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근 목사 서거와 미주의 자주민주통일 운동사(70~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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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1-11-23 00:00 조회4,32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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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홍동근 목사님이 2001년 11월11일 정오 평양에서 서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국열사릉>에 묻히셨습니다. 고인의 서거에 조의를 표합니다. 저는 로스엔젤레스의 젊은이들로 구성한 <통일맞이 나성포럼>이 조직되어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동안 미주운동사에 관하여 개괄적이나마 정리해 본 글이 있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미주의 자주민주통일운동사에서 특히 홍동근 목사님의 발자취는 어디에든 남겨졌기 때문에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미숙한 글이지만 고인의 서거를 생각하며 이글을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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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운동사(70~80년대)
*글: 하 용진(통일맞이 나성포럼 사무국장)
미소간의 군사적대치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미국의 산업구조는 군수산업과 우주항공산업등의 첨단과학사업에 주력케 된다.이런 가운데 기존의 제조업 부분의 생산과 소비를 담당할 계층의 필요성에 의해 미국은 1965년 이민법의 개정을 통해 이민의 문을 대폭 개방하게 된다.
초기 하와이 이민이후 폐쇄되었던 이민은 50~60년대 전쟁고아와 국제결혼여성, 유학생과 종교재단에 의해 소수의 이민자가 유입되던 상황에서 70년대는 제2기 이민이라 불리우는 본격적 이민의 새장이 열린 것이다.
한편 국내는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부는 자신들의 영구집권을 위해 반공의 기치하에 또다시 유신쿠데타를 자행한다. 이 무렵 전태일열사의 항거에 고무되어 조국근대화의 미명아래 숨죽이던 노동자와 양심적 지식인 그리고 학생들은 현 사회의 모순에 눈 뜨기 시작하고 반유신, 반독재의 대열로 서서히 나서기 시작한다.
유신에 반대하여 애국민주세력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유신정권은 통혁당, 인혁당사건을 비롯한 용공조작으로 애국민주화세력을 말살하고 긴급조치를 발동해 말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을수 없는 암흑세상으로 전 민중을 몰아 넣었다.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제거된 정치인과 유신의 횡포를 못견딘 양심적 지식인들이 대거 확대된 이민의 길을 걸어 미주로 이동해 오게 된다. 국내가 유신에 의해 철저히 침묵을 강요받고 있을 때 이곳 미주에서는 이들의 주도로 반유신, 반독재투쟁을 외치며 조직화 된다.
이는 일제하 국내의 억압상황을 피해 만주, 미주에서 독립운동의 근거를 마련한 것 같이 미주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숭고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시 미주운동을 이끈 조직으로 뉴욕중심의 동부는 73년경 임창영, 노광욱, 지창보, 고원이 중심이 되어 재미민주한인협회가 결성 되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 76년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으로 발전하면서 통일운동에도 주력하게 된다.
서정균의 해외한민보가 미주민련의 대변지 역할을 하였고 자매조직인 이보배여사가 이끄는 여성동우회가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LA중심의 미서부는 김성락, 차상달, 홍동근이 중심이 되어 73년 8월에는 조국자유수호동지회가, 74년에는 남가주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어 조국의 민주회복과 유신철폐운동을 근간으로 김대중지지와 양심수 석방등 국내정치지원운동을 전개해 갔으며 70년대 말에는 노의선, 김성락이 주도하여 조국통일촉진회가 만들어져 이북알기사업을 전개하면서 통일운동에 발길을 딛는다.
이외 홍동근, 최진환, 홍윤호가 중심된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와 예정웅, 문성철의 청년그룹이 결성한 4.19선양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1980년 광주항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시기를 전후하여]
18년 철권 통치의 유신도 부마항쟁을 깃점으로 그 파열을 맞게 된다. 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울려퍼진 한 방의 총소리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그것은 자유이고 희망이었다.
서울의 봄, 얼어 붙었던 몸과 마음을 열고 그 어느때 보다도 따스러운 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국의 민주화와 새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자랑스러운 이민의 삶을 살고자 했던 동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유신독재를 피해 그리운 강산을 눈물로 떠나 미주로 이주해 망명아닌 망명생활을 감수해야했던 수 많은 동포들에게 있어 그 감회는 더욱 가슴 뜨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열기가 무르익기도전 일단의 군인무리들이 정권탈취를 위한 음모들을 하나씩 진행시키고 있었다. 12/12쿠테타로 집권의 기반을 마련한 그들은 마침내 남도 광주에서 피의 살육을 자행하면서 이땅의 민주주의는 한낮 꿈으로 남아야했다.
<<5.18광주항쟁>>
야수적 만행에 맞서 광주의 민중들은 의연하게 싸워 나갔고 장열한 죽음은 자주,민주,통일의 역사에 깊이 아로새겨진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운명을 규정한 일대변혁이었으며 이곳 미주에서도 운동사에 획을 긋는 계기가 된다.
분노는 산과 물을 건너 이곳 미주에서도 연일 광주의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가 영사관앞에서 있었다. 오히려 국내의 모든 언론이 통제된 반면 미주의 동포들은 외신을 통해 광주의 진실에 대해 접근할 수 있으므로 해서 전두환 일파의 야심을 꿰뚫고 반 전두환 투쟁에 즉각 나설수 있었다.
LA의 경우 그 투쟁의 중심에 김상돈을 대표로 국영길, 노길남, 김운하, 차상달을 중심으로한 한국민주화운동협의회가 조직되어 전두환 일파를 규탄하는 집회와 대책회의를 통해 그들의 만행을 동포사회와 미진보세력에게 알려 나갔다..
80년대초 광주항쟁 지도부의 일인이었던 윤한봉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미주운동은 새로운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미주 각지역에 산재해 있던 의식있는 청년들이 윤한봉을 중심으로 뭉쳐 미전국적 청년조직인 재미한국청년연합이 결성되어 미주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오랬동안 활동하게 된다.
레이건의 등장으로 미소간 무한 군비경쟁의 시대를 열고 냉전의 첨예한 대립은 결국 한반도의 대치상태를 더욱 격화 시켜간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 상황속에서도 해외의 동포들은 남북의 화해와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들을 끊이지 않았다.
미주의 선우학원과 유럽의 이영빈등 기독교학자들이 주도가 되어 1981년 11월말 비엔나에서 남.북.해외 기독자회의가 개최되어 분단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북과 남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는 다음의 헬싱키대회에 까지 이어지면서 미주통일운동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직선제개헌의 쟁취로 불타기 시작한 6월민주화대투쟁의 열기가 이곳 미주에서도 활화산 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두환정권을 비판하는 성명과 집회가 연일 있었고 한때 최루탄추방대회에서는 아드모어공원을 발디딜틈 없이 가득 매운 가운데 코리아타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6월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의 열망으로 국내와 마찬가지로 이곳 미주에서도 조직활동의 본격화가 시작된다.
그 대표적 단체로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의 결성을 들수 있는데 비교적 북한방문이 자유로울수 있었던 미주의 이산가족들은 자신의 혈육을 찾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들 가운데 몇분의 학자들이 북한 방문기 <분단을 뛰어넘어>를 저술하게 되었고 이는 국내에 이북바로알기운동을 촉발케 하면서 그 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통일문제를 전면화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앞서 기독자회의가 계기가 되고 <분단을 뛰어넘어>가 고무추동이 되어 87년 6월 양은식, 선우학원, 홍동근, 전순태, 서정균, 김현환, 김동수등이 중심이 되어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가 창단 된다. 통협은 이산가족찾기를 핵심사업으로 전개하여 이를 통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북을 방문하게 되고 미주통일운동의 역량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또한 미주범민련결성을 주도하는등 미주통일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87년에는 LA에서 민주화운동의 물적토대구축과 중소상인의 조직을 위해 한민족연구회가 노길남, 유상준, 손세영등이 중심되어 결성되었다. 한민족연구회는 이후 민족상과 민족장학상을 제정 미주 운동의 활동을 고무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외 홍동근, 김현환, 홍근수, 강문홍, 강위조등 기독교인이 중심이되어 종교적입장에서 통일에 접근하고자 했던 통일신학동지회가 있었다.
86년 10월 대부분 1.5세들로서 지배문화에 대항해 생산적, 민중문화를 퇴폐, 외래문화에 맞서 1.5세로서 자아를 확립하고 우리민족문화를 찾고 계승하기 위한 취지를 내걸고 민중문화연구소(민문연)가 창립된다.
민문연은 매년 봄,가을로 범대중적 문화재를 개최하여 동포사회에 진보운동의 입지를 확대하였고 각 한인학생회를 통해 우리문화를 보급하고 민문연의 취지를 전파해 나갔다.
또한 6월 항쟁 당시 LA지역에서 대규모 민주화투쟁을 선도해 갔으며 이후 상항의 청년문화원, 뉴욕의 우리문화찾기회등 미주 타지역의 문화운동조직이 결성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민문연은 이후 민청, 우리문화공동체로 변화,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LA 청년조직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의의를 갖는다.
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고조되어가던 민중의 민주화열기는 마침내 조국통일의 열망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88년 들어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선거에 출마했던 한 후보가 남북학생회담을 제안 하면서 4.19이후 암흑의 시대속에서 신새벽 뒷골목에서나 외쳐야했던 조국통일이 급기야 전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고 전국 각 대학의 지지속에 6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고 수용하면서 88년은 마침내 통일운동의 새원년으로 기록되게 된다.
그러나 6월의 학생회담은 노태우정권의 필사적 저지로 말미암아 피튀기는 공방 끝에 결국 무산되고 8월 15일 재차 판문전에서 회담을 가질것을 결의한다.
88년 7월 어느날 조국통일을 외치며 한 학우가 교내옥상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조성만>>
조국의 통일. 목숨받쳐 싸워야할, 민족의 운명이 걸렸고 모든 모순의 근본이 깔렸고 그래서 조국통일 없이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수 없다는, 통일만이 민족이 살길임을 알게 했다.
이제 암흑속에 억눌렀던 조국통일의 함성은 전국 각지 각 단체의 지지를 받게 되고 이곳 미주에서도 지지성원과 더불어 통일운동의 불길이 당겨지기 시작한다.
이민자의 삶을 살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하고 그래서 조국, 민족이란 개념에 빠져 가끔은 허우적대는 그래서 건강하고 항상 주인된 삶을 추구하던 일단의 젊은 무리들이 "조국통일과 나"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88년 8월 10일 8.15남북학생회담을 앞두고 민족대단결, 자주, 평화통일의 원칙천명과 해외동포의 단결로 조국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내용의 미주청년학생조국통일투쟁선언문을 발표하고 미주청년조국통일협의회(청협)가 발족한다.
그리고 청협의 두회원이 8.15학생회담에 해외대표로 방북을 하게 된다.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청년학생들이 만날 그 역사적 현장에 미주의 두 대표가 참석하게 되면서 해외동포도 조국통일의 당당한 일 주체임을 입증하였다.
분단으로 인한 고통이 해외동포에게는 예외일수 없었고 조국통일이 전 겨레의 삶을 규정하는 속에서 남.북.해외의 7천만 모두의 단결과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해외동포는 당연히 통일운동의 한축을 지탱하는 주체임이 분명한 것이다.
청협의 두 대표는 북의 청년학생들로부터 연일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백두산으로 부터의 통일대행진을 따라 8월 15일 마침내 남북학생회담의 장소인 판문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햇살무리를 밟고 나타나야할 남녁의 학우들은 그 시각 신촌의 아스팔트를 온몸으로 사슬을 만들며 한보 한보 전진을 위한 피나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위대한 싸움의 결과 87년의 민주화대투쟁의 여파와 함께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열어 제치게 된다.
청협의 두 대표가 북부조국을 방문하고 조국의 청년학생들이 반통일세력들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즈음 민문연의 마당에서는 민문연, 청협회원들이 회담성사를 위한 무기한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보름간의 기간동안 상항지역의 동지들이 합류하는등 각 지역 여러단체와 수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격려를 보내주었다.
특히 보름간의 단식투쟁동안 동포사회에서 처음으로 이북바로알기운동이 진행되었는데 하루 두차례 이북영화상영과 통일강연회를 개최하여 연일 백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북부조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일대 전기를 마련케 했으며 이로서 미주통일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오는데 큰역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모두는 그렇게 승리한 것이다.
판문점에서, 최루가스 가득한 신촌거리에서, 그리고 쓰린배를 움켜지고 있던 그 곳에서...
청협결성 직후 그 산하 조직으로 남가주의 민주청년학생회(민청)가 10월1일, 북가주의 애국청년학생회(애청)가 11월 20일 건설되면서 미주에서 유일한 청년통일운동단체가 등장하게 된다.
88년 타오르기 시작한 통일에의 불길은 89년들어 더 한층 조직적이고 전국적 경향을 띄며 확산 되어 나간다. 1월 20일 6월항쟁 이후 대중적 기반을 토대로 전민련이 발족하고 이어 3월 1일 전농, 5월28일 전교조가 결성되면서 전 계층 전 국민적 반독재민주화, 자주, 통일에의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노태우정권은 외부적으로 소위 북방정책의 기조를 설파하고 내적으로는 보수대연합을 추진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통일운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더우기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결정통보로 8월 대회전을 예고하는 가운데 통일, 반통일의 한판싸움이 하루하루 긴장속에 다가오고 있었다.
반제연대성, 평화와 친선을 구호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170여개국 3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7월1~8일 까지 열렸다.
미주에서는 청협의 주도하에 시애틀의 통일형제회, 뉴욕의 기독청년학생회, 조국사랑시카코등 미전역의 8개 단체가 제13차세계청년학생축전준비미주통일청년협의회(축준협)을 LA에서 결성한다.
축준협은 축전동참을 통해 미주청년학생운동의 단결을 도모하고 통일운동을 대중화, 활성화시킨다는 원칙으로 미주대표단을 구성하고 홍보지 <축준협>발간, 세미나등 각종 이북바로알기 사업등을 설정하고 각 자의 지역에서 치열한 활동을 전개해 갔다.
7월에는 LA, 시애틀, 상항, 뉴욕, 와싱턴 DC, 시카코, 토론토의 전 지역에서 24명의 미주대표단을 확정하고 LA에서 통일한마당과 통일길놀이를 하고 아드모아공원에서 대표단 출정식 및 범동포통일촉진대회를 개최했다.
피부색, 종교,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반제연대,평화,친선을 부르짖었던 그곳에서 재일, 재독등 해외의 동포청년들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통해 해외연대가 시작되었고 전대협대표 임수경이 등장하면서 분단후 처음으로 남.북.해외의 청년학생이 어우러지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다.
남.북,해외의 통일열기가 하나로 결합되고 전세계에 한반도의 통일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외침으로 보여준 쾌거였다. 당시 재미한청은 백두산에서 판문점에 이르는 "한반도평화를 위한 국토대행진"을 주도 전세계의 진보세력들에게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알리는 성과를 이루어 낸다.
90년들어 이 세기안에 반드시 조국통일을 이루어 내야할 사명을 통감하고 통일,민주화세력은 투쟁의 강도를 높여 간다.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와 보수제도야당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보수야합 민자당을 탄생시킨다.
이제 싸움은 쓰러져가는 소수 군부의 무리만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의무리 전체와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의 수레를 끄는 자들과 그것을 막고 선자들의 싸움이...
이에 통일운동권도 하나의 힘으로 뭉치기 시작한다. 전민련이 8월 15일 범민족대회를 가질 것을 제안하고 남북해외가 개최에 전격 합의하였다.
<<범민족대회>>
그야말로 분단이후 남,북,해외의 전 민중이 만난다는 그 가슴벅참, 하나가 되고 만다는 7천만의 의지로 전 국토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허나 노정권의 양동술에 말려 남과 북은 결코 만날 수 없었다.
판문점의 대회장에는 북과 해외대표만이 참가하였지만 백두의 a과 한라의 a이 합장되었다남과 북이 만나야한다는 정당성을 설파하고 통일에의 의지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미주에서는 통협과 한민족연구회, 한겨레연합이 중심이 되어 미주대표를 구성하여 참석하였다. LA에서는 범민족대회를 지지하는 통일한마당이 민문연과 청협의 주최로 개최되었다. 비록 자리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범민족대회의 의의를 공감하면서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이어져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민족대단결의 기운과 범민족대회의 성과를 안고 1990년 11월 19일 베를린에서 남,북,해외의 대표가 모여 전민족적 민간통일운동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결성에 합의하고 이에 따라 미주에서는 통협, 청협, 한민족연구회를 비롯 여러 가맹단체와 수많은 발기인으로 1990년 12월 3일 역사적인 범민련 재미본부가 결성된다. 그후 미주통일운동은 남, 북, 그리고 해외동포들이 민족대단결의 기치 높이 들고 3자연대운동의 막을 올린다.
(*1990년 이후 통일운동은 남북 해외에서 본격화된다. 이에 대한 10년사는 따로 정리하여 발표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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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tongil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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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운동사(70~80년대)
*글: 하 용진(통일맞이 나성포럼 사무국장)
미소간의 군사적대치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미국의 산업구조는 군수산업과 우주항공산업등의 첨단과학사업에 주력케 된다.이런 가운데 기존의 제조업 부분의 생산과 소비를 담당할 계층의 필요성에 의해 미국은 1965년 이민법의 개정을 통해 이민의 문을 대폭 개방하게 된다.
초기 하와이 이민이후 폐쇄되었던 이민은 50~60년대 전쟁고아와 국제결혼여성, 유학생과 종교재단에 의해 소수의 이민자가 유입되던 상황에서 70년대는 제2기 이민이라 불리우는 본격적 이민의 새장이 열린 것이다.
한편 국내는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부는 자신들의 영구집권을 위해 반공의 기치하에 또다시 유신쿠데타를 자행한다. 이 무렵 전태일열사의 항거에 고무되어 조국근대화의 미명아래 숨죽이던 노동자와 양심적 지식인 그리고 학생들은 현 사회의 모순에 눈 뜨기 시작하고 반유신, 반독재의 대열로 서서히 나서기 시작한다.
유신에 반대하여 애국민주세력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유신정권은 통혁당, 인혁당사건을 비롯한 용공조작으로 애국민주화세력을 말살하고 긴급조치를 발동해 말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을수 없는 암흑세상으로 전 민중을 몰아 넣었다.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제거된 정치인과 유신의 횡포를 못견딘 양심적 지식인들이 대거 확대된 이민의 길을 걸어 미주로 이동해 오게 된다. 국내가 유신에 의해 철저히 침묵을 강요받고 있을 때 이곳 미주에서는 이들의 주도로 반유신, 반독재투쟁을 외치며 조직화 된다.
이는 일제하 국내의 억압상황을 피해 만주, 미주에서 독립운동의 근거를 마련한 것 같이 미주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숭고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시 미주운동을 이끈 조직으로 뉴욕중심의 동부는 73년경 임창영, 노광욱, 지창보, 고원이 중심이 되어 재미민주한인협회가 결성 되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 76년 미주민주국민연합(미주민련)으로 발전하면서 통일운동에도 주력하게 된다.
서정균의 해외한민보가 미주민련의 대변지 역할을 하였고 자매조직인 이보배여사가 이끄는 여성동우회가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LA중심의 미서부는 김성락, 차상달, 홍동근이 중심이 되어 73년 8월에는 조국자유수호동지회가, 74년에는 남가주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어 조국의 민주회복과 유신철폐운동을 근간으로 김대중지지와 양심수 석방등 국내정치지원운동을 전개해 갔으며 70년대 말에는 노의선, 김성락이 주도하여 조국통일촉진회가 만들어져 이북알기사업을 전개하면서 통일운동에 발길을 딛는다.
이외 홍동근, 최진환, 홍윤호가 중심된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와 예정웅, 문성철의 청년그룹이 결성한 4.19선양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1980년 광주항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시기를 전후하여]
18년 철권 통치의 유신도 부마항쟁을 깃점으로 그 파열을 맞게 된다. 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울려퍼진 한 방의 총소리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그것은 자유이고 희망이었다.
서울의 봄, 얼어 붙었던 몸과 마음을 열고 그 어느때 보다도 따스러운 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국의 민주화와 새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자랑스러운 이민의 삶을 살고자 했던 동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유신독재를 피해 그리운 강산을 눈물로 떠나 미주로 이주해 망명아닌 망명생활을 감수해야했던 수 많은 동포들에게 있어 그 감회는 더욱 가슴 뜨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열기가 무르익기도전 일단의 군인무리들이 정권탈취를 위한 음모들을 하나씩 진행시키고 있었다. 12/12쿠테타로 집권의 기반을 마련한 그들은 마침내 남도 광주에서 피의 살육을 자행하면서 이땅의 민주주의는 한낮 꿈으로 남아야했다.
<<5.18광주항쟁>>
야수적 만행에 맞서 광주의 민중들은 의연하게 싸워 나갔고 장열한 죽음은 자주,민주,통일의 역사에 깊이 아로새겨진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운명을 규정한 일대변혁이었으며 이곳 미주에서도 운동사에 획을 긋는 계기가 된다.
분노는 산과 물을 건너 이곳 미주에서도 연일 광주의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가 영사관앞에서 있었다. 오히려 국내의 모든 언론이 통제된 반면 미주의 동포들은 외신을 통해 광주의 진실에 대해 접근할 수 있으므로 해서 전두환 일파의 야심을 꿰뚫고 반 전두환 투쟁에 즉각 나설수 있었다.
LA의 경우 그 투쟁의 중심에 김상돈을 대표로 국영길, 노길남, 김운하, 차상달을 중심으로한 한국민주화운동협의회가 조직되어 전두환 일파를 규탄하는 집회와 대책회의를 통해 그들의 만행을 동포사회와 미진보세력에게 알려 나갔다..
80년대초 광주항쟁 지도부의 일인이었던 윤한봉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미주운동은 새로운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미주 각지역에 산재해 있던 의식있는 청년들이 윤한봉을 중심으로 뭉쳐 미전국적 청년조직인 재미한국청년연합이 결성되어 미주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오랬동안 활동하게 된다.
레이건의 등장으로 미소간 무한 군비경쟁의 시대를 열고 냉전의 첨예한 대립은 결국 한반도의 대치상태를 더욱 격화 시켜간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 상황속에서도 해외의 동포들은 남북의 화해와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들을 끊이지 않았다.
미주의 선우학원과 유럽의 이영빈등 기독교학자들이 주도가 되어 1981년 11월말 비엔나에서 남.북.해외 기독자회의가 개최되어 분단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북과 남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는 다음의 헬싱키대회에 까지 이어지면서 미주통일운동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직선제개헌의 쟁취로 불타기 시작한 6월민주화대투쟁의 열기가 이곳 미주에서도 활화산 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두환정권을 비판하는 성명과 집회가 연일 있었고 한때 최루탄추방대회에서는 아드모어공원을 발디딜틈 없이 가득 매운 가운데 코리아타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6월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의 열망으로 국내와 마찬가지로 이곳 미주에서도 조직활동의 본격화가 시작된다.
그 대표적 단체로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의 결성을 들수 있는데 비교적 북한방문이 자유로울수 있었던 미주의 이산가족들은 자신의 혈육을 찾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들 가운데 몇분의 학자들이 북한 방문기 <분단을 뛰어넘어>를 저술하게 되었고 이는 국내에 이북바로알기운동을 촉발케 하면서 그 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통일문제를 전면화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앞서 기독자회의가 계기가 되고 <분단을 뛰어넘어>가 고무추동이 되어 87년 6월 양은식, 선우학원, 홍동근, 전순태, 서정균, 김현환, 김동수등이 중심이 되어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가 창단 된다. 통협은 이산가족찾기를 핵심사업으로 전개하여 이를 통해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북을 방문하게 되고 미주통일운동의 역량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또한 미주범민련결성을 주도하는등 미주통일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87년에는 LA에서 민주화운동의 물적토대구축과 중소상인의 조직을 위해 한민족연구회가 노길남, 유상준, 손세영등이 중심되어 결성되었다. 한민족연구회는 이후 민족상과 민족장학상을 제정 미주 운동의 활동을 고무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외 홍동근, 김현환, 홍근수, 강문홍, 강위조등 기독교인이 중심이되어 종교적입장에서 통일에 접근하고자 했던 통일신학동지회가 있었다.
86년 10월 대부분 1.5세들로서 지배문화에 대항해 생산적, 민중문화를 퇴폐, 외래문화에 맞서 1.5세로서 자아를 확립하고 우리민족문화를 찾고 계승하기 위한 취지를 내걸고 민중문화연구소(민문연)가 창립된다.
민문연은 매년 봄,가을로 범대중적 문화재를 개최하여 동포사회에 진보운동의 입지를 확대하였고 각 한인학생회를 통해 우리문화를 보급하고 민문연의 취지를 전파해 나갔다.
또한 6월 항쟁 당시 LA지역에서 대규모 민주화투쟁을 선도해 갔으며 이후 상항의 청년문화원, 뉴욕의 우리문화찾기회등 미주 타지역의 문화운동조직이 결성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민문연은 이후 민청, 우리문화공동체로 변화,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LA 청년조직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의의를 갖는다.
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고조되어가던 민중의 민주화열기는 마침내 조국통일의 열망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88년 들어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선거에 출마했던 한 후보가 남북학생회담을 제안 하면서 4.19이후 암흑의 시대속에서 신새벽 뒷골목에서나 외쳐야했던 조국통일이 급기야 전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고 전국 각 대학의 지지속에 6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고 수용하면서 88년은 마침내 통일운동의 새원년으로 기록되게 된다.
그러나 6월의 학생회담은 노태우정권의 필사적 저지로 말미암아 피튀기는 공방 끝에 결국 무산되고 8월 15일 재차 판문전에서 회담을 가질것을 결의한다.
88년 7월 어느날 조국통일을 외치며 한 학우가 교내옥상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조성만>>
조국의 통일. 목숨받쳐 싸워야할, 민족의 운명이 걸렸고 모든 모순의 근본이 깔렸고 그래서 조국통일 없이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수 없다는, 통일만이 민족이 살길임을 알게 했다.
이제 암흑속에 억눌렀던 조국통일의 함성은 전국 각지 각 단체의 지지를 받게 되고 이곳 미주에서도 지지성원과 더불어 통일운동의 불길이 당겨지기 시작한다.
이민자의 삶을 살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하고 그래서 조국, 민족이란 개념에 빠져 가끔은 허우적대는 그래서 건강하고 항상 주인된 삶을 추구하던 일단의 젊은 무리들이 "조국통일과 나"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88년 8월 10일 8.15남북학생회담을 앞두고 민족대단결, 자주, 평화통일의 원칙천명과 해외동포의 단결로 조국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내용의 미주청년학생조국통일투쟁선언문을 발표하고 미주청년조국통일협의회(청협)가 발족한다.
그리고 청협의 두회원이 8.15학생회담에 해외대표로 방북을 하게 된다.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청년학생들이 만날 그 역사적 현장에 미주의 두 대표가 참석하게 되면서 해외동포도 조국통일의 당당한 일 주체임을 입증하였다.
분단으로 인한 고통이 해외동포에게는 예외일수 없었고 조국통일이 전 겨레의 삶을 규정하는 속에서 남.북.해외의 7천만 모두의 단결과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해외동포는 당연히 통일운동의 한축을 지탱하는 주체임이 분명한 것이다.
청협의 두 대표는 북의 청년학생들로부터 연일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백두산으로 부터의 통일대행진을 따라 8월 15일 마침내 남북학생회담의 장소인 판문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햇살무리를 밟고 나타나야할 남녁의 학우들은 그 시각 신촌의 아스팔트를 온몸으로 사슬을 만들며 한보 한보 전진을 위한 피나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위대한 싸움의 결과 87년의 민주화대투쟁의 여파와 함께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열어 제치게 된다.
청협의 두 대표가 북부조국을 방문하고 조국의 청년학생들이 반통일세력들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즈음 민문연의 마당에서는 민문연, 청협회원들이 회담성사를 위한 무기한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보름간의 기간동안 상항지역의 동지들이 합류하는등 각 지역 여러단체와 수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격려를 보내주었다.
특히 보름간의 단식투쟁동안 동포사회에서 처음으로 이북바로알기운동이 진행되었는데 하루 두차례 이북영화상영과 통일강연회를 개최하여 연일 백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북부조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일대 전기를 마련케 했으며 이로서 미주통일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오는데 큰역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모두는 그렇게 승리한 것이다.
판문점에서, 최루가스 가득한 신촌거리에서, 그리고 쓰린배를 움켜지고 있던 그 곳에서...
청협결성 직후 그 산하 조직으로 남가주의 민주청년학생회(민청)가 10월1일, 북가주의 애국청년학생회(애청)가 11월 20일 건설되면서 미주에서 유일한 청년통일운동단체가 등장하게 된다.
88년 타오르기 시작한 통일에의 불길은 89년들어 더 한층 조직적이고 전국적 경향을 띄며 확산 되어 나간다. 1월 20일 6월항쟁 이후 대중적 기반을 토대로 전민련이 발족하고 이어 3월 1일 전농, 5월28일 전교조가 결성되면서 전 계층 전 국민적 반독재민주화, 자주, 통일에의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노태우정권은 외부적으로 소위 북방정책의 기조를 설파하고 내적으로는 보수대연합을 추진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통일운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더우기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결정통보로 8월 대회전을 예고하는 가운데 통일, 반통일의 한판싸움이 하루하루 긴장속에 다가오고 있었다.
반제연대성, 평화와 친선을 구호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170여개국 3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7월1~8일 까지 열렸다.
미주에서는 청협의 주도하에 시애틀의 통일형제회, 뉴욕의 기독청년학생회, 조국사랑시카코등 미전역의 8개 단체가 제13차세계청년학생축전준비미주통일청년협의회(축준협)을 LA에서 결성한다.
축준협은 축전동참을 통해 미주청년학생운동의 단결을 도모하고 통일운동을 대중화, 활성화시킨다는 원칙으로 미주대표단을 구성하고 홍보지 <축준협>발간, 세미나등 각종 이북바로알기 사업등을 설정하고 각 자의 지역에서 치열한 활동을 전개해 갔다.
7월에는 LA, 시애틀, 상항, 뉴욕, 와싱턴 DC, 시카코, 토론토의 전 지역에서 24명의 미주대표단을 확정하고 LA에서 통일한마당과 통일길놀이를 하고 아드모아공원에서 대표단 출정식 및 범동포통일촉진대회를 개최했다.
피부색, 종교,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반제연대,평화,친선을 부르짖었던 그곳에서 재일, 재독등 해외의 동포청년들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통해 해외연대가 시작되었고 전대협대표 임수경이 등장하면서 분단후 처음으로 남.북.해외의 청년학생이 어우러지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다.
남.북,해외의 통일열기가 하나로 결합되고 전세계에 한반도의 통일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외침으로 보여준 쾌거였다. 당시 재미한청은 백두산에서 판문점에 이르는 "한반도평화를 위한 국토대행진"을 주도 전세계의 진보세력들에게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알리는 성과를 이루어 낸다.
90년들어 이 세기안에 반드시 조국통일을 이루어 내야할 사명을 통감하고 통일,민주화세력은 투쟁의 강도를 높여 간다.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와 보수제도야당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보수야합 민자당을 탄생시킨다.
이제 싸움은 쓰러져가는 소수 군부의 무리만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의무리 전체와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의 수레를 끄는 자들과 그것을 막고 선자들의 싸움이...
이에 통일운동권도 하나의 힘으로 뭉치기 시작한다. 전민련이 8월 15일 범민족대회를 가질 것을 제안하고 남북해외가 개최에 전격 합의하였다.
<<범민족대회>>
그야말로 분단이후 남,북,해외의 전 민중이 만난다는 그 가슴벅참, 하나가 되고 만다는 7천만의 의지로 전 국토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허나 노정권의 양동술에 말려 남과 북은 결코 만날 수 없었다.
판문점의 대회장에는 북과 해외대표만이 참가하였지만 백두의 a과 한라의 a이 합장되었다남과 북이 만나야한다는 정당성을 설파하고 통일에의 의지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미주에서는 통협과 한민족연구회, 한겨레연합이 중심이 되어 미주대표를 구성하여 참석하였다. LA에서는 범민족대회를 지지하는 통일한마당이 민문연과 청협의 주최로 개최되었다. 비록 자리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범민족대회의 의의를 공감하면서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이어져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민족대단결의 기운과 범민족대회의 성과를 안고 1990년 11월 19일 베를린에서 남,북,해외의 대표가 모여 전민족적 민간통일운동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결성에 합의하고 이에 따라 미주에서는 통협, 청협, 한민족연구회를 비롯 여러 가맹단체와 수많은 발기인으로 1990년 12월 3일 역사적인 범민련 재미본부가 결성된다. 그후 미주통일운동은 남, 북, 그리고 해외동포들이 민족대단결의 기치 높이 들고 3자연대운동의 막을 올린다.
(*1990년 이후 통일운동은 남북 해외에서 본격화된다. 이에 대한 10년사는 따로 정리하여 발표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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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tongil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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