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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가 오늘을 본다면> - 아스따나의 한 고려인이 보내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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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6-09-07 07:45 조회22,27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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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자흐스탄의 동포 홍정모의 글을 옮겨 싣는다.  그는 남조선의 '통일부'장관이란 자가 러시아를 방문하여 동족헐뜯기나 자행하는 것에 실망과 분노를 느낀나머지 자신의 심경을 진솔하고 통렬한 글에 담았다. 어떤 인터넷의 댓글들은 이 글에 공감을 표하면서, "남쪽의 통일부란 것은 일본과 한국의 통일을 사명으로 하는 기관인가! 하는 통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민족통신 편집실]



"홍범도가 오늘을 본다면"


"외세를 삼천리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독립투쟁에 한몸 다바친 홍범도가 이국땅에서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바라고 바랬던것이 무엇이였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외세가 없는 진정한 자유독립국가, 그 누구도 다시는 감히 건드릴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강국이 고국산천에 일떠서는것이였을것이다. 그것도 갈라진 나라가 아닌 하나의 통일국가를 말이다. 우리 민족이 외세가 벌벌 떨게 할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있었다면, 부국강병, 보국안민의 념원이 진실로 실현된 나라가 있었다면 지난 세기때처럼 그렇게 망국노의 설음을 당하지 않았을것이고 홍범도와 같은 우리 선조들처럼 머나먼 여기 중앙아시아에까지 흘러와 타향살이를 하지 않았을것이다.

세상이 보란듯이 핵강국의 위상을 만방에 떨치는 북을 보며 우리 동포들이 이루 말할수 없는 기쁨과 감격, 긍지에 넘쳐있는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며칠전 남조선 통일부장관 홍용표라는 사람이 여기 까자흐스딴의 아스따나에 날아와 국제회의에 참가하였었다. 한피줄을 나눈 동족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우리의 관심사인 통일문제를 맡아보는 장관이기때문인지 저도모르게 그의 회의일정에 관심을 두게 되였다. 혹시 나와 성이 같은 홍씨이기때문에 은연중 생겨나는 친밀감으로 하여 더 유심히 지켜보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TV를 통해 본 그의 언행은 나에게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어쩌면 명색이 통일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국제회의장에서, 외국인들앞에서 동족인 북을 비난하다못해 북의 핵보유가 《민족의 생명을 위협하고있다.》느니, 《핵포기》를 해야 한다느니 하는 심사 뒤틀린 소리만 골라하는가. 적어도 해외의 우리 고려인들이 보기에는 그가 북을 통일의 동반자로 생각하는것 같지 않다.


특히 홍용표라는 사람은 장관으로서의 자질마저 의심된다. 그 사람은 까자흐스딴의 자발적인 핵포기실례를 거들면서 북도 핵을 포기하고 《새로운 기회》를 잡으라고 요구하던데 그게 어디 가당한 소리인가. 글쎄 내가 이 세상을 다는 몰라도 자기가 살고있는 까자흐스딴과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고국에 대해서는 좀 알고있다. 까자흐스딴이 일시적으로 보유했던 핵무기는 목적의식적인 노력으로 가진것이 아니라 구쏘련의 붕괴로 하여 절로 생긴것이였고, 더우기 누구의 침략위협을 받아 핵보유의 필요성이 꼭 제기되는것도 아니였다. 그러니 세계의 비핵화와 안정을 위하는 립장에서 핵을 포기하게 된것이다. 그런데 북의 실정이야 어디 까자흐스딴과 같은가. 언제한번 외래침략이 끊긴적 없는 나라가 바로 조선반도 나의 고국이고 특히 북은 지금껏 장장 60여년간이나 세계최대의 핵보유국인 미국과 전쟁상태에 있지 않는가. 오죽했으면 북이 허리띠를 조이면서, 미국의 제재에 맞서면서까지 핵을 만들었겠는가. 이러한 객관적사실자료들을 다 무시하고 무작정 핵을 포기하라면 그거야 북의 동포들더러 미국앞에 무릎끓고 항복하라는 소리나 다를바 없다. 평범한 사무원인 나에게도 쉽게 리해되는 이런 사실이 어떻게 장관인 홍용표에게는 리해되지 않는가 하는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근거》를 대며 북을 욕하다못해 외국사람들에게까지 빌붙으며 북을 좀 어째달라고 《협력》요청을 하는것이 과연 통일부장관이 할 일인지 참말 의심스럽다. 그러면서도 알마띠에 가서는 천연스레 《평화통일》을 외우던데 무슨 배우같기도 하고...


홍용표의 행동을 지켜보느라니 내가 그와 같은 성씨를 쓰고있다는 사실까지 부끄럽게 느껴진다. 붙는 불에 키질한다고 며칠전에는 이쉼강변에서 사는 동포친구가 《자네네 홍씨문중에 저런 너절한 사람도 다 있나?》라고 묻는 전화까지 걸려왔다. 그 순간 모닥불을 통채로 뒤집어쓴것만 같았다.


사실말해서 나는 족보를 따지면 배달민족의 반일투쟁사에 자기의 이름을 긍지높이 아로새긴 유명한 반일의병대장 홍범도와 먼 친척벌되는 사람이다. 망국의 한을 품고 배일의 함성을 부르짖으며 화승대로 일본사무라이들을 무리로 쓰러눕혀 명성을 떨쳤던 홍범도를 우리 홍씨문중은 더없는 자랑으로 여긴다. 하여 한해에 몇번은 홍범도의 묘소가 있는 끄즐오르다에 찾아가 꽃을 놓아드리군 한다.


외세를 삼천리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독립투쟁에 한몸 다바친 홍범도가 이국땅에서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바라고 바랬던것이 무엇이였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외세가 없는 진정한 자유독립국가, 그 누구도 다시는 감히 건드릴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강국이 고국산천에 일떠서는것이였을것이다. 그것도 갈라진 나라가 아닌 하나의 통일국가를 말이다. 우리 민족이 외세가 벌벌 떨게 할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있었다면, 부국강병, 보국안민의 념원이 진실로 실현된 나라가 있었다면 지난 세기때처럼 그렇게 망국노의 설음을 당하지 않았을것이고 홍범도와 같은 우리 선조들처럼 머나먼 여기 중앙아시아에까지 흘러와 타향살이를 하지 않았을것이다.


세상이 보란듯이 핵강국의 위상을 만방에 떨치는 북을 보며 우리 동포들이 이루 말할수 없는 기쁨과 감격, 긍지에 넘쳐있는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수 없는 강력한 국가. 존엄높은 민족을 꿈꾸는 우리 겨레의 숙원이 북에서 현실화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홍용표를 비롯한 남조선의 위정자들은 력사를 통하여 검증된 이 진리와 교훈을 모르거나 외면하고있는것 같다.


민족의 밝은 미래를 담보해주는 북의 핵억제력이 남조선당국에게는 그렇게도 싫은것인가고 묻고싶다.

홍범도가 망국민의 한을 풀지 못한채 눈을 감은 이곳에서 홍용표가 어지러운 잡소리를 늘여놓은것은 실로 전체 홍씨들의 수치이자 민족의 수치이다.


오늘도 황량한 까자흐언덕너머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서있는 홍범도의 반신상앞에서 나는 동족을 해치려고 모지름쓰며 세상의 웃음거리로 되고있는 쓸개빠진자들을 노려보는 그분의 분노의 눈초리를 보는듯 하다.


부언하건대 외국에까지 나와 동족을 헐뜯는 홍용표는 더는 홍범도의 애국애족의 령혼이 한을 품고 잠들어있는 이 땅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그리고 수치스러운 그 이름에서 홍씨성을 갈아치우라.


까자흐스딴 고려인통일련합회 

홍정모

인터넷 매체인 <아리랑 메아리>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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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군조선님의 댓글

선군조선 작성일

북과 남에서 모두 절세의 애국자으로 추앙하는 영웅 홍범도 장군.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신화적 독립군.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최초의 민족주의자.

[위키]

홍범도(洪範圖,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 1943년 10월 25일)는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하였으며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을 전전하다가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했고,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였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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