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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아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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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7-06-24 07:13 조회1,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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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6(2017)년 6월 23일 《우리 민족끼리》
 
《코레아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2)

 
지난 2010년에 재미교포인터네트언론 《민족통신》에 조선전쟁의 발발과 관련한 글이 실리였다.
《코레아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라는 글내용을 련재로 소개한다.
 
량민학살을 주도한 남조선강점 미군과 그 하수인
 
리승만의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지난 1948년 려수에서 폭동을 일으킨 14련대 군인들이 지리산에서 유격활동을 벌리자 괴뢰군은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토벌에 돌입했으며 작전중 산간마을을 초토화하였다. 제2대대장의 인솔하에 출동한 괴뢰군은 신천리 린근마을에 불을 지르고 강변과 신천국민학교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야수적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이날 제2대대 주둔지인 덕산국민학교와 제3련대 정보과가 본부를 차려놓은 농회창고에서 마을사람들을 련행하여 취조한 후 살해했다. 희생자들은 토벌작전에 나갔던 괴뢰군에게 각 마을에서 련행되여 그들의 주둔지에서 고문을 당한 후 시천면 덕산국민학교 뒤산이나 농회창고 뒤산, 삼장면 가막골 등지에서 살해당하거나 혹은 희생자의 거주지에서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3련대는 1950년 1월 말 서울로 이동할 때까지 린근지역주민 수백명을 유격대와 협력하거나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살해했다.
1949년부터 조선전쟁발발직전까지 경북 대구에 주둔하고있던 륙군 제6련대와 이 부대를 재편한 22련대, 륙군 정보국소속 《호림》부대, 경산경찰서 등은 지역내 유격대에 대한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괴뢰군 제3련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함양군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유격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초토화하였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한자는 후날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술하였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괴뢰군 제5사단 제3련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들이였다.
1949년 7월부터 1950년 1월말사이에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강변, 신천리 신천국민학교, 원리 덕산국민학교 뒤산, 사리 농회창고 뒤산, 삼장면 평촌리 가막골, 지리산 산간마을과 골짜기 등 여러곳에서 량민들은 괴뢰군 제3련대 정보과, 제2대대소속 괴뢰군에게 집단살해당했다.
제7사단 제3련대는 1949년 3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덕유산, 괘관산, 반선리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1949년 7월~ 1950년 1월 괴뢰군 3련대소속 병사들이 경남 산청군주민 129명을 살해한 《산청 시천, 삼장 민간인학살사건》은 적수공권의 농민들을 고문, 총살하거나 총검과 죽창으로 살해하였다고 진실화해위원회는 밝혔다.
재미력사학자 방선주(66)가 입수한 미국극동군사령부의 비밀문서는 《문경 량민학살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1949년 12월 24일 오후 2시 국군 2개 소대가 들이닥쳤다. <국군>들은 마을주민 10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국군>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과 카빈총을 쏘아댔다. 남녀 8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 가운데는 녀자 41명, 어린이 10명과 갓난아이 5명까지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것 같다는 지휘관의 느낌때문에 학살되였다. 이웃사람들의 주검밑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1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더구나 이와 같은 만행을 지휘한 <국군>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마을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던것으로 남조선강점 군사고문단장 로버츠준장은 비망록에서 밝히고있다.》
당시 산북 면사무소 서기로 학살현장 구호활동을 폈던 천규철은 리승만괴뢰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은페하였음을 시사한다. 《나는 학살 다음날 면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데없는 상황이였다. 뒤에 신임 문경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친일, 친미매국노들이 이러한 자기들의 만행을 인민군대에 뒤집어씌워 조작한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괴뢰군 제3련대 1, 2대대는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산동면에, 제12련대 1~3대대는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초까지 구례중앙초등학교와 구례구역 등에 각각 주둔하면서 구례군일대 유격대에 협력한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집단사살했다.
괴뢰군 제8사단은 1950년 3월 28일부터 오대산 및 황병산일대에서 끈질긴 《공비》토벌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1월기간에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 5개 지구에 대한 토벌공세를 벌리고 이 지역의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주민 약 4만명을 학살하였다.
미군과 이를 추종한 친일세력의 횡포는 8. 15이후 날이 갈수록 더욱 횡포한 자세를 보이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악화되는 속에서 조선전쟁이 일어났기때문에 그 리유가 무엇때문인가를 알자면 그 력사적배경의 진실부터 알아야 한다.
 
짐승도 낯을 붉힐 야수적만행
 
남녘동포들은 민족분렬사와 조선전쟁력사에 대해 그 진실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였다. 리승만괴뢰《정권》부터 그 이후 대부분의 집권자들과 어용학자들은 주로 외곡력사를 사실처럼 선전하여왔기때문이다. 특히 《보안법》이라는 말도 안되는 악법을 리용하여 진실을 진실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였고 동족인 북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동족으로 생각하면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것이 《보안법》에 저촉되여 감옥에 가야 하는 그런 참담한 사회가 바로 남조선의 현실로 되여왔다.
조선전쟁을 보는 관점도 미국정부와 이를 추종하는 남조선의 력대 집권자들이 주장하는것과 미국의 량심적인 학자들이나 정의감을 가진 종군기자들이 보는 관점이 아주 다른 점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남조선의 량심적인 학자들과 해외동포학자들이 보는 관점도 미국정부와 이에 추종해온 남조선의 사대매국《정권》의 주장들과는 완전히 다른것이 구체적으로 검증되여왔다. 미군이 자기 나라 리해관계때문에 조선반도에 들어온것을 《점령군》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를 거꾸로 천사로 미화하여 《해방군》이라고 주장하는 상반된 관점을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미국의 지배세력이며 이에 추종해온 사대매국세력이다.
미국의 학자 부르스 커밍스가 쓴 《코레아전쟁의 기원》을 비롯하여 미국의 종군기자 아이 에프 스톤의 《코레아전쟁의 숨겨진 력사》, 《한길사》가 밝힌 《1950년대의 인식》, 《풀빛》출판사가 밝힌 《한국민중사 2》, 《자주민보》가 밝힌 리도영박사의 《움직이는것은 무엇이든 쏴라》, 그리고 인터네트상에 올라온 조선전쟁의 자료 등의 내용들은 남조선과 미국이 주장하는 이른바 미군의 《해방군》주장이나 전쟁의 원인을 북의 《남침설》로 보는 립장을 단호히 거부하고있다. 우리는 일방적인 견해만을 펴고있는 립장보다는 량심적이고 객관적인 립장을 보여주는 학자들과 종군기자의 견해에 립장을 함께 한다는 사실을 여기에 밝히면서 계속해서 조선전쟁의 진실을 벗겨본다.
지난 세기 력사를 돌아보면 우리 민족은 미국과 일본에 의해 숱한 고통을 받아왔다. 일제통치 40여년도 미국과 일본의 비밀협약(1905년 《타프트-가쯔라》밀약)에 의해 수난을 받게 되였고 8. 15해방이후에도 미군정의 간섭과 탄압정책으로 우리 민족은 말할수 없는 수난과 대학살의 치떨리는 참혹한 시대를 겪어야 했다. 그것도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미군정통치하인 지난 1947년 8월부터 1950년 9월까지 통영, 거제일대에서 군경에 의해 민간인 수백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빙산의 일각이지만 이것부터 돌이켜본다.
하청면과 장승포읍 주민들도 1949년 유격대에 협조한 혐의로 괴뢰군 제16련대 등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그 행위는 하수인역을 맡은 괴뢰군이 하였지만 그 주범은 배후의 미군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좌익》으로 몰린 한 녀교사는 얼굴이 예쁜 젊은 처녀들과 함께 릉욕을 당하고 암매장되였는데 그 녀교사는 다리까지 잘리웠다. 또 충무, 통영군 남녀 800여명의 학살은 헌병무관들이 부녀자들을 릉욕하고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사건이였는데 당시 녀성들은 창고에 끌려가 남녀가 모두 옷을 벗긴채 구타를 당하였다(김삼웅).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에서 11사단 205부대는 마을 주민 60여명을 살해하고 부녀자 7명을 끌어내여 대검으로 목과 유방, 심지어 음부까지 란도질하여 모두 죽였다. 이번에는 19명을 일본도로 참수하였는데 김점동이 일본도에 의해 목을 두번이나 내려쳐졌으나 죽지 않자 《더러운 놈 모가지가 왜 이렇게 질겨》하면서 장교는 세번째 내려쳤다(서중석). 창원군 북면에서도 해군첩보 대대장 황광수 등이 이곳 주민과 피난민 60명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면서 어린애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일본도로 내리쳐 죽이고 부녀자들에게는 젖가슴을 칼로 자르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김삼웅).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아산군 신창지서 주임이던 유해진은 마을 부녀자를 강간하고 부하까지 강간하게 하였으며 빨갱이루명을 쓴 부녀자를 첩으로 삼았다.
이제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반인륜과 패륜행위를 살펴보겠다. 여기에는 6. 25전후 가장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출신이고 리승만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김종완이 대표적이다. 그는 려수 등에서 일본도로 사람을 참수하는것을 즐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1950년 5월 6일 6. 25전에 백골부대를 이끌고 거제도 일운면 구조리 앞바다에 주민 1천명을 1시간동안 찬물에 세워놓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모와 사위 등 서로 어려운 사이를 골라 서로 마주 뺨을 때리도록 하고 만약 세게 때리지 않으면 총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란타하는 짐승같은 짓을 저질렀다(서중석). 이같은 《뺨 때리기》와 《말 태우기》는 당시 흔한 보편적현상이였다.
제주에서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태워 빙빙 돌게 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하였다. 총살에 앞서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총맞아 쓰러질 때 가족들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김종민).
통영에서는 죄없는 량민 수십명을 창고에 가두어놓고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수장시켜 죽였다. 필자와의 면담에서 어느 륙군상사는 시숙과 제수를 옷을 벗겨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멍석에 말아 굴리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가증스런 야수적행위는 이미 제주에서부터 알려졌다. 처녀와 총각을 불러내여 서로 정교를 강요하였고(황상익)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정교를 맺게 하고는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김종민).
다음은 완도읍 두암리에 살던 《좌익》아들을 둔 할머니의 이야기다. 경찰이 그 아들을 죽이고는 아들의 간을 꺼내 할머니입에 물리고는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였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반 미친 상태에서 경찰이 시키는대로 하였고 13년 형을 받아 7~8년 복역후 석방되였으나 몇달후 죽었다고 한다(김삼웅).
이와 같은 행위는 미국을 등에 업고 자기 형제자매를 살해하고 탄압했던 반민주, 반민족세력의 횡포였다. 실례로 자기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씻을수 없는 죄를 저지른 미국에 기생해서 기득권을 누린 리명박친미보수《정권》의 잔인무도한 행위와 거의 류사한것으로 비유되고있다.
그런데 그 주범은 표면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직접 만행을 저지른 친일세력들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그 주범은 무기를 공급하고 지시를 내린 남조선강점 미군이다. 더구나 미군은 그 당시 사람을 많이 죽인 친일매국노를 높이 평가해주고 진급을 시켜 고무하였다.
이러한 반인륜적행위는 단지 6. 25때문에 발생한것은 아니다. 이미 일본군국주의의 악랄한 인권말살주의에 물들어있던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이 반공제일주의를 내들었던 미군정과 결합하여 그들이 생사를 걸고 남조선사회의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실시되였다. 실제로 미군정당시에도 마크 게인의 일본 일기장에 서술되여있듯이 경찰이 류사한 만행을 저지르고있었다. 물론 6. 25이전에도 4. 3항쟁과 려수항쟁에서 보듯이 토벌대의 이러한 만행은 수없이 많았다. 단지 6. 25이후 보다 대규모로 빈번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공비》토벌을 위한 군경과 민간《의용대》의 작전은 1949년 말∼1954년 초까지 4년 넘게 계속됐다.
감옥은 애국자들로 넘치는데도 반《정부》기운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민주세력을 일거에 제거할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조선전쟁의 발발이였다. 뿐만아니라 전쟁은 북까지 《점령》할수 있는 기회로 되는것으로 하여 미국과 친일세력, 그리고 이에 결탁한 반민족세력들은 모두가 그렇게 소망했다.
즉 전쟁만이 모든것을 해소할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였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미국은 전쟁을 위한 씨나리오를 착착 준비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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