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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일본<우리학교>는 민족의 재보(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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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7-12-21 04:51 조회3,3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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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우리학교>는 민족의 재보로 평가되어 왔다. 린다 모씨(인디아나 폴리스 거주 재미동포)는 지난 달 일본 도꾜에 있는 조선대학교에서 주관한 <역사탐방>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6일동안 재일조선인들의 우리학교와 일제 강제 징용자들이 죽어간 아시오탄광, 히타치탄광, 국평사 등을 참관하고 돌아와 기행문을 민족통신에 기고했다. 그의 연재기행 네번째 를 여기에 연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https://youtu.be/CVTcKQRC74c

 


https://youtu.be/rqG8XD7DelM


 

 



[연재-4]일본<우리학교>는 민족의 재보(동영상)

 

 

*린다 모

(인디아나 폴리스거주 재미동포)

 


조선학교-린다모-소형.jpg




 

 

 

탐방 4일째에 수천명의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야 했던 아시오탄광과 히타치탄광의  견학을 위해서 우리는 유일하게 생존하셨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정운모님의 증언이 담긴 <과거를 잊지말자>라는 영상을 보고 역사실습자료라는 책자를 받았다. 지금은 폐광이되어 자연림이 되어버린 아시오탄광을 가기 전에 학생들은 한달이 넘는 역사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와신상담’이라는 한자성어를 그들은 자신과 후손들에게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조선 말기부터 하나 둘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들일제 식민지 시대에 끌려간 사람들, 해방이후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우리 민족이고 우리 현대사를 함께 살아온 우리의 민중이니 그들의 역사가 한반도의 근현대사의 역사로 기록되고 배우는 것은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조선학교-린다모003.jpg

[사진]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아시오 동산에 세운 조선인 징용자들의 추모비, 

현재 부지 소송으로 인해 이나마도 철거 위험에 놓여있다.


조선학교-린다모두번째.jpg

[사진]조선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옛 모습


조선학교-린다모두번째03.jpg
[사진]모또야마 평화공원에 세운 조선 징용자 추모비, 

2014년 재일조선인 상공연합회에서 주관하여 관리하고 있다고한다.


조선학교-린다모000.jpg

[사진]조선대학교내의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는 해방 후 초기 교육자료들


조선학교-린다모006.jpg


일광이라는 지역에 있는 아시오탄광은 1900년대에 아시아 최대의 구리탄광으로서 일본 최초의 전차, 수력발전소와 철교가 만들어진 최초의 현대식 도시였으며, 일본이 1610년에 발견한 구리 광산이지만1877년부터 본격적인 구리채굴을 시작하여 전쟁을 준비하였고, 전쟁막바지에는 조선인 강제노동자를 대거 투입하여 1973년 폐광될 때까지 갱도 길이가 1,200km에 달하는  갱도가 개미굴처럼 지하로 파고 들어간 구리 광산이였다 (출처, 조선대학교 역사실습자료)  

 

깊은 계곡과 일본군의  감시초소로 둘러쌓인 광산의 조선인 숙소는 도망갈 수없는 감옥이였다.

 

일제 강제징용자들의 증언처럼 숙식은 비참했고, 노동시간은 12시간에, 임금은 각종명목으로 뜯어갔다. 맞아죽고, 굶어죽고, 폭파작업에 죽고, 병들어 죽고, 도망치다 잡혀 죽어나갔다패전후 귀국과 밀린 임금을 요구하는 백인포로와 중국인들은 승전국의 포로로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귀국되였으나,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제 식민지민으로 취급되어 노동학대, 인종적차별과  전후처리 문제에서 제외되었다.

 

1940년 처음 93명의 조선인 징용자가 끌려와 최고 만명이상의 희생자가 생겼으나 그 자취를 깨끗이 지우고 아시오동산으로 바꿔진 현재의 모습을 보고 타지역의 다른 조선인 징용자들의 비참했던 자취를 지우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정부에 대하여 매번 울분을 삼키며 돌아간다고한다.

 

현재까지도 중국인 노동자들의 추모비는 중일외교 때에  일광 현의 관민 주도 아래 반듯하게 세워졌지만 그나마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손수 세운  외로운 조선인 추모비는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일본인 땅에 남아 철거요구를 받고 있다. 조선 강제 노동자의 고향이 대부분 우리나라 삼도에 속하는 남한 사람들이나 해방 후에 우리 정부는 남의 나라에 묻혀있는 한 맺힌 유골에 관심이 없었다. 현재 국회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국민재산 환수법’이 통과되어 징용자 추모비라도 반듯하게 세우고 추모관과 역사관을 만들어 절대로 일제 식민시대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에 남겼으면 참 좋겠다.

 

히타치광산의 노동자의 50%가 조선인이라 할만큼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일본군과 일본기업의 요구에 의해 공출되고 강제로 징집되어 이곳에서 노예의 삶을 살다가 수없이 죽어나갔다폐광 후에 주변의 산에는 수풀이 우거져 조선인들의 삶의 흔적은 아시오 탄광처럼 찾아볼 수 없었으나 이곳 역시 조선인 숙소는 철망없는 감옥이였으며, 폐광 후 70년이 지났어도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광산 입구와 제련소에서 올라오는 제련연기로  가득찬 조선인의 숙소지역으로 보이는 돌계단에는  영양실조와 구타로, 갱도의 열기로 달라붙은 옷자락을 끌고 쿨럭거리면서 소식을 알 수없는 가족과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며 울고 다녔을 조선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는듯하다.

 

모또야마 평화공원, 강제 징용자들이 작업중에나 구타등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화장터는  흔적만 남았고, 화장을 위해서 대기했던 자리는 절로 바뀌었고 주위에 뒹굴던 무연고 조선징용자들의 유골을 모셔두었다고한다.  1979년 조선인 1세들이 강제징용 조선인 납골탑을 세우고 <미래를 잊지 않는 사람들>을 제작한  조선인 후세들이 조국의 산천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혼들을  위하여   매년 추모제를 지내며 지난날의 가슴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자 많은 학생들을 방문시키고 있다고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납골당을 열고 죽어서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맺힌 삶들을 향해서 우린 잔을 올리고 향을 피워드려도  착찹한 마음을 가눌수가 없었다.    이곳에서도 중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추모비는 일본정부의 지원으로 공유지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으니 가는 곳마다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은  해외동포들을  죽어서나 살아서나 타국에서 차별받고 모욕당하는 것에 관여치 않는 한국 정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다음에 계속~)

 

 


<필자 소개>

필자 린다 모씨는 서울 출생으로 1999년에 미국에 이주고려대학교 졸업, 416해외연대 인디애나폴리스 대표그리고 AOK 인디애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남편은 동포사회에서 목회자로 일하고 있는 모욱빈목사.

 

 

[연재-3]일본<우리학교>는 민족의 재보(동영상)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editorial&wr_id=2013

 

[연재-2]일본<우리학교>등 탐방한 기행문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119

 

[연재-1]일본<우리학교> 탐방한 기행문(동영상)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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