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민족해방 지도자-니콰라과 오르테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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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7-03-07 00:00 조회21,2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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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민족통신 종합]유태영 목사(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이며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는 "제국주의 본질을 캐면 우리나라 문제도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는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제국주의 세력은 작은 나라들을 어떻게 간섭하고 지배해 왔는가를 파헤치기 위해 남미지역의 진보적 지도자들과 그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을 다룸으로써 우리 조국이 처해 온 역사적 배경을 조명하려고 시도해 왔다. 유태영 목사는 우리 민족은 어떤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내는가에 대한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특별논단, 남미의 진보인물들과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연재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그 동안 베네주엘라 우고 차베즈 대통령,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에 이어 이번에는 니콰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 지도자인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에 대해 연구한 인물역사와 이 나라 역사적 배경에 대한 논문을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했다. 이 내용을 전재해 소개한다.[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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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 Saavedra)대통령(62)이 2007년 1월 10일에 또다시 니카라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1945년 11월 11일생으로 중산층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떠 열다섯 살 때부터 친미독재자 소모사 정권의 46년간의 독재에 대항하는 반정부 활동을 시작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 온 악질세력과 생애를 걸고 투쟁해 집권에 성공한 민족해방 지도자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20년전 1985년 1월에 42년동안이나 독재를 한 악명 높은 소모사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1990년까지 5년 동안 집권한 경험이 있는 전직 대통령이다.
그후 16년동안 재야에서 계속하여 산디니스타 만족해방전선( FSLN)의 지도자로 투쟁하다가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우익 보수진영의 부호 은행가 에드아도 후보자를 꽉 누르고 또 다시 재집권에 성공하여 두번째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트리벨리 니카라과 주재 미국대사가 직접 나서서 우익 보수 정당 후보자에게 지원을 약속했고 또 콘트라 반군을 지원 했던 노스 전 백악관 보좌관 까지 니카라과를 직접 방문하여 오르테가 대통령의 당선을 가로 막으려고 총력을 기우렸다.
미국은 내정 간섭을 한다는 국제적 여론과 비난의 소리를 못들은 척 하면서 끝까지 친미 우익 보수정당의 에드아도 후보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미국은 결국 실패 하고 말았다. 그결과 미국이 제일 염려하고 무서워하는 남미의 좌파 대통령을 또 하나 탄생시키고 말았다.
당선된 오르테가 대통령은 당선 소감을 이렇게 말 했다. “나는 20여년 전에 소모사 독재와 싸울때 보다는 지금에 와서 많이 변했는데 냉전 논리를 고집하는 미국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소모사 독재자를 몰아냈던 오르테가 대통령은 20년후에 또다시 미국의 반사회주의 음모를 보기 좋게 몰아 내고 승리했다.
1. 침략과 독립의 역사
고대 마야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부족들이 태고적부터 멕시코에 살고 있었다. 여러 부족중에서 Nicoya, Nicarao, Diriagon 세 부족이 멕시코를 떠나 남하하여 니카라과에 정착 했다. 이들은 정착을 한후 스페인 침략자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수세기동안 니카라과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세 부족을 니카라과의 인디언 토착원주민들이라고 부른다.
이 세 부족들은 각각 추장이 있고 언어와 규율과 지역간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구별되여 있지만 추장을 통해서 세 부족들이 상호 교류하고 친교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원시적 마야문화권에 속하는 공동체였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니키라과를 처음 발견한 때는 1508년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지나치고 멕시코로 향해 갔다. 그후 1522년에 스페인 원정대가 스페인 황제의 명령을 받고 다시 와서 니카라과를 점령하여 스페인의 관활 구역으로 설정 했다.
<##IMAGE##> 스페인 원정대 대장 곤잘레즈는 인다언 추장 니고야를 잘 설득하여 추장 이하 6,000 명을 Catholic 신자가 되게 하는데 성공 했다.
다음에는 인디언 다른 부족 니카라오 추장을 접근하여 곧 친근해 젔는데 이번에는 접근한지 8일만에 추장이하 9,000명에게 영세 (세례) 를 주는 쾌제를 올렸다.
선교의 괘제 뿐만 아니라 니카라오 추장은 곤잘레즈에게 큰 황금 덩어리를 선물로 안겨 주었다.
곤잘레즈 원정대장은 추장의 이름 “니카라오” 를 본따 그곳 지명 을 “ 니카라과” 라고 명명 해 줌으로 더 큰 Catholic 선교의 개가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잘 나가던 곤잘레즈 원정대장은 세번째 만나는 인디언 추장 디리아곤 추장으로 부터는 된서리를 맞게 됬다. 디리아곤 인디언 추장은 접근해 오는 곤잘레즈 원정대장 에게 3,000명의 부족군대를 거느리고 대항하여 말하기를 목숨을 구하려면 니카라과에서 곧 떠나 물러가라고 위협했다. 곤잘레즈 원정대장은 아무 말 못하고 즉시 니카라과를 떠나 남쪽 파나마로 피신 해 내려 가게되었다.
그후 스페인 정부는 페드라리아를 니카라과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1531년까지 통치 했다. 하지만 그후부터 오랜 세월동안 니카라과는 스페인의 관심 밖으로 밀여 났다. 왜냐하면 니카라과는 땅도 작고 탐 낼만한 자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침략자들은 니카라과 보다는 페루, 콜럼비아, 베네수엘라등 남쪽에 있는 잉카제국의 광활하고 기름지고 부유한 영토를 점령하는데 먼저 우선 순위를 두고 그곳에 총력을 기우려야 했기 때문 이였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오히려 니카라과에서 원주민 인디언 200,000 명을 붙잡아 인력이 부족한 남족 페루 지방으로 팔아 넘겼다. 그럼으로 니카라과에서는 인디언의 수가 급격히 감소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그후에 유럽 여러 나라 에서 건너온 소수의 백인 침략자들이 주로 소 도시를 이루어 정착하여 몇 백년을 살았다. 이 몇백년 동안 니카라과에서 발생한 침략자들과 원주민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별로 특기 할만한 것이 없다.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 갔다. 1600년대가 지나가고 1700년대도 거이 해 저믄 석양에 이르렀다. 300년동안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휩쓸고 모두 다 점령 했던 화려한 해양 제국 스페인도 역시 석양을 맞이했다.
남미의 그 넓은 대륙의 구석구석을 다 뒤지면서 은과 금을 몽땅 긁어가던 스페인 대 제국인데 어찌하여 교활한 불란서에게 그리도 쉽게 무너 졌던가 ?
1794년에 스페인은 불란서의 침략을 받았다. 그렇게도 당당하던 해양제국 스페인 황제는 폐위를 당하고 불란서가 시키는데로 그의 동생이 왕위에 대신 올라 앉는 비극에 처했다.
침략자도 한 때가 지나면 침략을 당하는 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의 산 교훈 인것 같다. 유럽에서 스페인 제국의 위세가 추풍낙엽처럼 떨어 젔다. 스페인의 위세가 떨어지고 급변하는 대세를 틈타서 남미에서 많은 스페인 식민지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운동의 선풍을 일으켰다. 남미 대튝의 모든 나라들이 저마다 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IMAGE##> 카리브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였다. 남미 대튝의 영향을 받아 1821년에 이르러서 코스타리카, 엘살바돌, 과테말라, 혼두라스, 파나마등 여러 카리브해이 작은 나라들이 멕시코 제국의 주도하에서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 했다. 그리고 그 후 또 다시 니카라과를 비롯한 5개 나라들은 1838년에 멕시코 제국의 통제에서 부터 완전히 벗어나 각각 자주 독립을 성취 했다.
스페인의 침략을 당한 후 300년 만에 니카라과는 1838년에 드디어 하나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니카라과는 자주독립의 기쁨을 누릴만한 기회도 없이 또 다시 비운에 처하게 되었다.
독립한지 4년후에 영국의 해양 함대가 니카라과의 산 쥬안 항구에 마구 상륙
하여 인디언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기타 주민들을 전부 추방하고 니카라과 정부를 위협 했다.
새시대에 새로운 방식의 침략행위가 다시 시작 되였던 것이다.
겁에 질린 니카라과 정부는 미국에게 호소하여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미국은 오히려 영국과 타협하여 니카라과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1850년 4월19일에 “영미 클레이튼 조약” (Clayton – Bulwer Treaty) 을 맺고 영미 두 나라가 공동으로 카리브 해협을 관리하고 니카라과도 역시 영미 두나라가 공동으로 지배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니카라과에게 내외의 모든 문제를 미국 하고만 토의하고 미국의 지시만을 따르라고 협박했다.
니카라과는 꼼짝도 못하고 공식적 선포도 없는 미국의 군정 하에 들어갔다.
미국 군부를 대표하는 William Walker 장군과 미국의 대기업가 철도왕 Vanderbilt 두 사람의 영향하에서 니카라과와 미국과의 관게는 차라리 합방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Walker 는 눈가림으로 리바스를 니카라과의 초대 대통령으로 세우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고 Walker 자신이 니카라과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영어를 니카라과의 공용어가 되도록 선포했다.
Walker 대통령의 독재강경 정책은 미국과 영국의 반감을 샀다. 그 뿐만 아니라 니카라과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자주진보개혁”세력의 항쟁에 몰려서 Walker 는 1860년에 권좌에서 쫓겨 났으며 곧 피살 되고 말았다.
그후 1800년대가 지나가고 1900년대의 초반에 이르는 50년동안에 니카라과는 “외세의존보수파” 와 “ 자주진보개혁파” 두 진영의 대립으로 인한 분쟁과 분열이 계속 되었다.
해마다 정권이 교체되고 대통령이 새로 등장하는 혼란속에서 미국은 잘 짜여
진 교란작전과 간섭으로 외세의존 보수진영을 일방적으로 밀어 줌으로 혼란 은 날이 갈수록 심화 되었다.
식민지에서부터 독립을 했다고 말은 하지만 착취를 당하는 민중들에게 있어서 독립이란 허황한 말 뿐이고 하나의 바램에 지나지 않았다.
스페인이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모든 백인들의 침략 행위는 하나 같이 악마적이고 교활하며 인종주의적 탄압 행위이였다. 착취를 당하는 민중에게 외세는 오직 비극만 가저다 줄뿐 이였다. 천주교든 기독교든 기만과 위선에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의 니카라과는 믿고 의지할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국제정세 속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조개속에서 진주 알이 태여나고 자라듯이 니카라과는 암혹이 깊어 지면 깊어 질수록 민중속에서 항쟁의 씨앗이 음트고 싻트일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2, 소모사 독재정권의 등장
소모사가 니카라과 정치무대에 등장한것은 1932년부터였다. 소모사는 필라델피아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으며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니카라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외교관들과 군인들을 위하여 통역관으로 일하는 기회를 통하여 미국과 가까워졌으며 이로 인하여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 사카사 대롱령이 니카라과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는데 사카사 대통령은 소모사의 삼촌이다. 삼촌이 대통령이 된것은 소모사의 큰 행운이다. 사카사 대통령은 보수 진보 양진영을 혼돈하여 왔다갔다 하면서 무능을 드러냈다.
사카사 대통령은 자기 조카인 소모사가 미국인들과 가까히 지내는 것을 활용 하여 소모사를 방위군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방위군은 그때 헌법이 인정하는 정규군은 아니였다. 하지만 미국이 필요한 어영군이기 때문에 미국이 뒤에서 적극 지원해 줌으로 정규군처럼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소모사는 삼촌 대통령의 배경과 친미적 관계를 적극 활용하여 니카라과 정치
무대의 중심에 떠오르는 인기를 독차지했다.
한편 니카라과에 산디노 라고하는 혼혈 스페인계 백인 양심적 젊은이가 있었다. 이 청년은 부모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재산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미국의 노예가 되어 고통 받아 온 빈민들을 위하여 빈곤에서부터 해방시켜 야 한다는 큰 뜻을 품고 미국 침략자들과 친미정권을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게릴라 전투 부대를 조직하였다.
산디노는 농촌과 탄광을 찾아가 민중들이 당하는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생활도 해 보았다. 산디노는 민중의 호응을 받아 3,000명의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고 교양하여 니카라과에서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친미적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용감 하게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정권에 야욕을 품고 기회를 찿고 있던 소모사는 산디노의 게릴라 활동을 주시하고 있으면서 산디노를 제거하기만 하면 자기의 공로를 인정 받게되고 보다 더 큰 미국의 신임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삼촌이 대통령이며 미국의 신임도 어느정도 받고 있는 소모사는 방위부대의 지휘권까지 가지고 있으니 “내가 못할 일은 없다” 라고 장담했다. 그래서 소모사는 산디노가 어느날 대통령을 면담하고 나오는것을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부하를 시켜 산디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후에 곧 처형하고 시체를 비밀로 암매장했다. 이런 행위는 마치도 박정희 군사독제시대에 중앙정보부가 하던식과 같은 방법이었다.
산디노를 살해하고 산디노의 게릴라 부대 3,000 을 해산 소탕기킨 소모사는 미국의 튼튼한 신임과 막강한 군사력을 보다 더 확고히 장악하여 앞으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소모사는 바로 그때 자기 삼촌인 사카사 대통령의 정권이 점점 쇠퇴해 가고 있는것을 악용하고 미국의 힘을 의존하기 만 하면 삼촌의 정권을 넉넉히 탈취할 수 있다고 판단 했다.
1936년에 사카사 대통령은 경제정책의 실정으로 인하여 민중의 원성이 날로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미국은 보다 더 강력한 친미 정권을 원하기 때문에 사카사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 또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조카가 지휘 하고 있는 군부의 위력은 도움 보다도 오히려 더 큰 압력이 되여 대통령의 사퇴를 재촉했다. 이와같은 대세에 못이겨 사카사 대통령은 할수 없이 권좌에서 그만 사퇴하고 물러났다.
1937년 1월 1일에 소모사는 자기의 삼촌인 사카사 대통령을 보기 좋게 권좌에서 몰아내고 미국과 군부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니카라과의 제17대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소모사는 산디노를 살해한후 게릴라를 소탕했다고 일시적으로 안심을 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디노의 혁명정신은 절대로 소탕 당하지 않았다. 산디노는 여전히 생생한 씨앗으로 살아 남아 민중의 저항세력으로 재생되여 소모사를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소모사를 죽음의 골짜기로 한거름 한거름씩 끌고 가고 있었다.
산디노는 죽었지만 산디노의 혁명정신을 이어 받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1961년에 니카라과에서 창설 되였다. 이 조직은 민중속에 연결되고 확장되여 소모사정권 32년동안 줄곳 거센 항쟁을 계속했다.
소모사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저항투쟁을 무조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으로 규정했다.
소모사는 산디노 저항세력을 냉전 이데올로기 분파로 규정해 놓고 산디니스타의 애국적 저항 운동을 무섭게 탄압했다.
미국 CIA 은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소모사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지원했다. 하지만 소모사 독재정권은 1979년 7월17일에 32년 동안의 극악한 독재를 긑내고 권좌에서 쫓겨 나고 말았다. 미국의 CIA 도 산디노 저항세력의 위세를 막을 수 없었고 점점 기우러져가는 소모사의 몰락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소모사는 1937년 1월1일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1979년7월17일에 권좌에서 쫏겨 났는데 42년 동안 니카라과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서운 독재를 했다.
소모사는 미국 마이아미로 막대한 달러 뭉치를 가지고 도망 했다가 그 후에 다시 파라과이로 가서 숨어서 피신생활을 하다가 1980년에 피살되었다.
다음은 소모사가 미국의 CIA 의 보호아래 42년동안 독재하면서 저지른 살인과 탈취와 인권 탄압에 대한 양심적인 Catholic 신부와 수녀들의 생생한 증언과 또한 국제인권운동가들이 경험한 기록들을 간추려서 몇가지를 소개한다.
Catholic 교회는 소모사와 미국의 남미 침략정책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극소수의 양심적인 Catholic 수녀들과 약간의 성직자들이 교회의 침묵을 깨고 불의에 항거 했다.
하지만 그들의 항거는 현장에서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과 함께 아파하고 같이 고민하는데 큰 뜻이 있었을뿐 미국의 침략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독재자를 타도하고 축출하는 투쟁에 있어서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한편 교권적 Catholic 교회는 이 양심적인 수녀들과 성직자들의 행동을 비난 했다.
60, 70년대에 니카라과에서 비밀로 나온 증언들은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오늘도 외세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제2의 소모사가 존재하고 있으며 고난 당하는 민중들의 증언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다.
다음은 니카라과에서 1960년, 1970년대의 소모사에 대한 증언중 몇개를 소개한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사실상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 자본주의가 공적 제1호로 라틴아메리카에 등장했다. 특히 억압적인 군정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소모사 정권 아래 세워진 총살대를 비난한 캐톨릭 신부들은 투옥되거나 추방의 위협을 항상 받았으며 그 중 버트란드 신부는 추방 당했다. 철학교수 페트난도는 1976년에 소모사 정권에 의하여 피살된 224명에 대하여 미 하원에서 증언한 뒤 추방 되었다. 소모사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면 “거세한 돼지” 들이 되고 만다.
1976년2월 한 증인의 말이다. “소모사 국민방위군들은 명단을 가지고 동리마다 옮겨 다니 면서 남자들을 끌어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하고 그리고 몰살을 당한후 총살을 당한 사람들의 토지는 방위군 총사령관의 토지가 되었다.
소모사의 방위군 4분의 3에 해당되는 5천600명이 미국에서 특수 훈련을 받고 훈련받은 군인들은 미국의 훈장을 받았다. 수없이 많은 방위군의 학살은 소, 돼지,토지,여자들의 전리품을 탐하는것 때문에 자행된다. 산디니스타의 협력자라고 누군가가 고발을 하기만하면 입증할 증거없이 그냥 수십명 수백명이 총살을 당했다.
26개의 교회들이 군 막사, 고문 장소 그리고 농민 부녀자들의 강간 장소로 이용되었다.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는 모두 구타와 고문을 당했는데 그중 한사럄은 몇일 동안이나 매달아 놓아 식물인간이 되었다.
60년대, 70년대 내내 소모사 가문은 미국의회 원조청문회에서 카스트로가 지원하는 산디니스타 게릴라를 막기위하여 원조가 필요하다고 몇십년 동안 거짓 증언을 했는데 원조는 소모사 가문과 군부의 호화를 위해서 전부 사용되었다.
1979년 7월 19일 소모사가 축출되고 미국으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42년 독재를 청산하는 값은 대단했다. 소요로 인한 사망자 50,000 이며 외국으로 도망간 소모사 추종자는 1,500,000 이였다
3.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IMAGE##> 1934년에 소모사는 음모를 꾸며서 산디노를 살해하고 암매장 했다. 그리고 소모사는 1937년에 권력을 과시하면서 니카라과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피살 당한 산디노는 멸망하지 않고 다시 부활하였다. 1961년에 산디노의 정신을 이어 받은 진보적 구릅들이 연합하여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을 결성하였다.
산디노는 혁명의 씨앗을 뿌려만 놓고 그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소모사의 잔인한 칼에 희생되여 떠나 갔다. 산디노가 죽은 후에 그의 혁명과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의 후배들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니카라과 민중속에서와 삶의 현장에서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산디니스타 전사들이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후 놀라운 활약들을 많이 했는데 1974년에는 소모사 대통령의 가까운 친적들을 대거 납치하여 몸값으로 1백만 달러를 받아 내는 쾌재를 과시 하기도 했다.
그후부터 산디니스타 전사들은 소모사 독재정권 타도와 사회주의 개혁운동을 통한 민족해방을 목표로하여 민중들에게 접근하면서 점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와같은 산디노 전사들의 활동은 소모사 전권에게 큰 위협이며 골치덩이어리 이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남미의 다른 나라들의 민족해방 운동단체들과 연대를 가지게
됨으로 미국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산디니스타 전사들의 저항운동과 그들의 위력이 미국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니카라과에게 제공하는 정상 원조를 삭감하면서 경고했다. 만일 소모사가 산디니스타와 대화를 하지않고 인권개선을 하지 않으면 원조를 아주 끊겠다 라고 카터 대통령은 소모사에게 경고까지 했다.
하지만 소모사는 미국의 공화당 강경파를 의지하고 카터 대통령 에게는 거짓말을 해 가면서 산디니스타에게 점점 더 극심한 탄압을 계속 했다. 소모사 대통령은 언론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방위군을 증가하여 독재정권을 오히려 더 튼튼히 강화했다.
소모사 대통령은 산디니스타 저항운동을 마음속으로 환영하는 순진한 민중들을 무조건 “빨갱이들” 이라고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수십만 양민들을 학살했다. 그 뿐만 아니라 소모사 정권은 방위군에게 초법적 권한을 허용해 주었다. 방위군들이 순진한 민중을 닥치는대로 탄압하며 탈취하면서 학살행위도 자행했으나 소모사 정권은 공산당을 소탕하는것 이니 아무 문제될것 없다고 오히려 방위군을 두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42년을 계속한 독재로 인하여 민중들의 가슴속에 쌓이고 쌓인 원한은 1979년에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 소모사 정권은 드디어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소모사 정권을 호위하던 방위군은 해체되었다. 해체된 방위군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카리브 나라들로 도피하거나 국내에 숨어 있다가 자수했다.
소모사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80년에 국가재건을 추진할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는 소모사 독재정권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방위군을 해산한후에 새로운 군부를 창설했다.
임시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4년후에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다니엘 오르테가를 대통령으로 선출 했다. 그리하여 1985년 1월10일에 오르테가 대롱령 역사상 처음으로 민선 대통령이 되여 취임을 했다.
4. 미국이 지원하는 콘트라스 (Contras) 반군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지도자인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대통령 이 되여 취임을 한것은 미국 공화당에게는 하나의 큰 치욕적인 사건이 되었다.
미국은 소모사 독재정권이 몰락했지만 그후에도 계속하여 친미적 세력이 니카라과를 계속 지배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보수 적 전략가들은 비밀로 묘안을 연구 해 냈다. 그 묘안은 미국중앙정보부(CIA) 를 시켜서 “콘트라스 반군 유격대”를 1980년에 만들어 냈다.
소모사 친미독재정권이 1979년에 몰락하자 미국은 바로 그 다음 해인 1980년에 벌서 극비리에 콘트라스를 창설하여 새로 등장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세력을 붕괴하기 위한 공작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앞으로 예견되는 니카라과의 민주화를 파괴할 게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은 소모사 독재정권 하에서 소모사에게 충성하던 친미성향의 군인들을 재등용하여 비밀리에 혼두라스등 카리브 나라들을 이용하여 그곳에서 훈련을 시켰다. 미국 정보국 요원들은 콘트라스를 창설하고 막대한 돈으로 지원하면서 운영했다. 미국은 니카라과 뿐만 아니라 카리브 5개 나라들이 혹시 반미나라가 될가 염려하여 좌경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니과라과와 연결하여 카리브 전 지역에서 콘드라스가 활동하도록 게릴라 조직을 확대 운영했다.
오르테가 대통령이 취임함으로 미국 공화당이 주도하고 있는 국회는 눈가림 으로 콘트라스 에 대한 지원을 우선 일단 중단하기로 결의 했다. 지원을 중단하는 이유는 콘트라스 의 존재를 숨기기위한 임시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레건 미국 대통령은 니카라과에 대한 원조는 물론이고 모는 교역과 교류를 즉각 봉쇄하고 중단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오르테가 대통령의 등장으로 인하여 미국의 안보에 큰 위험이 있다는 핑게로 니카라과를 봉쇄했던 것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이런 긴급한 상황하에서 불가피하게 미국과 내통하고 있는 모든 우익 반동들에 대하여 강경책을 쓸수 밖에 없었다. 오르테가 대통령이 미국에 대하여 강경책을 쓴다고 친미적 우익 언론들과 Catholic 교회는 일제히 오르테가 대통령을 향하여 비난의 포문을 얼기 시작 했다.
몇일 후에 공화당이 주도하는 미국의 의회는 임시로 중단했던 콘트라스에 대한 지원을 다시 재개하도록 가결 하고 즉시 백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결재했다. 레건 대통령은 콘트라스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일일히 민주당 의원들의 승인을 받는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고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레건 대통령은 콘트라스를 계속하여 지원할 수 있는 비밀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 방법은 이란에 무기를 몰래 판매하고 판매에서 얻은 돈으로 콘트라스 를 국회 몰래 계속 지원 할것을 게획 하는 방법 이였다.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여 막대한 자금으로 콘트라스를 계속 지원했다.
하지만 1986년에 레건 대통령이 그동안 이란에게 몰래 비밀로 무기를 판매한 사건 (Iran-Contras) 이 야당 국회 의원들에 의하여 폭로 되었다. 이 폭로된 비밀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국과 전세계에 초미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란에게 비밀로 무기를 판매 한것은 중동정책의 모순이다. 그 돈으로 콘트라스를 몰래 지원 한것은 남미정책의 모순이다. 민주당은 레건 대통령을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비밀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한 일등공신은 현역 군인 올리버 노스 소령 이였다.
노스 소령은 국회 청문회 증언에서 레건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충성했을 뿐 죄가 없다 라고 뻔뻔스러운 답변을 했다. 노스 소령은 그후에 레건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으로 승격 되었다.
이란 - 콘트라스 사건이 폭로된 이후부터 콘트라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중단 되었다. 지원이 끊어지니 콘트라스는 약해지고 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몇십년 동안 계속된 콘트라스와의 냉전 대결의 내전을 할수만 있으면 속히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의 회복을 간절히 원했다.
그리하여 1988년에 오르테가 대통령은 용단을 내어 해산의 위기에 처해 있
는 콘트라스 반군 지도자와 정전 – 화해 협정 (Esquipulas)을 제안하고 협정을 맺었다.
협정을 맺을 당시 콘트라스 반군의 병력은 10,000 명 이였다. 반군의 가족들은 미국이나 카리브 지역에 거주하는데 수는 140,000명 이였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콘트라스 단원 전원과 가족들에게 사면 복권을 허락하여 시민사회로 복귀시켰다. 민족 대단결을 위한 역사적으로 기리 남을 결단이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냉전의 뿌리를 깨끗이 청산하려는 용단과 민족화해를 열망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세계는 오르테가 대통령의 용단을 민족화해와 평화를 위한 위대한 용단이라고 격찬했다.
하지만 오르테가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용단에 치명적 재난과 시련이 닥처왔다.
첫째는 자연에서 온 재난이며 둘째는 미국에서 온 재난이였다.
1988년과 89년에 계속된 폭우와 태풍으로 500명이 죽고 230,000 이 집을 잃었다. 자연의 재난으로 인한 재산 피해는 1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또 극심한 한재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곡물 생산이 극감되였다. 온 나라가 온통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과 기근에 빠졌다.
이러한 극악한 상황하에서 오르테가 대통령은 여당이던 야당이던 정치적 투쟁이나 이념적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고 탈피하여 재난을 극복하자라고 호소했다. 이 길만이 재난에서 소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1990년 총선을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할것을 선포 했다. 이것은 대통령의 애국적 용단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동시에 또한 너무나 순진한 결단으로 평가받고도 있다.
그랬더니 15개의 정당에서 15명의 후보자들이 출마하여 혼란이 벌어젔다. 이와같은 혼란속에서 역시 미국의 에치 다불유 부쉬(H.W. Bush=현 미국 대통령 아버지)대통령은 여전히 니카라과를 지배하고 싶은 욕심을 포기하지 않고 흉계를 꾸며 오르테가 대통령의 결단을 악용 했다. 에치 부쉬 대통령은 여러가지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여 방해 공작을 하면서 오르테가를 낙선시키기 위하여 상대방 후보자에게 9백만 달러를 지원 하기도 했다.
투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미국이 노골적으로 지원한 후보가 55% 대 41%로 오르테가 대통령을 낙선시켰다. 부쉬가 지원하는 돈의 힘이 극심한 가난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재난으로 인하여 지치고 지친 유권자들의 표를 유혹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너무나도 극심한 빈곤속에서 역시 돈의 힘이 일정 효력을 발휘한 셈인가? 어쨌던 오르테가 대통령은 다음 16년을 또 참고 기다리면서 미국의 끈질긴 침략에 맞서 투쟁을 계속 해야만 했다.
5. 니카라과 대선 미국의 패배 – 오르테가 재선 승리
<##IMAGE##> 진실과 정의, 인격과 존엄, 민중의 항쟁이 지속되는 한 민중은 반드시 이기고 승리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유일한 관심이다.
산디니스타 좌파혁명의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2007년 1월10일에 니카라과 대통령에 재선되어 역사적인 취임식을 가졌다. 오르테가 대텅령은 1979에 미국이 지원하는 42년의 소모사 독재정권을 몰아 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또 이번에는 16년의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친미정권을 몰아 내고 재선에 승리
하였다. 이번 승리는 진실과 정의의 승리이며 민중의 항쟁이 쟁취한 승리이다.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직후에 니카라과의 신임 대통령이 제일 처음으로 행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차베스 대통령과 모랄레스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문건에 서명을 하는 것이였다.
그 문건은 “볼리바르 혁명정신에 기초한 중남미 다섯 나라들이 연합, 단결, 협조를 강화하여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침략을 봉쇄한다” 라고 하는 알바(ALBA) 의 선언문 이였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둘러 싼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의 모든 나라들이 일치 단합하여 지역안보와 발전을 성취할 뿐만 아니라 카리브 지역의 주도권을 전세계에 밝혀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카스틸라 교육부 장관을 새로 임명했다. 카스틸라 교육부 장관은 니카라과의 잘못된 교육제도를 당장 뜯어 고치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친미 신자유주의 정권하에서 니카라과의 교육제도는 사립학교 제도이며 20%에 해당하는 부유층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교육제도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부유층 만을 위한 잘못된 교육제도를 즉시 개정하여 80%에 해당하는 빈곤층 민중들을 위한 교육제도로 개혁할 것을 발표했다. 이것은 마치도 한국의 한나라당이 부유층을 위해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기 위해 날뛰는 것에 민중들이 반대하고 있는 양상과 유사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놀라운것은 1월13일에 이란의 아마디네자 대통령이 국빈으로 니카라과를 방문한 것이다. 1990년부터 단절되였던 국교를 다시 회복하여 정상화하게 된것을 발표했다. 그리고 두 정상은 양국 상호 친교각서에 서명했다. 이 각서는 앞으로 이란과 니카라과는 경제, 에너지, 상업, 재정, 기술 및 기간산업등에 관한 모든 경험들을 서로 교환할 것을 약속하는 각서이다.
이란 대통령은 나콰라과의 수도 마나구아(Manaqua)의 빈민촌을 직접 방문하여 가옥신축과 의료지원 을 약속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이란과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단결하고 연합하여 싸울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신은 우리 모두를 도우신다.” 두 정상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당당히 교류를 선언했다.
총인구 547만의 니카라과는 80% 에 해당하는 절대 다수가 하루 2달러($2) 이하로 겨우 살아가는 극히 빈곤한 나라이다.
친미 성향의 전직 대통령들이 세 차례나 정권을 교체하면서 친미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고집했는데 그 결과는 서반구에서 아이티 다음으로 두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된것 뿐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이 16년 후에 다시 집권을 하게되여 돌아오기는 했지만 전임 대통령들이 넘겨준 나라 사정은 소모사 독재정권 이래 최악의 상태이다.
하지만 오르테가 대통령은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니카라과에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면서 알바(ALBA)의 회원국인 베네수엘라, 쿠바, 볼리비아, 에과도르, 니카라과등 나라들이 상호 우호적 조건으로 지원하고 교역하게 됨으로 니카라과는 능히 빠른 기간안에 사정이 변하고 급성장 하게 될것으로 보인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벌써 미국에게 과거의 불공정한 자유무역 으로 인하여 발생한 이윤에 대하여 ”차감계산” (Off-set) 을 하여 부당한 이익금을 환불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청했다. 이 요청의 뜻은 과거사는 물론 환불로 시정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모순을 다시는 용납 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 제시하는 요청인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니카라과의 채무액인 3천1백 80만달러($31.8 million)를 탕감해 주었을 뿌만아니라 계속해서 에너지, 의료, 기간산업, 식량등을 원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석유 저장시설을 건설하여 15만 배럴(150,000 barrels)을 저장할 수 있도록 도와 줄것도 약속했다.
만일 미국이 오만하게 니카라과에게 원조를 무기로 삼고 위협을 한다면 니카라과는 이제는 동맹국이 된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와 같은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으면서 오히려 반미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될 것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거듭하여 역설하고 있다. "이견을 뒤로 하고 민중과 빈자들을 우선으로 할 새로운 정치문화를 수립할 것이다."라고.
니카라과의 가난을 일소 하도록 투자가들에게 확신감을 심어 줄것이다. 하지만 투자의 과감한 확대가 가슴에서 분출되는 사회주의 정신에 역행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끝]
(2007년 3월 5일)
뉴욕, 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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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진보지향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과 지도자들]
*[특별기고]*남미의 해방자-우고 차베스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특별기고]*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사회주의로 안정기반---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특별기고]시민혁명의 선두를 달리는 에콰도르 코레아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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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디니스타 민족해방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 |
<##IMAGE##>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 Saavedra)대통령(62)이 2007년 1월 10일에 또다시 니카라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1945년 11월 11일생으로 중산층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떠 열다섯 살 때부터 친미독재자 소모사 정권의 46년간의 독재에 대항하는 반정부 활동을 시작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 온 악질세력과 생애를 걸고 투쟁해 집권에 성공한 민족해방 지도자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20년전 1985년 1월에 42년동안이나 독재를 한 악명 높은 소모사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1990년까지 5년 동안 집권한 경험이 있는 전직 대통령이다.
그후 16년동안 재야에서 계속하여 산디니스타 만족해방전선( FSLN)의 지도자로 투쟁하다가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우익 보수진영의 부호 은행가 에드아도 후보자를 꽉 누르고 또 다시 재집권에 성공하여 두번째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트리벨리 니카라과 주재 미국대사가 직접 나서서 우익 보수 정당 후보자에게 지원을 약속했고 또 콘트라 반군을 지원 했던 노스 전 백악관 보좌관 까지 니카라과를 직접 방문하여 오르테가 대통령의 당선을 가로 막으려고 총력을 기우렸다.
미국은 내정 간섭을 한다는 국제적 여론과 비난의 소리를 못들은 척 하면서 끝까지 친미 우익 보수정당의 에드아도 후보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미국은 결국 실패 하고 말았다. 그결과 미국이 제일 염려하고 무서워하는 남미의 좌파 대통령을 또 하나 탄생시키고 말았다.
당선된 오르테가 대통령은 당선 소감을 이렇게 말 했다. “나는 20여년 전에 소모사 독재와 싸울때 보다는 지금에 와서 많이 변했는데 냉전 논리를 고집하는 미국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소모사 독재자를 몰아냈던 오르테가 대통령은 20년후에 또다시 미국의 반사회주의 음모를 보기 좋게 몰아 내고 승리했다.
1. 침략과 독립의 역사
고대 마야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부족들이 태고적부터 멕시코에 살고 있었다. 여러 부족중에서 Nicoya, Nicarao, Diriagon 세 부족이 멕시코를 떠나 남하하여 니카라과에 정착 했다. 이들은 정착을 한후 스페인 침략자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수세기동안 니카라과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세 부족을 니카라과의 인디언 토착원주민들이라고 부른다.
이 세 부족들은 각각 추장이 있고 언어와 규율과 지역간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구별되여 있지만 추장을 통해서 세 부족들이 상호 교류하고 친교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원시적 마야문화권에 속하는 공동체였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니키라과를 처음 발견한 때는 1508년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지나치고 멕시코로 향해 갔다. 그후 1522년에 스페인 원정대가 스페인 황제의 명령을 받고 다시 와서 니카라과를 점령하여 스페인의 관활 구역으로 설정 했다.
<##IMAGE##> 스페인 원정대 대장 곤잘레즈는 인다언 추장 니고야를 잘 설득하여 추장 이하 6,000 명을 Catholic 신자가 되게 하는데 성공 했다.
다음에는 인디언 다른 부족 니카라오 추장을 접근하여 곧 친근해 젔는데 이번에는 접근한지 8일만에 추장이하 9,000명에게 영세 (세례) 를 주는 쾌제를 올렸다.
선교의 괘제 뿐만 아니라 니카라오 추장은 곤잘레즈에게 큰 황금 덩어리를 선물로 안겨 주었다.
곤잘레즈 원정대장은 추장의 이름 “니카라오” 를 본따 그곳 지명 을 “ 니카라과” 라고 명명 해 줌으로 더 큰 Catholic 선교의 개가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잘 나가던 곤잘레즈 원정대장은 세번째 만나는 인디언 추장 디리아곤 추장으로 부터는 된서리를 맞게 됬다. 디리아곤 인디언 추장은 접근해 오는 곤잘레즈 원정대장 에게 3,000명의 부족군대를 거느리고 대항하여 말하기를 목숨을 구하려면 니카라과에서 곧 떠나 물러가라고 위협했다. 곤잘레즈 원정대장은 아무 말 못하고 즉시 니카라과를 떠나 남쪽 파나마로 피신 해 내려 가게되었다.
그후 스페인 정부는 페드라리아를 니카라과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1531년까지 통치 했다. 하지만 그후부터 오랜 세월동안 니카라과는 스페인의 관심 밖으로 밀여 났다. 왜냐하면 니카라과는 땅도 작고 탐 낼만한 자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침략자들은 니카라과 보다는 페루, 콜럼비아, 베네수엘라등 남쪽에 있는 잉카제국의 광활하고 기름지고 부유한 영토를 점령하는데 먼저 우선 순위를 두고 그곳에 총력을 기우려야 했기 때문 이였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오히려 니카라과에서 원주민 인디언 200,000 명을 붙잡아 인력이 부족한 남족 페루 지방으로 팔아 넘겼다. 그럼으로 니카라과에서는 인디언의 수가 급격히 감소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그후에 유럽 여러 나라 에서 건너온 소수의 백인 침략자들이 주로 소 도시를 이루어 정착하여 몇 백년을 살았다. 이 몇백년 동안 니카라과에서 발생한 침략자들과 원주민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별로 특기 할만한 것이 없다.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 갔다. 1600년대가 지나가고 1700년대도 거이 해 저믄 석양에 이르렀다. 300년동안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휩쓸고 모두 다 점령 했던 화려한 해양 제국 스페인도 역시 석양을 맞이했다.
남미의 그 넓은 대륙의 구석구석을 다 뒤지면서 은과 금을 몽땅 긁어가던 스페인 대 제국인데 어찌하여 교활한 불란서에게 그리도 쉽게 무너 졌던가 ?
1794년에 스페인은 불란서의 침략을 받았다. 그렇게도 당당하던 해양제국 스페인 황제는 폐위를 당하고 불란서가 시키는데로 그의 동생이 왕위에 대신 올라 앉는 비극에 처했다.
침략자도 한 때가 지나면 침략을 당하는 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의 산 교훈 인것 같다. 유럽에서 스페인 제국의 위세가 추풍낙엽처럼 떨어 젔다. 스페인의 위세가 떨어지고 급변하는 대세를 틈타서 남미에서 많은 스페인 식민지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운동의 선풍을 일으켰다. 남미 대튝의 모든 나라들이 저마다 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IMAGE##> 카리브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였다. 남미 대튝의 영향을 받아 1821년에 이르러서 코스타리카, 엘살바돌, 과테말라, 혼두라스, 파나마등 여러 카리브해이 작은 나라들이 멕시코 제국의 주도하에서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 했다. 그리고 그 후 또 다시 니카라과를 비롯한 5개 나라들은 1838년에 멕시코 제국의 통제에서 부터 완전히 벗어나 각각 자주 독립을 성취 했다.
스페인의 침략을 당한 후 300년 만에 니카라과는 1838년에 드디어 하나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니카라과는 자주독립의 기쁨을 누릴만한 기회도 없이 또 다시 비운에 처하게 되었다.
독립한지 4년후에 영국의 해양 함대가 니카라과의 산 쥬안 항구에 마구 상륙
하여 인디언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기타 주민들을 전부 추방하고 니카라과 정부를 위협 했다.
새시대에 새로운 방식의 침략행위가 다시 시작 되였던 것이다.
겁에 질린 니카라과 정부는 미국에게 호소하여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미국은 오히려 영국과 타협하여 니카라과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1850년 4월19일에 “영미 클레이튼 조약” (Clayton – Bulwer Treaty) 을 맺고 영미 두 나라가 공동으로 카리브 해협을 관리하고 니카라과도 역시 영미 두나라가 공동으로 지배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니카라과에게 내외의 모든 문제를 미국 하고만 토의하고 미국의 지시만을 따르라고 협박했다.
니카라과는 꼼짝도 못하고 공식적 선포도 없는 미국의 군정 하에 들어갔다.
미국 군부를 대표하는 William Walker 장군과 미국의 대기업가 철도왕 Vanderbilt 두 사람의 영향하에서 니카라과와 미국과의 관게는 차라리 합방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Walker 는 눈가림으로 리바스를 니카라과의 초대 대통령으로 세우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고 Walker 자신이 니카라과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영어를 니카라과의 공용어가 되도록 선포했다.
Walker 대통령의 독재강경 정책은 미국과 영국의 반감을 샀다. 그 뿐만 아니라 니카라과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자주진보개혁”세력의 항쟁에 몰려서 Walker 는 1860년에 권좌에서 쫓겨 났으며 곧 피살 되고 말았다.
그후 1800년대가 지나가고 1900년대의 초반에 이르는 50년동안에 니카라과는 “외세의존보수파” 와 “ 자주진보개혁파” 두 진영의 대립으로 인한 분쟁과 분열이 계속 되었다.
해마다 정권이 교체되고 대통령이 새로 등장하는 혼란속에서 미국은 잘 짜여
진 교란작전과 간섭으로 외세의존 보수진영을 일방적으로 밀어 줌으로 혼란 은 날이 갈수록 심화 되었다.
식민지에서부터 독립을 했다고 말은 하지만 착취를 당하는 민중들에게 있어서 독립이란 허황한 말 뿐이고 하나의 바램에 지나지 않았다.
스페인이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모든 백인들의 침략 행위는 하나 같이 악마적이고 교활하며 인종주의적 탄압 행위이였다. 착취를 당하는 민중에게 외세는 오직 비극만 가저다 줄뿐 이였다. 천주교든 기독교든 기만과 위선에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의 니카라과는 믿고 의지할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국제정세 속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조개속에서 진주 알이 태여나고 자라듯이 니카라과는 암혹이 깊어 지면 깊어 질수록 민중속에서 항쟁의 씨앗이 음트고 싻트일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2, 소모사 독재정권의 등장
소모사가 니카라과 정치무대에 등장한것은 1932년부터였다. 소모사는 필라델피아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으며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니카라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외교관들과 군인들을 위하여 통역관으로 일하는 기회를 통하여 미국과 가까워졌으며 이로 인하여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 사카사 대롱령이 니카라과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는데 사카사 대통령은 소모사의 삼촌이다. 삼촌이 대통령이 된것은 소모사의 큰 행운이다. 사카사 대통령은 보수 진보 양진영을 혼돈하여 왔다갔다 하면서 무능을 드러냈다.
사카사 대통령은 자기 조카인 소모사가 미국인들과 가까히 지내는 것을 활용 하여 소모사를 방위군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방위군은 그때 헌법이 인정하는 정규군은 아니였다. 하지만 미국이 필요한 어영군이기 때문에 미국이 뒤에서 적극 지원해 줌으로 정규군처럼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소모사는 삼촌 대통령의 배경과 친미적 관계를 적극 활용하여 니카라과 정치
무대의 중심에 떠오르는 인기를 독차지했다.
한편 니카라과에 산디노 라고하는 혼혈 스페인계 백인 양심적 젊은이가 있었다. 이 청년은 부모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재산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미국의 노예가 되어 고통 받아 온 빈민들을 위하여 빈곤에서부터 해방시켜 야 한다는 큰 뜻을 품고 미국 침략자들과 친미정권을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게릴라 전투 부대를 조직하였다.
산디노는 농촌과 탄광을 찾아가 민중들이 당하는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생활도 해 보았다. 산디노는 민중의 호응을 받아 3,000명의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고 교양하여 니카라과에서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친미적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용감 하게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정권에 야욕을 품고 기회를 찿고 있던 소모사는 산디노의 게릴라 활동을 주시하고 있으면서 산디노를 제거하기만 하면 자기의 공로를 인정 받게되고 보다 더 큰 미국의 신임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삼촌이 대통령이며 미국의 신임도 어느정도 받고 있는 소모사는 방위부대의 지휘권까지 가지고 있으니 “내가 못할 일은 없다” 라고 장담했다. 그래서 소모사는 산디노가 어느날 대통령을 면담하고 나오는것을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부하를 시켜 산디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후에 곧 처형하고 시체를 비밀로 암매장했다. 이런 행위는 마치도 박정희 군사독제시대에 중앙정보부가 하던식과 같은 방법이었다.
산디노를 살해하고 산디노의 게릴라 부대 3,000 을 해산 소탕기킨 소모사는 미국의 튼튼한 신임과 막강한 군사력을 보다 더 확고히 장악하여 앞으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소모사는 바로 그때 자기 삼촌인 사카사 대통령의 정권이 점점 쇠퇴해 가고 있는것을 악용하고 미국의 힘을 의존하기 만 하면 삼촌의 정권을 넉넉히 탈취할 수 있다고 판단 했다.
1936년에 사카사 대통령은 경제정책의 실정으로 인하여 민중의 원성이 날로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미국은 보다 더 강력한 친미 정권을 원하기 때문에 사카사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 또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조카가 지휘 하고 있는 군부의 위력은 도움 보다도 오히려 더 큰 압력이 되여 대통령의 사퇴를 재촉했다. 이와같은 대세에 못이겨 사카사 대통령은 할수 없이 권좌에서 그만 사퇴하고 물러났다.
1937년 1월 1일에 소모사는 자기의 삼촌인 사카사 대통령을 보기 좋게 권좌에서 몰아내고 미국과 군부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니카라과의 제17대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소모사는 산디노를 살해한후 게릴라를 소탕했다고 일시적으로 안심을 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디노의 혁명정신은 절대로 소탕 당하지 않았다. 산디노는 여전히 생생한 씨앗으로 살아 남아 민중의 저항세력으로 재생되여 소모사를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소모사를 죽음의 골짜기로 한거름 한거름씩 끌고 가고 있었다.
산디노는 죽었지만 산디노의 혁명정신을 이어 받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1961년에 니카라과에서 창설 되였다. 이 조직은 민중속에 연결되고 확장되여 소모사정권 32년동안 줄곳 거센 항쟁을 계속했다.
소모사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저항투쟁을 무조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으로 규정했다.
소모사는 산디노 저항세력을 냉전 이데올로기 분파로 규정해 놓고 산디니스타의 애국적 저항 운동을 무섭게 탄압했다.
미국 CIA 은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소모사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지원했다. 하지만 소모사 독재정권은 1979년 7월17일에 32년 동안의 극악한 독재를 긑내고 권좌에서 쫓겨 나고 말았다. 미국의 CIA 도 산디노 저항세력의 위세를 막을 수 없었고 점점 기우러져가는 소모사의 몰락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소모사는 1937년 1월1일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1979년7월17일에 권좌에서 쫏겨 났는데 42년 동안 니카라과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서운 독재를 했다.
소모사는 미국 마이아미로 막대한 달러 뭉치를 가지고 도망 했다가 그 후에 다시 파라과이로 가서 숨어서 피신생활을 하다가 1980년에 피살되었다.
다음은 소모사가 미국의 CIA 의 보호아래 42년동안 독재하면서 저지른 살인과 탈취와 인권 탄압에 대한 양심적인 Catholic 신부와 수녀들의 생생한 증언과 또한 국제인권운동가들이 경험한 기록들을 간추려서 몇가지를 소개한다.
Catholic 교회는 소모사와 미국의 남미 침략정책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극소수의 양심적인 Catholic 수녀들과 약간의 성직자들이 교회의 침묵을 깨고 불의에 항거 했다.
하지만 그들의 항거는 현장에서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과 함께 아파하고 같이 고민하는데 큰 뜻이 있었을뿐 미국의 침략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독재자를 타도하고 축출하는 투쟁에 있어서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한편 교권적 Catholic 교회는 이 양심적인 수녀들과 성직자들의 행동을 비난 했다.
60, 70년대에 니카라과에서 비밀로 나온 증언들은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오늘도 외세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제2의 소모사가 존재하고 있으며 고난 당하는 민중들의 증언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다.
다음은 니카라과에서 1960년, 1970년대의 소모사에 대한 증언중 몇개를 소개한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사실상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 자본주의가 공적 제1호로 라틴아메리카에 등장했다. 특히 억압적인 군정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소모사 정권 아래 세워진 총살대를 비난한 캐톨릭 신부들은 투옥되거나 추방의 위협을 항상 받았으며 그 중 버트란드 신부는 추방 당했다. 철학교수 페트난도는 1976년에 소모사 정권에 의하여 피살된 224명에 대하여 미 하원에서 증언한 뒤 추방 되었다. 소모사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면 “거세한 돼지” 들이 되고 만다.
1976년2월 한 증인의 말이다. “소모사 국민방위군들은 명단을 가지고 동리마다 옮겨 다니 면서 남자들을 끌어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하고 그리고 몰살을 당한후 총살을 당한 사람들의 토지는 방위군 총사령관의 토지가 되었다.
소모사의 방위군 4분의 3에 해당되는 5천600명이 미국에서 특수 훈련을 받고 훈련받은 군인들은 미국의 훈장을 받았다. 수없이 많은 방위군의 학살은 소, 돼지,토지,여자들의 전리품을 탐하는것 때문에 자행된다. 산디니스타의 협력자라고 누군가가 고발을 하기만하면 입증할 증거없이 그냥 수십명 수백명이 총살을 당했다.
26개의 교회들이 군 막사, 고문 장소 그리고 농민 부녀자들의 강간 장소로 이용되었다.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는 모두 구타와 고문을 당했는데 그중 한사럄은 몇일 동안이나 매달아 놓아 식물인간이 되었다.
60년대, 70년대 내내 소모사 가문은 미국의회 원조청문회에서 카스트로가 지원하는 산디니스타 게릴라를 막기위하여 원조가 필요하다고 몇십년 동안 거짓 증언을 했는데 원조는 소모사 가문과 군부의 호화를 위해서 전부 사용되었다.
1979년 7월 19일 소모사가 축출되고 미국으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42년 독재를 청산하는 값은 대단했다. 소요로 인한 사망자 50,000 이며 외국으로 도망간 소모사 추종자는 1,500,000 이였다
3.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IMAGE##> 1934년에 소모사는 음모를 꾸며서 산디노를 살해하고 암매장 했다. 그리고 소모사는 1937년에 권력을 과시하면서 니카라과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피살 당한 산디노는 멸망하지 않고 다시 부활하였다. 1961년에 산디노의 정신을 이어 받은 진보적 구릅들이 연합하여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을 결성하였다.
산디노는 혁명의 씨앗을 뿌려만 놓고 그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소모사의 잔인한 칼에 희생되여 떠나 갔다. 산디노가 죽은 후에 그의 혁명과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의 후배들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니카라과 민중속에서와 삶의 현장에서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산디니스타 전사들이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후 놀라운 활약들을 많이 했는데 1974년에는 소모사 대통령의 가까운 친적들을 대거 납치하여 몸값으로 1백만 달러를 받아 내는 쾌재를 과시 하기도 했다.
그후부터 산디니스타 전사들은 소모사 독재정권 타도와 사회주의 개혁운동을 통한 민족해방을 목표로하여 민중들에게 접근하면서 점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와같은 산디노 전사들의 활동은 소모사 전권에게 큰 위협이며 골치덩이어리 이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남미의 다른 나라들의 민족해방 운동단체들과 연대를 가지게
됨으로 미국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산디니스타 전사들의 저항운동과 그들의 위력이 미국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니카라과에게 제공하는 정상 원조를 삭감하면서 경고했다. 만일 소모사가 산디니스타와 대화를 하지않고 인권개선을 하지 않으면 원조를 아주 끊겠다 라고 카터 대통령은 소모사에게 경고까지 했다.
하지만 소모사는 미국의 공화당 강경파를 의지하고 카터 대통령 에게는 거짓말을 해 가면서 산디니스타에게 점점 더 극심한 탄압을 계속 했다. 소모사 대통령은 언론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방위군을 증가하여 독재정권을 오히려 더 튼튼히 강화했다.
소모사 대통령은 산디니스타 저항운동을 마음속으로 환영하는 순진한 민중들을 무조건 “빨갱이들” 이라고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수십만 양민들을 학살했다. 그 뿐만 아니라 소모사 정권은 방위군에게 초법적 권한을 허용해 주었다. 방위군들이 순진한 민중을 닥치는대로 탄압하며 탈취하면서 학살행위도 자행했으나 소모사 정권은 공산당을 소탕하는것 이니 아무 문제될것 없다고 오히려 방위군을 두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42년을 계속한 독재로 인하여 민중들의 가슴속에 쌓이고 쌓인 원한은 1979년에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 소모사 정권은 드디어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소모사 정권을 호위하던 방위군은 해체되었다. 해체된 방위군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카리브 나라들로 도피하거나 국내에 숨어 있다가 자수했다.
소모사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80년에 국가재건을 추진할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는 소모사 독재정권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방위군을 해산한후에 새로운 군부를 창설했다.
임시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4년후에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다니엘 오르테가를 대통령으로 선출 했다. 그리하여 1985년 1월10일에 오르테가 대롱령 역사상 처음으로 민선 대통령이 되여 취임을 했다.
4. 미국이 지원하는 콘트라스 (Contras) 반군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지도자인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대통령 이 되여 취임을 한것은 미국 공화당에게는 하나의 큰 치욕적인 사건이 되었다.
미국은 소모사 독재정권이 몰락했지만 그후에도 계속하여 친미적 세력이 니카라과를 계속 지배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보수 적 전략가들은 비밀로 묘안을 연구 해 냈다. 그 묘안은 미국중앙정보부(CIA) 를 시켜서 “콘트라스 반군 유격대”를 1980년에 만들어 냈다.
소모사 친미독재정권이 1979년에 몰락하자 미국은 바로 그 다음 해인 1980년에 벌서 극비리에 콘트라스를 창설하여 새로 등장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세력을 붕괴하기 위한 공작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앞으로 예견되는 니카라과의 민주화를 파괴할 게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은 소모사 독재정권 하에서 소모사에게 충성하던 친미성향의 군인들을 재등용하여 비밀리에 혼두라스등 카리브 나라들을 이용하여 그곳에서 훈련을 시켰다. 미국 정보국 요원들은 콘트라스를 창설하고 막대한 돈으로 지원하면서 운영했다. 미국은 니카라과 뿐만 아니라 카리브 5개 나라들이 혹시 반미나라가 될가 염려하여 좌경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니과라과와 연결하여 카리브 전 지역에서 콘드라스가 활동하도록 게릴라 조직을 확대 운영했다.
오르테가 대통령이 취임함으로 미국 공화당이 주도하고 있는 국회는 눈가림 으로 콘트라스 에 대한 지원을 우선 일단 중단하기로 결의 했다. 지원을 중단하는 이유는 콘트라스 의 존재를 숨기기위한 임시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레건 미국 대통령은 니카라과에 대한 원조는 물론이고 모는 교역과 교류를 즉각 봉쇄하고 중단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오르테가 대통령의 등장으로 인하여 미국의 안보에 큰 위험이 있다는 핑게로 니카라과를 봉쇄했던 것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이런 긴급한 상황하에서 불가피하게 미국과 내통하고 있는 모든 우익 반동들에 대하여 강경책을 쓸수 밖에 없었다. 오르테가 대통령이 미국에 대하여 강경책을 쓴다고 친미적 우익 언론들과 Catholic 교회는 일제히 오르테가 대통령을 향하여 비난의 포문을 얼기 시작 했다.
몇일 후에 공화당이 주도하는 미국의 의회는 임시로 중단했던 콘트라스에 대한 지원을 다시 재개하도록 가결 하고 즉시 백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결재했다. 레건 대통령은 콘트라스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일일히 민주당 의원들의 승인을 받는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고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레건 대통령은 콘트라스를 계속하여 지원할 수 있는 비밀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 방법은 이란에 무기를 몰래 판매하고 판매에서 얻은 돈으로 콘트라스 를 국회 몰래 계속 지원 할것을 게획 하는 방법 이였다.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여 막대한 자금으로 콘트라스를 계속 지원했다.
하지만 1986년에 레건 대통령이 그동안 이란에게 몰래 비밀로 무기를 판매한 사건 (Iran-Contras) 이 야당 국회 의원들에 의하여 폭로 되었다. 이 폭로된 비밀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국과 전세계에 초미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란에게 비밀로 무기를 판매 한것은 중동정책의 모순이다. 그 돈으로 콘트라스를 몰래 지원 한것은 남미정책의 모순이다. 민주당은 레건 대통령을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비밀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한 일등공신은 현역 군인 올리버 노스 소령 이였다.
노스 소령은 국회 청문회 증언에서 레건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충성했을 뿐 죄가 없다 라고 뻔뻔스러운 답변을 했다. 노스 소령은 그후에 레건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으로 승격 되었다.
이란 - 콘트라스 사건이 폭로된 이후부터 콘트라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중단 되었다. 지원이 끊어지니 콘트라스는 약해지고 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몇십년 동안 계속된 콘트라스와의 냉전 대결의 내전을 할수만 있으면 속히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의 회복을 간절히 원했다.
그리하여 1988년에 오르테가 대통령은 용단을 내어 해산의 위기에 처해 있
는 콘트라스 반군 지도자와 정전 – 화해 협정 (Esquipulas)을 제안하고 협정을 맺었다.
협정을 맺을 당시 콘트라스 반군의 병력은 10,000 명 이였다. 반군의 가족들은 미국이나 카리브 지역에 거주하는데 수는 140,000명 이였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콘트라스 단원 전원과 가족들에게 사면 복권을 허락하여 시민사회로 복귀시켰다. 민족 대단결을 위한 역사적으로 기리 남을 결단이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냉전의 뿌리를 깨끗이 청산하려는 용단과 민족화해를 열망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세계는 오르테가 대통령의 용단을 민족화해와 평화를 위한 위대한 용단이라고 격찬했다.
하지만 오르테가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용단에 치명적 재난과 시련이 닥처왔다.
첫째는 자연에서 온 재난이며 둘째는 미국에서 온 재난이였다.
1988년과 89년에 계속된 폭우와 태풍으로 500명이 죽고 230,000 이 집을 잃었다. 자연의 재난으로 인한 재산 피해는 1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또 극심한 한재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곡물 생산이 극감되였다. 온 나라가 온통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과 기근에 빠졌다.
이러한 극악한 상황하에서 오르테가 대통령은 여당이던 야당이던 정치적 투쟁이나 이념적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고 탈피하여 재난을 극복하자라고 호소했다. 이 길만이 재난에서 소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1990년 총선을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할것을 선포 했다. 이것은 대통령의 애국적 용단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동시에 또한 너무나 순진한 결단으로 평가받고도 있다.
그랬더니 15개의 정당에서 15명의 후보자들이 출마하여 혼란이 벌어젔다. 이와같은 혼란속에서 역시 미국의 에치 다불유 부쉬(H.W. Bush=현 미국 대통령 아버지)대통령은 여전히 니카라과를 지배하고 싶은 욕심을 포기하지 않고 흉계를 꾸며 오르테가 대통령의 결단을 악용 했다. 에치 부쉬 대통령은 여러가지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여 방해 공작을 하면서 오르테가를 낙선시키기 위하여 상대방 후보자에게 9백만 달러를 지원 하기도 했다.
투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미국이 노골적으로 지원한 후보가 55% 대 41%로 오르테가 대통령을 낙선시켰다. 부쉬가 지원하는 돈의 힘이 극심한 가난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재난으로 인하여 지치고 지친 유권자들의 표를 유혹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너무나도 극심한 빈곤속에서 역시 돈의 힘이 일정 효력을 발휘한 셈인가? 어쨌던 오르테가 대통령은 다음 16년을 또 참고 기다리면서 미국의 끈질긴 침략에 맞서 투쟁을 계속 해야만 했다.
5. 니카라과 대선 미국의 패배 – 오르테가 재선 승리
<##IMAGE##> 진실과 정의, 인격과 존엄, 민중의 항쟁이 지속되는 한 민중은 반드시 이기고 승리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유일한 관심이다.
산디니스타 좌파혁명의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2007년 1월10일에 니카라과 대통령에 재선되어 역사적인 취임식을 가졌다. 오르테가 대텅령은 1979에 미국이 지원하는 42년의 소모사 독재정권을 몰아 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또 이번에는 16년의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친미정권을 몰아 내고 재선에 승리
하였다. 이번 승리는 진실과 정의의 승리이며 민중의 항쟁이 쟁취한 승리이다.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직후에 니카라과의 신임 대통령이 제일 처음으로 행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차베스 대통령과 모랄레스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문건에 서명을 하는 것이였다.
그 문건은 “볼리바르 혁명정신에 기초한 중남미 다섯 나라들이 연합, 단결, 협조를 강화하여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침략을 봉쇄한다” 라고 하는 알바(ALBA) 의 선언문 이였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둘러 싼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의 모든 나라들이 일치 단합하여 지역안보와 발전을 성취할 뿐만 아니라 카리브 지역의 주도권을 전세계에 밝혀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카스틸라 교육부 장관을 새로 임명했다. 카스틸라 교육부 장관은 니카라과의 잘못된 교육제도를 당장 뜯어 고치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친미 신자유주의 정권하에서 니카라과의 교육제도는 사립학교 제도이며 20%에 해당하는 부유층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교육제도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부유층 만을 위한 잘못된 교육제도를 즉시 개정하여 80%에 해당하는 빈곤층 민중들을 위한 교육제도로 개혁할 것을 발표했다. 이것은 마치도 한국의 한나라당이 부유층을 위해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기 위해 날뛰는 것에 민중들이 반대하고 있는 양상과 유사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놀라운것은 1월13일에 이란의 아마디네자 대통령이 국빈으로 니카라과를 방문한 것이다. 1990년부터 단절되였던 국교를 다시 회복하여 정상화하게 된것을 발표했다. 그리고 두 정상은 양국 상호 친교각서에 서명했다. 이 각서는 앞으로 이란과 니카라과는 경제, 에너지, 상업, 재정, 기술 및 기간산업등에 관한 모든 경험들을 서로 교환할 것을 약속하는 각서이다.
이란 대통령은 나콰라과의 수도 마나구아(Manaqua)의 빈민촌을 직접 방문하여 가옥신축과 의료지원 을 약속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이란과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단결하고 연합하여 싸울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신은 우리 모두를 도우신다.” 두 정상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당당히 교류를 선언했다.
총인구 547만의 니카라과는 80% 에 해당하는 절대 다수가 하루 2달러($2) 이하로 겨우 살아가는 극히 빈곤한 나라이다.
친미 성향의 전직 대통령들이 세 차례나 정권을 교체하면서 친미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고집했는데 그 결과는 서반구에서 아이티 다음으로 두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된것 뿐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이 16년 후에 다시 집권을 하게되여 돌아오기는 했지만 전임 대통령들이 넘겨준 나라 사정은 소모사 독재정권 이래 최악의 상태이다.
하지만 오르테가 대통령은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니카라과에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면서 알바(ALBA)의 회원국인 베네수엘라, 쿠바, 볼리비아, 에과도르, 니카라과등 나라들이 상호 우호적 조건으로 지원하고 교역하게 됨으로 니카라과는 능히 빠른 기간안에 사정이 변하고 급성장 하게 될것으로 보인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벌써 미국에게 과거의 불공정한 자유무역 으로 인하여 발생한 이윤에 대하여 ”차감계산” (Off-set) 을 하여 부당한 이익금을 환불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청했다. 이 요청의 뜻은 과거사는 물론 환불로 시정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모순을 다시는 용납 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 제시하는 요청인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니카라과의 채무액인 3천1백 80만달러($31.8 million)를 탕감해 주었을 뿌만아니라 계속해서 에너지, 의료, 기간산업, 식량등을 원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석유 저장시설을 건설하여 15만 배럴(150,000 barrels)을 저장할 수 있도록 도와 줄것도 약속했다.
만일 미국이 오만하게 니카라과에게 원조를 무기로 삼고 위협을 한다면 니카라과는 이제는 동맹국이 된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와 같은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으면서 오히려 반미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될 것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거듭하여 역설하고 있다. "이견을 뒤로 하고 민중과 빈자들을 우선으로 할 새로운 정치문화를 수립할 것이다."라고.
니카라과의 가난을 일소 하도록 투자가들에게 확신감을 심어 줄것이다. 하지만 투자의 과감한 확대가 가슴에서 분출되는 사회주의 정신에 역행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끝]
(2007년 3월 5일)
뉴욕, 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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