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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과 주체사상의 만남/홍동근 목사 운명 1주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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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2-11-08 00:00 조회5,7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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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홍동근 목사가 평양방문중 운명한지 벌써 1주기를 맞았다. 민족통신 독자란에 통일신학님이 11월 11일 1주기를 추모하며 다음 글을 올려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1]

hongdongkuen.jpg"....1990년 이래 내(홍동근목사)가 김일성 종합대학 종교학과와 평양신학원에서 초청교수로 기독교신학을 강의하면서 봄과 가을학기마다 북의 조국을 방문했을 때 주석의 회고록을 나올 때 마다 읽고 독후감을 계속 쓰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요, 감격이었다.

특별히 구약성서 "출애굽기"를 강의하면서 나는 지도자 모세의 출애굽 해방투쟁을 김일성 장군의 항일 유격대 민족해방전쟁과 대비하여 그 성서적 의미와 우리 민족사적 의미를 자주 음미했다.

출애굽사건이야말로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츠가 언명한 대로 "정치적 해방" 사건이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종살이땅 애급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민족을 탈출케 한 정치적 해방인 것이다.

그리고 이 출애굽의 하나님은 모든 억압받는 피압박민족의 하나님이며, 우리 민족의 해방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김일성대장을 불러 일찍이 지도자 모세가 "하비루"(천민 또는 민중) 들을 이끌고 애굽제국과 투쟁하여 출애굽을 한 것처럼, 소농, 화전민, 머슴의 자녀들로 항일무장 유격대를 만들어 일제를 치고 무원고립의 간도 동포들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동북만주에서 막아 아시아의 평화를 보위하여 마침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민족해방의 출애굽을 이룩하였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구원사에서 김장군과 그의 사람들로 모세와 이스라엘 하비루의 출애굽을 담당케하신 것이다.

[2]

주석의 회고록은 우리들에게 많은 새 사실들을 계시하며 그 속에서 우리는 깊은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또한 발견한다. 이것은 통일조국을 열망하여 북을 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며, 우리들 인생의 의미를 해석하는데도 큰 감명을 준다. 여기 간단히 예거하여 주석과 그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정신적 의미를 생각한다.

1) 주석이 처음 기독교배경의 가정분위기를 회고록에서 제시한다.
특별히 어머니편 외가의 돈독한 기독교전통은 주석으로 종교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없이 평생 관용을 지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 강반석여사의 강직하면서 자애롭고, 애국적이면서 겸손한 자기 희생적 삶은 기독교부녀상의 모범이다.

2) 주석이 또한 처음 부친 김형직선생의 독립운동의 동지들과 활동무대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으며 교회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선생이 창립한 "조선국민회"(1917)의 창립동지들인 이보식, 배민수, 백세민 등도 다 기독교학원 숭실학교의 동문이며, 후일 목사와 신도 지도자들이 된 사람들이다. 이보식목사는 내고향 교회 목사였으며, 조선국민회는 의주, 피현, 강계 등 전국 어디서나 교회가 근거지와 활동무대가 되었었다. 1920년대 교회의 애국적 분위기를 알 수가 있다.

3) 부친 김형직선생과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들이 기독교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그들에게 신앙과 애국은 하나이며 민족해방은 교회선교의 제일과제였던 것을 처음 공개하였다.

손정도, 최동오, 양세봉, 오동진, 리관련, 장철호 등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독립단 사령들이 모두 기독교신자요, 민족주의 애국자들이었다. 주석은 이들 부친동지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을 회고하였다.

4) 주석의 부모를 위시하여 (기독교)가족 모두가 항일독립운동에 일찍이 투신하여 감옥과 무장 투쟁에서 죽고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부친이 감옥의 고문으로 어머니가 가난과 병고로 각각 30과 40에 별세하였다. 삼촌 김형권동지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동생 철주 또한 전투중 전사하였다. 막내 영주는 행방불명이 되어버렸고, 외삼촌 강진석선생도 15년 옥고 끝에 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광복된 조국엔 주석 혼자 돌아왔다. 조국과 민족의 사랑에 모두 순사(殉死)한 성가족(聖家族)이다. 어느 기독교신자들이 대를 이어 구국에 자기를 버리고 순교했던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 (요한복음 14:13). 예수님의 말씀이다."
(홍동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pp. 10-12)

"사람은 일찍이 멸시했었던 것을 후일 새삼 존경하여 잊지 못할 때가 있다. 내게 있어서 주석이 그러하다. 어려서 그의 전설 속에 자라나 학교에 가며 일제의 반공교육과 해방후 교회 반공운동의 영향을 받아 그는 "가짜 김일성", "소련의 앞잡이", "공산주의 무신론자", "폭력혁명당" 등의 죄명으로 무조건 불신하고 반대하게 되었다. 그의 혁명 투쟁도, 사상도, 민주개혁도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평가해 볼 바탕도 뜻도 없었다. 인민학교 교원을 하면서 나는 정면으로 반대하고 끝내 파면되고 곧 체포령을 받았다. "애국가"(박세영 작)대신 찬송가를 부르고,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빨치산혁명가"를 부르면 벌했었다. 반세기를 지나는 오늘,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린도전서 13:11)
....
지난 10여 년, 나는 성경과 예수님 다음으로 김일성주석과 북의 조국을 무엇보다 더 많이 읽었다. 그의 생애, 혁명관, 세계관, 지도자적 덕성에서 맑스, 레닌, 모택동, 호지명 이상의 매혹과 친근감을 받았다. 몇번이고 그 전기를 써서 남의 동족에게, 특히 동료 기독자들에게 나누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러내 내게는 문재(文才)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생전에 못해 드린 것이 유감이다. 또 한가지 내가 주석의 존함을 모신 김일성대학 초청교수가 되어 기독교를 강의하면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저술하여 그에게 올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성경에 누가가 "데오빌로"각하(누가 1:3)에게 복음서를 쓴 것을(처럼) 말이다.

주석의 생애와 사상에는 기독교적 의미가 많다. 그래서 이번 대학강의에서 주석을 추모하여 "김일성 주석과 그 기독교적 의미"를 강의하였다.
지난 50년 주석을 가장 멀리했던 기독자들과 이를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주석이 일찍이 일요선거와 토지개혁을 반대하여 거부하는 기독교목사들에게 "조선의 예수를 믿읍시다. 미국놈의 예수를 믿지말고요"하고, 또 "조선의 하늘보고 기도합시다. 미국놈의 하늘보지 말고요"했었다. 남의 토착화신학논쟁 20년전 일이다. 오늘 50년후 그 의미를 알만하다.
....
독일작가, 루이제 린저 여사는 이 주석의 고상한 덕성에 매혹되어 북을 8번이나 방문하고, 주석의 "현지 지도"를 따라 조선의 산촌과 농장을 즐겨 동행했다 한다. 그녀가 북조선 사람들은 신학자 칼 라아너(Karl Rahner)신부의 말처럼, "익명의 그리스도인들"(Christians Incognito)이라고 찬미하였다. 즉 입으로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으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란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처럼 서로 사랑하고 봉사해 산다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멸시하고 저주했었던 분, 김일성 주석을 반공기독자 중 먼저 만나 화해하고 새삼 존경하여 모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갈라디아 5:13)와 "화목케하는 직책"(고린도후서 5:18)외에는 하나님께로 받은 특권이 없다. 이제 남북의 정상회담도 성공적으로 실현되어 통일의 문이 열리는 날, "보안법"도 철폐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합법화될 것이다. 모든 이념과 사상이 법아래 자유하게 될 것이다. 그때 공산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이념에서가 아니라 그 인격의 도덕성과 생활의 애국적, 인도적 가치에 따라 평가되고 민족사에 기록될 것이다...."
(홍동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pp. 425-27.)

..., 김주석의 기독교 체험과 민족적 교회에 대한 열망은 기독자인 우리들에게 깊이 생각게 한다. 주석이 기독교신앙의 가정에 태어나고 어머니 따라 예배당에 다녔던 것은 자신의 말대로 사실이다. 엄숙한 종교의식과 단조로운 목사의 설교가 싫어 잘 가지 않았었다. 예배를 구경하는게 재미없었다 했다. 자라서는 "예수의 복음이 우리 인민이 겪고있는 비극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제1권, 103쪽)고 느껴서 잘 가지 않았다. 그래 아버지 김형직 선생은 "너는 예수보다는 자기나라를 더 믿고 자기 나라 사람을 더 믿어야 한다"(제1권, 103쪽)고 가르쳤다 한다. 예민하고 민족적 관심이 더 많았던 소년에게 당시 개인적 복음의 교회는 재미가 없고 실망의 장소였다.
그러나 주석은 고향에서나 만주길림에서나 교회를 떠난 적은 없었다. 그의 비판대로 교회가 인민이 겪고 있는 비극을 자기 것으로 받아드리고 거기 구원의 손을 뻗는 참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던들 그는 그 교회의 열성당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고백대로, "예수의 교리 가운데 인도주의적인 것이 많았으나, 민족의 운명을 두고 깊이 고뇌에 빠진 나에게는 구국에로 부르는 역사의 외침 소리가 그보다 더 절박하게 들려왔다"(제1권, 103쪽). 그래 길림시절에는 애국자 손정도목사를 고문으로 모시고 길림교회에서 "조선인 길림소년회"와 "조선인 유길학우회" 등을 조직하여 합법적 민족운동을 했던 것이다. 그때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지하조직을 만들어 지하활동을 동시에 했었다. 손목사는 이를 받아들이고 교회 안에서의 학생들의 애국운동을 지도했던 것이다. 오늘 자기 나라에서도 교회의 정치참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쉽지 않다.

주석은 가정적으로, 특별히 외갓집의 신앙적 분위기 속에 성장했으며, 그 부친과 함께 개인적 경건의 복음보다는 민족의 해방과 사회의 정의를 열망하는 신약시대의 제롯당(열성당)이나 또는 오늘의 해방신학자들처럼 "해방자 예수의 복음"을 더욱 믿었던 사회복음적 신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래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는 결사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다"(제1권, 242쪽)고 했었다. 그러나 주석의 젊은 날도, 또 부친의 조선국민회 운동시대에서도 모두 교회를 중심하고 교인 중에 애국적인 신앙양심과 사람들을 규합하여 활동하였다.

이 주석이 후일 조국이 해방되어 첫 인민정권 선거를 주일날 하게되면서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직면했을 때 교회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안식일 치료"를 들어 호소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주석이 그 젊은 날을 대를 이어 교회를 출입하였으나 민족구원의 불타는 열망을 기독교복음에서 찾지 못한 것은 크게 유감이다. 그것은 3.1 운동 후 민족교회에서 선교사적 교회로 변질하여 역사적 기독교가 관념적이고 보수적인 비정치적 교회로 변질한데 있다. 이 교회를 일찍이 이동휘, 여운형, 조소앙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신도들이 중도에 떠났다. 교회문 밖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고독히 실천한 것이다. 주석과 부친 김형직 선생도 예외가 아니다. 부친의 숭실중학 퇴학은 상징적이다. 많은 애국인 지식인 신도들을 교회가 내몰아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에로 개종했다. 교회의 선교적 실패이다.

주석이 그러므로 그 성장과정에 기독교적 영향은 많이 받지 못했으나 "기독교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는 도움은 많이 받았다."(제1권, 104쪽)고 고백하였다. 이처럼 기독교와 친근히 했었던 젊은 날이 회고록에서 비로소 공개되었다. 그가 1981년 김성락목사가 북을 방문했을 때 그를 오찬에 초대하고서 "우리 가운데 목사가 계시면 기도를 드려야 밥을 얻어먹지 않겠소?"하며 친절히 기도를 권했다는 것은 유명한 말이다. 그에게 기독교가 생소한 것이 아니다. 오직 "맛을 잃은 소금"으로서의 교회가 무의미했다. 그래 때론 기독교 목사들에게 "미국의 예수 믿지 말고 조선의 예수를 믿읍시다"하고 또 "미국의 하늘보고 기도하지 말고 조선의 하늘을 보고 기도합시다"고 권유했었다 한다. 그것은 토지개혁 반대 때도 똑같이 교인들에게 한 말이라 한다.

그러나 오늘 80-90년대에서 상황은 크게 변화했다. 문익환목사가 북을 방문하고 임수경양과 문규현 신부가 평양을 찾으면서 북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지고 남에서의 통일운동도 크게 고조되었다. 그중 N.C.C의 통일운동, 통일신학동지회 운동, 또 "범민련" 통일운동 등, 국내와 해외 주력이 모두 기독교목사와 신도이다. 주석과 북의 동포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책임을 지는 새 기독교를 발견한 것이다. 이 새 기독자들이 북의 국가 체제를 인정하고 공산주의자들과 대화하여 민족통일의 성업에 같이 협력할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선교의 메시지로 받은 것이다.

여기 주석이 기독교에 대한 신념을 이처럼 피력하였다. "온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게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적 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나의 사상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제1권, 104쪽). 기독교인도주의에 대한 주석의 인정과 평가를 이처럼 공개적으로 표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또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의 정신으로 모두가 도와주고, 고락을 함께 하면서 화목하고 단결된 하나의 대가족을 만들 수가 있다는 그의 공산주의 사회 이상도 맑스. 레닌주의적이기 보다는 동양적이며 유교적인 대가족 유토피아를 생각게 한다. 이 소박하고 민족적인 공산주의 신앙에서 해방직후 교조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종파공산주의자들과 고전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종교인과 인텔리는 무조건 반동으로 몰리고 추방되었다. 그들이 급진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할 때 주석과 빨치산 공산주의자들은 근로자 대중뿐 아니라 종교인, 인텔리, 애국적 자산가도 포함한 인민연합정권을 원했던 것이다.
....
주석이 기독교로부터 종교적 영향은 받지 못했으나 기독교신자들에게서 도움은 많이 받았다고 했다. 생각건대 교회로부터 직접 신앙적, 교리적 영향은 받지 못했었으나 아버지의 예언자적 정의감, 어머니의 마리아적 인고의 사랑 그리고 손정도, 오동진 등 기독교 애국자들의 희생적 실천의 기독교 전통을 몸으로 받은 것이다. 회고록 속에 비치는 주석의 인간중심의 사회주의와, 동지애와 의리감엔 기독교적 의미가 많다. 본래 정의와 평등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맑스 이전에 기독교 성서에서 온 것이며 사랑은 또한 기독교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주석의 천재성이 이렇듯 가정과 인간관계에서 기독교 인도주의의 전통을 사회주의 내용에 종합하여 주체사상의 세계관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
"민족이 없이 공산주의는 해서 뭣하고, 민족주의는 해서 뭣하고, 하나님은 또 믿어서 뭣하겠는가", "조선의 하늘을 보고 기도하시오." 주석의 말이다.
(홍동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pp. 6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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