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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2]코리아 전쟁의 성격과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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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3-06-18 03:04 조회598,523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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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선 민족통신 논설위원은 17일 시론을 통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리아전쟁의 성격과 명칭에 대한 논란에 대해 진단하면서 "왜 6ㆍ25전쟁에 대한 사실적 표현 한마디에 이토록 발광하는가?  한 나라의 대표라는 박근혜가 바로 독립군을 토벌하는데 선두지휘하던 일본군 장교의 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는 이번 소요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지적한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시론-2]코리아 전쟁의 성격과 명칭

*글:장광선 민족통신 논설위원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해마다 6월25일이면 한국사회에 이 노래가 우렁차게 울려퍼집니다.
올 해도 이 노래가 울려퍼지기 전, 서울신문에서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학생들 70% 이상이 “6 25는 북침”이라 답변했다 합니다.
이 결과에 발끈해, ‘전교조가 잘 못 가르친 탓’이라는 웃지못할 우스게를 내뱉었다는구려.
"청소년들 70%가 625전쟁을 북침으로 이해"하고 있다니 참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사실 전쟁은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문제가 아니지요.
'남침' '북침'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시키기 위한 교활한 책임전가 논리일 따름이라 생각합니다.
1945년 8월15일 이후 분단 상황을 해결하려는 민중투쟁은 지속되었고 이것이 1948년 미군정의 음모와 지휘조정에 의한 남쪽 단독선거로 분단이 고착화되자 이를 깨고 통일정부를 이루기 위한 전투로 또는 남쪽정부(미군)의 북쪽지배권 확보를 위한 전투로 가열되었다가 1950년 6월25일 전면전으로 확전되었지요.
그래서 강정구교수는 이 전쟁의 성격과 이름을 '통일전쟁'으로 불렀다가 곤욕을 치렀고 나는 '독립전쟁'으로 부릅니다.

아무튼 그 날, 1950년 6월25일은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며 우리 민족에게 다시는 반복되어 나타나서도 안 되는 날임에는 분명합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딱 여기까지만입니다.
다음구절,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은 1945년 9월8일입니다.
그 날, 해방된 조국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 나라를 건설하기에 들뜬 한반도에 첫발을 디딘 멕아더의 포고령 제1호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조선인민에게 고함
미국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일본제국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 제국군대간에 오래 행해져왔던 무력투쟁을 끝나게 하였다. 일본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또 그를 대표하여 일본제국정부의 일본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세문사 발행 해방20년(1965년)에서]


이 후 한반도 남단에서 시행된 미군정의 모든 시책은 말 그대로 점령군의 권리행사였습니다.
남쪽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설되는 모든 과정 역시 미군정의 계획 관리 통제아래 시행되었음으로 당연히 그 모든 과정에서 민중의 강렬한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민중의 자주독립을 위한 저항을 미군정은 온갖 폭력수단을 동원하여 진압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제주4 3반항’과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민중의 항미독립무장게릴라투쟁이 전국범위로 확산됐으며 동시에 이런 민중항쟁을 북쪽의 지원과 사주로 몰아붙인 이승만남쪽정부는 항쟁의 근원을 제거하고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끊임없이 38선 일대에서 도발을 일으켰습니다.
그 분쟁이 전면전으로 확산된 날이 1950년 6월25일입니다.
따라서 6 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논쟁은 사실상 무의미하며 한국전쟁의 본질을 왜곡 희석시켜 점령의 영구화에 대한 책임을 면피해보려는 얄팍한 술수에 불과하다고 의식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습니다.

[6ㆍ25전쟁은 독립전쟁입니다]
(2005년 11월1일 http://blog.hani.co.kr/newbornking/15)

1945년 8월15일, 일본천황이 연합군에 항복했을 때 한국 사람들은 한국이 독립된 줄 알았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환희와 희망에 끓어올라 거리로 뛰어나가 만세를 불렀고 모름지기 우리 손으로 그토록 바라고 갈구하던 새 나라를 건설하자고 동분서주 바빴습니다.
지배자 일본으로부터 치안과 행정을 인계받아 신생독립국을 건설하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중앙과 각 도지부는 물론 면단위까지 조직되어 민중의 힘으로 자주적인 국가건설의 초석을 착실하게 닦아갔습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 민중은 '해방의 은인'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손에는 서툴게 그린 성조기와 태극기가 들려 있었고 군데군데 미군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나부끼기도 했습니다.
두부에 상륙한 미군은 환호하는 한국인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습니다.
나중에 미군은 그들의 상륙을 저지하려는 반항하는 원주민으로 오해하고 이를 해산하기 위해 총을 쏘았다고 해명 같지 않은 해명으로 얼버무렸지요.
아무리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이라 해도 환영하는 열광하는 모습과 반항하는 성난 모습이 구별되지 않았단 말입니까?
손에 든 그들의 국기는 정령 보이지 않았더란 말인가요?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식민지 지배자가 그대로 행정과 치안을 유지한다고 선언하고 한국인은 일본 행정과 군사권력의 지시에 복종하라는 내용의 포고문 제1호로 미군정 삼년의 지배정책을 시작합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당국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그때까지 진행 중이던 건준에 의한 일본총독부통치행정 및 치안 인수 작업도 미군에 의해 불법행위로 처벌을 받았으며 도망가고 숨어있던 일제잔재가 미군정의 엄호아래 일제히 고개를 내밀고 지배자의 위치로 복귀한 것입니다.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만 해체시킨 것이 아닙니다.
대한독립을 위해 중국 등 외국에 망명하여 투쟁하던 독립투사들의 자유스러운 귀국조차 방해했습니다.
심지어 임시정부 요원들의 귀국까지 저지하고 나섰다가 뒤늦게 '개인자격'으로 입국하는 것을 선심 쓰는 듯 허락했습니다.
이어서 건국준비위원회가 자체적으로 독립된 민중의 힘으로 조직한 치안유지대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강제해산시킨 미군정은 치안유지를 하기 위함이란 명분으로 일제 경찰조직을 고스라니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민족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와 암살을 조장 방조했습니다.

독립된 새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찾자는 노동자 농민들의 활동들을 무참하게 탄압함으로써 민중의 생활기반은 식민지 상황보다 열악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미군정의 모든 행정조치는 도저히 독립된 나라라고 인식할 수 없게 하는 처사들이었습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적 논의를 떠나 1948년 5월10일 형식상 민주주의 보통선거에 의해 국회가 조직되고 대통령이 선출됐으며 이어서 8월15일 대한민국 국가수립이 선포됨으로써 3년의 미군정을 끝내고 독립국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이제는 바야흐로 독립국 대한민국이 탄생된 것을 축하하고 기뻐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국회는 민족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반민특위를 구성하여 매국 매족 친일 부일협력자를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반민족행위자를 색출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신생독립국이라는 대한민국 정부는 반민특위를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회부의장을 포함한 수 십 명의 국회의원이 외국군 철수와 남북연석회의 등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하자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형한 이른바 국회뿌락치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독립운동세력과 민족민주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독립운동 하부조직성원들과 지원풀뿌리 민중을 사회주의자로 몰아 노골적으로 탄압하던 나머지 이들을 '보도연맹'으로 묶어 몰살했는데 10만명에서 15만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암매장 당한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진상조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 가족은 반세기가 넘도록 억울한 희생을 호소하기는커녕 숨을 죽이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이야말로 독립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라는 것이 경제적 측면에서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국가 재부와 생산물을 수탈당한 것이었다면 독립국이란 바로 국가 재부와 생산물을 자국국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말함일 것입니다.
이 논리를 당시 인구의 80%였다는 농민들에 대입한다면 남의 땅을 소작하며 소출을 수탈당하던 소작제도로부터 자기 땅을 가지고 자기의 부를 이루어내면서 국가건설의 밑받침이 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때문에 토지개혁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우선적이며 절실하게 요구되던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은 '실패하기 위한' 형식적으로 민중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한 정책으로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땅을 나누어 가진 소농들은 온갖 명목의 세금과 영농비를 조달 감당하지 못하여 바로 그 땅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더욱 열악한 조건에서 노예적 소작제도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사회 전반적으로 나라를 찾았다고 좋아하던 민중들은 물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투사들의 가족까지도 이토록 여전히 압박과 설음 속에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친일 부일 민족배반자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여전히 온갖 권력과 재물을 고스라니 이어받아 떵떵거리며 사는 식민지 세상이 지속되었습니다.
어느 면에서도 대한민국은 해방된 독립된 나라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6ㆍ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을 누가 시작했느냐, 그것이 과연 옳은 방법이었느냐,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이냐 하는 등의 아주 미묘하고 첨예한 이념논쟁을 접어두고 사건을 사건 자체로 관찰한다면 나는 그 전쟁을 독립전쟁이라고 규정하고자 합니다.
일제가 항복한 후 남북에 똑같이 군정이 실시됐다고 하지만 남쪽에 들어 온 미군의 "일본군 통치에 복종하라"는 '점령군 포고문'과 상반되게 북쪽에 들어온 소련군은 "조선민중의 해방을 축하하며 자체적인 독립국 건설을 돕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남과 북의 갈림길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식민지의 연속과 독립국의 건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갈림길입니다.
일제시대의 지배세력이 고스라니 정권을 인계받은 남쪽과 대조적으로 북쪽은 무장독립투쟁 세력이 국가건설의 주역을 담당했으며 독립국답게 식민지하의 모든 제도와 행정과 규범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제도와 행정과 사회규범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분들의 가족과 자녀는 새 정부가 방방곡곡 뒤져서 찾아내어 최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예우했다고 합니다.
어느 잣대로 측정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민주주의적이냐 독재적이냐가 되겠지만 북쪽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하에 신속하고 일사분란하게 토지개혁을 완료했으며 이 한 가지 정책만으로도 민중은 독립국의 수혜를 실질적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인구의 절대다수이던 빈농 소작인들은 자기 땅을 부여받아 피땀 흘린 보람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나라가 해방되고 독립된 자기나라임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북쪽의 민중들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며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권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며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반드시 후대에 보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확신했을 것입니다.
6ㆍ25전쟁이 터진지 3일 만에 인민군은 별 저항 없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올 수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2차 세계대전 전투경력을 자랑하던 막강한 맥아더 부대가 인민군 일개 분대병력이 남았을 뿐인 월미도를 접수하는데 1주일이 걸렸으며 인천에서 서울까지 옮겨가는 데에 두 주나 걸렸다는 사실에서 짐작이 가는 북쪽 민중들의 애국정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강정구 교수가 6ㆍ25전쟁을 통일전쟁으로 규정하는 글을 발표하자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들끓음입니다.
강교수는 그때 그렇게 통일이 됐으면 좋았을 것이라든지 나빴을 것이라든지 하는 가치판단을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했을 따름인데 한나라당을 선두로 이른바 수구세력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이것이 북쪽 김정일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둥 국가존위를 위태롭게 한다는 둥 하며 강교수를 불구속 수사하겠다는 정부를 '보국'차원에서 타도하자고 발광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소요사태를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왜 6ㆍ25전쟁에 대한 사실적 표현 한마디에 이토록 발광하는가?
한나라당의 대표라는 박근혜가 바로 독립군을 토벌하는데 선두지휘하던 일본군 장교의 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는 이번 소요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강교수 죽이기에 나선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하나 같이 일제의 수혜로 그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부당하고 부정한 반민족 반민중적 지배와 착취로 기득권을 유지 보강하고 있는 세력이 아닙니까?

오호통제라!
아직도 대한민국은 식민지세력의 횡포에 시달리며 해방독립의 몸부림을 치누나!

(2013.6.17)
 
*Video Clip about The Korean War-Part I By Bruce Cummings
 
*Video Clip about The Korean War-Part II By Bruce Cummings
 
 

*[장광선 시론-1]무엇이 남북회담을 깼는가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3-06-22 02:10:13 민족촌평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3-07-13 15:57:20 특집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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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꽤과리님의 댓글

꽤과리 작성일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6.25전쟁의 정의를 잘 정립해서 가르친것 같습니다.
학생들로부터 모처럼 희망을 보았습니다. 정의는 밟아 뭉갠다고 없어지지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확인 하였습니다.
장광선선생의 간결한 필력이 자주통일에 대한 크나큰 신심을 주고 있습니다.

학생님의 댓글

학생 작성일

장광선 논설위원님 글 읽고서 많은걸 생각했어요. 우리가 한국전쟁을 배울때 그건 일방적이었어요. 이라크전쟁도 미국이 거짓말하여 침략했다는 걸 늦게 알았어요. 미국 언론들도 똑같아요. 대량살상무기도 없는데 있다고 때려부셨잖아요. 거짓투성이 전쟁 이야기 우린 믿지 않아요. 장위원님 논설읽고서 더 그랬어요. 짱^^

오인동님의 댓글

오인동 작성일

누구나 읽기 편하게 쓰셔서 설득력이 높은 글 감사합니다.

샌후란시스코님의 댓글

샌후란시스코 작성일

한국 고등학생들이 그래서 70%가 북침이라고 그렇잔아요
박근혜 대통령은 큰일이라고 난리구요.
이승만 대통령도 미국등에 엎혀서 우두머리되고서
북진통일 노래불렀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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