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애국자, 윤영무 선생 향년95세로 서거 > 통일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3월 28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통일

겸손한 애국자, 윤영무 선생 향년95세로 서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5-07-10 13:52 조회6,670회 댓글3건

본문


겸손한 애국자, 윤영무 선생 향년95세로 서거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 언제나 겸손하고 양심적인 애국자로 칭송받아 윤영무 선생이 최근(지난 612) 노환으로 서거했다. 향년95. 고인의 유가족들은 가족들과 조용히 장례식을 갖고 로스엔젤레스 근교 로즈 힐에 안장된 윤일량 사모님의 묘지에 합장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윤영무 선생은 뉴욕에 본부를 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자주연합)’ 고문으로 그리고 뉴욕의 통일학교 고문으로 활약해 오면서 민족문제에 관한 번역 일 등을 해오면서 후진들과 함께 활동해 왔으나 10여년 전에 자녀들이 있는 로스엔젤레스로 옮겨 교외에서 조용하게 지내면서 남가주서예협회 회원으로 여생을 소일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이곳 민족민주진영 단체 일부 회원들은 고인의 애국적인 생의 업적을 기리며 49제가 되는 기간인 오는81() 오후2시 로스 힐 묘지에서 추모행사를 갖기로 잠정적으로 정하고 민주민족운동단체들, 시민운동단체들 회원들에게 알려 이날 행사를 통해 고인의 애국의 뜻을 기리기로 했다.

 

*전화문의 연락처: 213-760-1178 혹은213-458-2245

 

 

 



                         *윤영무 선생의 발자취


1-yoonyangmoowithroh.jpg
[사진]작년 2014년 9월에 민족통신 기자와 서예전시회장에서 잠시 대담하는 모습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그는 1920 718 평양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인민학교중학교평양고보를 졸업하고 1943 1 일본으로 유학 길을 떠나 도꾜에 가서 중앙대학에 등록은 하였으나공부는 제쳐두고 옆집의 일본인 진보운동가를 만나 잠시  서클에 참여하다가 1년도 못되어 그해 12월경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오자 말자 일본헌병에 붙잡혀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들어갔다가 얼마안되어 8.15 맞게되었다. 30 되던 1950 8 숙대 가정과를 졸업한 김일량 여사와 피난시기에 결혼하여 21(윤한윤현윤나미) 두고 있다.

 

 결혼 후에는 풍안무역 이사로 일하다가 1970 브라질 쌍파울로에 이민가서 세탁공장을 운영했고 1975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뉴욕에서 오랜 동안 의류상 도산매를 경영하다가 연로하여 은퇴하고 10여년 전에 로스엔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고인은 80연대 초반부터 미주민족민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들을 후원하며 말년을 보내오면서 7순이넘은 나이에 중국어를 공부하여 민족자료에 도움이 되는 중국어와 일본어 도서들을 번역하여  내외 민족민주운동진영에 기여해 왔다

그는 최근 4 동안에는 서예공부에도 몰두했다그의 서재가 있는 방에는 붓글씨 도구와 그가  서예작품들이 수십   싸여있다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이라고  서예작품도 있고작년 9월에는 미주한인서예협회가 개최한 작품전에 서예작품을 출품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고인은 일제시대에는 일본헌병에 의해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부대에서 죽을 고비를 무릎쓰고 탈출하여광복군에 들어가 활동하였지만 광복군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광복군 활동을 물으면 "별로  것이 없는데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면서  들고 한번도 싸워보지못한 광복군인데 얘기할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사양하기만 했다.

 

고인은 10년전 민족통신과 가진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대학에서 한국 학자들과 해외학자들을 초청하여 개최하는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세미나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들어보니 사실과 거리가 멀었어요"라고 말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은 광복군에서   별로 없고 거의가 김일성 항일유격대에서 벌인 전투였다고 설명하면서 「보천보 전투」소식을 들었을  임시정부 간부들을 비롯하여 김구 선생까지도 통쾌해 했다고 격찬한 내용을 들려 주기도 했다 

당시 광복군은 장개석의 중앙군 산하에 편재되어 있었는데 중앙군은 광복군에게 무기를 주지 않고 중앙군내부에 머물러 있으라고만 주장하였다고 한다장개석군은 일제와 맞서 싸우는 생각보다는 마우태퉁(모택동지휘아래 움직이는 팔로군과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고 지적했다이는마치 임시정부 간부들이 일제와 싸우기 위해 투쟁하는 것보다는 간부들 사이에 감투싸움에 연연하는 양상들과 흡사한 상태였던 것으로 그는 회고했다청년 장준하가 임정간부들의 주도권싸움들을 관찰하면서 통탄한 나머지 이러한 현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등대"라는 잡지를 만든 이야기와 맥을 같이한다.[장준하 돌베게 참조]


이러한 와중에 8.15 맞았다김구 선생은 해방을 맞아 귀국을 준비하였으나 미군에 의해 좌절당하고 말았다고 고인은 술회한바 있었다.  임시정부 이름을 가지고는 귀국하지 못한다는 것이 미군당국의 강력한 요청이었다고 한다한편 김구 선생은 당시 상해에 와서 그곳 동포들을 불러모아 해방의 기쁨에 대해 연설하며 "친일파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 외쳤지만 그곳에 참석한 중국거주 동포참석자들은 거의가 친일파였고 아니면 아편장사꾼들  이였기 때문에 이들 교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고 윤영무 선생은 생시에 그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적도 있었다그는 특히 "김구 선생이그후에도 정세를 잘못 읽어 이승만과 손잡고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은 최대실수였다" 혀를 차며 이야기 경우도 있었다

윤영무 선생은  장개석의 입장과 자세를 이승만과 유사하다는 점을 비유하기도 했다장개석이 쓸만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듯이  지배세력의 비호아래 구성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은 애국자들이었던 여운형김구장준하 등을 죽인 정권들이라고 직격탄을 날린적도 있었다 

고인인 지난시기 중국의 팔로군과 중앙군의 알력을 우리 역사에 대입하여 조명하면서 여기에서도 교훈을찾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중앙군을 지휘했던 장개석은 이념이 달랐지만 모택동의 팔로군과 힘을합쳐 외세인 일제에 대항하여 싸워 승리하기 위하여 국공합작을 이루었어야 하는데 동족끼리 주도권 싸움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기 휘하의 사령관이었던 장한량이에게 서안에서 감금당해  국공 합작하여 항일투쟁을 하려는가아닌가 대해 응답해야만 하였던 난처한 사건 서안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설명한적도 있었다 

 

고인은  중국의  세력에 대해 당시의 중국  사정은 모택동군과 장개석군의 차이가 너무나 현격했었다고 회고한바 있다. "모택동군은 겉보기에는 비록 거지같이 보이고 누추하였지만 모택동군은 도덕적으로 깨끗하였고  당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을 위한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나 장개석군은 일제에 항쟁하는 투쟁정신이 미약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남경에 배가 들어오면 장개석군의 군벌 도둑질에 의해 들어오자 말자 빈배가 되어버릴 정도로 부패하였다는 당시의 중국사정을 후진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결과 일제가 항복한 1945 이후부터 1949년까지 4년에 걸쳐 모택동군과 장개석군의 내전이 벌어졌으나  전쟁이 끝나자 장개석군의 사단장들이 모택동군에 합류했고 중국의 본토는 모택동군의 수하에 장악되게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우리 민족의 분단사에서 나타난 문제들을 교훈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윤영무 선생은 우리의 과거 역사나 다른 나라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은 오늘의 역사현실에 과거사들을 조명하여 참신한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하는 입장이었다중국의 국공합작의 노력을 설명하면서도 분단된 우리 나라가 좌우의 이념대결을 지양하고 코리아반도 역사를 차단하여  외세를 극복하여 체제가 서로 존중하는 기초 위에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가슴  깊이 담겨있는 깊은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 94년을 돌아보며 이러한 뜻을 후진들에게 주려고 노력해 왔다그가 인생의 말년에 중국말을 배워가면서 까지 <판문점 담판> 우리말로 번역한 것도그리고 일본말로  김명철의 원작 <김정일 통일전략> 우리말로 번역한 것도 모두 이러한 귀중한 뜻이 담긴 고인 생애의  부분이었다


*북부조국 테레비죤 방송보도 동영상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지개님의 댓글

무지개 작성일

좋은 분들이 자꾸 떠나시니, 또 답답해집니다.

무등님의 댓글

무등 작성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