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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교류와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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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0-12-27 00:00 조회4,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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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교류와 통일

백승배(글렌데일웨슬리교회 담임목사)

1. 들어가는 말
예수께서 처음 목회를 시작하실 때, 회당에 들어가셔서 처음으로 읽은 성경이 있습니다. 누가 복음 4장 18-19로 본래는 이사야 6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가 나에게 기름을 부으신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갇힌 이들의 해방을 선포하며
소경을 보게 하고
실망한 희생자를 놓아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 4:18-19)
이 말씀으로 오늘 얘기를 시작하는 까닭은 여기 나오는 "주님의 은총의 해"가 바로 희년을 나타내는 말이고 이 말은 종교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일희년 50년 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한달 반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분단 만 50년을 보내고 우리는 만 51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통일은 아직도 요원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산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제목이 "종교교류와 통일" 인데 부족한 것 양해하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 다.
언젠가 이곳 미주판 중앙일보 시론에 이석렬 선생께서 "역시 종교인들 눈이 밝다"는 글을 발 표하신 적이 있습니다. 남북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조국해방 50돐 대민족대회에 재미기독교 대 표단을 파견하기로 한 것 등과 기타 행사를 계획한 이얘기들, 그리고 불교계에서 북한과 합동 법회를 계획하는 것 등과 서로간의 상호 교류 초청 등을 보고 평하신 것입니다. 반면 통일민주 세력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종교인으로서 한편 기분 좋으면서도 솔직히 말씀드려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종교도 별 수 없이 정치의 예속으로 지 난 반세기를 지내온 까닭입니다. 이는 불교, 기독교 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반세기를 회고하며 종교인으로서 회개하는 것으로 이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2. 지난 반세기의 교류 회고

해방 후 통일추구는 민족주의자들을 중심한 좌우합작통일론과 우익입장의 통일, 좌익입장의 통일로 대별될 수 있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좌우를 합치려는 김구, 김규식, 여운형씨 등 민족주 의자들의 꿈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민족해방은 기쁨이었으나 곧 슬픔으로 이어졌습니다. 남북 분단이 고정화된 까닭입 니다.
남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동반하고 단독정부가, 북에서는 김일성 정권의 정부가 각 기 섰습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하느님의 명령이었으나 소수의 목소리를 빼고는 분단에 동 조한 것은 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대부분 반공과 멸공 노선에 동조한 교회가 우후 죽순처럼 퍼져갔고, 북쪽에서는 교회들이 숨어버렸습니다. 교회가 부르죠아지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교회가 분열 후에도 하나로 남아 있던 것과 달리 남한의 교회는 일찍이 하나의 꿈을 포 기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독립 이전에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유사성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한국전쟁기의 남북한 기 독교 양상은 판이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교회는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기관으로서의 교회/ 아메리카인들의 앞잡이로서의 교회 /교회의 이승만 지지와 남한에 대한 선호성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소"(장병욱, 위의 책 33-39쪽)였습니다. 그러므로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한에서는 교회는 일제 잔재로 분열현상에다가 북한으로부터 피난 온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철저한 반공 노선을 겪게 되었습니다. 또한 서방기독교 세력이 민족주의 기독교 세력을 약화, 압도했습니다. 김구, 김규식 등 역사의 기둥은 이래서 자리를 잃었습니다.
이후 교회는 민족보다는 이데오로기 논쟁을 택했고, 민족교회보다는 반공교회를 택했습니다. 통일에의 열망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후 분단은 고착되고 증오는 심화되었습니다. 국토가 초토화되고, 수백만이 살상되고, 천만의 이산가족이 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지만 교회는 뼈아 픈 반성을 몰랐습니다. 한 교회사가는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우리 기독교계는 그 있을 법한 , 동란에 대한 신앙적 고백이나 연구 및 발표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있어야 할 동란의 신학적 비판과 논문이 전무한 데서 큰 충격을 받 았다. 도대체 이 무슨 현상인지 그 무서운 동란을 겪은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있건 만 지난날의 비극을 하나도 다루지 않는 그 저의는 무엇인지 놀라울 뿐이다....아마도 이같은 현 상은 그 동안 한국교회가 무역사종교로서 이 민족의 현실을 떠나 순전히 개인의 구원만을 일삼 는 몽환경에만 빠져 있었다는 결론밖에는 없는 것이다." (장병욱, "6.25 공산 남침과 교회" 1983 년)
교회는 분열과 보수주의의 물결로 넘쳤습니다. 그 배타성과 독단성, 탈역사성, 문자고착성주 의로 말입니다.
1960년대 이후는 박정히 군사독재의 시대였습니다. "잘 살아보세, 하면 됩니다"의 구호에 맞 추어 교회도 그런 세속의 물결에 휩싸였습니다. 아직도 북은 포용되어야할 형제자매가 아니라 격파되어야 할 적이었습니다. 종교인도 거의 예외 없이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통일문제를 감정적 견지에서 논의할 때는 지나갔고 현실적인 견지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인식이 대두되었습니다.
홍현설, 조향록, 강원룡, 박형규 목사 등이었습니다. 박상증은 이북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면 문 제는 공산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에 있다는 견해를 발표했습니다. (기독교사상 1961년 2월)
1970년대에 들어 박형규 목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직접 대결해야 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악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용적인 반면에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소아병적인 반감을 표시해 왔다. 한국의 교회가 계속 이런 태도와 입장을 취한다면 남북한의 대화에 있어서 교회가 담당할 역할은 없을 뿐 아니라 교회가 이북 땅에 발을 디딜 가능성도 전 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 3일 1971년 9월) 이후 문익환 목사는 "남북통일과 한국교 회"를 기독교사상에 발표하였다. 이는 1972년 7.4 공동성명후의 일로 통일문제의 양성화는 정치 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후 남한의 일부 교회들이 통일기반을 형성하는 작업으로 민주화운동에 깊이 참여하자, 북 한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종교는 지배계급의 수중에 장악되어 인민들을 착취, 억압하는 사상적 무기라고 인식하던 북한에서 "반미구국통일전선 운동에서 종교신자들과의 사업을 강화 하여 그들과 연합을 시도하는 것은 남조선의 현실적 조건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허종호, 1975년)
무엇보다도 통일논의는 1980년대에 더욱 활기를 띄었습니다. "선민주, 후통일"을 주장하던 민 주화 운동권의 시각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민주화운동이 곧 통일운동이요, 통일운동이 곧 민 주화운동입니다"는 인식이 싹튼 것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은 하나다"고 선 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남의 자유 위에 평등을, 북의 평등 위에 자유를 주장하는 통일론이 대 두됩니다.
1986년 9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교회지도자들이 전쟁후 처음으로 상봉하였습니다. 역사적 인 남북종교지도자들의 만남입니다.
1988년 2월엔 KNCC 통일선언, 11월엔 글리온 선언이 나왔습니다. "희년통일기원"의 탄생입 니다. 이는 1989년 WCC(세계기독교협의회) 모스코바회의서 한반도희년선포로 이어집니다. 이 해,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6월 임수경 양이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한대학생을 대표하여 참석했고, 그의 귀국(?)을 위하여 문규현 신부가 월북, 임수경 양과 함께 판문점을 발 로 밟고 넘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의 글리온회의를 한국에서 하려하였으나 무산되고 말았습니 다.

해외에서의 교류 상황
해외에서는 1981년 이화선 목사, 이영빈 목사, 김순환 여사 등이 1981년 통일대화를 목적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이 방문의 결실로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의"가 1981년부터 매해 열리기 시작합 니다.
1981년은 비엔나에서, 1982년은 헬싱키에서, 1983년은 평양에서, 1984년은 북경에서, 1985년은 비엔나에서, 1988년은 헬싱키에서, 1990년은 헬싱키에서, 1991년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습니 다.
이는 통협인사들을 중심한 모임이라면 한편에서는 1967년부터 북미주 기독학자들이 모임을 갔던 중 1988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는 "분단시대와 이산가족"이란 제목으로 열리고 1989년 부터는 "민중신학교과 주체사사의 통일지향사상으로서의 발전 가능성",1990년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기독교의 위치", 1991년 "새민족공동체를 위한 기독인의 사명", 1992년 "민족통일을 위 한 신학의 정립"등으로 이어집니다.


근래 미주의 상황
80년대 중반부터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코리아통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985년 대표단을 북조선에 파견, 86년 "코리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정책선언문"을 택했고 그후 세계기 독교 공동체와 호흡을 같이하면서 북조선기독교도련맹과의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1989년에는 처음으로 북조선 기독교도련맹이 미국을 방문했고, 1991년에는 미국장로교회의 초청으로 제2의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1991년 여름 한인교회대표단이 북조선을 방문했고(미국장로교, 연합감리교 대표 25명), 그후 91년 11월 Korea Church Coalition이 개최한 희년대회에 북조선 제3의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했 습니다.
1992년에는 미국교회협의회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 면담, 92년 6월 북미기독학자 회와 희년협의회 초청으로 북조선대표단이 미국방문,
1993년 핵문제로 방문단 활동중단,
1994년 5월 미주한인교회 평화통일희년협의회 대표단 평양 방문, 그 해 6월 총회에 대표단 초청 이루어지지 않았고,
1995년 6월 미국장로교와 미주한인교회 평화통일희년협의회 초청으로 북조선 대표단이 미국 방문 때 음악인들도 대동했습니다. 문화교류가 처음 열린 것입니다.
1995년 8월 해방 50주년 행사에 미주교포대표단의 개신교, 천주교, 불교도 대표들 다수 참석, 1995년 11월초에 처음으로 북조선천주교대표단이 미국을 방문, 한국천주교와 교포천주교 대 표들과 통일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상 한인교계의 통일활동은 북미주기독학자회, Korea Church Coalition(코리아 통일을 위한 미국교회 연합회), 미주한인교회평화통일희년협의회, 중북부감리교회통일위원회, 나성 통일희년 기도회등이 있고 11월 26-28일 시카고에서 미한인연합감리교 통일희년총회가 열리게 됩니다.
80년대 운동 중 특기할 것은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글리온 선언의 열매입니다.
북조선 기독교연맹과의 통일운동의 연대는 1984년 일본 도잔소의 YMCA 국제캠프장에서 개 최된 WCC의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를 통해서 그리고 1986년 9월 스위스 글리온의 산장에서 개최된 남북교회자도자들과의 역사적인 상봉을 통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결과 로 1988년 2월 한국기독교협의회의 통일선언이 그 해 11월 제2차 글리온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그 회의의 성격과 내용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리온 선언은 7. 4 공동성명이 후 WCC라는 국제기구의 배석 하에 16년만에 남북 민간기독교대표자들이 합의한 최초의 한반 도 평화통일선언입니다. 이어 1989년 WCC는 95년을 코리아의 통일희년으로 선포하고 전 세계 의 교회가 이를 위해 기도할 것을 선언합니다. 비록 희년인 1995년은 통일을 미룬 채 넘어가지 만 그 의의는 큽니다.
세계 교회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우리 스스로 한반도 문제를 항상 공평하게 다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 백해야 합니다. 과거의 실수는 에큐메니칼공동체의 양심에 비추어 재평가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해 노력하겠다는 우리의 결단을 심화시켜 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 니다."


3. 교류가 가져온 것

만남은 신비입니다. 만남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만남은 생각을, 생각은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50년의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가져온 것은 무엇입니까? 불신, 증오, 원망, 싸움, 상호비방, 눈물, 한, 편견, 오해, 비굴, 굴종, 오기 등 온통 죽음의 단어들, 부정적 단어들입니다. 이리하여 형제자 매가 서로 죽이고, 무기경쟁을 하고, 적 아닌 형제자매를 적으로 여기는 우를 범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북쪽 고기준 목사의 말을 들어봅시다.
"만나기 전에는 우리는 자본주의한 미국의 앞잡이 목사나 반공목사가 아닌가 의심도 했고 물 론 그 분들도 우리를 빨갱이 목사니 하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서 한 핏줄을 느꼈을 때 그런 생각은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민족, 주안의 형제인 것을 느꼈습니다." 남쪽의 지성이요 의식 있는 목사인 장기천 감독의 말을 들어봅시다.
"글리온에 도착한 이튿날 새벽에 개회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저는 그들이 찬송 을 제대로 부르는지 엿보았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그들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 거워지고 마음에 감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도 우리 민족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 제자매라는 단순한 사실을 새롭게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30년이 지난 후의 만남이었지만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계교회협 의회에서 남북대표들만 만날 수 있는 친교의 시간을 할애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같이 앉았기 때문인지 서먹서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옛 노래를 부르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봉선화, 아리랑, 나의 살던 고향, 그 밖에 몇 곡을 함께 불렀습니다. 노래 를 부르면서 저는 북한 사회도 사람의 얼굴을 가진 사회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어둠 의 세계, 냉동인간들의 사회로 전락해 버린 줄 알았는데 저들도 이제 성숙하여 사람의 얼굴을 회복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중에서)
민주화 투쟁을 한 그도, 특히 다른 남하한 사람처럼 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남은 그를 평화통일을 위해 일하는 분으로 바꾸었습니다.
89년 이곳 윌셔연합감리교회, 이창순목사의 북한 방문보고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이틀은 아침이면 방송소리가 거리서 들려올 때 무섭더라구! 그러나 그 후부터는 아무 렇지도 않더라구."
만남은 우리의 두려운 감정을 평안한 감정으로 바꿉니다. 불신의 감정을 신뢰로 바꿉니다. 증 오를 친절로 바꿔줍니다. 만남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줍니다. 저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형 제자매이며, 마귀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게 합니다. 서로 자기가 갖고 있던 생각도 바꿀 수 있게 해 줍니다.
북에서도 문익환 목사님과 임수경 양, 문규현 신부를 만난 후 저들의 기독자를 향한 생각은 180도로 변했습니다. 홍동근 목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40년 외세의 총칼이 가로막은 분단의 철조망과 장벽을 뚫고 통일의 위대한 모 험을 했다.............세 사람이 기독자들의 통일을 10년 앞당겼다. 그리고 선교사 3만 명을 파견한 것보다, 더 위대한 남북화해의 십자가를 북의 2천만 가슴에 세웠다."(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 까지 78쪽)
북조선의 박승덕 교수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랑과 평화, 정의와 평등, 영생에 대한 종교교리는 인류의 보편적 리념을 구현한 좋은 사상 이라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종교인들이 침략과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옹호하며 사람들 사이의 반목과 적대를 배격하고 인민들의 친선을 강조하며 사회생활에서 정의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주체사상 의 종교관 188쪽)
만남이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북조선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서고, 장충성당이 서고, 수많은 가정교회들이 생겨나고, 사찰들이 서고, 사전의 종교해석이 바뀌고, 김 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생기고, 평양신학원이 생기고, 안내원들의 방문자를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세계를 접하게 해 주어 다원화가 인정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 다도 큰 변화입니다.
열렬한 반공 목사인 한경직 목사도 이북을 방문하고 나면 그의 극보수의 생각이 바뀔 수 있 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남한의 극단적 반공주의자도, 주체사상신봉자인 대학생들도 만나면 바 뀔 수 있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4. 교류의 걸림돌들

이렇게 만나면 바뀌는데 만남을 반대하는 적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정부입니다. 해외 통일대화를 막고 나선 것도 정부였습니다. 창구를 일원화해야 한다 고 저들은 말하나 통일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통일의 주인이 민중인데, 민중들의 만남을 저 들은 막고 나서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남이나 북, 모두 본래적인 것을 추구하며, 영원과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인들이 서로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는 모든 모임을 적극 권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포교를 침략으로 오해하는 종교인들만 빼고 말입니다.
둘째는 현 체제를 이용하는 보수세력입니다.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자들은 대재벌들이요, 군 인들이요, 보수적인 언론입니다.
재벌들은 통일 없이 북한의 고급인력을 이용만 하려듭니다.
군인들은 체제를 유지하여 자기 배를 채우려 합니다.
보수언론도 역시 옛 군벌에 의지하여 차지한 자리를 그냥 유지하려 듭니다.
셋째도 역시 보수적 세력으로 반공 이데오로기에 사로잡힌 기독교도들입니다. 그들 보수주의 자들은 화해와 평화의 정신이 바로 그리스도 정신인 것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원수 사랑의 의미를 전혀 새기려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사회 참여가 복음과 결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에는 초월성도 있지만 역사성도 있습니다. 초월성을 잃을 때 복음은 세상과 쉽게 타협하 고, 역사성을 잃을 때 복음은 잘못된 신비주의에 빠집니다. 역사성을 잃지 말아야 하지만, 종교 진리는 그것이 기독교의 것이든, 불교의 것이든 마호멧교의 것이든 세상과의 긴장 가운데 살아 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를 떠나서도 아니고, 문화를 반해서도 아니고, 문화에 묻혀서도 가 아 니라, 세상에 참여하며 창조적으로 살아야 하는 역사성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살아야 할 역사의 현장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터입니다.
통일의 길을 가로막는 어떤 세력도 우리가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 세력들은 구조적인 죄악 입니다. 원죄입니다. 구조악의 방치도 동조와 함께 죄악입니다.


5. 한국 기독교의 내일을 위하여

통일이 되지 않았는데도 이 얘기를 하는 것이 좀 애매하지만 통일은 금방 안되어도 앞으로 남북의 교류가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며 이 얘기를 합니다.
남한엔 백이 넘는 교파를 가지고 교회가 난립하여 있습니다. 분열의 극치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독교가 대부분 미국의 영향하에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1920년대 선교사들이 제왕이나 귀족처럼 복음을 앞세우고 기세를 부리던 때, 선교사 들이 한국교회를 부흥회적 교회로 이룩하려 하고, 지성을 키우지 않던 때, 그리고 3.1 운동이 실패한 후 일본 제국주의가 금수처럼 우리 강토나 사람들을 삼킬 듯 억압할 때, 1925년 한 청 년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앙은 생명적이어라.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것이어라."
1935년 "기독교 조선복음교회"를 창설한 최태용 목사의 이얘기 입니다.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추대되기도 했지만 거절한 분, 1950년에 납북되신 분입니다.
앞으로 이북의 교회는 장, 감, 성, 기타 교단들이 경쟁적으로 돈을 들고 들어가서 여기저기 교회를 세우고, 돈을 뿌리는 그런 꼴을 보일 수 없는 곳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통일후 종교장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국적인 기독교, 한국적 인 여러 종교들이 난립이 아닌 공존과 번영을 누리는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주의 대신에 생명주의, 맹목적 신앙 대신에 지성적이며 따듯한 감성을 담은 주의, 남의 것이 다 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 속에 좋은 것을 발견하고, 내 것 속에 숨겨진 하느님 의 뜻을 발견하고, 조선의 얼이 복음과 함께 숨쉬는 교회, 그런 곳이기를 바랍니다.
불교나 기타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6. 마감하는 말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문화인사든, 종교인사든, 학생이든, 어떤 개인이나 단체라도 교류를 확대하는 것은 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특히 종교가 "궁극적 관심, 궁극적 가치, 초월적 신비, 절대자" 등을 추구하고, 종교인들이 절 대적 가치인 진리를 추구하며, 정의와 사랑, 평화와 자유, 구원과 해방을 진심으로 추구한다면, 종교인이 어떤 사람이나 이념, 권력이나 제도에도 얽매이지 않고 교류하고 만난다면, 이는 더할 수 없는 통일의 보탬이 되겠지만, 종교인들이 국가 권력이나 이념의 노예가 된다면 이것보다 더한 불행과 추행은 없을 것입니다.
참 종교의 정신은 진리 외의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이를 알고 두려 움 없이, 아니 비록 두려워도 진리에의 충성심을 잃지 않고, 지고의 사랑으로 만남을 추구하며 서로 변화할 때, 통일의 그 날은 더 빨리 다가 올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자기가 믿는 종교에조차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가지는 것이 곧 불타와 예수의 정 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매이지 않는 자유정신을 가질 때에만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한쪽에는 자본주의 진영을 잡고, 다른 한쪽에는 공산주의 진영을 잡아, 남과 북을 함께 포용하며 남과 북의 장점을 살리며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만 종교인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소신 있게 말하며,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통일의 그 날을 앞당기는 우리가 되기 위하여, 운명을 사는 우리가 되지 말고 역사를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며 바울 사도의 말을 끝으로 말씀을 마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 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이 글은 김영삼 정권시절에 쓰여진 것이기에 그 동안 정부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인뿐 아니라 민간인에 대해 문은 전보다 더 넓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햇볕정책 을 통해 남북은 접근도 예전보다는 유연해지고 미국정부의 발목을 잡는 일도 이젠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그대로 있고 남북의 긴장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있으며 만남의 장벽은 높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해내외의 교회들이 식량지원, 염소 보내기, 세미나 등을 통해 만남의 틀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카톨릭대로, 불교계는 불교계대로 만남을 모색하고 만나기도 했습 니다. 이러한 직간접의 교류는 불신의 벽을 헐고 민족의 통일을 여는 작은 통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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