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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미국의 중동정책과 후세인의 처형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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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7-01-09 00:00 조회19,1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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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국은 야누스

한국에서 전두환 정권이 한창 이던 시절에 영국의 한 학자는 묘한 말을 했다. “한국에서는 예수도 석가무니도 불타도 모두 다 빨갱이 이다. 전두환을 반대 하거나 비위에 맞지 않으면 모두 다 빨갱이가 된다”

<##IMAGE##> 오늘 중동에서 미국을 반대 하거나 미국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모두 다 테로리스트가 된다. 도대체 오늘 중동에서 테로리스트가 않인 사람 몇이나 있겠는가? 미국에 대하여 어떤 기대나 환상을 가지는 것은 하나의 논센스 이다.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미국의 이익에 근거 해 있다. 미국이 어떤 정권을 지지하며 또 어느 독재자를 후원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임으로 항상 변화가 계속되고 있다.

그럼으로 미국의 중동정책은 그 속에 고정성과 유동성의 양면을 지니고 있는 야누스 이다. 미국이 남미에서 한 짓이나 한국에서 하고 있는 짓이나 또 지금 중동에서 하고 있는 짓들은 모두 가 다 꼭 같은 야누스 이다.

미국은 처음에는 그럴듯 하게 양당 체제를 만들어 놓고 그 중에서 한 당을 골라 집권당이 되게 한다. 집권당과 야당은 서로 물고 찢으 면서 싸우게 한다. 혹은 그렇치 않이면 두 정당이 서로 야합해서 나누어 먹게 하여 차츰차츰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일어 나게 한다. 이렇게 되면 집궝당은 자연히 독재를 하지 ㅤㅎㅏㄶ을 수 없게되고 그때 미국은 뒤에서 그 독재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 해 준다.

그렇다가 국민 대중이 독재정권에 대하여 불만과 불평이 쌓이고 쌓이게 되면 그때는 자연히 데모가 일어나게 된다. 데모로 인하여 독재정권이 위태롭게 되면 미국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지 않고 뒤에서 군대를 내 세워 준비된 “쿠테타” 를 이르키게 한다. 성공한 쿠테타는 최소 10년은 끄떡 없이 친미정권을 게속 유지할 수 있다. 쿠테타를 이르킨 군인들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비밀로 길러 낸 군인들인데 이들은 우익적인 민주주의와 자유평화를 부르지즈면서 무자비하게 동족과 민중을 탄압하고 때로는 학살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미국의 세계 정책은 그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든 지를 막론하고 항상 게속되며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익이 보존 되고 미국의 안전이 지켜지는 조건 하에서는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자유와 평화를 역설 한다. 하지만 만일 미국의 유익이 조곰이라도 흔들리거나 위태롭게 보이면 그 때 미국은 즉시 정권을 교체하여 군인과 독재 자를 내세워 안전한 친미 정권을 다시 세운다. 미국은 언제던지 두 얼굴을 가지고 변신하는 야누스 이다. 미국은 속에 흑과백을 절반씩 가지고 있는 야누스 이다.

사우디는 중동의 석유 강국으로 왕(King)이 왕권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 왕족들이 정부조직 안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모두 다 독차지 하고 있다. 석유강국으로 돈이 무진장 많이 있는 부자 나라 인데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군대가 거의 없는 나라이다.
어찌하여? 그 이유는 군대가 없어도 미국이 왕과 왕권을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뒤에서 방패가 되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일반 백성들은 왕권을 페지하고 자유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수 십년 동안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리고 자체의 군대를 가지고 자주적으로 국방을 해야 한다고 수 십년 동안 외치고 있다. 하지만 사우디의 왕과 귀족들은 끄떡도 하지 않고 왕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이 뒤에서 왕권을 튼튼히 보호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왕족들은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해 마다 받으면서 백악관과 텍사스에 있는 부시의 별장에서 친형제 처럼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최상의 영광을 누린다.
사우디 왕가는 자체의 군대를 가지는것 보다는 차라리 미국의 대통령들과 친형제 처럼 지내 면서 왕권을 유지하는 편이 보다 더 유리하고 안전 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사실에 있어서 미국은 사우디가 군대를 가지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는다. 만일 사우디가 자체의 군대를 가지게 되면 그 때는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게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또한 사우디 왕가도 마찬 가지로 만일 자체의 군대를 가지게 되면 군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쿠테타를 이르켜서 왕위와 왕권을 페지하려고 할 것 이라는 것을 왕족 들은 불을 보듯 뻔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왕가의 요구와 미국의 요구가 서로서로 잘 맞아 떨어 진 것이다.

미국은 사우디의 왕과 왕정을 손 안에 꽉 쥐고 중동의 석유를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있는 것 이다.. 현재 중동에서 미국의 보호하에서 왕권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사우디 외에 욜단등 몇 나라가 더 있으며 또 애급의 무바락 대통령도 역시 미국을 등에 업고 미국을 의지 함으로 독재 정권을 오래 동안 유지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한국에서 태권도 훈련을 잘 받은 제대군인들을 수 만명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의 왕국들에게 소개하여 취업을 하도록 하느데 그들은 그 나라에서 비밀로 군대의 역활을 한다. 미국은 미국군이 직접 하게뒤면 오히려 반미 감정만을 유발 시킬 위험이 있기때문에 그런것을 숨기기 위하여 한국의 제대군인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중동에서 용병의 역활을 하도록 하는것 이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 때부터 시작한 오래 된 이야기 이다.
중동을 놓치지 않고 끝 까지 석유의 이권을 장악 하려는 미국의 야누스 작전은 질기고도 끝이 없다.


2.사담 후세인은 누구인가?


사담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에 바그다드 북쪽의 사막지대에 있는 한 적은 동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 났다. 조실 부모한 그는 난폭한 의붓아버지가 때리는 회조리로 매를 맞으면서 자랐다.

사담 후세인은 18세 때 바그다드에 상경하여 학생운둥에 가담 했다. 그는 그때 부터 아랍 민족주의 운둥에 심취 했다. 1956년에 제2차 중동전쟁이 터질 때 그는 이락의 친영국 왕정을 반대하는 폭동에 참가 하면서 바드당에 가입 했다. 그때 바드당은 친영국 왕정을 반대하는 아랍 민족주의 자들이 함께 뭉처서 투쟁하는 정당 이었다.

1958년에 카심장군이 주도하는 군부 쿠테타가 성공 하여 친영 왕정을 무너 뜨렸다. 하지만 쿠테타에 성공하여 친 영국 왕정을 무너뜨린 카심장군은 웬일인지 이락의 애국적인 민족주의 자들과 바드당을 탄압 했다.
그 이유는 카심장군은 바드당과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좌경으로 기울어 진 좌파 인사들이 많이 있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였다. 카심장군은 친영 왕정을 반대 했을 뿐만 않이라 또한 이락의 좌경 세력도 반대 했던 것이다.

1959년에 사담 후세인은 카심장군을 암살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실패하고 다리에 부상만 당하고 말았다. 사담 훗세이은 도피하여 시리아와 에집트에서 3년 동안 도피 생활을 했다. 1963년 2월8일에 드당이 또 다시 쿠테타를 이르켜서 이번에는 카심장군의 정권을 무너 뜨렸다.

사담 후세인은 에집트에서 도피 생활을 끝내고 이락에 돌아와 바드당에서 맹열히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는 벌서 미국의 CIA 가 바드당에 침투하여 좌익과 우익으로 둘로 갈라 놓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소수의 우익 분자 들에게 막대한 비밀 공작금을 지원 해 주면서 매수 공작을 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좌익의 뿌리를 뽑는 운동을 전개 했다. 이 때 바드당 안에서 좌익으로 몰려 학살을 당한 의사, 학자, 교사, 변호사의 수는 수백에 이르렀다.

놀라운 사실은 이와같은 미국의 CIA 음모와 결탁하여 맹열히 활약한 자가 바로 사담 후세인 이였다는 사실이다. 사담 후세인은 이 때 좌익 분자들을 색출 하고 학살 하는데 큰 공을 세워 미국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받게 되였다.

1968년 7월30일에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사촌형제와 함께 권좌에 올라 이락의 2인자의 권좌에 높이 올랐다.

그리고 1976년 9월22일에 사담 후세인은 드디어 이락의 대통령이 되였다.
사담 후세인이 이락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그 배후에는 분명히 미국의 CIA가 비밀 공작을 하면서 그를 뒤에서 전적으로 후원 했기 때문 이였다.
사담 후세인은 이락의 대통령이 된 후에 아랍 세계에서 큰 지도자로 부상했다.

한편 그 때 이란에서는 호메인이 이슬람혁명을 성공시킴으로서 이슬람 시아파 세력을 중동에 퍼뜨리면서 중동을 지배 하려 했다. 이것을 크게 염려. 한 것은 바로 미국 이였다. 미국은 이란과 이락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싸우기를 바랬다.

미국은 두 나라가 “수니파” 니 “시아파” 니 하면서 서로 종파적 주도권 을 잡으려고 피나는 싸움을 하도록 뒤에 숨어서 사담 후세인을 보루로 이용 했던 것이다.
1980년 부터 1988년 까지 장장 8년 동안 두 나라는 참혹한 전쟁을 치루었는데 미국은 사담 후세인에게 생화학무기를 제공 해 줄 뿐만 아니라 이란의 모든 비밀 정보를 제공 해 주면서 사담 후세인을 적극 지원 해 주었다.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이 그 때 는 미국 대통령의 특사의 자격으로 이락을 방문 하였다. 그는 사담 훗세인과 모든 협력 방안을 논의 하면서 쿠르드족을 멸망 시키기 위하여 화학무기를 사용 하는 것도 시인 해 주었다. 그리고 이란과 싸우는데 있어서 필요한 기타 모든 군비를 더 많이 제공 해 줄것을 약속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국은 또 이란과 시리아 두 나라가 서로 싸움을 하도록 사담 후세인을 적극 활용 했다. 럼즈펠드는 말하기를 “미국과 이락 은 중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의 이익을 같이 나누기 위해서 서로 손을 잡아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사담 후세인과 굳게 악수를 했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 8년 동안 전쟁을 하면서 이란이 시아파 세력을 아랍 나라들 에게 퍼뜨리는 것을것 저지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하여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아 경제성장을 이루 었으며 중동이 근대화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꿈 꾸 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은 결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의 기만술에 너머가 이용만 당했을 뿐 그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사담 후세인은 1995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100%에 가까운 앞도적 지지로 정권을 유지 했고 또 100만의 군사력을 가지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어깨를 맞대는 강국이 된 것을 과시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괴롭게 구는 쿠웨이트를 침공 하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인하여 사담 훗세인은 미국을 배경삼아 그동안 탄탄히 닦아 놓은 그 모든 기반이 와르르 무너지는 비운에 처하기 시작 했다.

특히 미국의 강경파가 득세한 조지 부시 대통령의 행정부는 이제는 사담 후세인을 더 이상 이용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ㅤㄷㅚㅆ다.
그리하여 결국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9.11 사건을 교묘히 이용하고 핑게 삼아 이락을 국제적 테로의 본거지로 지적하고, 사담 후세인을 중동의 평화 를 파괴하는 위험한 존재인 “ 악의 축” 이라고 지명 하면서 이락을 침공 했다.
미국은 오레 동안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다가 9.11을 이용하여 사담 후세인을 용도 페기 처분을 한 것 이다.

New York City, Riverside Church의 담임목사 였던 The Rev. Dr. Coffin은 중동에서 미국이 전쟁을 시작 한 그 주간에 주일예배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만일 저 중동에서 Orange가 생산 된다면 미국이 무었하려 그 먼 곳 까지 찾아 가서 전쟁을 하겠는가?”
Coffin목사는 미국의 야누스적 위선 행위를 적라나하게 비판 했다.


3.사담 후세인이 저지른 죄과


그러면 사담 후세인이 1976년에 대통령의 권좌에 오른 후부터 축출을 당할 때 까지 30년의 긴긴 세월 동안에 그가 저지른 죄과는 과연 무엇이며 그에 대한 재판은 어떻게 진행 되였던가?
사담 후세인을 민족적 량심으로나 인륜과 도덕적 판단으로도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 했다. 하지만 일일히 그 죄과를 다 기록 하는 것이 이 글의 뜻은 않이다. 다만 년대 순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대략 살펴 보기로 한다.

<##IMAGE##> 첫째:1968년에 사담 후세인은 민족주의를 표방 하는 바드당의 열성 당원 이였다. 하지만 그는 미국 CIA에 매수되여 바드당의 좌경화를 막는 다는 구실로 무고한 학자와 지식인, 의사와 변호사 그리고 교사와 종교인들을 색출 하여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살해 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이 신임하는 정치적 위치를 확보 했다. 개인의 출세를 위하여 자기의 양심을 속이고 민족과 나라를 배신 했다.

둘째:1979년7월16일에 사담 후세인은 이락의 대통령이 된후에 자기를 반대하는 반대파를 무자비 하게 숙청 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은 1980년9월22일에 이웃 나라 이란을 향하여 선전 포고를 선포 했다.

이락과 이란의 전쟁은 물론 중동의 종파적 주도권 싸움 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실 내용은 미국이 중동의 석유를 노리면서 뒤에서 사담을 앞세운 지역 분쟁이며 침략 전쟁 이였다 장장 8년을 게속한 전쟁 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수 백만에 이르 렀다. .
누구를 위해 종은 울렸나?
사담 후세인은 처형 ㅤㄷㅚㅆ지만 아랍인들은 아직도 왼전한 대답이 없는 듯 하다.

세째:1982년7월8일에 Dujail 마을 시아파 주민들이 사담 후세인 암살 을 시도 했다는 이유로 Dujail 마을 주민 148명을 무참히 학살 했다. 이 학살 사건은 종파 분쟁 으로 인한 동족 간의 학살 사건일 뿐이였으며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전혀 없었다고 미국은 극구 변명 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 학살 사건에 미국이 직접 개입 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 사실 하나 만을 크게 과시 하면서 사담 후세인 재판에 있어서 이 학살 사건을 직접 결부시켜 사형 집행의 정당성을 삼았다.. 미국은 이중성을 또 들어 냈다.

네째: 1988년3월28일에 사담 후세인은 악명 높은 쿠루드족 종족말살 정책으로 화ㅤㅎㅑㄱ무기를 사용하여 Halabja주민 5,000명의 양민을 학살 했다.
이 화학부기는 영국과 미국이 사담 후세인에게 비밀로 제공 했고 한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1983년부터 화학무기를 비밀리로 사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결국 사건이 터저서 여론이 확대되니까 그때 미국은 솜방망이를 들고 사담 후세인에게 경고를 내렸다.

다섯째: 1990년8월2알에 이락은 쿠웨이트를 침공 했다. 침공의 이유는 쿠웨이트가 이락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독자적으로 미국과 다른 서방 나라들과 교역을 한다는 것 때문 이였다.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자기 나라의 일부로 여겼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의 행동을 그냥 놔 두지 않고 호되게 응징하여 10개월 후에 이락을 쿠웨이트에서 쫓아 냈다. 미극과 이락은 사이가 점점 더 멀어 ㅤㅈㅓㅆ다.

여섯째: 사담 후세인의 살인 행각은 30년 동안 끝이 없이 줄곧 게속 되였는데 월남전에서 죽은 사람의 수 와 한국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수와 거이 같은 많은 사람들이 30년의 독재 치하에서 죽은 것 이다.
.
1) 사담을 반대하는 정적들을 학살
2) 수니파를 반대 하는 시아파 사람들을 학살
3) 8년전쟁동안 이란과 이락에서 죽음을 당한 양민들
4) 이락의 쿠르드 종족들 을 살해
5) 쿠웨이트 전쟁으로 죽음을 당한 양민들
5) 수 없이 많은 이락의 병사들을 전쟁 터로 내보내 전사
6) 오늘 현재 3년 동안 이락에서 죽은 자들과 부상자들

언론들은 사담 후세인을 위대한 몬스터 라고 한다. 그는 사실 괴물 중의 괴물 이였다.. 미국은 이 위대한 괴물을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할 때는 잘 이용 하다가 필요가 없게 되면 헌 신짝 처럼 버리고 만다.
사담 훗세인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징벌 만큼이나 미국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 이다.
미국은 바그다드에 미사일 세레를 마구 퍼 부었지만 오늘 전세게는 미국을 향하여 증오와 비난의 미사일을 모두 날리고 있다. 이락은 지금 전 국토가 폭격과 내전으로 안전장치는 완전히 붕괴 되여 최고의 위험 지대로 화하고 말었다.
미국이 아무 준비도 없이 “판도라의 상자” 를 열어 놓은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수렁에 빠진 부시가 발려 놓은 무모한 전쟁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담 후세인이 무모한 도박으로 끌어 들인 전쟁과 그리고 악의 축을 응징 한다고 경솔 하게 처 들어간 부시의 통기호테 식 침공은 과연 무었을 위한 전쟁 인지 대답이 없다. 다만 미국의 역사상 처음 보는 부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30% 이하로 딸어 ㅤㅈㅓㅆ다는 사실 만이 말 없이 미국의 고뇌를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3년 동안의 전쟁에서 이락 민간인의 희생자 가 수백만 에 이르고 미군의 희생자도 3천명이 초과 하고 있는 데도 문제 해결의 방법을 오직 군사적 대결으로 만 해결 하려는 미국의 야만성 만을 다시 보게 된다.


4.사담 후세인 재판과 처형의 정치적 의혹


미국은 사실 사담 후세인의 생포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생포하면 지난 수 십년 동안 그에게 군사지원과 경제원조를 해 준 미국의 비밀과 치부가 법정 증언에서 적나나하게 폭포 될것을 두려워 ㅤㅎㅒ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비밀 CIA 요원을 동원 하여 사담 후세인을 사살 하려고 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결국 체포할 수 박에 없었다.

<##IMAGE##> 사담 후세인의 재판과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들어 난 의혹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추려 보아야 하겠다.

대량 살상무기(WMD)를 구실 삼아 미국이 이락을 침공 했는데 실제 사담 후세인 재판 과정에서는 WMD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국제재판에 회부 하는 것을 극구 반대 하는 이유는 사담 후세인의 입에서 WMD에 대한 증언이 나올 것을 무서워 했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의 재판에서 마땅히 1988년의 “안팔작전”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쿠르두족 10만을 살해한 죄과에 대하여 사건의 진상이 밝혀 저야 만 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일언반구의 말이 없었다. 왜? 그이유는 사담이 사용한 그 화학무기를 영국과 미국이 비밀로 제공 했기 때문 이였다.

그러면 왜 1982년에 두자일 마을에서 148명의 시아파 사람들을 살해한 그 작은 사건 만을 크게 확대해서 사담 후세인을 사형을 할 만한 큰 죄목으로 삼 았나?
그 이유는 미국은 사담 후세인의 사형의 근거를 이락인 들이 저들끼리 싸운 동족 간의 싸움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 내고 미국은 발 뺌을 하려는 고도의 게산이 있기 때문 이였다.

사담 후세인을 왜 하필이면 새 해가 오기 전 12월 30일에 급하게 사형에 처 했나? 그 이유는 원수인 수니파의 종교적인 기념행사가 시작되는 날 인데
바로 이 날에 사형을 집행 함으로서 수니파를 멸시 하면서 정신적 패배감 을
넣어 주기 위함 이었다. 그리고 미국인들 에게는 새 해가 되기 전에 그래도
무었인가 전쟁의 승리를 거두 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미국은 전세계 어느 곳 에서나 미국의 이익에 관련된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법을 적용 하지 않고 오직 미국을 위한 일방통행만을 강요하고 있다. 사담 후세인은 천인 공로할 많은 큰 죄악을 저지르면서 24년 동안 철통통치를 했으니 마땅히 그의 범죄에 해당하는 엄벌을 받는 것 마땅 하다.

하지만 그가 처형을 받는 이유와 처형을 받는 과정이 국제법 상으로 정당하게 밝혀 저야 한다. 이번에 미국이 취한 행보를 보면 서방의 문명 사회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재판의 정신과 재판의 절차를 전혀 ㅤㅊㅓㅈ아 볼 수 없고 오직 강자의 론리로 원수에 대한 보복심만 난무하는 무법적인 재판과 처형 이였다.
세계는 이러한 강자의 론리에 대하여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이락 국민을 독재로부러 해방 시켜주겠다고 하면서 침공을 감행 했지만 무고한 사람들만 죽이고 있다. 미국이 이락을 침공하기위해 내세운 모든 이유와 명분은 거짓으로 백일 하에 드러났고 오직 석유를 위한 반인도적인 폭력 인것으로 밝히 드러 났다.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시라아와 에집트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 지면서
중동 전역으로 반미의 열풍이 퍼저 나아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는 서로 상반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지만 “미국에 죽음을” 이라고 하는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반미의 목청을 높이고 있다.
중동의 패권을 쥐려고 야심을 품었든 사담 후세인은 결국 교수대의 이슬로 살아저 없어지고 말었다.
하지만 세계의 패권을 쥐려고 보다도 더 큰 야심을 품고 있는
미국의 제2의 사담 후세인과 그의 앞날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될것 인가?
끝이 잘 보이지 않는 반미의 악순환과 수렁에 깊이 빠저 들어간 오늘의 미국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끝]

*유태영 목사(77)는 범민련 재미본부 공동의장과 재미동포동부연합회 회장을 역임했고 30년 목회생활을 하며 4권의 책을 발행했다. 지금은 재미통일운동 원로로서 후진들을 지도하고 있다. 유 목사는 금년에도 시집을 발행할 계획이며 시사논문들을 집필할 생각이라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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