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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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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동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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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2-02-06 00:00 조회4,7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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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과 가진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

신 형석 / 기자


0205-3.jpg"그리스도교인들은 지난해 평양에서 발표된 6·15남북공동선언의 이행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와 자주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북과 남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외세가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조선반도에 대한 무력행위를 하려고 하는 데 대해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단호히 반대할 것입니다."

작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평양에서 조선 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강영섭 위원장과 남측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동완 총무가 함께 발표한 공동기도문 내용 중 일부이다.

12월11일에 공동발표 하였으나 남측에는 성탄절에 즈음하여 연합늦게 소개 되었다.
"우리 딸들이 자주민보와 인터뷰를 한다고 했더니 꼭 하라고 하더군요"

"따님들이 자주민보를 알고 있습니까?"

김동완 총무의 큰 딸 계리씨는 재작년 "한국전쟁 50주년 백악관 앞 시위"를 위해 김동완 총무를 속이고(?) 한총련 대표로 미국에 갔다 왔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 딸 예리씨는 2001년 중앙대학교 서울 캠퍼스 부총학생회장으로 아직도 수배중에 있다.

"집사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죠. 젊어서는 내 옥바라지하느라 고생하고, 내가 이제 고생 안 시키니까 큰 녀석, 둘째 녀석 땜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니까, 아주 괘씸한 놈들이야…. 그래도 허튼 짓 하는 것보다야 낫지만요"

아버지 세대가 자식세대에 분단을 물려준 것이 집안문제가 되었다는 김동완 총무. 9·11 테러사건 이후 남북 관계에 찬바람이 불던 작년 마지막 자락에 방북하여 성탄절 공동기도문을 발표해 세간을 놀라게 했던 장본인이다.


■"기독교" 하면 통일운동과는 좀 거리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70년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80년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되었지요.

우리가 그토록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까요. 그 반성은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교회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개인에게는 원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그 원죄가 있습니다. 바로 "분단"입니다. 분단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외세와 우리 내부의 반공보수주의자들에 의해 또다시 광주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통일운동가라는 평가를 받고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통일운동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궁급합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에게도 인생의 전환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전태일 동지가 죽기 3년 전에 그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당시 남산동 50번지에 살다가 화재가 나서 창동에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저는 인하공대를 졸업하고 기도운동을 하고 있었구요.

이때 제가 창동 천막촌에 교회를 지어주러 가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가보았더니 천막촌의 지도자가 전태일 동지의 어머니인 이소선씨였어요.

그렇게 해서 이소선씨의 집에서 전태일 동지와 함께 살면서 1년 동안 감리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교회공사가 끝나자 삼각산에서 기도원을 지어달라고 해서 전태일 동지와 함께 1년 정도 함께 지내며 교회를 지어주었지요.

그 후에 나는 감리교 신학대학에 편입하고 학생회장이 되어 일을 했고 전태일 동지는 평화시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11월13일 그가 분신자살을 한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에겐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알던 전태일이 분신이라는 방법을 통해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전태일 동지의 장례를 치르고 평화시장에 가보고는 생각이 바뀌어서,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빈민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개인적으로는 운동과 직접적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예요. 그 뒤로 남산야외음악당 사건으로 감옥에도 가고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85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와서도 1년에 한 번씩은 5월만 되면 감옥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운동을 하게 되다 보니, 어느새 인권운동을 하고 있었고, 인권운동은 다시 저를 민주화운동의 자리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민주화란 있을 수 없다는 광주의 교훈이 평화통일운동을 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작년 평양 봉수교회에서 "평화통일을 위한 8·15남북교회 연합예배" 설교 중 남북의 교회가 20년 동안 계속 만남을 가져왔다고 하셨는데요

"광주 이후 80년대 초반은 통일하면 빨갱이,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교회는 유물사상을 반대하기에 그런 공세의 여지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통일운동에 더욱 나서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82년 초, 전두환 정권의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 통일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때 참 에피소드가 많아요.

올림피아드 호텔에서 통일위원회를 조직하려고 했는데 호텔 측이 보일러가 안 된다면서 객실 전체를 폐쇄한 거예요. 할 수 없이 고민 끝에 일본에서 모임을 가지고 통일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85년에는 미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통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그후에도 해외에서 이북의 교회와 만나기도 하고 91년, 97년, 98년에 평양을 다시 방문했지요. 이렇게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면서 88년도에는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이라고 하는 것에 두 가지 원칙을 더하였습니다. 민중참여의 원칙, 인도주의의 원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선언문이 발표되자 대학가에서는 호응과 지지가 대단했고, 여기 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는 연일 반공주의자들의 항의와 시위가 잇따랐습니다. 양극단에 서 있었던 샘이지요."

■ 그 기간에 남북 교회가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제5차 "글리온(Glion) 회의"를 세계교회협의회(WCC) 등과 협의하여 2002년 3월11일부터 16일 사이에 금강산에서 개최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글리온 회의는 남북의 교회가 86년에 서울이나 평양에서 만나기가 어려워서 스위스 제네바 부근의 "글리온(Glion)"이라는 곳에서 만난 것이 유례가 되어 붙여진 회의 이름입니다.

이때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최초로 만났고 다시 88년과 90년에 이 곳에서 또 한번 만났지요. 95년에는 도꾜에서 만났구요.

올 3월에 하기로 한 5차 회의에 대해서는 작년 12월 방북 때 북측에서 "정국이 복잡해져서 좀 고려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알다시피 9·11사건 이후 미국이 북을 테러지원국, 대량학살무기 생산국 등 이런저런 이유로 불편함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노력을 하겠지만 연기가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처음 북의 기독교인들과 만났을 때는 남북이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게 조심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평화통일을 위해서 남북 교회가 무엇을 할 지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8·15통일축전의 씨앗이라고 자부하고 있는데, 민족평화통일을 위한 8·15축전주일을 세계교회협의회와 함께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95년에 만났을 때는 북측에서 장기수 송환을 요구해서 뜨거운 이슈가 되기도 했어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연고가 없으신 장기수분들이 감옥에서 나오셨을 때 교회에서 탕제원을 만들어 도움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올해 평양축전에서 소위 "만경대 사건"이라고 불려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3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는 남측 참가단의 지도부가 없었다는 것, 둘째는 각양각색의 색깔을 지닌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는 것, 셋째는 가기 전날까지 "간다, 못 간다"의 논란 속에 교육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래도 사고가 크지 않았다고 봅니다. 저는 더 큰 일이 생길까 걱정을 했는데 말입니다.

사전에 먼저 가 본 사람들이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평양을 세 번 정도 가보았던 저 같은 사람이 교육을 시켰어야 했는데 전혀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지난 2000년 6월 신앙계에 실린 스티브 린튼 박사(유진벨재단 이사장)와의 대담에서 남과 북의 통일문제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총무님께서는 통일에 있어 외세가 아닌 7·4남북공동성명에서 밝힌 3가지의 원칙에 따라야 된다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동선언의 탄생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아주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9·11 사건은 우리 민족의 통일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고 봅니다.

이 사건만 없었어도 남북 관계는 공동선언에 기반하여 상당히 발전했을 것입니다. 부시 정부가 무슨 말을 했건 말입니다.

지금은 민족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또 다른 외세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한 일환으로 작년 남북 교회가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은 미국이 북을 공격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대량무기를 만든다는 이유를 들어 북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세계교회협의회와 함께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신년인사를 통해서도 발표했습니다.

북한의 아픔은 우리의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가 북한을 공격하면 좋아할 줄 아는데 절대 아닙니다. 북을 공격하면 그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더욱 큰 어려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지닌 분들도 냉전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북을 대하면 안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숨을 몰아 남과 북이 한 걸음 더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통일의 이 도도한 물줄기를 이제는 누구도 돌릴 수 없다고 봅니다."

■대담자리에서 통일문제에 있어 "상호주의"는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하셨는데요


"북의 기독교보다는 남의 기독교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돈도 많고 사람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을 나누어줌으로 평등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2000년 11월20일 발표하신 "21세기 한국기독교 신학선언"을 통해 "한국기독교가 지나친 반공 기독교의 입장을 내세워 북한을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하는 등 남북분단과 갈등의 심화에 한몫을 한 것을 하나님 앞에 통렬한 마음으로 고백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월간조선"이 문제 삼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김대중 대통령과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87년도에 후보단일화를 두고 갈라진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김영삼씨 단일화론을 주장했던 쪽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시 김대중씨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비판했던 쪽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데 감명을 받았어요. 그리고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문제였던 언론에 대해서 개혁하는 것에도 찬성 입장을 밝혔습니다.

아마도 언론개혁에 찬성 입장을 보인 종단과 대표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객관적이지는 못했습니다. 보수적인 교계 지도자들의 이야기만을 다루었으니까요.

언론은 총보다 무섭고, 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제발 객관적이고, 통일 지향적이고, 민중 지향적이었으면 합니다. 당시야 조·중·동이 사장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돌아서야 합니다.

특히 올해는 양대 선거가 있습니다. 언론이 객관적이기를 바랍니다."


■어려움도, 즐거움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내가 운동에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지만, 사랑하는 교우 전태일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참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11월14일 신문 1면에 실린 전태일의 죽음을 접하고,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때가 아마 가장 힘들었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즐거웠을 때라? 가장 보람이 있었을 때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인민군 사열을 받는 장면을 보고는 "이제, 되었구나"라는 감동을 받았어요.

그러나 젊은 세대는 분단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기를 바랬는데 우리 애들도 한총련 수배자가 되어 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여기서 끝내야 됩니다. 또 대물림을 해서는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올해 온 국민이 힘을 모아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양대 선거에서는 통일문제를 정쟁의 문제로 삼는 정치인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건 민족의 문제입니다. 어느 정권의 문제가 아니에요.

올해 또다시 통일의 문제를 가지고 정쟁을 하고, 통일의 물결을 돌려놓으려는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나서서 표로 심판해야 합니다.

선거 때만 되면 북풍이니, 뭐니 하면서 과거에 했던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덕담을 부탁드립니다

"통일교육에 대해 혼신의 힘을 쏟는 젊은이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닥이 넓어집니다. 북한문제도 중요하고 외세를 척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군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바닥이 든든해야 하며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지난 8·15 평양행사에서 3백여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해방이후 처음으로 일사불란하게 행사를 치루려고 노력하고 왔습니다.

비록 수고했다고 꽃다발을 주지는 못할망정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왜 이런 현상이 있었겠는가? 평화통일에 대한 교육이 부족해서 나서는 현상입니다.

평화통일교육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북과 나누려는 것과 함께 바닥을 넓히려는 교육을 양손에 쥐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 딸들이나 한총련 학생들에게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학생운동이 가장 옳고 떳떳했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나 방도는 더욱 많이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이적단체에 대한 문제를 풀려고 더욱 노력을 해야 합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모습이 필요하며, 좀 더 넓게 폭넓게 가야 합니다.

아버지와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한총련이 되기를 바랍니다."

<월간 자주민보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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