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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해외통일운동가 박기식 선생의 인생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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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물자료 작성일05-07-10 14:07 조회1,8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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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요원에서 6.15 대표단 되기까지’  
<인터뷰> 해외통일운동가 박기식 선생의 인생역전  

[통일뉴스] 이현정 /이계환  기자  2005-07-09 오후 5:34:32      


삶에도 인생역전(人生逆轉)이 있다. 비록 마른 땅에서 진 땅으로 바뀌었을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라면 값진 것이다. 희수(喜壽)를 막 넘긴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중앙정보부 요원에서 통일운동가로’라고나 할까? 평양에서 열린 6.15민족통일대축전에 해외대표단으로 참가했다가 한국에 들른 미국 거주 통일운동가 박기식 선생을 지난 6월25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 편집자 주


▶6.15민족통일대축전에 해외대표단으로 참가했다가 한국에 들른 박기식 선생을 통일
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내 인격을 팔아 기자들과 부딪힌 시절”

중앙정보부(옛 국가정보원) 요원에서 6.15민족통일대축전 해외 대표단 일원에 이르기까지, 해외통일운동가 박기식(78세) 선생은 굴곡진 한국사의 한 가운데서 세상과 부딪쳐온 인물이다.

박 선생은 1960년~1970년대 초 중앙정보부(중정) 국내정보국 언론담당관으로 활동했으며 해외로 ‘망명’한 뒤에는 정부요원에서 ‘반정부인사’로 변모해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중정에 있을 당시 선생이 주로 맡은 일은 조선일보를 출입하며 기사와 논설의 논조를 ‘정권안보’에 맞게 조정하는 일이었다. 선생은 각 언론사 기자들과 논설위원들을 헬기에 태워 전방을 참관하게 하기도 했다며 당시를 기록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언론담당이라는 것, 이거 힘들어요. 저거 입맛대로 요리해 달라, 저리 해 달라. 그 사람들은 ‘국가안보’가 아니라 ‘정권안보’가 아니요? 국가안보 때문이라면 명분이 있지. 정권안보는 야당과 어긋나는 이해관계가 있는 게 아니요?”


▶박정희 정권때 언론사 기자들과 논설위원들을 헬기에 태워
전방을 참관하게 했다. 당시 천관우 동아일보 주필(왼쪽)과
박기식 선생. [사진 제공 - 박기식]

정권이 언론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던 시기에 1965년~71년까지 7년 간 조선일보 언론담당관으로 일해온 박기식 선생은 당시를 “내 인격을 팔아 그 사람들(기자)과 부딪힌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아울러 선생은 조선일보 출입시절에 대해, 당시 송건호 리영희 남재희 임재경 김대중 허문도 김용태 최병렬 김학준 기자 등을 떠올리며 “당시 조선일보는 ‘방가(家)’(조선일보 사주인 방씨 일가, 당시 조선일보는 방일영 회장-방우영 사장 체제였음)의 왕국’이라고 회상했다.

1947년 대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6.25전쟁때 포병학교 정훈요원으로 전방에서 근무했고, 5.16군사쿠데타 이후 동향(同鄕)이라는 이유로 국가재건최고회의 행정부서에서 일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지만 본의 아니게 중앙정보부로 배정받는 바람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선생은 결국 71년 말 인생의 본궤도를 되찾기 위해 사표를 던지고 72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형식은 이민이었지만 사실상 ‘망명’이었다.

미국에선 1년 간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기반을 잡아나갔고 말문이 트인 다음에는 전자계통에서 근무했다. 가족들은 1년 뒤인 73년에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이맘때 즈음 박기식 선생은 자신의 삶을 바꿔놓을 주요 인물을 만난다. 바로 장면 정권 때 유엔대사를 했던 임창영 박사다.

미국서 인생을 바꾸게 된 임창영 박사 만나


▶박기식 선생(왼쪽)은 미국에 건너가 임창영 박사를 만나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기식 선생은 “73년 9월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김대중 납치사건 규탄 집회에서 임창영 박사를 만나 강연을 듣고 민주화 운동으로 방향을 틀게 됐다”고 말했다.

임창영 박사에 대해 박기식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야말로 선비적인 사람이었다”며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적인 카테고리에 머물지 않고 민족적 차원에서 북을 바라봤다”고 소개했다.

임창영 박사가 미국 또는 남과 북 어느 쪽의 국적도 갖지 않은 채 무국적자로 생을 마감한 것도 분단된 조국 중 어느 쪽의 국적도 갖고 싶지 않다는 선비다운 꼿꼿함 때문이었다고 박기식 선생은 설명했다.

임창영 박사는 1980년대 김일성 주석과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체제 인사라는 이유로 언론보도가 통제됐기 때문이다.


▶재독 작곡가 윤이상 선생(오른쪽)과 함께 한 박기식 선생. [사진 제공 - 박기식]


▶198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대회"에서
북측 전금진 참사(오른쪽)과 함께 한 박기식 선생(가운데). [사진 제공 - 박기식]

박기식 선생은 “내가 중정에 있을 때 조선일보 외신부에 임창영 박사와 관련한 보도가 들어오면 다 통제되곤 했다”고 말했다.

박기식 선생은 임창영 박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일본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작품임을 폭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일로 박기식 선생은 반정부인사로 분류돼 김영삼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남녘 땅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먼 이국 땅에서 살아야 할 처지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제 역사적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역사적 소견’


▶"이제는 역사의 증언자들이 입을 열어야 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기식 선생은 “역사의 증언자들이 나서야 한다”며 “5.18광주사건을 진압한 특전대들도 자기가 행한 것을 얘기해야 하고 제주사건이나 6.25에 즈음해 보도연맹을 처분한 사람들도 증언대에 올라야 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이제는 입을 열어야 할 때”라고 말한 박기식 선생은 “해방 60년을 맞이해 적어도 환갑의 해를 맞이한 이맘때까지도 우리 백성이 과거사에 대한 참여 없이 나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해 얼마 전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진실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조사결과에 대해서도 박기식 선생은 ‘역사의 증언자’ 입장에서 소견을 밝혔다.

진실규명위원회는 국정원 과거사건 우선조사대상으로 선정된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 이상열 공사가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의 지시를 받고 신현진(가명), 이만수(가명) 등 중정 연수생을 동원해 파리 인근에서 권총으로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을 살해한 뒤 사체를 낙엽으로 덮어 유기했다는 내용의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김형욱 중정부장은 당시 김경재(필명 박사월, 전 민주당 의원) 씨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 집필을 추진하고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중정부장 재직시 중정의 대미 공작활동 등 국가기밀을 폭로하다 1979년에 살해됐다.

김형욱 중정부장이 살해된 장소를 두고 한국이냐, 외국이냐 의견이 분분했지만 국정원 진실규명위원회는 관계자들과의 면담조사를 통해 파리에서 살해된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박기식 선생은 김형욱 중정 부장이 실종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민통 총회 자리에서 김경재 씨로부터 들은 얘기를 토대로 김형욱 중정부장은 한국에서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으며, 중간 조사결과이긴 하지만 국정원 발표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형욱 부장 살해를 직접 지시했는가 여부가 빠진 것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대선 가도에 손상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옛 사진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기식 선생은 김형욱 정보부장이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추문을 빼는 조건으로 박 정권으로부터 150만 불을 받기로 흥정한 뒤 50만 불을 미리 수령하고 나머지 100만 불은 파리에서 받기로 했는데 김형욱 부장의 후배인 이모 공사가 100만 불 중에 50만 불을 준다면 부장님 따라 망명하겠습니다”라고 말해 이모 공사와 파리에서 따로 만났다가 그가 독한 양주에 탄 약을 마시고 실신해 한국으로 옮겨졌다는 내용의 주장을 김경재 씨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또 미국에 있으면서 김형욱 부장이 회고록 준비작업 외에도 “통일운동 하겠다. 민주화운동 하겠다”며 “운동권 각 신문제작자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곤 했다”고 회고했다.

김형욱 살해를 직접 지시했다는 김재규 전 중정부장에 대해서도 박기식 선생은 “김재규는 장준하 등 비주류 양심세력과 친분을 갖고 있었다”며 “자기가 권력을 잡을 생각이 있었다면 육군 벙커로 가는 게 아니라 KCIA(중앙정보부)로 갔을 것”이라 말하고 “김형욱이가 죽는 것을 보고 김재규도 언젠가 내게도 올 수 있다는 생각이 겹쳐 우발적으로 차지철과 박정희를 살해했을 것이다”고 추측했다.

선생의 집은 남.북.해외 통일인사들의 사랑방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현직에 있을 당시 중정에 함께 근무했던 박 선생은 긴 이야기를 단숨에 풀어놓으며 간간이 한숨을 쉬고 물 잔을 기울였다.

언제나 시대의 한복판에 서있었던 선생은 현재까지 통일에 대한 열정을 늦추지 않고 미국에서 해외 통일운동단체인 자주연합, 동포연합, 그리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미주본부에서 활동 중이다.


▶통일인사들의 사랑방인 박기식 선생 집에서. 최덕신(맨 왼쪽), 류미영(왼쪽에서 세번
째) 씨와 홍근수 목사(맨 오른쪽)가 보인다.  [사진 제공 - 박기식]


▶박길연(가운데) 현 유엔주재 북한대사와 함께 한 박기식 선생(왼쪽에서 네번째).
[사진 제공 - 박기식]

숱한 민주화인사와 통일인사들이 선생의 집을 보금자리 삼아 통일을 논하고 민족을 논했으며 6.15해외준비위 곽동의 위원장, 송두율 교수 등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굵직한 인물들이 선생과 교류하고 있다.

이외에도 박기식 선생이 내놓은 50여장의 빛 바랜 사진 속에는 선생과 함께 찍은 낯익은 남.북.해외 통일인사들이 즐비했다. 미국에 들른 이들은 대개가 남.북.해외 인사들의 사랑방인 선생의 집을 거쳤거나 선생의 안내를 받았다.

박기식 선생은 “우리는 운동을 통해서 동지간에 서로 우정을 교환하곤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운동을 하는데 부수적인 멋진 소득이었다”며 “그렇게 안 사람들은 10년 지기 이상으로 서로가 미덥고, 자기를 찾아오면 환대해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 때의 박기식 선생(왼쪽). [사진 제공 - 박기식]

해외에서 통일운동을 하다 고향 땅인 남측 정부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냉대 받는 이들 해외통일운동가들에게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동지’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뜨거운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북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천당가지 않겠습니까”

향년 78세, 6월 14일~17일 평양에서 개최된 6.15민족통일대축전에 해외대표단 자격으로 참가한 박기식 선생은 “이번에 북을 여행하면서 고별방문이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점점 달라지고 있는 통일의 열기를 보노라면 “내 몫은 했노라고 자위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5.18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은 박기식 선생(왼족). [사진 제공 - 박기식]

“건강해지려면 통일운동을 하세요. 머리에 잡념이 없어지고 생각이 모여 건강에 좋아집니다. 또 천당 가고 싶거든 통일운동하세요. 이북의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천당 가는 구체적인 작업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바람을 남측의 젊은이들에게 전한 박 선생은 “그래도 요새 젊은 사람들이 통일운동 한다고 격렬하게 하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에도 민족체(民族體)가 훼손되면 이를 부활시키는 백혈구 같은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작성일자:200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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