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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강점 4월 2일~9일 주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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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민권연구소 작성일05-04-01 11:04 조회1,5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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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강점관련
4월 2일~9일 주요일지


한국민권연구소 제출


  본 일지는 미군강점 60년을 맞은 올해를 주한미군이 없는 원년으로 만들기 위해 본 연구소가 만든 교양자료입니다.
미국과 주한미군이 한국사회를 예속화하고 강제점령해온 역사적 증거와 사건들을 정리하여 짧게 모았습니다.

본 일지는 한달을 주기로 정세동향 자료집에 실리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서는 매 주 금요일에 일주일 단위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자료에 한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해설도 첨부됩니다.

주한미군 철수원년, 자주통일 원년을 일구는데 열심히 헌신하실 모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료에 오류가 발견되거나 수정, 보완, 첨부사항 및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연구소 대표 이메일 minkwonyun@hanmail.net로 메일을 주십시오.

1868년
4월      북경의 미국 공사관과 상해의 총영사관에서 조선에 대한 침략계획 실현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실행
4월      대동강하구에 <제너럴셔먼호>사건을 명분으로  셰난도어 호가 침입하여 조선민중에 대한 약탈과 위협을 감행

설명있음: 19세기 미국의 조선점령 정책과 무력도발

1878년
4월     미국 상원해군위원회 조선과 불평등조약 체결 대책, 슈헬트 전권대사 임명

1882년
4월       조중회담에서 조미간의 조약체결 교섭이 타결

1947년
4월       민족문화재인 부도, 석등, 석비, 탕 등이 보존되어 있는 경복궁의 정원을 파괴하고 거기에 미군 병사(兵舍)를 세움

1948년(2.7 구국투쟁/4.3항쟁)
4월        제주 4.3항쟁

제주 4.3항쟁(설명있음)

1985년
4월        농민들의 미대사관 앞 시위

2003년
4월 8일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 제1차 회의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 회의(설명있음)

설명
1) 19세기 미국의 조선점령 정책과 무력도발
19세기의 미국은 자국의 자본주의가 집적과 집중을 거쳐 거대 독점자본화, 국가독점 자본화, 제국주의화 단계를 거치면서 세계적인 침략정책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럽의 구제국들이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는 조건에서 미국은 남아메리카와 태평양, 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미국의 관계문헌들을 살펴보면 미국의 조선정책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조선을 ① 대륙진출의 교두보이자 군사기지로 만들며 ② 자국의 잉여생산물을 고가에 팔수 있는 대외시장으로 만들고 ③ 조선의 자원을 재취하여 자국의 독점자본에게 막대한 이익을 남기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은 약소국을 강점하는 초기 수단으로 이른바 함포외교라는 것을 이용하였다. 이른바 함포외교란 함대를 몰고 가서 의도적으로 무력 충돌을 유발하고 그 배상과 책임을 약소국에 전가하여  항구의 개방과 불평등한 협정 체결을 하여 자국의 이익을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미양요, 병인양요등도 그러한 이른바 함포외교의 일환으로 외세가 침입했던 사건을 말한다.

미국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을 이용하기 위하여 제너럴셔먼호를 1866년에 조선에 들여보내나 영웅적인 평양민중들의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후 미국은 아시아 태평양 침략의 사령탑인 중국의 공사 및 영사관 등지에서 조선침략 계획을 입안하고 젠킨스를 두목으로 하여 1868년 2치 무력도발을 일으킨다.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다시 침입한 미국의 함선 셰난도어호 도발과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그것이다.
이 또한 역시 조선민중의 영웅적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연이은 패배에 미국은 1871년 대대적인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였다.
주청전권공사 F.F.로우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인위적으로 전쟁을 도발하였다. 알다시피 이 대대적 무력도발에서도 미국은 패하였는데 이를 우리는 신미양요라고 부른다.

연이은 3차례의 무력도발이 모두 실패한 미국은 이후 자국과 종속관계에 있던 일본을 이용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는 방향으로 대 조선 정책을 전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잇는 것은 미국의 조선반도(한반도) 지배 정책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최초 무력도발을 격퇴한 제너럴셔먼호사건(1866년)을 기점으로 본다면 우리 민족의 반미항전사는 올해 139년에 이른다.

2) 제주 4.3항쟁
우리 민족의 영구분단을 기정사실화 하는 5.10 단정단선이 진행되려고 하자 전국적으로 단정단선 반대투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다. 제주민중의 항쟁도 마찬가지였다.
5월 10일 2시를 기점으로 제주민중은 대대적으로 궐기하기 시작하였다.

1.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2. 망국 단독선거 절대반대
3. 투옥중인 애국자들을 무조건 즉각 석방하라
4.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은 즉각 돌아가라
5.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6. 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각 철수 시켜라
7. 조선 독립 통일 만세

이와 같은 구호를 들고 제주민중은 크게 궐기 하였다.
친일파들과 친미파들이 장악했던 경찰서와 파출소는 인민위원회가 장악하게 되었고 4.3 항쟁을 일으킨 무장대오는 전체 제주민중들의 열렬한 지원 속에 호소문을 발표하고 적극적인 전개활동을 펼쳤다.

제주민중의 4.3 항쟁에 놀란 미군정 경무부는 이틀 후인 4월 5일 제주도 지방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각 도 경찰청으로부터 총 1700명의 토벌대를 급파하였다.
토벌병력이 확충되자 제주지방경비사령부는 해안선을 봉쇄하고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때부터 근대사에 보기 드문 대대적인 학살, 고문, 투옥이 자행되게 된다.
이러한 토벌과 항쟁은 근 1년간 진행되었다.

8만 6천명 살상, 1만 5천 호 방화, 7만 8천 두의 소와 2만 2천 필의 말 및 2만 9천 마리의 돼지 도살, 곡류 13만 5천석, 고구마 4백 2십만 관, 면화 9만 7천 관, 소채 90만관 소각

이 항쟁의 댓가는 처절했다. 당시 제주 전체 인구의 1/3이 토벌로 인해 학살당했다는 비공식 평가도 존재한다.

이 4.3항쟁은 우리 조선민중이 당시 조국의 분단과 단정단선을 얼마나 극렬하게 반대했는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을 분단시키 위해 미국과 민족반역자들이 펼친 반동적 학살과 고문, 민중탄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두 가지 교훈은 오늘날 미일 제국주의와 친미수구세력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3)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 [Future ROK-US Alliance Policy Initiatives]  
  
변화하는 안보환경에 대한 효율적 대처를 명목으로 한미 간에 진행하는 회의
34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변화하는 역내 및 세계 안보환경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양국 사이에 합의된 미래 정책구상이다.
2003년 4월 8일 서울에서 제1차 회의가 열린 이래, 2004년 8월까지 총 11차에 걸쳐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주로 한미 간의 동맹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1차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은 ① 한반도 안보에 대한 한국의 역할 증대 ② 주한미군의 역내 안정에 대한 기여 강화 ③ 연합 방위능력 향상 및 전쟁 억제력 강화를 위한 연합 군사능력의 현대화에 대한 협의 추진 ④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 여건 보장 ⑤ 주한미군 기지 운영의 효율성 제고 및 기지체계 통폐합 ⑥ 서울 용산기지의 이전 ⑦ 중장기 차원의 한미 연합 지휘관계 연구를 위한 협의체 구성 등이다.

이후 11차까지 열린 회의에서 용산기지와 미 2사단 등의 구체적인 재배치 위치와 경기도 평택시를 중심으로 한 해당 지역의 토지 매수 계획안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2004년 현재 총 7300만 평에 달하는 주한미군의 공여지는 재배치가 끝나는 2008년 무렵이면 2500만 평으로 줄어든다.

한미동맹이 미국에 예속된  수직동맹이라고 할 때 동맹관계 문제를 논하는 이 회의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예속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박세길/돌베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박세길/돌베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박세길/돌베개)
침략의 역사 항전의 역사(김희일/기획출판 한)
인터넷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index.asp
각종 인터넷 포탈싸이트 자료모음 및 기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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