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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7]《안중근 이등박문 쏘다》현장 하얼빈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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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6-09-12 10:54 조회2,56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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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통신 기자가 2016년 9월11일 중국 하얼빈 안중근 거사현장과 기념관 탐방


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은 중국 하얼빈 역전과 안중근열사(1879~1910) 거사 현장을 탐방하면서  이준열사(1859 1 21 ~ 1907 7 14) 원한. 강우규열사(1855~1920) 원한, 이봉창열사(1900~1932) 원한, 신채호열사(1880~1936) 원한, 윤봉길열사(1908~1932) 원한 생명을 바친 애국자들을 올리면서 이들의 원한들을 되새겨 보는 한편  조선이  2016 99일을 기해  5차핵시험을 성공적으로 단행한 것과 결부하여 자신의 소감을 밝힌 기획기사를 올렸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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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중근 의사 거사현장-앞쪽의 3각형표시는 안중근의사 
총격자리고 뒤쪽의 4각형표시는 이등방문이 저격당한 자리

 

 

 

[기획-7]《안중근 이등박문 쏘다》현장 탐방


 

 

[하얼빈=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911 이른 아침 620 고속열차를 신앙을 떠나 오전 830분에 하얼빈 서부역전에 도착했다.

 

이곳에 부모를따라 3살때 하얼빈으로 이래 이곳에서 성장하여 자라온김천옥 선생이 기자를안내하여 하얼빈 본역으로달려갔다여기저기 지하철도 공사장이라 자동차들이 제대로빠지지 않아서 빙글빙글돌아 돌아서 안중근의사가 거사를 감행한 장소로 갔다. 1909 1026 오전9시에 거행한이등박문 저격장소 바로 그곳을 참관하고 역전에 부속한 조그마한방에 안중근 열사의기념관이 문을 열고 있었다. 월요일은 문을 닫는데 일요일은 문을 연다고 설명하는 수위실 관계자는 입장할 신분증과 소지품들을 검사하고 기념관안으로 입장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안중근 열사의기념관이 이곳으로  옮긴 것은 2년가량 된다고 한다. 전에는 하얼빈시조선족 문화관이 있었는데 당시  기념관 공간의규모가 규모였고시청각 자료들을 설치하여안중근 열사의 생애등을동영상으로 감상할 있도록 시청각 시설이있었으나 남한 당국이 시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다가중국 당국의 눈총을받게 사연이있었다고 한다. 특히 안중근 열사가 처형당하는 순간 외쳤던것은 "조선독립 만세!"였지, '대만독립 만세' 아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분단사에서 남북 학자들이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은남과 북의 호칭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에사용하였던 용어들을 그대로써야되는데 지금의 분단사에서 남녘이 사용하는어휘들을 그대로 사용하자고 하는 것은 상대편을 존중하지 않는다는뜻으로서 오해하기 때문이다.

 

안중근 열사는 1909 1026 거사를 단행했지만 그가 여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 중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1910 214일이었고, 사형이 진행된 것은 1910 326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안중근 그는 누구인가

 

안중근은 1879 92일에 태어나 1895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는 1904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하다가, 1905 조선을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힘쓰다가 1907 연해주로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1895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도마, 다묵)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설립하고기업에 투신한 경험도갖고 있었다. 이러한배경을 가진 안중근이이등박문을 저격하게 배경은 무엇인가.

 

 

안중근열사(安重根, 1879 9 2 ~ 1910 3 26) 카톨릭 신자로서의 양심을 지킨 인물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저격한이유에 대해서는 15가지 이유들을 들어 항변했다.  그러나 그의 만민평등주의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사회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그는 국제법에의해 처리되지 못하고일본에 넘겨져 일본법에의하여 처리되어야 하는 운명에 봉착해  결국에는 처형이언도 되었고, 끝내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등박문을 저격한곳은 하얼빈 역전이었다. 당시 러시아가중국에 철도부설권을 가지고집행관리하여 왔기 때문에이곳에서의 러시아 영향권이매우 컸다고 한다. 하지만 1905 -일전쟁의 후유증도 작용한것으로 보인다. 결국 만국형법이 아닌 일본 형법에 의해 안중근열사는 무려 12차례의심문을 받았다. 때마다 안중근은 자신의행동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행위는전쟁을 것이라고계속 강조했다. 그의 저격 동기는 영국의칸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계속 감옥안에서도 '동양평화론' 집필할시간을 달라고 요구해왔다.

 

기자는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하얼빈역전의 장소에는안중근의사가 저격한 자리는3각형 표시로 놓았고,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 저격당한 장소는네모표시로 기록해 놓았다.

 

안중근 열사가쏘아댄 총탄은 이등박문의 가슴팍을 뚫고 관통하여 그의 생명을빼앗았으나 우리 민족은일제의 식민지 땅으로전변되었고, 36년의 노예생활을 강요당해만 했다. 그렇게 피를 흘려 왔는데 그렇게되어야만 했을까이것이 이번 하얼빈 사적지를 탐방하며느끼는 안타까움이며 동시에질문이기도 하다.

 

기자는 역사의 현장에서 느끼는감회를 간략하게 축소한다면, 당시 우리민족에게는 위대한 지도자가없었기에 나라를 통채로일제에게 강점당하고 이름도빼앗기고 우리말 우리 글까지 탈취당하는 말할 없는 수모를겪어야 했다. 같은 비극의 역사는조국해방을 맞았으나 또다른제국주의자, 미침략세력이  우리 조국의남단을 타고 앉아  어언 70여년의세월을 간섭하고 방해하면서 허수아비 앞잡이세력들을 남한의 식민지노예로 만들어 마음대로조롱하고 농락해 왔다. 허수아비 앞잡이정치꾼들은 무릎을 꿇고 군사주권을 상납하면서까지 기득권을누리기에 혈안이 되어 왔다. 이들은 파렴치한이 되어  열사들의 피눈물도외면하고, 민중들의 아픔과고통도 외면하고, 민족분단의 설움과 고통도외면해 았다. 이들은심지어 이산가족의 아픔마져외면하면서 마치도 자신들이이산가족의 아픔을 느끼는것처럼 언론들을 동원하여현실을 왜곡하고 진실을오도하기에 급급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사대 매국세력들은 언론들을매수하여 사실을 교활하게왜곡하면서 진실을 뒤짚는것을 밥먹듯 왔다.

 

이들은 입만 벌리면 얼굴색 하나 달라지지 않은채 거짓말로남북관계를 갈등과 마찰로이끌어 왔다. 남북화해협력에 관한 기사들이나 이러한 방송들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요즘의 남녘언론들의 실상으로나타나고 있다특히 이명박정권과 박근혜정권에 들어와 민족문제는 내동댕이치듯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남북관계는 사상유례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말았다.  

 

비록 안중근열사(安重根, 1879 9 2 ~ 1910 3 26) 한몸을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던졌지만 당시의우리민족의 지도자들이 역할을 하지 못해 후대들이 비극의 역사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고지적하는 언론들은 아무리살펴보아도 찿을 길이 없다.

 

남녘 당국자들이나 보수언론들은 자신들의문제 때문에 남북관계가 엉망이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때문에 문제라는식으로 상습화하여 것이 남녘 정치권과 하수인 노릇으로일관해 언론들의특징이며 속성이라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많은 열사들이있었지만 그들의 열망과소망을 위해 산자들이어떻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에대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남녘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이거의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돌이켜보면, 안중근열사 뿐만 아니라이준열사(李儁, 1859 1 21 ~ 1907 7 14) 구한말의 검사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07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헤이그에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하면서 미국을비롯한 강대국들이 어떻게하였는가를 뼈저리게 맛보았고, 조선강점 일제총독에게 폭탄을던졌던 강우규열사(1855~1920) 원한, 일제천황을 죽이기위하여 도꾜로 출발하기전에 수류탄을 들고 맹세를 다지는 이봉창열사(1900~1932) 원한, 계몽운동을 벌려 역사, 문학 여러 분야에서 많은 글을 남기고 려순감옥에서 순국한신채호열사(1880~1936) 원한, 그리고 1932 429 상해에서 폭판을던져 일제의상해파견군 사령관이하 많은 적들을살상한 윤봉길열사(1908~1932) 원한 개인적으로 생명을 바친 애국자들의 원한들이 쌓이고쌓여 상황이었다.  

 

 또한 1920년대 초에는 고려공산당을 비롯하여진보적 단체들과 민족주의계열 단체들도 있었으나거의 대부분 파벌과분파싸움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며 아까운시간을 낭비해 역사였다. 올바른 지도자들이 없었다는이야기이다. 그래서 안중근의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전날 감옥의철창을 내다보면서  “아, 우리민족에게는 위대한 지도자가없단 말인가?”라고한탄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안중근 열사는 4 차례나 일본 제국의총리를 지낸 정치가이토 히로부미(이등 박문) 1905 대한제국과 을사조약을 맺는 데에도 크게 역할을한바 있다는 사실을간파하고 그가 만주를방문하여 러시아와 회담을갖는다는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듣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고만주의 독립 운동가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 등과 함께  7 동맹을맺고 처단을 계획했다.

 

1909 10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 지원을받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들은 장춘으로는 열차가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역둘중에 한군데서 저격하기로 당초 계획을변경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당초 러시아당국은 이토 일행의안전을 위해 하얼빈 현장을 엄격히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앞에서이토 일행을 환영할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요청해 경호를강화하지 않았다. 당시 하얼빈 역은 중국땅이었지만 러시아가 철도부설권을 갖고 관리해오던 시기였다.

 

 

기자는 안중근열사와 또다른 열사들을 올리면서도 민족문제는 올바른 지도자를만나지 못하면 개인적인애국자들이나 열사들은 있을지몰라도 우리 민족이강한 나라가 되어서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있는 독립국이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지난 시기 우리민족사의 교훈이었다.

 

아직도 남한은미국의 식민지에 불과하며주변나라들의 간섭과 지배의울타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언제나 주변국의 영향에의해 자기 갈길을가지 못한 것이 실체였다. 지금 이순간도 남한은 자기 문제를 자기 스스로풀어갈 있는 여건을 갖지 못하고미국의 눈치, 일본의눈치, 중국의 눈치,러시아의 눈치를 보며 그들을 쫓아 다니며동족인 북조선을 적대시압살정책으로 목을 졸라매달라고 구걸 하는 한심한 모습들을 보는 것이  바로   남한 정치의현주소이다.

 

이에 비해 북조선은 외세가 방해하고간섭하여도 조금도 흔들리지않고 자기 갈길을꿋꿋이 가고 있는 것이  북조선정치의 현주소이다.  그래서 조선 당국은 누구에게도 주권을 양보하지않고 고수하며 자위력만이 자기 주권을지킬 있다는일념으로  진보철학강국,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첨단과학기술 강국 핵보유국으로 우뚝 세워 놓았다

 

조선이  2016 99일을 기해  5차핵시험을 성공적으로 단행한것도 바로 주권을확고하게 틀어쥐고 평화번영을 위한 미래를담보하기 위한 정치적입장과 자세였다. 다시 말하면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과실천은  안중근의사를 비롯하여 여러분의의사, 열사들의 피맺힌원한들을 풀어주는 한편 민족의 행복한 미래의토대를 마련하는 역사적인대사변으로 아로새겨 주었다.   

 

그래서 세계는지금 이러한 북조선의입장과 자세를 따라배우기 위해 다투어 토론하며 학습하고있는 것으로 밝혀지고있다. 특히 3세계 나라들에게 조선은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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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청산님의 댓글

청산 작성일

민족통신
특파원 수고많으십니다.

조선인의 기백을 보여준
안중근의사의 정신 쾌거
우리후대 이어져
남쪽 사대매국정권 청산되고
남북통일일우는 정권탄생 염원하며..

보천보님의 댓글

보천보 작성일

노길남 특파원님 방문수기 감명받았쑤다. 감사 감사 감사~


<<<남한은미국의 식민지에 불과하며주변나라들의 간섭과 지배의울타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언제나 주변국의 영향에의해 자기 갈길을가지 못한 것이 그 실체였다. 지금 이순간도 남한은 자기 문제를 자기 스스로풀어갈 수 있는 여건을 갖지 못하고미국의 눈치, 일본의눈치, 중국의 눈치,러시아의 눈치를 보며 그들을 쫓아 다니며동족인 북조선을 적대시압살정책으로 목을 졸라매달라고 구걸 하는 한심한 모습들을 보는 것이  바로  남한 정치의현주소이다.  이에 비해 북조선은 외세가 방해하고간섭하여도 조금도 흔들리지않고 자기 갈길을꿋꿋이 가고 있는 것이  북조선정치의 현주소이다.  그래서 조선 당국은 그 누구에게도 주권을 양보하지않고 고수하며 자위력만이 자기 주권을지킬 수 있다는일념으로  진보철학강국,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첨단과학기술 강국 및 핵보유국으로 우뚝 세워 놓았다. >>>

김엽님의 댓글

김엽 작성일

일본의 이등박문을 사살한 조선민족의 영웅.안중근의사.당시로서는 불공대천의 원쑤 일본의 이등박문을 사살하면 일본의 조선침략이 끊날줄로만 알랐던 민족의 영웅.안중근.

    조선에 위대한 령도자가 없었고 온 민족이 수난의 구렁텅이에서 헤매일때. 안중근의사의 거사는 온민족의 침략자에 대한 원한을 불러 일르켰다.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의 넋이여 고이 잠드시라.

    노길남기자님.부디 건강하여 우리나라 통일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하여 좋은 글을 많이 써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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