불구하고 1년여만에 유럽연합
15개국 가운데 13개국과 수교하는 저력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세계전략에 편승한 중
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도 복원했다.
미국은 최소 10년간 ‘북조선’ 고립·압살을 겨냥한 중미 공조관계에 그토록 많은 열과 성
을 바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북이 지역 강국으로서의 독자적 지위를 확보하고 중국과의 관
계 개선을 시도함으로써 중미 공조가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을 앉아서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빠져 있다.
미국은 이북과의 평화공존관계를 허락하는 동시에 이남에 대한 정치·군사·경제적 지배구
조를 심화시킴으로써 이남에 대한 기득권을 보전하는 이른바 ‘두 개 한국 정책’를 실현하
는 방법을 찾고 있다.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과 미국에 동조하는 극우친미세력이 ‘통
일’이 아닌 ‘평화’를 외치는 이유도 ‘남북통일’과 별개의 ‘한반도 냉전구조 청산’을
실현하기 위한 기만전술이다.
그러나 이 ‘꼼수’는 북조선과의 관계개선과 쉽게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남 통일세
력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가능성이 크지 않다. 결국 남는 것은 동북아
신흥강국 이북과의 평화공존뿐이다. 이북과의 평화공존은 곧 이남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이남의 자주성이 확보되면서 남북평화통일이 실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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