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2-12 08:41
[대담]박기식선생《재라도 북녘땅에 뿌려줬으면...》
 글쓴이 : 편집실
조회 : 1,865  

보스턴의 통일운동진영의 원로인 박기식 선생 사부는 임창영 박사로 밝혀졌다. 기자는 최근 보스턴을 방문하여 박기식 선생과 대담을 갖고 주고 받은 대화를 통해 박선생 자신이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미주동포 통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로는 유일무이하지만 그 계기는 한때 한국의 유엔대사였던 임창영 박사 때문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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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왼쪽부터 박기식 선생, 리준무 선생, 백승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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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기식 선생 부인(가운데), 왼쪽이 백승배 목사 사모, 맨 오른쪽이 리준무 선생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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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통일운동 진영의 원로, 박기식 선생 탐방기 

"재라도 북녘땅에 뿌려줬으면 좋겠다."

《사부는 임창영박사이다.나의 삶의 형태숨쉬는 형태에 영향을 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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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기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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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기식 선생

 

[보스턴=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당초 뉴욕을 방문할 미주통일운동 진영의원로들인 함성국 목사, 유태영 박사, 박기식선생 등을 만나보려고 했다. 그런데 세분 모두 뉴욕행사에 참석하지 못했기때문에 행사장에서 만날 없었다. 함성국목사는 캘리포니아 시미콘벨리로 이사를 가셨기에전화로 안부를 묻고 조만간에 방문하기로 했다. 유태영 박사는 사모님이투석을 하며 병원출입이 잦아서 나들이가어려운 상황이다 하여  전화를 걸고 댁으로 방문하여  부인을 돌보기에아주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는사실을 있었다.

 

기자는 로스엔젤레스에서 행사에 참가한백승배 목사부부와, 리준무선생부부와 함께 한차로뉴욕에서 함께 출발하여보스턴 박기식 선생댁을찾아 방문했다. 선생님은재미동포 통일운동 진영의원로이지만 그의 출신이 중앙정보부이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배경을 가진 인물로서 국내외 동포들의관심을 모아왔다그리고 요즘에는노환으로 힘들어 하시지만특히 투석(Dialysis)으로 병원을 다니시기에  나들이가 힘든 탓에  주위분들과 만남이 뜸해진상황이기에  사람을 무척 그리워하는 같았다.

 

송학삼 선생과정기열박사도 다녀갔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일행이방문한 것을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우리 일행이방문하자 호텔을 마련하여준비해 주셨고, 시장에가서 해물 롭스터를구입하여 직접 요리를하여 대접하기도 하여 송구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박기식 선생은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첫날 저녁 호텔방에서 장시간 대화를주고 받은 약주도 한잔 하시고  《오 나의 태양이여~( 쏠레미여~)》를 원어로 불러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어 주었다.

 

노래는 이태리 나폴리 민요인데 작곡가 에두아르도 카프아에 의해 만들어졌다. 간초네 나폴레타의 대표적 명곡이다. 카푸아는 1869 시칠리야에 위치한 섬사람으로 그는 1896년부터 로마 일간지 편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런데 노래는1896 피에다그로타 가요제에서 입상한 노래로 하늘의 태양,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로 표현하는 것을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자연을 찬양한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박기식 선생이  노래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는 북부조국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1979년이 계기가 되어 북을 알기 시작하였고, 조선을 건설한 김일성주석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게됨으로써 그를 태양으로 맞이하게 되었다는것을 시사하는 말을 들으며 그의 가슴을 알게 되었다 계기를 만들어 분은  그를 북녘 땅으로 인도한 ()  임창영 박사이다.

 

 림창영 박사는 한때 김대중 선생을 구출하는 운동도 벌여 왔었고,  그리고 남측 당국의 유엔대사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박기식 선생은 미국으로 이민온 이후 재미동포통일운동에 가담한 인물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림박사의 아들(램지 림과 폴림), 그리고 두 손녀들(램지 림의 딸)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고 있어 3세대 모두 애국운동 전선에 참여하고 있다.

 

박기식 선생은 금년 412일로 89세가 된다. 그리고 부인 정성구 여사와 결혼한지도 61년째가 된다. 1956년에 박기식 선생과 결혼한 정성구 여사는 경북여고를 나와 부산대 재학중 경산여중고 교사로 일하다가 인연이 되어 박선생과 백년해로를 약속하게되었다.

 


박기식 선생 고향은 안동근처 구니군 우보면서 출생


박기식 선생은1929 412 경상북도안동근처에 위치한 구니군우보면에서 태어나 대구에서성장했다. 8남매 4남으로태어나 대구농림중학교를 나와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학교 선생으로 활약하면서 청구대학교 3학년에 중퇴했다. 그리고1952 경희대학교 전신인 신흥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3년재학하다가 중퇴하고 교육계에 투신했다.

 

박기식 선생은김수완 추기경의 고향과같다. 그래서인지 부인과함께 카토릭(천주교)계의 신자이다. 그의 사부이기도 림창영박사는《진실한 기독교인은 진실한사회주의자와도 교제할 있다.》는 철학을가져서인지 선생은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불교인들과 이슬람인들 다른 종교를 가진 인물들과도 가깝게 지내는 성품이기도 하다.

 

1972 4월에 미국에온지  1 4개월후 김대중선생 납치사건(738) 일본 도꾜에서 일어나  림창영( 한국유엔대사) 박사를 만나 구출운동에 참여한 것이 남한 민주화와 그후 조국통일운동에 관계하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교원시절에 제자 중에  박한식 교수(조지아대학 교수)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한 학자라서 긍지를 느낀다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따지고  보면 1973년부터 미국에 와서 한국 민주화 운동에가담하게 되었고,  1979년부터 방북한이래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 운동에 참여하여왔는데 초기에는 소위 통일운동 진영내부의 소수 인물들로부터 이러저러한 의심을받아 왔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고진심이 쌓이고 쌓여 나의 깊은 가슴을이해하게 되어 다행이었지만 초기에는 나의 애국적 행동에 제동을거는 통일운동 진영 내부의 인물들도 있었다고 지적하며 가벼운 미소로지난 날들을 돌이켜준다.

 

역시  민주화 운동이나통일운동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꾸준히 실천하여 나아가면 그런 문제들은 자연히 사라진다는 교훈도 일깨워준다. 박기식 선생은 재미동포 통일운동진영내부의 원로들 가운데서도 모범을 보여왔다. 이번 재미동포전국연합회 2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공로상을 수여받았다. 북녘 당국으로부터는 최고지도자로부터  생일상도 받았고, 남녘 통일지향언론들(통일뉴스, 자주민보, 민족21 )로부터는여러차례 대담 취재 대상으로 취급받아 왔다.

 

박기식 선생은 미국생활 44년동안 여러계층의 내외 인물들과 연계되어 재미동포들의 민주화 운동가 통일운동 진영의주요 인물들 대부분과 친교활동을 통해 가깝게 지내 왔다. 그래서 많은 동포들은 그를 가리켜 미주통일운동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박기식 선생이 통일운동하면서 인맥관계 많았다.


이번에도 기자는 박기식 선생과 대화를주고 받으면서 림창영박사, 선우학원 박사, 김상돈 선생, 홍동근목사, 차상달 선생, 문명자 선생, 양은식박사, 강광석 박사, 노의선 목사, 김영중선생, 로광욱 박사, 이용운 제독, 전충림선생, 서정균 선생, 김운하 선생, 최석남선생, 최정열 여사, 김경재 의원, 김형식선생, 최덕신 선생, 유하성 선생, 장석영선생등 여러 인물들에 대하여 거론하는 이야기를 들을 있었다그는 역시 미주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는 요즘 전개되고 있는 서울의 촛불집회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움직임과국정원과의 결탁에 대해서도설명해 주었다. 박기식선생은 자신이 중앙정보부 시절 경험한교육과정들을 설명해 주면서 (1)첩보과정, (2)정보과정, (3)보안과정, (4)수사과정, (5)정규과정 등에 대하여 처음 두가지 과정에 대하여 3개월, 3개월씩 교육받았는데  각과정들은 각 3개월씩 배정되어 있다. 그리고 정규과정은 1년 교육인데 이것을 배운 내용은 대학교 4 과정의 지식들을 공부하는 자료들이라고 밝힌다. 시기에는 반공포로, 서북청년단, 첩보대(CIC, HID) 등인데 요즘에와서는 국정원이 이른바  어버이연합과 같은 극우단체들을 배후조종하고 있고, 탈북자들도 조직력에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반민주, 반민족세력을 주로 담당하는국정원은 주로 돈을 주고 매수하는 활동이 일상적이라고 그는 분석한다.

 


박기식 선생의 사부는 임창영 박사


박기식 선생은우리 일행과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서림창영 박사에 대하여고마움을 거듭 표명했다. “나의 삶의 형태, 숨쉬는 형태에 영향을 분이 림창영박사라고  말한다.  그는 그래서인지  림창영박사가 처음에 조용하게 북녘을 방문하였을때  김일성주석과 무려 16시간 동안 독대를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고 밝히면서 박사는 그의 사부였다고 거듭 고백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죽음을 내다보면서 나는 죽어서 화장을 하여 재라도 북녘 땅에 뿌려주면 좋겠다.”라며 민족의 성지인 조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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