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34] <5대양6대주> 8개국 취재 마치고 고인들 참배::고인이 된 신옥자선생/이화선목사/정규명박사와 강혜선여사 등 묘소참배/<베를린리포트가 해외동포사회 최초의 인터네트 언론 >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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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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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34] <5대양6대주> 8개국 취재 마치고 고인들 참배::고인이 된 신옥자선생/이화선목사/정규명박사와 강혜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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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5-29 20:18 조회20,616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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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취재진은  5대양6대주 통일염원 탐방취재를 위해 중국-일본-뉴질랜드-오스트랄리아-아랍 에미레트-독일과  마지막 나라들인 스웨덴, 덴마크를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후랑크후르트에 도착하여 사나흘 동안 머물르는 동안 일부인사들을 만났고, 한편 고인들이 통일운동 선배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미국에 오기전  유럽지역에서 활동안 내용을 여기에 추가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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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왼쪽부터 고 이화선목사 딸 이한나씨, 신옥자씨 딸 김숙진씨와 민족통신 기자 




 [기획34]

 

<5대양6대주> 8개국 탐방취재 마치고 고인들 참배


 

[후랑크후르트=민족통신 노길남특파원]기자는 5대양6대주 통일염원 탐방취재를 위해 중국-일본-뉴질랜드-오스트랄리아-아랍 에미레트-독일과  마지막 나라들인 스웨덴, 덴마크를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후랑크후르트에 도착하여 사나흘 머물르는 동안 일부인사들을 만났고, 한편 고인들이 된 통일운동 선배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 기간 김성수박사를 비롯 선경석 6.15유럽지역위원회 상임대표, 김순실여사와 그의 딸 이한나씨, 그리고 고인이 된 이화선목사의 묘소 참배, 고 신옥자여사의 딸 김숙진씨, 그의 친구인 이은희씨와 고인의 묘소를 참배했고, 그리고 채명수박사와 부인 류소영박사, 이한나씨와 함께 고 정규명박사의 묘소를 참배했다. 고인들 중에 스위스의 최기환박사, 프랑스의 이희세선생 등은 차기 방문때 묘소에 인사하기로 했다.


 

*() 이화선 목사 묘소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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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이화선목사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고인의 딸 이한나씨와 그의 어머니 김순실여사(86)를 만났다. 김순실여사는 동포문학계 원로로서 그동안 많은 작품활동에 업적을 남겼는데 작년에는 <유령가족>이라는 책을 발간해 독일에서의 삶의 명암을 반영해 관심을 모았고,  딸 이한나씨는 한민족유럽연대의 재정담당 임원을 맡아 활동하면서 교회에 참석하면서  기독교계 신자들을 중심으로 <통일음악회>를 주관하여 모금한 재정을 조선의 그리스도교도연맹에 지원해 왔다.   

 

지난해 말에 소천한 이화선목사는 1926626일 전남 남해 두미도에서 출생하여 한신대를 졸업하고 1964년에 독일로 와 생활하면서 목회활동과 더불어 민건회 활동에 참여했고, 이영빈목사와 함께 1980년대 북의 그리스도교계와 공동활동을 통해 조국의 평화통일운동에 기여해 오다가 20171119일 지병으로 소천했다.

 

 특히 이화선목사와 이영빈목사는 1980년대 남북한 및 해외동포간 기독자간 교류사업에 특별한 공로를 세운 목회자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81 11 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 하델스톨프 쉬바이쳐 하우스에서 개최된 남북한 및 해외 기독교인들 간의 첫 역사적 대화 모임이 있었다.

 

1980 5 18일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한국교회에 다시 통일논의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816월 서울에서 “죄의 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란 주제로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한국교회는 같은 분단국인 독일교회와 협의회를 구성해 함께 통일에 대한 대화 모임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제4차 모임에서한국 기독교인들은 통일문제를 다루기 위한 위원회나 기구를 설치할 것을 협의회에 건의하였다.


이후 1981 11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 하델스톨프 쉬바이쳐 하우스에서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기독자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 대화모임에는 전금철, 허정숙, 안병수, 고기준 등 북녘에서 30명이 참석하였고, 해외 기독인 대표로는 이영빈 목사와 이화선 목사 등이 참석하였다.

 

그 당시 『로동신문』은 이 회의를 “민족의 화해와 단결, 조국통일을 위한 첫 역사적인 회합”으로 보도하였다. 회의의 목적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회의를 통해 자주적인 통일, 평화적인 통일, 민족의 대단결, 자치적 연합체 구성 등에 합의하였는데, 이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기치를 내건 7·4남북공동성명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모임은 한국 정부나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 모임을 종교행사를 가장한 친북인사들의 정치집회로 인식하여, 이를 기독교인들의 모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제2차 모임이 1982 12 3일부터5일까지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해외교포 운동의 기본을 반독재민주화로부터 반미 자주화 문제로 전환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해외교포들을 민족 자주 통일의 기치 아래 결집시켜 주었다. 그 후 10년 동안 헬싱키, 평양, 북경,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매년 정례적으로 개최하였다.

 

1·2차 회의에서는 민족문제에 대한 포괄적 이해없이 비판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신중했던 반면 미군 철수 및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4 12 17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3차 회의가 열렸으나 당시 국내 언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임에 참여한 해외 기독자들은 친북인사로 낙인찍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이 대화는 그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최근 남북의 역사학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북녘에서는 “북과 해외동포 신자들의 통일의지를 시위한”모임으로 평가하였고, 남한에서는 “남북 기독교자들이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 모임이었다.”라고 평가되기도 했다.

 

또한 한국교회사 속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종교단체로, 그리고 그 지도자들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북 간 종교 교류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통일 논의를 독점하고 있는 당시 상황 하에 민간 차원에서 한반도의 통일 논의와 대화를 모색하였다는 점과 그 뒤 남북 기독자들이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한 지적들은   『한국기독교의 역사』Ⅲ(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9)을 포함하여 <경계선> (이영빈, 신앙과지성사, 2005), 그리고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 (이만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의 도서에서도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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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명 박사 묘소에 두번째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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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규명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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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부인 강혜선여사



 

    고인은 1929419일 서울 출생으로 경복고를 나와 경성대 예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를 나왔다. 1958년 독일로 유학, 프랑크푸르트대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육계에 투신했다.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다 독일에 망명해 살던 유럽 통일운동 원로이며 물리학자인 정규명 박사가 지난 200512 11일 오전 고향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향년 76세로 눈을 감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인의 장례식을20(현지시간) 프랑크푸르트 외곽에 위치한 허이젠스탐 공동묘지에서 진행되었다.

 

정규명 박사는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강제납치 당해 국내로 연행, 옥살이를 하다가 1971년 독일로 돌아가 괴테대 물리학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 민주운동의 중심 조직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 해외민주화운동 연합단체인 한민련 유럽의장, 1987~1990년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의장, 1991년 범민련 유럽본부 의장 등을 역임했다.

 

기자는 지난 20126월에 독일을 방문하였을때 고인의 부인인 강혜순여사를 만나 고인의 묘소에 함께 간적이 있었다.그 때 그의 나이는 78세였고 남편 정규명박사가 세상을 떠난지는 7년이 세월이 흘렀던 시기였다. 부인 강혜순여사는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20161118일 운명하였으니깐 벌써 1년반의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20126월 기자는 손세영 민족통신 편집위원과 함께 독일서 열린 6.15선언 제2주년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정규명박사 부인 강혜순여사와 만나 대담을 한바 있다.

 

그 당시 강혜순 여사는 기자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면서 미주동포가 고인을 참배하기 위해 방문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하며 한층 더 기뻐했다.

 

고 정규명박사의 부인은 자택에서 우리들을 맞이하여 잠시 담화를 나눈 후에 우리들의 요청으로 고인의 묘소로 안내해 주었다. 고인의 묘지에는 우리말로 “조국은 하나다”라고 쒸어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것은 생전에 고인이 얼마나 조국의 통일을 갈망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고인의 부인께서는 ‘하이젠스탐’ 묘지를 안내한 직후 그 주위에 있는 중국식당으로 안내하여 점심을 대접해 주었다. 고인의 묘지에 참배하고 떠나려는 취재진 일행에게 식사를 하고 가지 않으면 섭섭하다고 말해 그 다음 일정을 미루고 점심을 함께 나누며 지난 시기의 이모저모를 되새겨 주었다.

 

분단의 희생자들이 많았지만 정규명 박사 가정의 경우도 가슴아픈 사연 가운데 하나였다.

 

1967 6월에 독일 한국대사관 공관원들과 한국의 중앙정보부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정규명 박사는 까만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데려간 하루 후 그의 부인 강혜순여사와 2살반된 아들도 대사관에 간 고인이 와달라고 하여 어디론가 불려갔다. 이들 가족들은 모두 비행기에 실려 도꾜로 갔고, 도꾜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한국으로 끌려가 이름만 듣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이곳에서 2살반된 어린아이와 함께 한달가량 문초를 받은 다음에 서대문 구치소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그 동안 어린 아들을 돌봐주던 정보원의 한 여성직원은 아이가 너무 울고 격리된 아빠와 엄마의 방을 왔다갔다하며 애절하게 우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왔던지 그 여성직원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고 말한다.

 

부인은 남편인 정규명박사가 이북으로 간 오빠를 찾아주기 위해 동독에 있는 북 대사관에 찾아가 자기 처의 오빠를 찾아달라고 했고, 그 생존이 확인되어 부부가 혈육을 만나러 북에 갔다 온 것 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들 부부는 서대문구치소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무려 1년동안이나 재판을 받았다. 그 동안 겪은 고초는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서 서대문경찰서로 이송될 때 어린 아들은 할머니 집으로 맡겨야 하는 순간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서 발버둥치며 자지러지게 소리치는 그 순간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며 민족통신 특파원들과 대화를 주고 받는 동안 눈시울을 적신다.

 

재판은 끝났지만 그 1년은 정규명박사는 남자구치소에서, 그의 부인 강혜순여사는 여성구치소에서 각각 1년 동안 감금돠어야 했고, 그리고 재판을 받지 않는 날에는 정보원들에게 끌려다니며 잠도 안재우고 묻고 또 묻는 문초를 받아야 했다며 악몽 같은 그날들을 되새겨준다. 혈육을 만난 것이 죄가되어 남편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부인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남편은 사형선고를 받자 구치소에서 형무소로 옮겨갔다. 이에 대해 서독 정부는 그의 선고를 감형하여 석방시켜 줄것을 박정희정권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정규명박사가 갇혀있던 형무소에 위문을 오고, 영치금까지 넣어주며 위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박정희정권은 사형을 무기로, 그리고 4년만에 특사로 석방을 결정했다. 4년동안의 감금이었다. 그 결과 1971년 출소하여 정규명박사와 부인, 이들의 아들은 모두 함께 같은 해 6월에 독일로 도로 돌아왔었다. 그 당시 서독정부는 이들 가족들의 귀가에 필요한 항공료 왕복표를 마련하여 전달했으나 정규명박사는 언제 통일이 될지 몰라 가족들의 왕복표중 편도표만 남기고 나머지 표들은 서독정부에 돌려주었다고 말하면서 정박사는 정직하고 순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설명한다.

 

정규명박사는 2005 129일 오전1020분 부인곁을 떠났으나 강혜순여사는  그 후 단 하루도 잊어본적이 없었다. 부인은 매일 오전아침 고인이 묻힌 묘소를 찾아 갔었다고 밝힌다. 그 묘소가 부인이 거주하고 있는 주택에서 걸어서 갈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운동겸 묘소를 찾아 가는 일을 일상화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분이다.

 

남편은 생전에 학자이면서 동시에 민족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다른 학자들과 함께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위해노력해 왔고, 그 뒷바라지를 위해 부인은 성의를 다하여 지원해 주었다


강혜순여사1934 42일 공주에서 태어났고, 고향은 서산이라고 한다. 그는 소녀시절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인지 부인이 고인을 그리는 추모집에 올린 글 “조국은 하나다”라는 제목의 수필은 읽은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어 준다. 부인은 공주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선생을 하며 5년 세월을 지낸 것이 그의 한국에서의 직업이었다. 1958년 고인이 독일에 유학올 때 부모들간에 합의가 이뤄져 혼인할 수 있었지만 부인이앓던 병환때문에 지연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 결혼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 결과 1962 6월에 부인이 독일로 왔고, 그 해 겨울에 고인과 결혼했다.

 

결혼한지 3년만인 1965년 이들 부부는 부인의 오빠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동독의 북 대사관의 주선으로 이북에 가게 되었고, 헤어진지14년만에 오빠들을 만나보게 되었다. 그 상봉때에는 그저 눈물만 나왔다. 오빠들은 어머니에 대한 안부만을 되풀이하여 물어보았을 때 함께 못온 것을 무척 한스러워했다고 회고한다.

 

부인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하면서 정규명박사는“이북을 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영영 통일이 될 수 없다. 정치체제가 다를뿐 이남과 이북은 한 민족이다”라고 강조해 왔었다고 한다.

 

부인은 지금도 고인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매일 묘소에서 그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큰 아들은 독일음악계에서 작곡가로 활약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생물학 박사로서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인은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었기에 생기는 비극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고, 지금도 애국자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주, 민주, 평화통일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큰 과제라고 강조한다.

 

민족통신 특파원들은 이날 신옥자선생의 묘소도 방문하려고 했으나 아직 고인의 묘소가 정돈되지 않아 고인의 딸 김숙진씨만 만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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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모선생 북송 도운 신옥자 선생 묘소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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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 신옥자 선생의 딸 김숙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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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옥자여사와 김성수박사와 홍근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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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6월 이곳을 방문하였을때에는 묘소참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인의 딸 김숙진씨와 그의 친구 이은희씨와 함께 신옥자 선생의 묘소를 참배를 할 수 있어 있었다. 그리고 김숙진씨 댁에서 두차례나 초청받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신옥자선생은 19411210일 청주에서 태어나 서울 간호학교를 졸업하고고인은 194112 10일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간호학교와 서울간호학교를 다니고 영등포 보건소에 근무했다. 1969년에는 독일에 파독간호사로 와서 은퇴할 때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 일했다.

 

고인은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각종 유럽민주단체들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1991년에는 비전향장기수 리인모 선생의 송환운동, 1994년에는 비전향장기수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선생 등의 귀향촉진회를 결성하여 공동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또한 고인은 6.15선언실천 유럽지역위원회 회원, 범민련 유럽지역본부 회원으로, 그리고 재도이치란트동포협력회 회원으로 참가해 왔다.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은 “고인이 해외에서나마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을 위해 남다른 역할을 하다가 고향땅에 오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면서 “리인모 선생이 남쪽에서 출소했을 때 3년 동안 모시고 살았던 김상원 씨도 고인의 운명에 마음 아파한다고” 전했다.

 

권오헌 명예회장에 따르면, 고인은 비전향장기수들 송환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리인모 선생 송환은 물론이고, 1994년에는 전쟁포로 3인인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송환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 고인은 이들 비전향장기수들의 북측에 있는 가족들과 남측에 있는 가족들 사이에서 편지를 왕래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2001년 들어 2차 송환 희망자인 정순덕, 정순택 선생의 송환을 위해서도 역할을 했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특히 2005년 사망한 정순택 선생의 유해가 남북 당국 간 합의에 의해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으로 송환되었을 때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회상했다.

 

한편, 범민련 남측본부는 조사에서 고인이 리인모 선생의 송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상기시키고는 “당시 선생이 애썼던 흔적은 어떤 이념과 체제의 장벽이 있더라도 통일운동가는 민족공동운명체의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투시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다”면서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 있더라도 운동주체가 시원시원하게 일을 하면 목표는 달성되고 만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고 기렸다. 유족으로는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다.


 

북부조국에서 보낸 조사

 

신옥자선생의 령전에 드립니다.


 

신옥자선생이 지난 2012 5 18일 뜻하지 않는 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는 급보에 접하고 우리 해외동포원호위원회는 고인과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신옥자선생은 어려서부터 형언할수 없는 인생고초를 겪으면서 불의에 찬 남조선사회에서 더이상 살아갈수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고국을 떠나 낯설은 이국땅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살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선생은 이국땅 도이췰란드에서 온갖 민족적차별을 당하고 인간이하의 멸시를 받으면서 남조선의 파쑈독재를 그대로 두고서는 조국의 통일도 겨레의 희망도 없다는것을 그 누구보다 통절하게 느끼고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운동에 선각자로 나서서 《재독한국녀성모임》,《한국민주민족통일련합》성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90년 《범민련》조직의 결성과 함께 《범민련》유럽지역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여 민주주의적민족권리와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투쟁에 심신을 다 바쳐온 애국투사였습니다.

 

선생은 통일애국을 위해 수십년세월 악형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혁명적지조를 지켜싸운 비전향장기수들을 돕는 사업을 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통일애국투사들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의무감으로 여기면서 리인모선생의 귀환을 비롯한 여러가지 어려운 사업을 도맡아 해왔으며 위대한 장군님의 품에 안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하여 남조선에 널리 소개선전하기 위해 할수있는 모든것을 다 하였습니다.

 

선생은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중앙상임위원으로서 동포들을 묶어세우고 조직의 통일단결을 위해 불철주야로 헌신하므로써 해외동포운동사에 뚜렷한 생의 흔적을 남기였습니다.

 

선생이 얼마전에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탄생 100돐 경축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대표단 성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정력적인 활동을 벌리던 그 모습은 우리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성원들에게 잊을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조국통일을 위해 심신을 불태우며 로당익장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조국통일의 날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접한 해외동포원호위원회는 정말 믿을래야 믿을수 없는 비보에 크나 큰 상실의 아픔을 금할수 없습니다.

 

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으나 조국통일과 애국애족을 위한 투쟁에 남긴 그 공적은 조국인민들과 오늘도 변함없이 통일애국의 길을 걷고 있는 해외동포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아 있을것입니다.

 

고 신옥자선생이시여 고이 잠드시라!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주체101(201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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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길을 걸어 김성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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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박사(82)는 남북정상회담과 다가올 <조미정상회담>을 바라보면서 한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기자는 미국을 떠나오기 전 김성수박사를 만나고 싶었다. 그의 고난이 길이 오늘을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1936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독일 튀빙겐 대학에 유학와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본이 아니게 공안사건에 휘말려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1973년에 일어나 그 사건때문에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최정길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죽었음에도 불고하고 <자살>에 의해 죽은 것으로 되고 말았다. 박정희군사정권에 의해 희생당했던 사건들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동서독이 존재하던 시대에는 북 대사관만 들려도 그것이 간첩죄로 둔갑되었던 때였다. 이 사건은 유신반대 시위가 폭발하던 그 때에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는 지난 날들을 회고하며 한반도 문제가 풀리려면 미국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 국가보안법이 없어져야 남북문제가 제대로 정립될 수 있다는 뜻으로 분석하면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올바로 진행된다면 그것이 곧 평화이고 통일이라고 시사했다.

 

그는 한편 통일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동지적 관계에서 얼마나 올바로 처신하느냐에 따라 운동이 발전하고 퇴보하느냐의 시금석이 된다고 풀이하면서 자신도 통일진영에서 일한다는 사람때문에 피해를 보았다고 털어 놓으면서 앞으로는 그런일들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꼬집었다.

 

김성수박사는 최근의 정세는 그 어느때보다 밝다고 설명하면서 해내외 동포들이 이같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일동포들이 받은 수난사들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면서 이곳 동포들은 많은 고통과 수난속에서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투쟁하여 온 이민자들, 혹은 망명자들이라고 지나온 이러저러한 역사들을 조명하며 자세하게 해설해 주었다.


 

69일 베를린서 남북대사들 참석한 가운데


6.15선언 유럽지역 기념행사가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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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선경석 상임대표와 단란한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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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선경석 상임대표가 1980년대 제작하던 노련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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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선경석 상임대표가 1980년대 제작하던 노련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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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선경석 상임대표가 사랑하는 딸 선영임씨-영어,독어, 일어, 중어 등 구사하는 효녀



 

오는 69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이날 오후3시 베를린 기독교 한인교회(Heilandskirche: Thusnelda-Allee 1, 10555 Berlin)에서 6.15공동선언실천유럽지역위원회(선경석 상임대표) 주최, 재독한인총연합회, 베를린 한인회, 베를린간호요원회, 베를린글뤽아우프회 공동후원으로 한국의 정범구 대사와 조선의 박남영 대사가 다함께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다.


선경석 상임대표는 1남1녀중 딸, 선영임(34)이 효녀라고 자랑하며 4개국 언어를 구사하고 아버지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따른다고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다.


 

 

*연락문의처:

0171-442-6688

혹은

0163-417-4602


....................................



           


<베를린리포트>가 해외동포 언론가운데 
 가장 먼저 창간한 인터네트 언론매체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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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독일 조링엔에 거주하는 김원희 발행인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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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링엔에 거주하는 김원희 발행인 부부가 사랑하는 개


김원희-짐의 하루01.jpg



 
<베를린 리포트>가 창간한 해는 1998년으로 확인되어 이 매체가 해외동포사회에서 최초로 창간한 언론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민족통신>이 1999년 4월에 시험창간되어 같은 해 11월11일 본격적인 언론으로 시작하였는데 이에 비해 <베를린리포트>가 이보다 몇개월 일찍이 시작된 매체로 이번 독일방문으로 알게되었다. 

<베를린리포트> 김원희발행인은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1995년 독일에 유학와서 생활하는 동안 <SBS>방송 통역자로 그리고 언론인으로 돕는것이 계기가 되어 언론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히면서 이것이 인연이 되어 언론분야에 종사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기자는 김원희 <베를린리포트>발행인과 의사인 그의 부인 나타리 김여사와 이번 독일취재 기간 서로 사귐의 기회를 갖게되어 이들 가족과 인연이 되었다.

김원희 사장과 인연이 된 것은 한국기자협회가 6.15시대에 해외동포 기자들을 초청하는 행사들에서 계기가 되어 서로 알게 되었는데 이번 <민족통신> 독일취재기간 전 구간의 교통편을 지원하여 주었고, 보흠-두셀도르프-후랑크후르트-베를린 등의 전역의 운송을 직접 지원해 주었다.

<베를린리포트>는 또한 재정적인 측면에서 가장 성공한 언론매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보수계나 진보계 동포들 양측 모두에게 신뢰받는 언론으로 성장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획-33]

해외동포 통일운동지도자,덴마크의 임민식선생 댁 심방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editorial&wr_id=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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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유태영/뉴욕님의 댓글

유태영/뉴욕 작성일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박사, 세상 떠난 원로들 묘소 참배 참 좋은 기획이었습니다.
이화선목사, 정규명박사 소식도 알게되어 반가웠고요. 그리고 신옥자 선생 소식도
반가웠습니다.

6년전 이맘 때 내가 신옥자여사의 영전에 보낸 글을 찾아 여기에 다시한번 전합니다.

그대와 만남은
범민련 민족통신 운동현장에서
오랜동안의 상봉
유럽과 미주, 그리고 조국땅에서
그대의 정결한
애국심으로
 오늘
여기까지 달려왔거니

그대의 정열적 민족애와
의기와 포부가
남달리 젊고 시그러웠는데
내가 부르는
신옥자여
한 사람의 천명이 있을 뿐인가?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그대는
소중한 한 생을 살아
그 무엇이나
아낌 없이 주었거니
이미 준것은
과거의 아름다운 역사로 간직하자

그리고 못다준 그대의 애국심은
우리 모두가
기억하리라

아 나와 우리 모두의 애국자여
신옥자 여사여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열고
애국과 애국심이 왕래하는
진실의 길에
경건히 보다 경건히
최후의 기도를 올리면서
그대의 영전에
우리 민족의 통일의 꽃 피게 하리라!

미주 뉴욕에서
유태영 드림
(2012.5.18)

최기봉님의 댓글

최기봉 작성일

노길남 선배 수고많이하셨습니다
지구한바퀴반 거리를다니시면서통일을 염원하는
조선민중들의 생생한목소리를 담아주셔서 통일전도사
사명을멌있게마무리하셧읍니다 감사한마음을올립니다

하나의 조선님의 댓글

하나의 조선 작성일

위대한 한민족의 여정입니다
그 쓰라린 여정을 함께하셨던 선배제위께 삼가 후배가  존경과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훌륭한 리포트를 잘 보고 귀하게 여기며 숙독합니다

김흥중님의 댓글

김흥중 작성일

최정길 님은 작고하시지 않은 곳으로 보이는데요. 작년 2017, 기센 대학교에서 1967년 동백림 사건 당시 납치되셨던 최 선생님을 석방하라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던 분들과의 만남에도 오셨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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