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애국자, 윤영무 선생 향년95세로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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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5-07-10 13:52 조회6,670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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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애국자, 윤영무 선생 향년95세로 서거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 언제나 겸손하고 양심적인 애국자로 칭송받아 온 윤영무 선생이 최근(지난 6월12일) 노환으로 서거했다. 향년95세. 고인의 유가족들은 가족들과 조용히 장례식을 갖고 로스엔젤레스 근교 로즈 힐에 안장된 윤일량 사모님의 묘지에 합장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윤영무 선생은 뉴욕에 본부를 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자주연합)’ 고문으로 그리고 뉴욕의 ‘통일학교’ 고문으로 활약해 오면서 민족문제에 관한 번역 일 등을 해오면서 후진들과 함께 활동해 왔으나 10여년 전에 자녀들이 있는 로스엔젤레스로 옮겨 교외에서 조용하게 지내면서 남가주서예협회 회원으로 여생을 소일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이곳 민족민주진영 단체 일부 회원들은 고인의 애국적인 생의 업적을 기리며 49제가 되는 기간인 오는8월1일(토) 오후2시 로스 힐 묘지에서 추모행사를 갖기로 잠정적으로 정하고 민주민족운동단체들, 시민운동단체들 회원들에게 알려 이날 행사를 통해 고인의 애국의 뜻을 기리기로 했다.
*전화문의 연락처: 213-760-1178 혹은213-458-2245
*윤영무 선생의 발자취 [사진]작년 2014년 9월에 민족통신 기자와 서예전시회장에서 잠시 대담하는 모습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그는 1920년 7월18일 평양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인민학교, 중학교,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1943년 1월 일본으로 유학 길을 떠나 도꾜에 가서 중앙대학에 등록은 하였으나공부는 제쳐두고 옆집의 일본인 진보운동가를 만나 잠시 한 서클에 참여하다가 1년도 못되어 그해 12월경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오자 말자 일본헌병에 붙잡혀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들어갔다가 얼마안되어 8.15를 맞게되었다. 30살 되던 1950년 8월 숙대 가정과를 졸업한 김일량 여사와 피난시기에 결혼하여 2남1녀(윤한, 윤현, 윤나미)를 두고 있다.
결혼 후에는 풍안무역 이사로 일하다가 1970년 브라질 쌍파울로에 이민가서 세탁공장을 운영했고 1975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뉴욕에서 오랜 동안 의류상 도산매를 경영하다가 연로하여 은퇴하고 10여년 전에 로스엔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고인은 80연대 초반부터 미주민족민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들을 후원하며 말년을 보내오면서 7순이넘은 나이에 중국어를 공부하여 민족자료에 도움이 되는 중국어와 일본어 도서들을 번역하여 해 내외 민족민주운동진영에 기여해 왔다.
고인은 일제시대에는 일본헌병에 의해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부대에서 죽을 고비를 무릎쓰고 탈출하여광복군에 들어가 활동하였지만 광복군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광복군 활동을 물으면 "별로 한 것이 없는데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면서 총 들고 한번도 싸워보지못한 광복군인데 얘기할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사양하기만 했다.
고인은 10년전 민족통신과 가진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 학자들과 해외학자들을 초청하여 개최하는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세미나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들어보니 사실과 거리가 멀었어요"라고 말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은 광복군에서 한 건 별로 없고 거의가 김일성 항일유격대에서 벌인 전투였다고 설명하면서 「보천보 전투」소식을 들었을 때 임시정부 간부들을 비롯하여 김구 선생까지도 통쾌해 했다고 격찬한 내용을 들려 주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 8.15를 맞았다. 김구 선생은 해방을 맞아 귀국을 준비하였으나 미군에 의해 좌절당하고 말았다고 고인은 술회한바 있었다. 임시정부 이름을 가지고는 귀국하지 못한다는 것이 미군당국의 강력한 요청이었다고 한다. 한편 김구 선생은 당시 상해에 와서 그곳 동포들을 불러모아 해방의 기쁨에 대해 연설하며 "친일파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외쳤지만 그곳에 참석한 중국거주 동포참석자들은 거의가 친일파였고 아니면 아편장사꾼들 등 이였기 때문에 이들 교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다고 윤영무 선생은 생시에 그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적도 있었다. 그는 특히 "김구 선생이그후에도 정세를 잘못 읽어 이승만과 손잡고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은 최대실수였다"고 혀를 차며 이야기한 경우도 있었다.
고인은 중국의 두 세력에 대해 당시의 중국 내 사정은 모택동군과 장개석군의 차이가 너무나 현격했었다고 회고한바 있다. "모택동군은 겉보기에는 비록 거지같이 보이고 누추하였지만 모택동군은 도덕적으로 깨끗하였고 그 당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을 위한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나 장개석군은 일제에 항쟁하는 투쟁정신이 미약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남경에 배가 들어오면 장개석군의 군벌 도둑질에 의해 들어오자 말자 빈배가 되어버릴 정도로 부패하였다는 당시의 중국사정을 후진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 94년을 돌아보며 이러한 뜻을 후진들에게 주려고 노력해 왔다. 그가 인생의 말년에 중국말을 배워가면서 까지 <판문점 담판>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도, 그리고 일본말로 된 김명철의 원작 <김정일 통일전략>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도 모두 이러한 귀중한 뜻이 담긴 고인 생애의 한 부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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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지개님의 댓글
무지개 작성일좋은 분들이 자꾸 떠나시니, 또 답답해집니다.
무등님의 댓글
무등 작성일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