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민주사회건설협의회 30년을 돌아본다-박 소은 > 민족논단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3월 29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민족논단

[유럽]민주사회건설협의회 30년을 돌아본다-박 소은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jok 작성일04-03-18 00:00 조회3,986회 댓글0건

본문

이 글은 유럽의 민족민주운동 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의 30돌을 맞아 민건 동지회를 준비하여 온 인물들중 한 사람인 박소은씨가 3월6일 후랑크후프트에서 개최된 민건30주년 행사를 위해 작성한 내용이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

1. 민건의 창립 배경과 조직적 구성

민건*민주사회건설협의회*는 1974년 3월 1일 독일 본 뮌스터광장에서
박정희 군부독제와 유신체제 타도를 외치면서 그해 3.1절 기념 55주년에 상징하는 55명의 서명을 받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어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 출범에 이르기까지 전후 시대적 배경을 돌이켜보면,

1.국내는 3선 개헌으로 유신 독재체재의 장기화와 전태일 분신을 통해 노동자 탄압이
그 극치를 달하고 있었다
2.수출 산업의 일환으로 노동력을 상품화한 간호원, 광부들이 독일로 오게되자
국내 사회의 전반적인 모순과 문제점들이 이곳으로도 이전되게 되었다.
3. 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국내의 문제는 이미 이곳 독일에 사는 동포들까지
감내해야하는 직접적인 탄압으로 닥아왔다.
4. 당시 독일은 국내상황과는 달리 사회전반적으로 특히 68 학생운동의 열기를 받아 사상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만연해 있어, 이러한 새로운 독일 동포 구성원들의 문제점과 국내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맞물리면서, 조직적 정치투쟁으로 성숙시킬 수 있었던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민건의 조직 역시 자연히 노동자, 유학생, 종교인, 지성인등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이들이 함께 어울러 질 수있었던 여건은,

1.이곳에 온 노동자들은 독일외국인 정책에 따른 이곳의 생활환경이나
고용조건등의 불이익과 부당함에 그간 잠재되어 있던 의식들이 표출되기 시작했다.노동자들은 스스로가 인력수출의 일환으로서 자신의 노동력이 개발독재자의 상품이 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자 노동자로서 정치의식화가 시작되었다.
2. 유학생들은 주로 국내에서 4.19를 거치면서, 학생운동 내지 정치운동을
경험하고 온 일부가 주동이 되어 국내정치 상황에 대한 투쟁 방안에 대해 이미
여러 시도와 움직임을 모색하고 있었다.
3. 노동하는 동포들과 직간접으로 연관되었던 일부 종교인들은 간호원,광부들이 직면한 부당한 대우와 그를 외면시 하던 관계당국에 항변하는 대변자로서 연대를 하게 되었다.
4.동백림 사건 이후 그 후유증을 토로할 수 있는 정치적 투쟁장이 필요했던 일부 양심적 지성인들의 욕구가 자연스럽게 적극적인 동참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렇게 보면 우선

1.독일의 운동사는 독일 동포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민건 창립 당시의 구성원들은 이곳 동포구성원을 총 망라하고 있고
그들의 외국 생활과 문제점해결, 그러면서도 국내 정치에 대한 투쟁이 밀착되어 있었다.
세월이 지나는 속에 이들은 반정부,반체재 인사들로 낙인찍히고 중상모략 당하면서
일반 동포사회로 부터 격리 당하여 고난을 당하는 소수의 동포군으로 배척당하게 되었다.
2. 이러한 민건 구성원 자체는 바로 모든층들이 가담했다는 점에서 독일적 특수성으로서 그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양면성을 처음부터 내포하여, 이른바 독일 해외운동의 특징을 이루게되었다.


11.민건이 추구했던 투쟁 내용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1. 민주사회건설
2. 민족 자주권 회복

박정희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사회를 건설하자는 당시의 당면과제 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의 분석에 기초한 그 예속적 성격을 신랄히 규정, 비판하면서
분단의 고착화를 종식시키고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근본적인 민족자주권 회복을 주창하였다.
여기서는 주로 두번째 주장에 관해서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70년 초는 아직 남북 이 분단된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으로서 50여년을 지난 오늘날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박정희 군부 독재가 북의 경제적 성장과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대항하여 남을 미국주도하의 자본주의세계로 편재하여 북에대한
체계적인 적대화 정책과, 반공을 국시로 삼아 반민족적 단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초기 과정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해방공간에 일어났던 남북연석회담을 계기로한 민족주의적 주장들과
사회주의가 제국주의에서의 해방의 길로,억압받는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라는
즉 인류사의 희망을 안겨주는 사상이라는데 공감하는 분위기가 어느정도는 있었고, 바로 그러한 사회를 반쪽의 민중들이 선택하고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처럼 반공에 혈안이 되어 바라보지는 않았다. 미국을 혈맹으로 인식하고 형제나라를 타도의 대상으로 사탄시하는 오늘날의 반민족적이고 매국적인 시각의 첨예화가 그만큼 상대적으로 높으지 않았다고 볼수도 있다.

이곳으로 유학온 민건 주도층들의 일부가 특히 그러한 국내 상황을 적극 이곳의 보다 넓은 자유공간에서 발전시켜 나갔다는 점이 민건이 투쟁내용을 당면한 독재타도와 민주주의 원칙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것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보다 근원적으로 민족문제를 처음부터 동시에 다루게 된 배경이라고 볼수 있다.
해방이후 김구, 조봉암, 장준하를 잇는 민족주의적 사고와 투쟁 공간의 폭이 지금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컸었다는 데서 이념적 자유분망함이 가능했던 사실이다.
남과북이 철저히 분리된 냉전의 논리가 30년 전에는 완전히 벌려진 가위모양은 아직 아니였다.
민건 창립전에 독일에서 이미 강한 민족적 자주성을 내용으로 하는 잡지<주체>의 출간(73)이 선행되었던 점, 초기 민건의 쎄미나 주제로서 남북통일안을 비교하는 통일쎄미나(75년)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도 지속적으로 통일문제를 다루었다는 사실에서 그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남쪽 자본주의 체제의 종속문제를 이론적으로 토론하는 과정에 이미 초창기 부터 미군철수 문제를 놓고 찬반론으로 열띈 토론을 전개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민건을 내적으로는 분열을 조장할 만큼 양극화 하였으나 , 30년이 지난 현재 미군철수 문제는 바로 민족최대의 쟁점이 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겠다.

물론 당시 72년에 있은 74 공동 성명이 나온 년후라서 그 실천 방안에 대한
토론의 물꼬가 터지던 시기였기도 했지만, 위와 같은 몇가지의 대략적인 사례로서 민건의 민족,통일에 대한 구상은 당시 국내, 해외를 막론하고 분명 선구적인 장을 열었음은 분명 인정할 수있다.
결국 7.4 공동 성명은 휴지장처럼 구겨져 잊혀져 버렸고, 30여년이 지난 2000년 6.15 공동 선언이 나온 이후 우리의 운동이 이제 또 한번의 오류를 허용해서는 아니된다는 역사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1II.민건의 평가

는 이제 막 오늘의 유럽민족민주운동 30주년 행사를 계기로 그 시작을 한다고 본다.
따라서 총체적이고 긴 안목에서의 역사적 평가는 74년 창립 이후 민건 의 발전과정을 그 자료를 토대로 하여 시대별, 내용별로 분석 정리하여 실로 그 운동사를 기술해야 하는 체계적이고 방대한 작업 때문에 이자리에서 불가능하지만, 그 취약점과 오류를 지적한다는 것은 , 그간에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의 유럽 운동을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라 보기에 다음과 같은 몇가지 측면에서 지적해 본다.

1. 운동의 장기적인 복안의 제약성
2. 운동의 중심세력의 취약성
3. 운동내의 결속력 문제
4. 대중운동으로서의 한계성
5. 국내운동과의 연대 관계
6. 세대교체의 실패.

1. 군부독재의 탄압과 착취에 양심과 울분으로 궐기하였던 74년의 창립 분위기를 오늘날의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독재정권의 출현에 대한 철저한 사회,정치, 경제적 분석보다는 그 악취나는 부패와 극명한 모순 현상 파악에 우선은 머물고 있었다.
(74년 3월 1일 성명서 참조) 곧 이어서 민주사회 건설과 통일이라는 두 중심을 골간으로 하여 투쟁 목표를 재 정비 하였으나(76년 제 2선언문 참조) 기본적으로는 민주사회건설이 민족자주권 회복이라는 문제와 여하히 연계되어있고 풀여져야하는가 에 대한 투철한 이론적 사상적 복안이 없이 평행선상에서 하나의 투쟁안으로서만 논란이 되었다. 따라서 선민주후통일, 선통일후민주 라는 각각의 입장으로 나누어져 통합을 못보고, 민건 내적 분열이나 균열의 요인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민건자체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국내운동역시 변혁이론의 미성숙으로 논란이 되었던 점을 생각하면 우리 운동사 전체가 걸어온 공통의 진통 과정이기도 하다.

2. 민건의 구성원을 볼때 그 스스로가 <광장>(74년 처음나온 출간물의 명칭)이라고 표현했듯이 노동자,학생,지성인,종교인등 당시 독일,유럽 동포들이 총 망라된 점은 있었지만 바로 그 복합된 구성원의 성격자체가 어떤 강력한 조직적 중심세력의 부재를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고 보겠다.
노동자들의 경우는 우선 이곳에서 받는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부당함에 의식화는 되었지만 조직을 주도할 정치세력은 아니였고, (그 이후 스스로의 권익보호투쟁과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조직으로서 분리되어 나갔다:노연)
학생들의 경우는 실제 운동의 주류를 이루기는 했으나 신분상 학위취득 이후의 체류가 불가능하여 , 장기적인 투쟁조직으로서 민건을 이끌수 없는 자기 한계를 가졌고
특히79년 박정희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속속 귀국하므로서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게되었다.(군부독재타도라는 목적에서 볼 때)
그 이후 부터의 민건은 이곳에 남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중도하차,귀국,등의 현실적 타협으로 치명적인 자기 손상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일부 잔류 지식인들은 이곳의 생계문제에 직면하게 되었고 장기적인 투쟁으로 들어 가야할 조직으로서 민건을 재 정비하는 주도 세력이 되는데는 역시 그 역활을 하지 못했다.
초기 가담했던 종교인들 역시 제한된 체류기간내의 양심적 가담으로 그치고
한편 진보적 종교인들은 기독교인을 중심으로한 남북대화라는 새로운 창구를
열면서 민건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자체운동을 벌리므로서 민건의 주도세력은 약화되었다.

3. 첫째로 구성원들의 다양함으로 그 자체는 이상적이었고, 반독재투쟁으로는 묶여질수 있었지만 계급적, 계층적 특성들이 잘 융합되지 않았고, 일단의 전문분화 과정이후는 민건 내에서는 지식인 대 노동자라는 대립구도가 대두되었고, 그 반목감정이 상당한 장애요소로 지속되었다. 둘째로 선민주후통일,미군철수 지지와 반대등 운동의 쟁점등을 두고 사상적인 대립구도가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지게 되었다. 민주화 투쟁만을 주창하는 일부 성원들은 스스로를 순수파(?)라 지칭하고 민건의 정통성,정체성 문제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적 대결과 불신 구도는 일부 유학생, 지식인들의 전두환 정권시 귀국을 통해 더욱 심화되어 조직 결속력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4. 민건은 군사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 정권 주창, 노동자탄압에 대한 투쟁, 남북화해와 통일실현 등의 국내 정치의 쟁점들을 주로 운동의 내용으로 삼아
해외운동으로서 선구적인 포문을 열었으나 독일, 유럽 안에서 많은 동포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운동으로서 확산시키는데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초기에는 독일에 취업으로 온 노동자들(광부, 간호원)의 부당한 계약 조건과 외국인으로 이곳에서 당하는 불이익에 항의하고 그 해결책을 적극 모색하는등
이곳 주류 동포와 밀착된 가운데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유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국내 정치와 사회,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고무하고 영향을 주는데
많은 역활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권의 자체의 기반확대를 못하고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동포사회에 뿌리박지 못하므로서 , 소위 운동인사들과 일만 동포들로 양극화 되었다.

5. 해외 운동으로서의 국내운동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당시의
국내 진보세력을 탄압하는 살벌한 상황에서는 공개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따라서 국내 운동세력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외국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대신한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국내와 해외를 통합하여 하나의 운동체계를 이루어 상호긴밀한 역활 문담을 조직적인 차원에서 창출하지 못한 것은 일정한 한계라 보겠다.

6. 유학생들의 경우 학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귀국하여야 하고
취업자의 경우도 노동계약이 완료돠면 귀국해야 하는 이곳 독일의 체류조건 때문에
운동이나 조직도 대를 이어 받는 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민건이 세대교체라는 작업을 할 수없던 일반적인 제약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하지 못하였다는 것도 인정하여야 한다.
새로 오는 유학생들이며 새로이 구성되는 이곳 동포층들을 동참시키는 것에
어느정도의 기여는 하였지만 운동 후세대를 적극 일구어 내지 못했다.
특히 2세 교육의 중요성과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족교육 기관이나 사업에 애초부터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지 못했다는 점은 큰 오류로서 지적할 수 있겠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곳의 체류자체를 장기적으로 내다 보지 못하고 임시적으로 상정하여 그때그때의 현실과제에 급급하였던 실책이라 볼 수있다.


이상은 결국 민건이 상당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자체로서 발전 변신 계승하는데
실패한 조직 내적인 주 원인들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조직 외적인 측면에서의 특수한 상황에서
민건이 봉착했던 점을 지적해 본다면

1. 독일이라는 분단상태의 국가,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던 독일적인 특수성 때문에 남쪽 공안당국의 엄청난 공세를 감당해야 했었고 (여기서 그간의 많은 사건들은 다 열거하지 않는다)그것은 운동의 자유로운 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었다는 점이다. 특히 장벽을 가로둔 당시의 베를린이라는 특수공간에 대한 공안당국의 집중적인 정보활동, 운동권과 일반 동포들의 의도적인 분리, 적대시, 중상모략책들은 직간접으로 운동인사들을 동포사회에서 철저히 고립시켰고 운동내부에까지 분열을 조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 이후의 이곳 운동사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고 보겠다.

2. 독일은 미국과는 달리 외국인의 장기 체류나 취업이 힘든 외국인 정책을 했기에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그들의 생활이나 정치활동을
자유로이 그리고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펴 나갈수 없게 제한하였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운동 초기에 가담하였던 많은 유학생들이 생활문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들도 체류문제로 생활전선에 허덕거리게 되므로서 운동구심체가 유지를 할 수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문제는 오늘까지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많은 동포들이 아직도 삶의 기반을 잡지못하고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있다.

3. 이러한 독일에 사는 우리동포들의 특수한 제약성 때문에 재정의 확보가 한 조직을 지탱할 수 있게할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도 중요한 외적 요인이다.
주로 회원들의 회비와 성금으로 유지된 민건은 당시의 잡지. 신문등의 출판이나 쎄미나 개최도 벅차서, 늘 재정의 한계안에서 유지, 단절, 변모하는 역경을 거쳐야했고
열악한 재정속에 그 활동반경을 구속당하여, 장기적인 사업 구상이 자유자재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상의 조직 내적,외적 문제점들을 통해서 볼 때, 민건은 초창기 스스로가 입장의 다양성, 공동의 사고와 공동의 결의를 하는 광장이라고 표현한 그 용어나 개념처럼 많은 다양성과 함축성을 가진 자유로운 공간을 스스로와 동포사회에 제공하여, 출범이후 노연,여성, 연구소, 쎄미나 형태로 전문화하여 유럽 운동을 열고 살찌우는 광장의 역활은 하였지만 , 유럽 운동의 중심체로서 자체발전을 위한 도약에 실패했다고 보겠다.
자체발전과 세대교체라는 과제를 완수하지 못하므로서, 이후
범민련을 중심으로 한 유럽운동의 재구성을 통해 정체와 상실기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직으로서는 더 이상의 활동을 멈추었다 하더라도 이곳에 남아서
귀국할 수 없는 많은 운동 1세대들은 일부 계속적으로 이곳 유럽 운동에 참여하여 지금까지 활약하고 있고, 일부는 개별적으로, 분야별로 각자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일부는 비록 현재의 운동 조직에는 직접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참여는 아니하더라도 민건 초기의 기본적인 운동의 정신과 양심을 지키면서 개인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건은 조직적으로 발전,와해, 정체, 휴식, 의미 상실이 되었으나,
출범했던 그 당시의 정신은 이곳에 남은 운동 1세대들의 삶과 이후 유럽 운동의 흐름속에 면면히 살아 흐르고 있다고 보겠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민건을 돌이켜 평가해 본다면 70년 초 국내 해외를 통털어 볼 때 상당히 앞서간 구호들로서 선진적인 역활을 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즉 민족과 민중의 양심을 대변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하였음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지속적인 투쟁으로 계승,발전시키지 못한 한계를 가졌던 것으로 자기비판을 할 수있겠다.

IV. 매듭말

비록 민건이 조직적으로는 더 이상 유지 되지 않다 하더러도
그 투쟁 목표와 정신의 계승이라는 시각에서
30년이 지난 오늘에 이곳에 남아 서 유럽운동의 일원으로서 남아 있는
우리들이 할일이 무엇인가를 정리해 본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여하히
앞으로 영위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그리고 해외, 유럽운동의 당면과제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점에서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동시에 민건 자체 평가에서 본 지적들을
여하히 수렴하고 지금부터라도 실천에 옮길 수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러한 공동의 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이 바로 이 30주년의 행사가 갖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민건의 창립 30년을 자축하자는 의도가 아니며,
민건의 역사적 배경과 그 발전과정, 특히 비판을 계기 삼아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이곳 운동 30년을 우리 민족민주운동사 속에 자리매김하는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실로 30년이 지난 오늘의 국내 상황은 엄청나게 변모하였다.
군부독재정권은 그동안 흘린 수많은 투쟁의 댓가로 종식되고 민주정권이 도래하였으며, 노동 대중들의 피땀흘린 희생의 누각위에 경제성장이 이루어 졌다.
무엇보다 2000년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채택된 6.15공동선언은 남북을 통일로 향한 커다란 발돋음을 하게하였다.

그러나 한편 시대착오적인 국보법의 존재로 냉전논리는 그 단말마적 비명을 지르고 있어 아직도 진정한 민주주의 원칙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경제성장이라는 화려한 휘장뒤에는 국제독점자본의 예속하에 민중의 생존권 투쟁은 그 어느때 보다도 처절하다.
더우기 미국 주도하의 세계재패 전략앞에 민족의 자주권은 실로 위기 일발의 절박한 상황에 봉착하여 있다.

우리는 민건이 초기 설정했던 민족 자주권 회복의 내용을 다시금 회상하고 그 과제를 발전적으로 풀지 못했던 민건의 평가를 통해서 이제는 그 완결의 길을 모두 함께 도모해야 하는 역사적 시점에 도달하였다고 본다.
6.15 공동 성명 이후 우리는 모두 통일 시대를 이루는 갈림길에 들어서 있다.
즉 분단의 시대를 우리 의식에서 부터 먼저 털어 버리고 통일의 시대로 향한 참다운 사고의 대전환과 운동의 대단결에 총력을 가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1. 우선 그간의 운동 과정에서 생긴 상이한 약간의 의견이나 인간적인 간극을 극복하고
진정 하나로 묶어 내는 작업이 시급히 요청돤다.

2.소위 운동권이라는 진보적 인사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갈라져 있던 전 동포사회와의 연계가 긴급히 요청된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역량을 최대한
확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민건부터 이곳 운동이 이루어 내지 못했던 대중운동으로서의 확산과 기반을 잡는데서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다.

3.나아가서 특히 우리 2세들과의 연대관계는 당위성 주장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구체성을 띈 실천 방안을 적극 모색해 나가야 할것이다. 우리 민족문제의 특수성을 일방적인 요청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사고와 언어를 동원하여 합리적인 토론의 장을 열면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공동작업과 공동사업을 통해 대화,전개 나가야야 할것인다.

4.국내 뿐 아니라 해외의 운동이 모두 한 고리에 묶일 수 있도록 연대를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 우리 민족문제의 긴급한 역사적 요청에 부합하는 운동방향의 정립으로서 민족문제 해결의 우선적인 원칙과 그 방법론으로서 6.15 공동 성명을 여하히 운동으로 묶어내는가 하는 문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에 우선 유럽내 제반 운동 단체는
1. 6.15정신에 대한 명학한 인식과 입장을 가지고
2. 대동단결하여 각 단체의 특성과 사업을 해나가면서도
3. 6.15정신에 입각한 투쟁사업에는 범단체적 통일전선의 구축이 필요하다.
4. 나아가서 동포단체들과의 연합전선을 확립하여6.15정신을대중화하여내어야한다
5. 그러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유럽 범 동포적 차원에서의 615 민족축전과 그 준비기구 같은 것을 구상해 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