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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참전열사묘에 이남 출신 영웅 <공재화> 새로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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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7-30 03:31 조회3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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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동포 필진으로 남녘 진보언론에 기고해 온 <중국시민>은 이번 자주시보 기고를 통해  "조국해방전쟁승리 65돐을 맞으며 공화국영웅들인 송해선,공재화,리병필,리형원,김제홍,차호남렬사들의 유해를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안치하는 의식들이 16일과 17일에 진행되였다." 밝히면서 "전쟁로병들인 송해선,공재화렬사들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여러대의 적땅크를 파괴하고 원쑤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겼으며 단신으로 적들의 공격을 4차례나 물리침으로써 조국의 고지를 3일간이나 사수하였다."고 설명한다.7월29일자를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병진노선.jpeg





북의 참전열사묘에 묻힌 이남 출신 영웅 공재화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7/29 [14: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의 전국노병대회와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 

 

7월 27일 정전협정체결 65돌에 즈음하여, 최근 평양에서 제5차 전국노병대회가 진행되었다. 

7월 24일 자 조선중앙통신 기사에 의하면 

 

“이번 대회에는 나라의 존엄과 자주권을 영예롭게 지켜내고 전승의 기적을 창조한 전국의 로병들이 참가하게 된다.” 

 

2015년 해방 70돌과 조선노동당 창건 70돌이 되는 해의 “전승절”을 맞으며 제4차 전국노병대회가 진행된 이래 3년 만이다. 제1차 전국 노병대회는 1993년 전승 40돌에 즈음하여 김정일 당시 조선노동당 조직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주도하여 진행했다. 25년이 지난 지금 전의 대회들에 참가했던 노병들은 대량 사라졌다. 그중 다수는 5년 전에 만들어진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안치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의 7월 26일자 보도에 의하면 

 

“지난 5년간 연 130만여명의 인민군군인들과 각계층 근로자들,청년학생들이 인민군렬사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시하였다.”

 

이번 “통일문화 가꿔가기”는 제1차 전국노병대회 참가자였고 최근에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안치된 사람을 다룬다. 

 

참전열사묘에 안치된 열사들 중 알만한 이름 

 

2018년 7월 17일 조선중앙통신은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렬사들의 유해 새로 안치”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조국해방전쟁승리 65돐을 맞으며 공화국영웅들인 송해선,공재화,리병필,리형원,김제홍,차호남렬사들의 유해를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안치하는 의식들이 16일과 17일에 진행되였다.

전쟁로병들인 송해선,공재화렬사들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여러대의 적땅크를 파괴하고 원쑤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겼으며 단신으로 적들의 공격을 4차례나 물리침으로써 조국의 고지를 3일간이나 사수하였다.

리병필렬사는 비행기사냥군조운동을 적극 벌려 여러대의 적기를 쏴떨구었으며 저격수영웅인 리형원렬사는 관무봉 남쪽무명고지전투에 참가하여 넉달동안에 150여명의 적병을 쏘아잡는 위훈을 세웠다.

김제홍렬사도 언제나 수령결사옹위,조국수호의 항로를 맨 앞장에서 날았으며 제대후에도 사회주의강국건설위업에 헌신하였다.

비행기사냥군조원이였던 차호남렬사는 도시와 농촌마을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에 미쳐날뛰던 적비행기를 10여대나 격추하였다.

렬사들의 유해를 안치하는 의식들에서는 발언들에 이어 렬사들의 유해가 안치되였다.

참가자들은 렬사들의 묘에 꽃다발들을 진정하고 그들을 추모하여 묵상하였다.(끝).”

 

유공자들의 이장은 근년에 가끔 나오는 소식이다. 필자가 모르는 인물들이 다수인데, 이번 기사에는 알만한 이름이 있었다. 공재화였다. 드문 성이고 이름도 흔한 편이 아니어서 전에 어딘가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노병들을 청년들이 따라배우도록 만들어진 책자  

 

찾아보니 1995년에 출판된 실화문학집 《포화를 헤쳐온 사람들》(금성청년출판사 1995년 4월, 236쪽)에 소개됐다. 

 

▲ 실화문학집 《포화를 헤쳐온 사람들》     © 자주시보,중국시민

 

1993년 전승 40돌에 즈음하여 김정일 조선노동당 조직비서 겸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전국노병대회를 성대히 진행하고 혁명의 3, 4세대들이 노병들을 적극 따라 배우는 사업을 밀어주었다. 그 차원에서 청년학생교양이 무거운 책임 중의 하나인 금성청년출판사는 김동호, 김문창, 박찬은 등 쟁쟁한 소설가들과 문인들을 조직하여 전쟁노병들을 취재하게 했고 결과 그런 책자를 내놓은 것이다. 필자로서는 “실화문학집 1”이라고 적었으니 2나 3이 어디 있으리라고 무진 애를 써서 얻어 보았으나 지금껏 후속책을 확보하지 못한 게 무척 유감스럽다. 

 

차례와 저자, 모범인물이름을 표에 넣어본다. 

 

제목

저자

인물

불굴의 전사

리빈

김동환

병사의 자국

김동호

조현주

시대의 박동속에서

김문창

리금옥

로병의 마음

김교섭

최추옥

어제도 오늘도

림병순

김복순

신들메

박찬은

장현곤

알았습니다!

리동섭

박재관

영원히 한길에서

김정남

박영화

소원

윤원산

홍경표

로병사의 심정

김석범

공재화

로병과 새 세대

서진명

박찬수

 

 

11명 노병의 고향출신경력직업은 다르나 글들의 공통한 내용은 주인공들이 전쟁시기에 어떻게 잘 싸웠고 전후에 어떻게 성실하게 일해왔느냐이다.

공재화의 사적은 203~ 215쪽에 실려있다.

 

수원 사람의 고향생각, 혈육 생각 

 

“로병사의 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한차례의 폭우가 지나갔다. 비는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처럼 그렇게 갑자기 멎었다. 이 건물 저 건물에서 구내길에 나선 종업원들은 즐겁게 떠들어대며 정문쪽으로 밀려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재화는 천천히 후문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수양산의 동쪽릉선기슭에 심어놓은 어린 뽕나무들을 돌아보고싶었던것이다. 혹시 그것들이 비바람피해를 받지 않았는지.... 그것들이 지금은 작고 연약하지만 달이 가고 해가 바뀌면 기름진 뽕잎을 내게 된다. 그러면 누에를 치게 되고 누에고치로 닭들이 좋아하는 특종의 먹이사료를 구해들이게 된다. 그가 맡아보는 3층집 높이만한 덩지 큰 창고안에는 각종 먹이사료들이 무둑무둑 가려져있었다. 창고원의 일이란 그것들을 매일 소용되는 량만큼 출고해주고 또 그만한 량을 접수해넣으면 된다. 창고원들은 이런 일에 익숙되여있었고 그렇게 하면 자기 임무를 다하는것으로 알고있었다. 그러나 종금반에서 반장으로 일하다가 몇달전에 건강상 부득이해서 창고로 옮겨앉은 공재화는 그것으로 자기 임무를 다했다고 보지 않았다. 많은 닭알을 생산하자면 특종의 먹이사료를 꼭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면서 그로 하여금 그 해결책을 모색케 했던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누에고치인데 마침 수양산 동쪽릉선의 공지에 새로운 수종의 나무들을 심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때라고 생각한 공재화는 국토관리국에 찾아가 뽕나무를 심었으면 하는 의견과 그것이 공장의 경영활동과 국가에 주게 될 리득에 대해 말했다. 

국토관리국에서는 그의 의견을 흥미있게 대했다. 그리하여 공장구역과 린접된 산기슭의 많은 면적에 뽕나무밭을 조성하게 되였다. 그것은 달포전에 있은 일이였다. 그런데 오늘 퇴근시간이 되여올무렵에 때아닌 바람이 들이치면서 한시간정도 폭우가 쏟아진것이였다.”(203~ 204쪽)

 

수양산이 있는 해주의 닭공장에서 종금반 반장으로 일하다가 창고원으로 옮겨앉았다면, 남의 기준으로 볼 때 공재화는 정말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다. 허나 그는 엄청 존경을 받았으니 공화국영웅이기 때문이다. 

공재화가 돌아보니 뽕나무들이 세찬 바람을 잘 이겨냈기에 마음이 흐뭇하다. 물곬이 진 한두 구간에서 몇 그루의 나무가 밑이 패워 기울어진 걸 바로잡았는데, 시내로 돌아와 아내를 만나면서부터 불쾌해난다. 맏아들 명수가 부모를 시내로 모셔가려고 하는 것이다. 

평양 광복거리 건설장에서 청년돌격대 소대장으로 활약하면서 노동당에 입당했고 김일성청년영예상도 수여받은 명수가 도공산대학에 들어가 몇 해 공부한 다음, 공재화는 아들이 닭공장에 와서 일하기를 바랐는데 8~9년간 평양과 해주라는 번화한 도회지 물을 먹은 명수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졸업 전부터 학교에 떨어지기로 했다더니 근간에는 시내에 집까지 마련했다면서 부모를 모셔가겠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년세가 많으시구 더구나 건강이 좋지 못한데...”라는 말에서는 전쟁 때 싸운 공로도 있고 또 공화국영웅인데 지금까지 한생을 기울여 그만큼 일했으면 쉴 권리가 있지 않겠느냐는 속심이 깔려있다. 공재화는 그런 아들이 여간 노엽지 않다. 

이리하여 공재화는 옛일을 돌이키게 된다. 

공재화는 수원 사람으로서 어릴 적 오목사의 집에서 꼴머슴으로 되었고 전쟁시기 마을에 인민군대가 올 때까지 베잠뱅이를 입고 그 일을 하다가 의용군에 가입했다. 

일선에서 전투들을 겪었고 통신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군부대들의 군사통신을 보장했다. 

1956년에 인민군대에서 제대한 뒤 평양의 어느 한 경노동직장에 남으라는 권고를 마다하고 황해남도 해주 부근의 학현(지금은 해주시의 학현동)에 가서 닭공장을 일떠세웠으니, 거기가 고향에서 그중 가까왔기 때문이다. 

학현에서 수십 년 일하고 살면서 공재화는 제법 큰 가정을 이루었다. 맏아들 명수가 꽤나 “출세”한 외에 둘째 아들 명학은 해주편직공장에서 일하고, 막내아들 명훈은 진명대학 사로청지도원반에서 공부했으며 맏딸 명순이는 닭공장에서 일하고 둘째 따 명희는 제대군인으로서 이웃마을로 시집갔다. 간만에 자식들이 집에 모여왔다. 

그런데 공재화는 고향에 남은 혈육들이 그립다. 

 

“그는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네 동생(공재영, 공재문, 공재룡, 공정숙)의 소식을 모르고있었다. 살았는지 묵었는지 그 생사조차 모르고있는 그로서는 그들을 만나고싶은 심정이 강했다. 

 

《오빠, 꼭 가야 하나요? 오빠가 없으면 우린 어떻게 해요? 난 어떻게 하구...》 

그가 의용군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할 때 하나밖에 없는 녀동생인 공정숙은 그의 손목을 잡고 눈물이 글썽해서 이렇게 말했었다. 공재화는 그때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지만 녀동생의 그 모습을 잊은적이 없었다. 매봉산에서 괴뢰군백골부대와 맞서 싸울 때에도 통신사솬학교를 졸업한 후 군부대들의 군사통신을 보장할 때에도 그리고 학현땅에 닭공장을 일떠세우고 종금반에서 일할 때에도 그는 공정숙을 생각하며 상봉의 날, 통일의 날을 눈앞에 그려보군했었다. 물론 그는 그 누구에게도 가슴속에 엉켜있는 이런 사연을 말해본적이 없었다. 그래그런지 그 누구도 통일의 그날까지 무슨 일이건 하려고 애쓰는 그의 심정을 알아주지 못했다. 

공재화가 매봉산의 수류탄영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다음엔 더욱 그러했다. 조국을 위해 그처럼 큰 위훈을 세운 사람이니 여생을 편안히 보내도 당당하다는것이였다. 공재화는 그런 사람들에게 고향에 두고온 부모형제들에 대해 말하고싶었고 매봉산에서 피흘리며 싸운 심정을 호소하고싶었다. 하지만 그게 다 자기를 동정해달라거나 자랑하는것으로 될것 같아 불문에 붙여왔다.”(207~ 208쪽)

 

공재화가 “매봉산의 수류탄영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 하는데, 1956년 그가 학현으로 갔을 때에는 그저 그러루한 제대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8년이 지나서야 숨은 영웅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수류탄 영웅”이 세상에 알려진 사연 

 

공정화의 영웅업적은 전선동부의 매봉산에서 세워졌다. 전쟁 전에는 별로 이름나지 않았으나 전쟁 뒤에는 전시가요 《매봉산의 노래》덕분에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 전시가요 《매봉산의 노래》 악보     © 자주시보,중국시민

 

전선동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러 유명한 1211고지는 매봉산의 왼쪽 남단에 있는데, 공재화가 싸운 곳은 매봉산의 남쪽 돌출부였다. 

 

“그는 여기에서 매봉산으로 달려드는 적들과 싸웠다. 처음에는 분대장이 숨지면서 넘겨준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그 다음에는 적의 기관총을 빼앗아들고... 그때 그는 혼자였다. 혼자서 적 한개 대대와 맞서싸웠다. 그는 그 전투가 어떻게 결속되였는지 자세히 모른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그는 의식을 잃은채 속사리인민들의 담가대에 실려 야전군의소로 옮겨갔던것이다. 

공재화는 그때로부터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다음에야 자기가 그 전투에서 의식을 잃는 마지막 순간까지 적들을 180명이나 쓸어눕히고 돌출부를 지켜냈음을 알았다. 원수들을 이겨내고 고향을 해방할 불타는 일념을 안고서!”(211~ 212쪽)

 

공재화가 전공으로 상을 받은 건 1964년 5월이다. 전투는 1951년에 진행되었으니 엄격히 말하면 13년 만이다. 

5월 초의 어느 날 공재화가 부화기들을 돌아보면서 후보반에 보내줄 병아리들을 받아내는데 뜻밖에도 중앙인민위원회 상훈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초급당비서실에서 만났다. 상훈부 사람들이 가져온 사진에는 젊은 시절의 공재화가 정치부중대장(지금은 정치지도원이라고 부른다) 김지봉, 소대장 강길선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상훈부는 김지봉을 통해 그 사진을 입수했고 또 김지봉과 그 사진을 통해 공재화를 찾아냈다. 

 

“상훈부일군은 전쟁시기에 발표된 전사 공재화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할데 대한 정령내용을 알려준후 그에게 금별이 빛나는 영웅메달과 국기훈장제1급을 수여했다. 

수양산골짜기에서 이름없이 지내던 공재화는 이렇게 되여 전설적인 수류탄영웅으로, 세상이 다 아는 사람으로 되였다.”(212쪽)

 

그런데 공재화가 알려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005년 8월 16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군사대결 4편 “육탄정신, 자폭정신을 강조하는 이유”의 한 꼭지 “가슴으로 화구를 막았음을 부인하며 살아온 이명석”에서 필자는 이렇게 썼다. 

 

“이명석(1926. 07. 22~1993. 06. 07)은 강원도 화천군 사람이었다. 

11살부터 방랑하며 일했고 광복 후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하다가 1947년 5월 입대했는데, 1951년 8월 24일 강원도 린제군 장승리계선의 965고지 습격전투에서 화점을 가슴으로 막아 부대의 돌격로를 열었다.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상이군인(조선에서는 영예군인이라 함)으로서 제대한 그는 결사적인 노력으로 망가진 몸을 어느 정도 회복시키고는 공밥을 먹지 않기 위해 일을 찾아했다. 영화를 돌리는 기술을 배워 노동성 영무휴양소에서 영화기술원으로 일한 것이다. 

10여 발의 탄알이 그의 배를 뚫었음을 아는 사람들이 엔간해서는 그렇게 다치지 않는다고 여기어 혹시 화구를 막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그는 극구 부인했다. 자기가 화점을 보고 몸을 일으킨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그 뒤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 동안 그의 전우들이 작성한 목격자료에 근거해 1951년 12월 14일 그에게 수여된 공화국영웅증서와 메달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보관되었는데, 10여 년이 지나 그가 살아있음이 발견되어 메달이 임자를 찾게 되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0년이 되건만, 러시아에는 아직도 임자를 찾지 못한 메달이 수십 만 개 된다 한다. 조선에서는 김정일위원장이 1960년대에 사업에 참가하면서 메달주인 찾아주기에 관심을 돌렸다는데 지금도 주인 없는 메달이 있는 지 모를 일이다.”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한 청년 김정일의 추진으로 메달주인 찾기 활동이 벌어졌는바, 공재화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조했다 한다. 

 

“전사자명단에 들어있는 매봉산의 수류탄영우은 절대로 죽지 않았을것이다, 그가 잘못되였음을 확인할만한 자료가 없지 않는가고 하시면서 상훈부일군들로 하여금 공재화를 꼭 찾아내도록 하신것이였다.”(212쪽)

 

1964년 5월 평양에서 열린 민주청년동맹(지금은 김일성- 김정일주의청년동맹) 제5차 대회에서 처음 공재화를 만나 “혼자서 180명의 적을 무찌른 공재화동무가 왔구만. 동무를 만나보고싶었소.”(213쪽)라고 말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김정일 지도자는 공재화를 두고두고 잊지 않았으니 김일성 주석 탄생 70돌 경축행사, 80돌 경축행사, 전국영웅대회... 등 공재화는 대형 경축행사와 대회들에 열 번 너머 참가했다. 공재화는 그런 영광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당은 지난날 사람대접도 받지 못했던 자기를 혁명의 대오에 세워주었고 영웅으로 내세워주었다. 받아안은 영광과 사랑, 그에 비하면 해놓은 일이란 너무도 작고 보잘것이 없다. 그래서 생이 진하는 그 순간까지 손에서 일을 놓을수 없는 그였다. 이것은 그의 념원이고 소원이였다. 

그런데 이 소원을 의례히 알아주려니 했던 명수가 오히려 동생들의 앞장에 서서 막으려 드는것이였다. 공재화는 이런 아들이 섭섭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는 등당 이 애비의 심정을 알아차리고 공산대학에서 곧장 이리로 왔어야 했을것이였다. 

(후레자식같으니, 아버지의 심정 하나 리해하지 못하는 녀석이 당을 받들면 얼마나 똑똑히 받들텐가!)”(214쪽)

 

조선의 글이 대개 그러하듯이 결말은 아름답다. 닭공장의 초급당비서가 공재화를 찾아와 공명수가 배치장(전근 지령서)을 떼가지고 공장으로 오겠다고 했다고 알린다. 또한 공재화에게는 곧 평양에서 열린 전국노병대회 토론(발언)을 준비하라고 전한다. 

 

“공재화는 뜨거운것이 앞을 가리워 걸음을 멈추었다. 전국로병대회가 있다는 말은 그도 들어서 알고있었다. 그러나 환갑이 지난 자기가 그 대회에 참가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햇다. 그런데 토론까지 하다니... 공재화는 여러 대회들에 참가하긴 했지만 토론은 이번이 처음인것이였다.”(218쪽)

 

큰 사랑과 은정 앞에서 눈물을 금치 못한 공재화는 집중치료를 받으면서 토론을 준비했고 며칠 뒤 평양행 열차에 탄다. 명수가 그를 바래면서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뽕밭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알겠다.》 

공재화는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미덥게 바라보았다. 자기뒤에 명수가 있고 명학이, 명훈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혁명의 4세대들은 그들은 이 로병사의 심정을 고스란히 받아안고 우리 당을 영원히 받들어나갈것이 틀림없었다.”(218쪽)

 

“로병사의 심정”은 이렇게 끝난다. 

 

미완의 과제 

 

책이 나온 뒤 23년이 지나갔다. 출판 직후 조선(북한)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이라는 전대미문의 어려움을 겪었고 핵보유국을 선포했다가 비핵화의 길로 나간다. 또한 그 동안 남북이산가족상봉도 여러 차례 조직되었고 금년에도 조직예정이다. 한국 언론들에서 공재화가 오르내리지 않았으니 공재화는 끝내 혈육들과 만나지 못한 모양이다. 

공재화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떴느냐는 보도되지 않았다. 허나 조선이 그를 존경하는 열사로 모시면서 유해를 조국해방전쟁참전열사묘에 안치했다는 건 그가 마지막까지 깨끗하게 살았고 그의 유가족들도 잘 보내고 있음을 방증해준다. 

언젠가 조선에 간다면 필자는 해주시 학현동으로 찾아가 공재화가 심혈을 기울였던 닭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뽕나무들이 잘 자라는지 확인하고 싶다. 

“월북인사” 할 때 남에서 워낙 유명했던 정치인, 예술인,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남에서 연구가 괜찮게 진행된 셈이다. 남로당 지도자들과 기타 명인들이 순전히 억울하게 숙청당했다는 틀에 매여 그릇된 결론들을 내리기도 한다만. 

헌데 공재화처럼 남에서 평범하게 보내다가 북에 가서 이름난 사람들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 공백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엄연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거늘 어찌 무시하랴. 그런 월북자들에 대한 연구는 미완의 과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북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북에서 알려진 공재화의 모습을 남과 해외에 전한다. 무의미한 노릇이 아니리라고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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