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한국 언론사 > 민족논단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2년 1월 28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민족논단

[자료]한국 언론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jok 작성일03-09-21 00:00 조회3,283회 댓글0건

본문

아래 내용은 <국민의 힘>의 자료로서 민족통신의 시각과 일치되지 않은 부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엽 근대신문의 출현시기로 부터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이전 시기에 해당되는 언론들의 발자취들입니다. 참고자료로 소개합니다.[민족통신 편집실]
......................................................................

제1장 근대신문의 출현(1883~1895)

1. 필사신문(筆寫新聞) 조보(朝報)

근대신문이 창간되기전에 전근대적 신문이자 관보의 성격을 띤 조보(朝報)가 있었다.

조보의 내용은 국왕이 통치상 내리는 명령과 지시, 관리의 임명등 국왕의 처결사항을 비롯하여 궁중의 동정과 지방관의 보고사항 등이었다.
조보의 기원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조보에 대한 기록이 조선 중종 3년(1508)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국가제도로 확립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報)의 발행이 중단된 때에도 외국인들이 국내정세를 이해하는데 조보가 중요한 매체가 되었으나 1894년 8월초 정부에서 인쇄된 근대적 관보(官報)를 발간하기 시작하면서 필사신문인 조보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2. 근대신문 발간과 그 배경

우리나라의 언론발달사를 구분짓는데 뚜렷한 하나의 기점이 1883년 창간된 한성순보(漢城旬報)이다. 그것은 순보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정된 제호아래 일정한 간격을 지키면서 발간된 인쇄매체 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성순보를 기점으로하여 우리의 언론사는 그 이전(전근대적 언론시대)과 이후(근대적 언론시대)가 확연히 구분되는 두 개의 시기로 나누어 진다. 순보는 1883년 10월31일 창간되었다가 1884년 12월4일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빌행이 중단되었고-(순보가 일본측과 긴밀한 유대 아래 발간되었다고 생각한 난민들이 박문국을 불태워 버렸다)- 한성주보(漢城周報)는 1886년 1월 25일에 창간되었다가 1888년 7월에 폐간되었다. 이 신문이 발간되던 당시 우리나라는 자기수호, 국민의 교화, 전근대적인 사회개혁등 절박한 문제들이 발생했고 낙후한 국력을 신장해야 겠다는 자각이 싹트게 되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돌아온 박영효(朴泳孝)가 신문 발간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報)는 오랜 침체에 빠져 있던 이 나라를 개화하여 부국강병케하고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벅찬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발간된 것이다.

1) 한성순보(漢城旬報)
- 열흘에 한 번씩 발행
- 음력에 의한 동양의 생활단위로 열흘마다 발행
- 한문으로 게재
- 매호 3,000부 정도 발행
- 외신기사가 63.7%
- 매호 24페이지 정도(책자형)

2) 한성주보(漢城周報)
-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
- 양력에 의한 서양의 생활단위로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
- 한글기사 사용(더 많은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
- 상업적인 광고 등장
- 외신기사 45% (순보보다 국내기사의 비중이 높아졌다)
- <私議>란을 두어 의견(意見)기사가 많아졌다.
- 매호 20페이지 정도(책자형)

* 순보와 주보를 외형으로(책자형) 잡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의 인쇄기술이나 용지사정으로 제본이 불가피 했기 때문에 외형만으로 잡지라 할 수는 없고, 내용으로보나 발간의 취지로 볼 때에는 신문으로 보는게 옳다. 또한 순보나 주보를 정부기구인 박문국에서 발간했다는 이유로 관보(官報)로 생각하고 최초의 신문을 독립신문으로부터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초창기의 신문은 정부가 발간하는 경우가 많으며 정부가 발행한다 하도라도 편집내용으로보아 오늘의 관보라는 개념과는 크게 다르다. 신보와 주보는 정부의 공고(公告)만을 싣는 기관지가 아니라 일반기사와 외국사정까지 싣는 일반신문과 잡지의 성격을 아울러 가진 매체였다.

3. 정부 공식 기관지로서의 관보(官報)

관보는 정부가 공무원과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사항을 편찬하여 간행하는 국가의 공고(公告) 기관지이다. 우리나라의 전근대적 신문인 조보(朝報)가 관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근대적인 관보는 1894년 8월 초순경에 발간되었으며 갑오경장은 일본의 강요로 추진된 것이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관보가 발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일본의 관보 발행제도를 본떴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한제국의 관보는 갑오경장 이후 한일합방까지 16년간에 걸쳐 우리나라 개화기의 법령류(法令類)가 모두 실려 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움직임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1차 사료(史料)이다.

제2장 민간지의 성장 (1896~1904)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때로부터 우리나라는 민간신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개화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880년대 부터였고 초기 개화운동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한성순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운동은 소수의 선각자들이 국민들에게 개화사상을 불어넣어 주려는 이른바 <위로부터의 운동>이었다. 그로부터 10년뒤인 1890년대는 다수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사회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닦게 됨으로써 <횡적으로 확산되는 대중화 운동>으로 발전되어 나아갔다. 그런데 1890년대의 개화운동이 이처럼 1880년대와 다른 차원으로 발전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독립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개화운동에 있어서 점화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국민들은 이 신문에 실린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와 국민의 권리, 의무들을 알게되고, 또 투철한 독립정신,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체득할 수 있었다.


1.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

1) 독립신문은 창간에서 폐간될 때까지의 과정

제1기 : 창간(1896년 4월 7일) ~ 1896년 7월 2일
이 시기는 독립신문의 창간에서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까지이다.
논조는 국민의 계몽을 주로 하였으며 정부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다.
제2기 : 1896년 7월 4일~ 1898년 5월 11일
독립협회 창립 이후부터 1898년 5월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출 국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 관 건립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 회원과 국민의 계몽에 주력했다. 1897년 1월 1일 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The Independent)을 각각 4페이지의 독립된 신문으로 발 행하고 그 크기도 2배로 확대했다.
제3기 : 1898년 5월 12일 ~ 1898년 12월 3일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주필이 된 이후부터 독립협회가 해산당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지로 발전.
제4기 : 1899년 1월 1일 ~ 1899년 12월 4일
독립협회 해산 이후부터 독립신문의 폐간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정부에 대한 정책 비판보다는 주로 국민의 교육계몽에 주력하였다.

2) 독립신문의 계몽적 역할

가. 독립신문은 ‘인민의 개명진보(開明進步)를 위하여 지대한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 자주독립과 국가 이익의 수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다.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의 권리를 되찾아 수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라. 한글전용을 단행하여 민족언어와 문자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마.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국민수탈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음을 고발하였다.
바.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창간되어 한국 민중에게 신문의 사회적 역할과 그 중요성을 알게 하고 여론과 공론을 형성하여 사회,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을 성립시켰으며 민간신문 과 출판물의 발흥을 촉진하였다.
사. 한국인들에게 세계사정을 알게 하고 국제정세의 변동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게 하였으며 세계각국의 문물을 소개하여 한국인의 시야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 독립신문의 영문판(The Independent)은 당시의 한국사정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의 의사와 주장을 세계 각국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2. 새로운 민간신문들

1) 미일신문: 1898년 1월부터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가 <협성회회보>를 창간. 협성회회보-> 미일신문(1898년 4월)
최초의 일간지.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당시 한반도에서의 이권침략을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던 열강세력에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적(배재학당은 미 국인이 경영)
2) 뎨국신문 : 일일신문 ->뎨국신문 1898년 8월 10일 창간.
한글전용.
부녀자와 중류이하의 서민들이 주로 읽었다.
3) 경성신문(京城新聞) : 1898년 3월 2일
4) 기독교 계통신문 : 죠선그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 신문
5) 황성신문(皇城新聞) : 1898년 9월5일 창간.
국한문 혼용.
주로 지식층과 상류층이 읽었다.

* 1896년 독립신문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창간된 이래 2년 뒤인 1898년에는 미일신문, 뎨국신문, 황성신문이 나왔고, 한 해 뒤에는 다시 시사총보와 상무총보가 발간되는 등 활기를 띠는 듯 하였으나 독립신문, 미일신문, 시사총보, 상무총보는 1899년에 모두 사라졌다. 이리하여 뎨국신문과 황성신문만이 1900년대까지 민족언론으로 남아서 이후 생겨난 대한매일신보와 함께 항일적인 논조로 발간되게 된다.

제3장 민족지와 친일지의 대립(1905~1909)

우리나라의 두 격동기인 러일전쟁 이후부터 한일합방(1904~1910)과 해방 후부터 정부가 수립(1945~1948)되는 시기에 언론사에 있어서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앞의 시기는 일제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쳐서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였던 식민지 이전의 과도기였고, 뒤의 시기는 독립정부가 수립되기에 앞서 미군정(美軍政)이 실시되던 때였다. 위의 두 시기는 국론이 분열되어 있던 때였고 신문 발간 건수가 급격히 늘었다. 러일전쟁 이후의 우리나라 언론계는 대립의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논조로 보면 <친일지와 민족지>로 양분되었고, 사용문자로는 <한국어 신문과 일본어 신문>으로 대별 되었으며, 발행주체로는 <한인 경영지와 일인 경영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또한 언론에 대한 통제에 있어서도 이 시기는 한국신문사에 뚜렷한 전환점이 그어진 해였다. 일제가 한국언론에 직접적으로 검열과 탄압을 시작한 시기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문지법(新聞紙法)과 출판법(出版法)이 제정되어 언론에 제도적인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신문에 대한 정간 처분을 비롯해서 압수,발매금지 등이 시작되었고 사전검열(事前檢閱)이 실시되었다.


1. 러일전쟁(露日戰爭)후에 창간된 신문들

1) 대동신보(大東新報)-1904년
: 일제에 의해 첫 정간을 당함. 통감부에 3천원에 매수
2) 대한일보(大韓日報)-1904년 -> 朝鮮日報(1910년)
: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하는 논조로 민족지와 여러
차례 논전을 벌였다.
3)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1904년
: 항일논조
4) 국민신보(國民新報)-1906년
:친일지
5) 중앙신보(中央新報)-1906년
:일본인이 발간한 한국어 신문
6) 만세보(萬歲報)-1906년
: 천도교의 기관신문
7) 경성일보(京城日報)-1906년
: 통감부의 기관지로 창간(친일지 독점기에 설명)
8) 경향신문(京鄕新聞)-1906년
: 천주교에서 발행한 한글전용신문. 일반기사가 많아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
9) 실업신문(實業新聞)-1907년
10) 대한신문(大韓新聞)-1907년
: 만세보의 시설을 인수하여 이완용내각의 기관지로 창간
11) 경남일보(慶南日報)-1909년
: 최초의 한인 발행지(초대사장 김홍조)
12) 한성신보(漢城新報)-1909년
13) 대동일보(大同日報)-1909년
: 후에 대한일 일신문이 됨.
14) 대한민보(大韓民報)-1909년
: 대한협회가 발간
15) 대한일 일신문(大韓日 日新聞)- 1910년
16) 시사신문(時事新聞)-1910년
: 민원식(일진회 회원)이 발간한 친일지로 민족지의
지탄을 받았다.
17) 해동신보(海東新報)-1910년

2.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과정에서의 언론통제

1) 친일지를 통한 여론조작과 선전

가. 일인 경영 한국어 신문 : 한성신보(漢城新報)(1895년 창간), 대한일보(大韓日報), 대동신 보(大東新報),중앙신보(中央新報),한성신보(漢城新報1905년 창간),
대한일 일신문(大韓日 日新聞)등 으로 하여금 친일선전을
일삼도록 했다.
나. 한국인 발행 친일지 : 민국신보(民國新報), 대한신문(大韓新聞), 시사신문(時事新聞)등이
일제의 한국침략에 이바지 했다.
다. 통감부 기관지 : 일어신문인 경성일보(京城日報), 영어신문인 The Seoul Press를 발간 하여 대내외에 걸친 선전 기관으로 활용했다.


2) 언론에 대한 제도적인 통제와 철저한 탄압 : 1908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합방이 가까워 질수록 압수와 정간의 건수가 늘어났고 국내에서 발간되는 민족지보다 는 “일본의 보호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해외 발행 신문에 대해서는
철저히 이의 배포와 구독을 봉쇄했다.

3.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대표적인 항일논조 신문

이시기의 민족진영의 신문으로는 제국신문(帝國新聞), 황성신문(皇城新聞), 만세보(萬歲報), 지방지인 경남일보(慶南日報)가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신문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영어신문 The Korea Dairy News(KDN)이다. 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된 기간은 일본이 한국의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으면서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시기였다. 한국 국내의 정세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여러갈래로 전개되던 때였다.

(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민족운동

1) 발행인 배 설(裴設)과 시대상황

영국인 배설은 일본에서 16년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런던의 Daily Chronicle의 특별통신원이 되어 한국에 왔다. 그 후 같은 통신원이던 토마스 코웬과 신문창간에 착수하여 1904년 7월 18일 영문판 The Korea Dairy News(KDN)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그러나 창간 직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주장을 이 신문에 반영하자 주한 일본 공사관의 미움을 받게 되어 완전히 반일적인 논조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공사관은 배설에게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고 반면, 한국 정부는 배설을 신뢰하게 되어 고종이 그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신보의 반일논조를 일본당국이 제지하지 못하자 한국의 독자가 늘어 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가운데 최고의 부수를 자랑하게 되었다.

2) 신보의 다섯 부류 종사자들

가. 논객이자 항일 투사(양기택, 박은식, 신채호)

이들은 일제가 말하는 “한국인 선동자”들로 합방전에는 필봉을 들어 민족정신을 앙양하고 국민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합방후에는 망명의 길에 올라 일제와 투쟁했다. 이들은 일제에 대한 논리를 구축하고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나. 업무부분에 종사한 행동파 (임을정, 옥관빈, 안문수)

조직을 통한 투쟁으로 일본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사람들이다. 서구의 신학문을 접했거나 외국에도 다녀온 사람들로서 진보적인 사상을 지녔다.

다. 외국인들

배설과 만함을 비롯해 몇몇 사람들이 영어신문의 편집과 경영에 참여했다.배설을 제외하고는 사명감이 아닌 직업인 이라는 입장에서 신문을 제작했다.

라. 일제에 순응하게 된 사람들(이장당, 일)

신보가 일제의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는 친일적은 아니었지만 대세를 바로 잡겠다는 의지가 없이 시국에 순응했다. 이 순응파들은 그대로 남아 총독부 기관지의 기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마. 경영과 정보수집에 관여한 사람들(백시용, 심우택, 손탁, 할버트)

고종의 측근으로 영어를 할 줄 알았고 고종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배설에게 전달하고 궁중의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4. 일본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방법

첫째 : 외교교섭을 통해서 배설의 추방과 신문의 발행금지를 영국측에 요구.
둘째 : 서울 프레스를 인수하여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는 동시에 대한정책을 선전했다.
셋째 : 한국정부로 하여금 신문지법을 공포케하여 이 법규에 따라 신보를 압수.
넷째 : 한국인 편집장 양기택(梁起擇)을 구속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일제하의 우리나라 언론

1. 3기의 시대구분(일제하의 언론은 크게 3기로 구분된다.)

제1기 친일지(親日紙)의 독점(1910~1919)
제2기 민간지(民間紙)의 재생과 항일(抗日)(1920~1930)
제3기 친일강요기(親日强要期)(1931~1945)

2. 일제하의 언론의 분류
1) 민족언론
(1) 국내발행과 해외발행
상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과 미국에서 발행된 신한민보가 대표적이다.
(2) 공개적 언론과 지하언론
지하신문은 그 성격상 발행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3.1운동 동시에 발행된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은 항일 민족언론사에 높이 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출판물이다.
(3) 발행의 법적근거
한국인 발행 : 정기간행물(계속출판물)에 적용된 신문지법과 단행본인 보통출판물에 적용 된 출판법이 있었다.
일본인 발행 : 신문지규칙과 출판규칙이 적용.
2) 친일언론
(1) 한국어 언론과 일어 언론
한국어 신문 : 매일신보(每日申(新)報), 시사신문
일어신문 : 경성일보
(2) 한국인 발행과 일인 발행

------------ 본 론 ---------------

4장 친일지 독점기(1910~1919)

1. 매일신보(每日申報)

매일신보는 일제통치 36년 동안 중단되지 않고 발간된 단 하나의 한국어 신문이다.
매신은 합방 이튿날인 1910년 8월 30일부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어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의 선전대변기관으로서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발간되었다.
일제는 합방과 함께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없애고 “대한”이나 “황성”등 한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단어는 일체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으므로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바뀐 것이다.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는 동시에 9월1일자로 대한제국정부의 기관지 격이던
漢城新聞(전 大韓新聞)까지 합병하여 1910~1920년 초까지 한국어 신문으로는 매신의 독점이 되었다. 언론인들로 보면 한말에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신 기자들이 평론가요 사학자였고 독립지사였던 것과는 달리 1919년 이후에는 대부분 신소설을 집필하는 작가로 활약했다.
매신은 정치기사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게되자 문학사에 오른 여러 작품들의 발표무대가 되었다. 대표적인 소설가로는 이인직, 이해조, 이상협, 윤백남등이 있고 이인직은 1906년 만세보에 “혈의 누(血의淚)”를 발표하고 하편을 뎨국신문에 매신에는 속편을 발표했다.
또한, 이광수는 매신에 근무한 적은 없으나 그의 처녀작<무정>,<개척자>를 모두 매신에 연재하여 작가로서의 명성을 크게 얻었다. 매신은 1919년 8월에 현상금을 걸고 소설작품을 모집하여 후에 나타난 민간지들의 신춘문예노집에 앞서 이 제도를 시작 하였다.

2. 경성일보(京城日報)

경성일보는 한일합방 이전인 1906년 9월1일에 통감부의 기관지로 창간된 신문이다. 처음에는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을 발행하였는데 1907년 제185호부터는 한글판을 중지하고 일본어판만 발행하던 중 합방후에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었다. 또한 매일신보를 통합하여 하나의 회사로 만든 것이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를 통합한 뒤에 매일신보는 독립된 신문이 아니라 경성일보의 사장과 편집국자의 지휘아래 놓인 경성일보의 자매지 성격을 띠게 되었다.

3.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

영문 일간지 서울 프레스는 원래 영국인 하지가 1905년 6월 3일에 창간한 신문이었다. 창간 당시에는 하지가 단독으로 운영했으나 일본 통감부는 베델의 코리아 데일리 뉴스와 대항하기 위하여 서울 프레스를 하지로부터 매수하여 통감부의 기관지로 만들고 이를 일간으로 발전시켰다. 서울 프레스는 한일합방 후에도 경성일보에 통합되지 않은 채 독립된 신문사로 운영되었다. 매일신보, 경성일보, 서울 프레스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하나의 신문사로 통합된 후에도 서울 프레스는 독립된 회사로 남아 있다가 1930년 2월에 경성일보에 통합이 되었다. 이때부터는 독립된 신문사가 아니라 경성일보사가 발행하는 일어신문(경성일보), 한국어 신문(매일신보), 영어신문(서울 프레스)로 경영이 일원화 되었다. 그후 1937년 5월 30일자를 마지막으로 서울 프레스는 자진 폐간 하였다.

제5장 민간지의 재생(再生)과 항일(抗日) (1920~1930)

1. 3.1운동 후 민족언론의 대두

1) 국내의 항일 지하신문들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면서 민족진영에서도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신문은 조선독립신문이었고 발간의 주동인물은 이종일, 박인호, 윤익선, 김홍규, 이종린등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은 이종일, 이종린등의 주도하에 윤익선이 발행인으로 3월1일 첫호 1만부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첫호 발행후 이종일과 사장 윤익선이 체포되었고 이종린과 장종건을 중심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600~2,000매까지 발행하다가 체포되었다.
같은 이름의 독립신문이 시내 여러 곳에서 발행 되었는데, 3월 하순경 여러명이 이들 신문을 통합하여 3~4일마다 발행하여 4월 26일까지 발행하였다. 독립신문은 그 후에도 비밀리에 다른 후계자들에 의해 발행되었고 8월 29일에는 국치기념호(國恥記念號)가 발행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독립자유민보(獨立自由民報), 대동신보, 제철공 김상옥의 집을 수색한 결과 대한국민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후원회 취지서 등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김상옥이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여러 차례 배포했던 것이다.

2) 해외에서 발행된 신문들
현재 제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서북간도 등 만주에서 발행된 것이 13종, 상해와 구미 것이 9종, 연해 9종이다. 신문 발간 분위기가 고조되자 인쇄시설을 갖추어 본격적인 신문을 제일먼저 발행한 것은 친일지 였다. 1919년 7월 21일 만주 봉천에서 창간한 滿洲日報가 그것이다. 이 신문은 일본 당국의 지우너을 받아 발행된 친일지로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우리말로 발행된 첫 일간 신문이다. 신한청년단의 <우리소식>이라는 등사판 신문이 이었고, 그 후 이광수가 사장이 되어 8월21일 첫 발행된 독립신문이 나오게 되었다.

2. 임시정부 성립 후의 독립신문

1) 독립신문의 창간

독립신문은 통합된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19년 8월 21일에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의 제호는 <獨立>이었는데 10월 25일 제22호부터 <獨立新聞>으로 바뀌었다. 화,목,토 주 3회 발행이었다. 이광수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창간사에는 이 신문의 사명을 다섯가지로 천명했다.
첫째 : 독립사상의 고취와 민심통일
둘째 : 독립사업과 사상을 우리의 신문으로 하여금 전파
셋째 : 유력한 여론을 환기하고 정부를 독려
넷째 : 문명 국민에게 불가결한 신학술과 산사상을 소개
다섯째 : 한국의 역사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개조 혹은 부활한 민족으로서 신민국을
이끄는데 노력한다.

2) 만든 사람들

사장: 이광수
영업부장 : 이영열
출판부장 : 주요한
기자 : 조동(?)
* 이광수 : 2.8독립선언서라 부르는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기초한 뒤 선언서 발표를 앞두고 2월 5일 상해로 떠나 선언서를 상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을 비롯하여 세계의 요로에 배포했으며 임시정부의 사료편찬 주임이 되어 y찬작업을 주도하는 한편으로 신문발간을 준비했다.
* 주요한 :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創造>의 동인. 3.1운동 후 상해로 건너가 <우리소식>의 편집을 맡았다가 독립신문의 출판부장으로 신문제작에 참여했다.

3) 독립신문의 성격

이 신문은 1919년 8월~1925년 11월에 종간될 때까지의 기간을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첫 번째 시기
1919년 8월 ~ 1921년 6월까지인 이광수와 이영열이 주도했던 시기이다.
이광수(사장)는 편집을 맡고 이영열(경리부장)은 자금조달등 경영을 맡았다. 그러나 창간 과정에서부터 이 신문의 구심점은 안창호에게 있었다. 임시정부의 중심인물 이었고 이광수와 주요한도 안창호의 측근이었다. 안창호를 보고 성금을 내는 경우도 많았다. 논조 또한 안창호의 영향이 커서 독립운동의 방략과 임시정부의 통합 운동 등 모두 안창호의 노선을 대변했다. 이런점에서 독립신문의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면에서 밀접한 연관성은 있으나 독자적인 언론기관으로 운영되었다.

(2) 두 번째 시기
1921년 10월~1924년 12월 까지로 김승학(김희산)이 주간 겸 경리부장을 맡았던 시기이다.
김승학은 만주지방의 독립군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만주지방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 조직 또는 개인 가운데 후원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 특징이다. 또한 신문의 영구적인 재정자립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시도해 보았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3) 세 번째 시기
1925년 1월~11월까지로 박은식이 사장이었던 시기이다.
신문의 경영은 더욱 어려운 시기였고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으나 악화된 신문의 경영을 회복시키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말았다.박은식도 노쇠했지만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상황과 국내 및 국제 정세에서 독립운동의 침체기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 신문을 유지해 나가기도 어려웠다. 내용에 있어서는 지면 전체에 독립사상이 베어있었다.

4) 중경판(重慶版) 독립신문

임시정부는 중일전쟁 후 1940년 9월에 중경으로 옮겼는데 1943년 6월 이 곳에서 중국어판 독립신문을 새로 창간했다. 타블로이드판 중국어로 제작된 이 신문은 1945년 7월 20일까지 모두 7호가 발행되었는데 창간사에는 이 신문은 상해판 독립신문의 복간이며 “3.1 대혁명이 완성하지 못한 임무를 완성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우선은 중국어판을 발행하지만 앞으로는 한국어판도 발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해외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은 마지막이 되었고 제7호가 나온지 한 달이 채 못되어서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3. 민간 3대 신문의 창간

1)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창간

<조선일보>는 친일 경제단체였던 대정실업친목회를 배경으로 창간이 추진되었다. 이 신문의 초기 임원진은 친일적인 사람들(조진태,예종석, 최강, 서만순, 권병하등)이었으나 기자들의 제작태도는 항일적이어서 빈번한 입수와 4차례의 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924년 9월에 신석우가 송병준으로부터 8만5천원을 주고 경영권을 정식으로 인수하여 조선일보는 판권이 민족진영으로 넘어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때부터는 <혁신 조선일보>라 하고 신석우는 발행인 겸 부사장이 되고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를 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사진으로는 안재홍, 백계현, 백관수, 이상협, 최익선, 김동성 들이었고 혁신 조선일보의 제작진은 대부분 동아일보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 후 경영난이 심해져 타개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못하던 중 1933년 1월에 방응모가 <주식회사 조선일보사>의 창립을 발기하여 경영권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해 9월까지 50만원의 주식회사 법인등기를 마치고 조선일보 창간이래 만성적이던 재정난을 일소하고 튼튼한 재정적 기반위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2) 동아일보(東亞日報)

김성수를 중심으로 발간이 추진되었고 사장에 박영효를 시작으로 1920년 4월 1일 출발하였다. 동아일보는 그 창간사에서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라는 세가지 주지를 밝히고 발족함으로써 총독부와 국내 수구 세력으로부터 창간초부터 탄압을 받았다. 박영효(1920.4~6월), 김성수(1920.7~1921.9월), 송진우(1921.9~1924.4월)로 사장이 바뀌었다. 동아일보는 1924년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광수가 연재한 연속사설 <민족적 경륜>이 문제가 되어 비난이 높아졌고, 3월에는 친일 폭력배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식도원에서 협박한 “식도원 사건”이 일어나서 동아일보의 명성이 상당히 훼손되었다. 사내에서는 편집국장 이상협을 중심으로 송진우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일어 여러 중견 사원들이 조선일보로 옮겨 가서 혁신 조선일보를 만들었다. 이런 와중에서 동아일보도 전열을 가다듬어 5월에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홍명희를 주필 겸 편집국장에 임명하였으나 1925년 4월에 사임하고 송진우가 주필이 되었고 이승훈도 5개월만에 사장직을 김성수에게 넘기고 고문이 되어 동아일보는 다시 김성수와 송진우를 중심으로 하는 원래의 체제로 되돌아 갔다.

3) 동명(東明). 시대일보(時代日報)---(동명에서 조선중앙일보까지)

일제가 1920년도에 허가해 준 세 개의 일간지 가운데 친일지인 시사신문의 사장이 피살된 후 한국인이 발행하는 일간지가 2종밖에 남지 않자 1922년 9월 3일에 육당 최남선과 진학문에게 시사잡지 <동명(東明)>을 주간으로 발행하도록 허가해 주었다. 이 무렵 일제는 동명 외에도 몇 개의 종합지를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해 주었다. 동명의 표지는 <時事週報 東明>이라는 제호 아래 “조선 민족아 일치합시다. 민족적 自助에 일치합시다”라는 슬로건을 크게 내걸었다. 동명은 최남선의 인기와 함께 2만여부를 발간하는 붐을 일으켰다. 그 후 동명은 1923년 6월 3일자를 마지막으로 자진 정간했다. 새로운 일간지 시사일보를 창간하기 위함이었다. 시사일보는 1924년 3월 31일 사장 최남선, 법적인 편집 발행인으로 편집국장은 진학문 이었다. 이 신문은 발간되고 있던 조선. 동아. 매신과는 달리 1면을 정치면이 아닌 사회면으로 만들었던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자금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로인한 경영권이 흔들렸다. 1926년 8월 중순까지 발간한 후 발행을 중단하게 되자 이상협이 중외일보(中外日報)로 개제하여 총독부로부터 발행허가를 받았다.

4) 이상협의 중외일보

이상협은 당시 신문계위 귀재로 아려진 사람이다. 그는 동아일보 발행 허가를 받을 때부터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초대 편집국장이었으나 1924년 동아를 나와 그의 직계기자들을 데리고 조선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한 다음 중외일보를 스스로 경영하게 된 것이다. 시대일보가 중외일보로 제호가 바뀌면서 어려운 경영상태에서도 여러 차례 압수처분을 당했다. 그 후 지금까지의 재정형편으로 인한 소극적인 경영정책을 탈피하고 적극적으로 발전성을 꾀한다 하여 8면 증대라는 언론계의 일대 파문을 일으켰으나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낳아 1930년 10월 14일 자진 휴간에 들어갔으며 1931년 9월 2일 주주총회에서 주식회사의 해산을 결의 했다.

5) 노정일의 중앙일보(中央日報)

한달 후인 10월 14일 중외일보의 제호를 중앙일보로 고쳐 총독부로부터 발행 허가를 얻었고 사장을 노정일 이었다. 비록 새로운 진용을 갖추고 제호를 바꾸어 새출발은 했으나 경영난은 여전해 사의 내분이 있었다. 경영난이 가중되자 노정일은 판권을 팔려는 기미가 보였고 사원들은 반대했다. 노정일은 5월 5일 당국에 자진하여 휴간계를 제출하여 이 신문은 창간 후 5개월 만에 “前代未聞의 더러운 역사를 남기고” 휴간하게 되었다. 휴간 5개월 이상 속간을 못하고 발행권을 살 사람을 물색하다가 조선일보의 최선익이 중앙일보를 인수하여 10월 31일 속간했다.

6) 여운형의 朝鮮中央日報

또다시 3개월 후인 1933년 2월 16일 에는 여운형이 사장에 취임하여 3월 7일부터는 제호를 朝鮮中央日報로 고쳤다.조선중앙은 경영안정과 계속적인 사보신장으로 구독자가 증가하여 동아일보를를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1936년 8월 13일자에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말소한 것이 화근이 되어 지금까지 민간지 가운데 가장 심하게 경영의 어려움을 겪었던 조선중앙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는데 휴간 동안에 뿌리 깊은 사내내분이 다시 일어나고 재정상태는 재기 불능으로 악화되어 1937년 11월 5일 발행허가의 효력이 상실되어 영영 폐간되었다.


제6장 친일 강요기(1931~1944)

1. 20년대와 30년대의 언론의 변화

(1920~1924)동안은 감정적 독립갈망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각 신문이 다투어 과격한 논조를 사용했다. 그렇지 않으면 치욕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해서 이런 민족언론의 논조를 탄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압수와 언론이 구속 등이 이루어 졌다. 이런 일제의 언론 탄압은 민족주의의 대두를 경계하는 것과 함께 사회주의 논조를 가장 위험시한 것으로 이는 일본 본토에서의 사상 탄압과 그 맥을 같이한다.
(1924~1929) 이론투쟁시대이다. 공산주의 사상이 민족의식과 서로 합류하는 시기로 일제는 동아.조선의 기사 가운데도 사회주의와 관련된 기사들을 압수했다. 또한 이 시가에 기사 압수건수가 가장 많았다.
(1929~이후) 합법적 논쟁시대이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사건 이후 온건으로 기울어 졌다. 조선일보는 신년호 1면에다 총독의 연두사와 휘호 등을 싣고 동아일보는 기원절(紀元節)기사를 1면에 3단에 싣는 지면 변화를 보였다. 이렇게 되자 기사의 압수, 삭제, 언론인 고소등 언론 탄압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에 이르는 군벌 파쇼통치의 강화기간에 민족언론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민족언론은 문자보급운동, 농촌계몽운동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2.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1) 문자보급운동

조선과 동아일보는 문자보급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1920년대 후반에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1928년 4월 1일을 기해 “글장님 없애기 운동”을 선언했고, 조선일보는 1929년 7월 14일 “귀향남녀학생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하여 이를 연례행사로 실시했다. 이 때의 표어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이었다. 동아일보도 1931년에서 193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학생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여 문맹타파와 한글보급운동을 벌였다. 1934년 제4회까지 4년에 걸쳐 약 10만명의 문맹자에게 강습을 실시하는 일대 민중운동을 벌였다.

2) 민족정신 고양

동아일보가 충무공 이순신 유적 보존운동을 일으켜 전국에서 거둔 성금으로 1932년 6월 충만 아산에 현충사를 중건했고, 조선일보는 사내에 향토문화사업위원회를 두어 민족문화를 되살리려 하였다. 이 일들은 민족정신의 함양과 민족의 독립영량 배양을 위한 노력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동아와 조선의 갈등

민간신문들이 민족을 위한 긍정적인 사업만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상업주의적인 경쟁을 벌이기도하고 지면 제작에서 반민족적인 과오를 범한 경우도 많았다. 동아와 조선이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 것은 1933년 방응모가 조선의 경영권을 맡으면서 부터였다.
김성수(동아일보)는 1891년 전북에서 태어나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24세에 중앙학교를 인수해서 26세에 교장에 취임했다. 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창립했으며 29세인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그 당시 근대식으로 사업을 벌인 재산가가 있다면 누구든지 김성수를 첫손에 꼽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였다.
방응모(조선일보)는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할 때 까지는 사회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골 사람이었다. 1923년 30세때 동아일보 정주(定州) 지국장을 맡았다가 금광에 손댄 것이 백만장자가 되어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동아에서 중추적이었던 이광수, 김동진 등을 무더기로 조선에 끌어들여 동아일보를 맹렬히 추격해 나갔다.
이 두 신문의 경쟁상태는 1935년 6월에 공개적인 정면격돌로 폭발하였다. 조선일보에서 보성전문의 신입생 초과문제를 보도하여 이 문제로 교장인 김성수가 인책 사임했고, 학생들이 재판에 이르게 까지 되었다. 동아일보도 방응모가 국유림을 대부 받으려 한다는 기사를 싣고 이 국유림 안에 있는 화전민 천여명과 관계주민 8천여명의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사학을 대표하는 교육기관과 언론기관이 서로 치부를 들추며 싸우는 데 일반의 여론은 몹시 나빴다. 더구나 모두 민족의 힘을 모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던 때였으므로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 잡지 <삼천리>와 <쩌-날리즘>은 대대적인 특집으로 두 신문의 감정적인 싸움을 성토했다. 조선과 동아는 신문 과 잡지 양면으로 경쟁이 확대되어 동아일보는 1931년 11월에 <新東亞> 1933년 1월에 <新家庭>등의 월간잡지를 발행하였고, 조선일보도 1935년 <朝光>을 창간한데 이어 <女性>,<少年>,<幼年>등을 계속 창간하며 경쟁했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부터는 총독부의 어용지인 매일신보와 논조에서 큰 차이가 없어졌다.

4) 조선, 동아의 폐간

두 가지의 이유로 자진폐간이 되었다.
첫 번째 이유는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인해서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을 없애려 했고
두 번째 이유는 전시체제하에서는 물자부족으로 일본 전역에 걸쳐서 신문사를 정비한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국어 신문에 대해서도 총독부는 매일신보 하나만을 남긴다는 방침아래 1940년 초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자진폐간을 강요하였다. 총독부는 조선과 동아를 폐간시키면서 양 신문의 영업권을 매일신보가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양 신문에 보상금을 지급하는 한편으로 양 신문에 근무하던 언론인 가운데 일부를 영입하였다. 이로써 1940년 8월 10일 양 신문은 동시에 자진폐간 하였다. 이로써 3.1운동의 결과로 일본이 문화정치를 표방함에 따라 1920년부터 발행되었던 민간신문은 명맥이 끊어지고 또다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독무대가 되었다.

(자료출처 : 국민의 힘)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2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