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활동가적(?) 패배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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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5-04-18 00:00 조회15,0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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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처음에 운동이라는 걸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을 믿었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 그것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것은 환상적인 생각이었다. 열정적인 사람이 늘상 그렇듯이 미친듯이 “운동” 에 매달렸다. 고등학교까지 내내 통제된 삶을 살다가 내가 주인되는 세상을 만든다니,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교수님들께 당당히 집회가 있기 때문에, 회의가 있기 때문에, 또는 반미의 날이기 때문에 수업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늘 수업보다 숭고한 일에 매달려 살았다.
자신을 “운동권” 또는 “활동가”라고 불렀으며 활동가처럼 말하고-우리 활동가들 특유의 단어들은 또 얼마나 쉽게 배웠는지 모른다- 활동가처럼 옷을 입고, 활동가처럼 활동했다. 매일 회의다, 집회다, 시위다, 뛰어 다녔으며 방학이 되면 농활 (농촌활동)이니, 기활(기지촌 활동)이니, 공활(공장활동)이니 해서 더 바빠졌다. 고백을 하자면, 1991년 대규모 집회가 전국에서 일어났을 때, 하루에 거의 한 사람씩 독재정권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할 때, 나는 남몰래 열의에 들떴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시위에 참가하고 짭새들에게 쫓겨 도망갈 때도 나는 그 자살한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서 울지 않았다. 이제 세상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 거리에서 “일반인”이 던져주는 음료수나 박카스를 마시며 나는 이미 영웅이었다.
1995년 통일 원년이 지나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내 모든 삶을 투자했고 많은 것을, 그리고 많은 동료들을 잃었지만,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전교조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고, 기지촌은 여전히 건재하건만 지쳐 나가 떨어진 것은 나였고, 통일을 얘기하자 어머니께서는 내가 빨갱이냐고 물어보셨다. 학점 2.5의 운동권 법학도를 받아주는 곳은 사회 아무 곳도 없었다. 아주 조그만 학원에서 말도 안되는 월급과 처우를 받으며 내 자신감을 깔아뭉갰던 것은 거기에 항거할 수 없는 내 미약함이 아니라 일이 끝난 주말 저녁 술에 취해 들어와 거울을 통해 봤던 내 얼굴이었다. 화장발과 최신 유행의 머리 스타일, 잘 차려 입은 옷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은 패배주의자의 그것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의자 뺏기 게임에서 끝까지 의자를 차지 하지 못한 사회의 낙오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세상이 바꿨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하지 못하고, 가정폭력이 금지 되었으며,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내가 통일을 원하다고 말해도 아무도 나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이 지금은 없다. 나는 무엇을 놓친 것일까? 역사는 내가 활동가라고 자신을 지칭했을 때나, 패배주의에 빠져있을 때도 발전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나였다. 세상을 바꾸느라고 너무 바빠서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활동가니, 일반인이니 하는 단어자체가 우스워졌다. 나는 활동가이니 특별하고 다른 사람은 일반인이니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내가 내 삶에서 빚진 것은 고귀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내 삶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깨어있으려고 노력할 것, 항상 의문할 것, 그리고 내 삶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것... 누구나 한번쯤은 가슴속에 품었던 생각이다. 활동가들은 다른 뭔가를 더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쓰잘데기 없는 짓이다. 대학가 비밀스러운 서점의 골방에서 남몰래 읽었던 막시즘,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을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다만 사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인”이라고 지칭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깟 조금 운동한 “경력”을 가지고 나는 “활동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한 후로 얼마나 충일한 삶을 살았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을 믿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론 때문이 아니다. 내 F은 삶의 경험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미국은 거대한 국가이고, 한국은 힘이 없으니 누가 대통령이 되건 통일에는 상관없다는 패배주의는 더 이상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 짧은 10년의 세월에도 많은 것이 바꿨는데, 앞으로 또 얼마나 좋은 세상이 올지 벌써 흥분이 된다. 그 중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내 조국의 하나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일원으로서의 내 모습인 것이다.
*필자는 미국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다.
자신을 “운동권” 또는 “활동가”라고 불렀으며 활동가처럼 말하고-우리 활동가들 특유의 단어들은 또 얼마나 쉽게 배웠는지 모른다- 활동가처럼 옷을 입고, 활동가처럼 활동했다. 매일 회의다, 집회다, 시위다, 뛰어 다녔으며 방학이 되면 농활 (농촌활동)이니, 기활(기지촌 활동)이니, 공활(공장활동)이니 해서 더 바빠졌다. 고백을 하자면, 1991년 대규모 집회가 전국에서 일어났을 때, 하루에 거의 한 사람씩 독재정권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할 때, 나는 남몰래 열의에 들떴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시위에 참가하고 짭새들에게 쫓겨 도망갈 때도 나는 그 자살한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서 울지 않았다. 이제 세상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 거리에서 “일반인”이 던져주는 음료수나 박카스를 마시며 나는 이미 영웅이었다.
1995년 통일 원년이 지나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내 모든 삶을 투자했고 많은 것을, 그리고 많은 동료들을 잃었지만,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전교조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고, 기지촌은 여전히 건재하건만 지쳐 나가 떨어진 것은 나였고, 통일을 얘기하자 어머니께서는 내가 빨갱이냐고 물어보셨다. 학점 2.5의 운동권 법학도를 받아주는 곳은 사회 아무 곳도 없었다. 아주 조그만 학원에서 말도 안되는 월급과 처우를 받으며 내 자신감을 깔아뭉갰던 것은 거기에 항거할 수 없는 내 미약함이 아니라 일이 끝난 주말 저녁 술에 취해 들어와 거울을 통해 봤던 내 얼굴이었다. 화장발과 최신 유행의 머리 스타일, 잘 차려 입은 옷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은 패배주의자의 그것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의자 뺏기 게임에서 끝까지 의자를 차지 하지 못한 사회의 낙오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세상이 바꿨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하지 못하고, 가정폭력이 금지 되었으며,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내가 통일을 원하다고 말해도 아무도 나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이 지금은 없다. 나는 무엇을 놓친 것일까? 역사는 내가 활동가라고 자신을 지칭했을 때나, 패배주의에 빠져있을 때도 발전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나였다. 세상을 바꾸느라고 너무 바빠서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활동가니, 일반인이니 하는 단어자체가 우스워졌다. 나는 활동가이니 특별하고 다른 사람은 일반인이니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내가 내 삶에서 빚진 것은 고귀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내 삶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깨어있으려고 노력할 것, 항상 의문할 것, 그리고 내 삶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것... 누구나 한번쯤은 가슴속에 품었던 생각이다. 활동가들은 다른 뭔가를 더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쓰잘데기 없는 짓이다. 대학가 비밀스러운 서점의 골방에서 남몰래 읽었던 막시즘,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을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다만 사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인”이라고 지칭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깟 조금 운동한 “경력”을 가지고 나는 “활동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한 후로 얼마나 충일한 삶을 살았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을 믿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론 때문이 아니다. 내 F은 삶의 경험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미국은 거대한 국가이고, 한국은 힘이 없으니 누가 대통령이 되건 통일에는 상관없다는 패배주의는 더 이상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 짧은 10년의 세월에도 많은 것이 바꿨는데, 앞으로 또 얼마나 좋은 세상이 올지 벌써 흥분이 된다. 그 중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내 조국의 하나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일원으로서의 내 모습인 것이다.
*필자는 미국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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