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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용구 선생 장례식 경건히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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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3-08-19 03:35 조회12,4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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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비아=민족통신 종합] 안용구 선생의 장례식은 17 오후130 매릴랜드 콜럼비아위즈키 장의사에서 부인 김정현여사와 21 자녀들, 각지역의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장 윤길상 목사의 집례로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에나모리씨(필라델피아 교향악단 비올라 연주자) 아버지를 추모하는 곡을 연주했고, 장남 안호씨(캔사스 교향악단 첼로 연주자) 아버지의 음악세계에 대해 회고하는 , 차남 준씨의 아버지 생애 대해 소개할 장내 참석자들의 표정들은 모두 숙연한 모습들이었다.

이어서 고인의 친구분 두분이 안용구 선생에 대한 생활철학과 삶의 자세에 대해 회고하는 시간도 있었고, 제자인 리준무 선생(뉴욕 우륵교향악단 지휘자) 조사와 함께 각계에서 조사들(북부조국 해외동포원호위원회, 6.15해외측위원회-곽동의 위원장, 독일의조국통일범민족연합 유럽지역본부-리준식 의장과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이지숙 회장, 민족통신 대표인 노길남 박사, 카나다 김수해 선생, 로스엔젤레스 오인동 박사, 뉴저지주의 김수해 선생, 클레어몬트의 백승배 목사의 조시 ) 간략하게 소개되었다.(조사,조시,조문들은 아래 별도 소개)

그리고 마지막 순서에 죠지아주 아트란타에서 참석한 박한식 교수의 추모의 말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이날 안용구 선생의 장례식은 재미동포들과 미국인 친지들이 함께 격식이 없는 편안한 모임으로서 위대한 음악가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고인의 자녀들과 친지들의 마음을 통해 참석자들을 크게 감동시킨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참석자들은 유가족이 초대한 식사를 나누면서 고인에 대한 추억담을 비롯하여 고인의 부인과 자녀들을 위로하는 시간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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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임시로 올린 자료입니다. 보도용 사진이 도착하면 다시 사진을 바꾸도록 하고자 합니다.(민족통신 편집실)


 

 안용구선생의 유가족들에게

 

  우리는 재미동포전국련합회 고문이였던 안용구선생이 별세하였다는 뜻밖의 비보에 접하여 슬픔을 금치 못하며 고인의 부인 김정현녀사를 비롯한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선생은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운동의 원로로서 재미동포사회와 해외에서 음악교류를 통해 조국통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신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쳐온 열렬한 통일애국인사였습니다.


 
선생은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으나 재미동포전국련합회의 강화발전과 조국통일의 길에 바친 고결한 생과 애국의 넋은 해외동포들과 우리들의 가슴속에 길이 남아있을것입니다.


 
다시한번 안용구선생의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주체102(2013) 8 15


 

조전

 재미동포전국련합회 고문이신 안용구선생께서 갑자기 서거하시였다는 비보에 접하여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안용구선생은 조국의 북과 남, 재미동포사회를 비롯한 해외에서 음악교류를 통하여 민족화해를 도모하시면서 통일성취를 위하여 헌신하신 민족화해와 자주평화통일운동의 원로, 명성높은 민족음악가이시였습니다.

 겨레의 념원의 실현을 위해 선생의 힘이 어느때없이 필요하는데 혈육이 있는 북부조국에 가는 날을 눈앞에 두고 그토록 갈망하사던 통일도 못보신채 너무도 애석하게 돌아가셨으니 커다란 슬픔과 손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안용구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기신 빛나는 애족애국의 공로는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록될것입니다.

 우리 재일동포들은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대원수님의 유훈대로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충정으로 높이 모시고 《제2 6.15통일시대》를 열기 위해 더욱 분발할것입니다.

 고 안용구선생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이 고인의 숭고한 뜻을 이어 민족의 화해와 단합, 조국의 통일번영에 이바지 해나갈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주체102(2013) 817

일본 도꾜


 멈출 없는 자유, 자주, 평화, 통일의 선율: 마리의 천천 만만의 되어

- 안용구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1928 원산 안의사댁에 울린

고고한 아이의 울음 소리

당신은 그렇게 오셨습니다.

기쁨으로, 환희로. 그러나

운명처럼 찾아온 불청객 소아마비

하지만 하늘은 그것으로

당신을 키웠습니다.

인고의 천재 음악가 베토벤의운명으로

운명처럼 당신의 귀를 열었습니다.

현의 소리로 당신의 인성을 살찌웠습니다.

음악은 당신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당신 가는 곳에 현의 소리

사랑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스승이 있었습니다.

조선에도, 일본에도, 독일에도

또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한국에도, 미국에도, 지구 어느곳에도

 

몸이 불편하였기에, 고통스러웠기에

깊고, 넓고 높은 소리를 냈습니다.

현의 마술사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심장을 열었습니다.

고통을 당신은 올곧음으로

멋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멋에 반한 멋쟁이,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한

대담 솔직 침착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금처럼 빛나고 바르고 현숙한, 이름 김정현,

당신의 평생 반려자가 되셨습니다.

 

현의 마술사 당신은 훌륭한 스승

한국을 현의 강국으로 만든 대부

훌륭한 제자를 길럿건만.

한반도 남단에 다시 찾아온 고난,

박정희, 오까모도의 군사 쿠데타

올곧은 당신 독재에 항거했습니다.

반체제 인사란 낙인이 각인되었습니다.

하여 미국 피바디의 현악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리 의의 소리,

인애의 소리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리 새가 되어

남과 북을 넘나들었습니다.

선생과 안정현 여사가 있음으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선생의 떠나심으로 우리 슬프지만

하늘에서 우리를 응원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육신의 몸에서 자유로운 선생님

비가 오면 비를 따라 오십시오.

바람 불면 바람따라 오십시오.

구름 흐르면 구름타고 오십시오.

냇물 흐르면 시내따라 오십시오.

햇빛비치는 따스한 날이면

빛으로 오십시오.

봄이면 향기로

여름이면 푸른 초목으로

가을이면 영근 열매로

겨울이면 하얀 눈으로 오시어

아직도 노예된 땅에

자유혼으로, 자주 노래로, 평화의 선율로

우리 곁에 있어 주십시오.

몸은 떠나셨어도

영으로 정신으로

우리와 함께하시어

자유, 자주, 평화, 통일을.위한 선율을

멈추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마리이 천천 만만의 새되어

민족의 얼을 깨우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경애하는 안용구 선생님!

(2013 8 16)

 

 

사랑하고 존경하는 안정현 여사님,

무슨 말로 여사님을 위로할 있겠습니까?

사고 소식을 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가 믿는 하느님께.

고등학교 3학년, 아버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도 역시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도 사흘후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사랑하는 안용구 선생님이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슬프고 원망스럽습니다.

워싱톤에 가면 선생 내외 사시는 집을 방문 이얘기 꽃을 피워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슬프지만 훌륭하신 선생님, 선배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밖에 없군요.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올곧은 , 정의의 조국 통일의 길로 매진할 밖에 없게 되었군요.

여기 몇자 적어본 조시를 가다듬어 보내드립니다.

하늘의 위로와 평화를 빕니다. 힘내세요. 여사님. 힘내세요 우리 모두의 누님.

 

클레어몬트에서

 

백승배 드림



조사/조문/조시

안용구 선생의 영전에 삼가 드립니다


  
저명한 민족음악가이신 안용구 선생이 서거하셨다는 밖의 비보에 접하여 우리는 슬픔을 금치 못하며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민족분단의 아픔을 가시기 위해 음악을 통해 조국통일 실현을 위해 모든  
아낌없이 바쳐 오신 열렬한 통일음악가이시었습니다.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우리민족 현대음악사의 별이며 민족음악가로 널리 알려진 안용구 선생님의 서거는 미주동포와 해외동포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 있어서 손실로 됩니다. 
  
안용구 선생님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던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시고 끝내 운명하시였으나 열렬한 통일운동가로서의 선생님의 넋과 통일애국의 길에 남기신 공적은 겨레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며 조국통일은 반드시 이룩되고야 것입니다. 

  
이제 못다 이루신 통일조국의 ,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 맡기시고 고이 잠드시옵소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3
8 16 

6.15
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

………………………………………..

 

존경해온 안용구 선생님 영전에 


  
비록 그토록 바라시고 염원하셔온 6.15 통일조국을 산자들의 몫으로 내려놓으시고 
부디 영면 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선생님을 애석하게 잃고 애통해하는 유가족분들께 위로의 인사를 보냅니다. 


  
2013
816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유럽지역본부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

 

……………………………………….

 

조사

위대한 스승 안용구선생님 영전에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별이 우리곁을 떠나 가셨습니다. 민족자주진영의 원로이시자 해외동포통일운동의 선배이시고 스승이신 안용구교수님께서 홀연히 우리의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사실은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해외통일운동사에 말할 없는 충격이고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손실로 되고 있습니다. 

세계적 명문음악대학인 죤합킨스 피바디음대에서 권위있는 교수님으로, 존경받는 음악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선생님은 1960년대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인기있고 저명한 교수님으로, KBS교향악단의 수석악장으로 이남의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었으며 한국의 실내악 운동에도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셨습니다. 

시대에 눈부신 활동을 하였던 안용구스트링오케스트라, 안용구스트링트리오, 안용구 현악4중주단 등은 많은 음악애호가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려가고 있던 이들 연주 그룹들은, 음악인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되어 아름다운 화제를 뿌렸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러한 실내악운동을 벌여가심에 따라 이남 음악계는 음악의 새로운 발전을 이끌어내는 실내악의 중흥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오신 선생님께서는 일신상의 행복과 향락만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겸허하고 소박한 일상생활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은저렇게 명예도 있고,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으신 분이 어떻게 가시밭길과도 같은 조국통일운동의 길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일까?”하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훗날에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긴 했지만, 한때는 가깝게 지냈던 음악계의 절친한 친구들조차 통일운동을 하신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멀리하고 발걸음까지 끊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사람들이 조국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몸소 실천하셨고,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분단되어 있는 나라의 현실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하신 선생님께서는 80년대 중반에 이북을 방문하시고 돌아와서 서울대학에서 함께 공부하고, 이남악단에서 같이 활동했던 재북 음악대학동창과 음악인들의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때 해주셨던 말씀 중에우리가 자주적일 가장 강하게 있다 인상 깊은 말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90
10월에 윤이상선생께서 발기하신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초청되어 선생님을 단장으로 모시고 참석했었습니다. 선생님은 단장연설에서 음악예술이 조국통일에 이바지 있는 여러 가지 방안들을 제시하시어 청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정이 많으셨습니다. 

가난으로 허덕이는 제자들을 사랑으로 안아 주셨습니다. 1960년대 국민학교 교원을 하고 있을 당시 나는 소문만을 듣고 생면부지의 고명하신 선생님을 찾아 무작정 상경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소 한장만을 손에 쥐고 물어물어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보잘것없는 학생이었지만 선생님께서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바이올린의 기초와 문제점을 하나하나 자상하게 지적해 주시며 그대로 해보라고 하시던 선생님은그것보라 처음보다 소리가 좋아지지 않았느냐 격려하시며 직업음악가로 나갈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보잘것없던 시골 학생은 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하였고 국립교향악단단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미국에 뒤에는 선생님의 인도를 받으며 83년부터 본격적인 통일운동에도 합류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선생님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그날 레슨이 끝나고, 당연한 것이지만 월사금을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곳에서 것만도 대단한데 돈은 여비로 보태 쓰라 레슨비를 돌려주시며 따뜻하게 격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유난히도 선생님의 인자한 모습이 뜨겁게 안겨오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지도를 받으려는 다른 학생들은 높은 월사금을 내고도 줄을 서는데,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장학금까지 손에 쥐어주며 선생님께서는 정성껏 가르쳐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정에서도 아주 행복하셨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던 어느 ,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군, 객지생활을 하느라고 고생이 많은데 차라리 우리집에 들어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제안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후로 선생님과 한집에 살면서 나는 많은 혜택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을 모시고 조선국립교향악단공연무대에 같이 설수 있었던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습니다. 2002 선생님은 백고산이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대를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 열연하셨습니다. 감동의 무대, 열화같이 환호하던 평양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에 만족해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그립기만 합니다. 

선생님슬하에는 삼남매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메이저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하는 장남 안호, 대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차남 안준 그리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양념딸 안영희를 키워 놓으셨고 자녀들도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귀여운 손자들을 할아버지께 안겨드렸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선생님은 훌륭한 사모님을 만나신 것이 최고행운이었을 것입니다. 사모님의 빼어난 미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영방송의 최고인기를 독차지 했던 아나운서라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사모님을 여걸이라고도 합니다. 이민생활에서, 선생님의 가정이라고 경제적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을 보필하시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모님께서는 한때 미장원도 경영하시고 부동산사업도 하시면서 가정의 경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명문 피바디음대에서 평생 일하셨지만 미국대학교수들의 주머니사정은 넉넉하지 못한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 사모님은 남자들도 하기 힘든 마당의 잔디까지 손수 깎으셨습니다. 사모님은 생활비를 절약하시려고 그랬던 같았습니다. 그런데 잔디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나도 사모님의 손을 때마다 마음이 아픈데 선생님께서는 사모님의 다친 손을 보시며 얼마나 우셨을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선생님을 승리자로 우뚝 서게 하셨습니다. 
그런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모님을 두시고 떠나셨습니다. 성공한 자랑스러운 자녀들을 남겨두시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음악계에 세우신 업적과 통일운동사에 남기신 철학적 교훈은 음악계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념원하는 우리민족모두에게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2013 817

리준무(뉴욕 우륵교향악단 단장겸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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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안용구선생님의 영전에 삼가 올립니다



윤길상 목사님께서 보내준 부고관련 소식을 이멜을 통해 읽고 잠시 멍했습니다. 나는 콜럼비아 사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뜻밖에 김정현 사모님께서는안선생 너무나 조국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조국통일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입니다라고 차분히 말씀하시고 나서 분은 너무 편안하게 행복하게 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지금 즐겨하지도 않는 술을 들고 있다 덧붙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이별을 참을 없어 약주를 하지 않으면 견딜 없는 심정임을 느낄 있었습니다. 국내외 통일운동 진영의 사람들이 많지만 이들 부부처럼 다정다감한 부부도 드물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7
년전인 2006 안용구 선생님 부부를 취재하러 콜럼비아 자택에 방문하여 하루를 묵으면서 안생님의 걸어 길을 들을 있었고, 부부가 만나게 계기도 들을 있었습니다. 한분은 유명한 음악가, 한분은 유명한 방송아나운서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안용구 선생님의 갑작스런 부고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멍했지만 우리민족의 손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인을 만나러 갔을 그의 2004 발행한 저서한마리 새가되어 선물로 주셨습니다선생님은 생전에 민족통신을 위해서도 여러차례 성금을 주신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평생에 책을 읽다가 눈시울을 적신적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7년전 선물로 받은 그의 저서  『한 마리 새가 되어』라는 그분의 생애를 읽으며 여러 차례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책은 한길 아트에서 2004 9월에 펴낸 고인의 자서전으로  바이올린 연주가 안용구 선생의 77 음악일기장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책은 그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 실력에 얽힌 이야기들도 있지만 세계적으로 이름난 유명 음악인들을 배출한 이야기들도 담고 있었고, 우리나라 음악세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의 봉건적 사회상과 분단시대의 처절한 사회상을 감동적으로 반영하여 내용들이기에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은 낙천적인 음악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서도  "나에게 부과된 고통이 바로 하나의 축복이었다. 과연 고통 없이 나의 오늘이 있을 있었을까? 배고팠던 시절이 오히려 아름답게 회고되어 그렇게 그리울 없다. 황혼의 나는 이제 다시 옛날의 기쁨과 슬픔을 맛볼 없지 않은가."라고 대목도 잊을 없습니다. 

용구 선생님의 삶은 자체가 우리 민족사의 깨끗한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예속이 아니라 자주이고,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이며, 불의가 아니라 정의이고,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며,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이렇게 조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뿌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정신적으로 영향을 준것은 이모였습니다. 그는 나와의 대화가운데  "나의 이모님은 항일운동을 했다. 이모와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함흥에서 당나귀를 타고 이화학당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까지 왔다고 한다. 성격이 강직했는데 이모가 언제나 혁명투사였기에 만나면 유관순 열사 등과 항일운동을 활약상을 들려 주었다." 귀띔해 준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인과의 만남에서 성장과정을 있었습니다. 그는 7년전 대화에서 피보디 음악대학에서 35년의 교수생활을 퇴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1928 원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 바이올린을 잡게 과정에서부터 유럽유학 기간과 이후 서울대 음대 교수를 거쳐 1968 미국 피보디 음악대학의 초청을 받기까지 지나온 이야기, 그리고 이후 4차례 이북을 방문하면서 남북 해외 음악인들의 만남을 통해 남북 가곡들을 모아 연주회를 갖기도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조국통일 없이는 미래가 없다" 귀중한 역사의 교훈을 가슴 속에 아로 새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인의  애국정신은 어릴때 이모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분단시대, 특히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에는 철권통치가 무척 싫었다는 고백들이 자서전에 배경으로 깔려있습니다. 미국으로 오게 중요 이유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정치적 암흑시대 때문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민오시기 전에도 한국에서 훌륭한 제자들을 세계적 음악가로 길러냈지만 반세기의 미국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후진들을 길러냈습니다.  1989 410 뉴욕에서 "분단을 넘어선 우리 가곡의 " 열었고 그후 미국 전역을 돌면서 연주회도 가진바 있었습니다. 그럴때마다  마지막에는 언제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부르며 울곤하였다." 대목도 그의 저서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위대한 통일음악가를 잃었다는 슬픔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선생님의 소원이며 염원이었던 조국의 자주적통일이 이뤄지지 못한 현실을 못내 안타가와하면서 선생님께서 이루지 못하고 가신 소원을 살아있는 우릳르 모두가 힘을 합쳐 반드시 선생님의 염원을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소원은 저희들에게 맡겨 두시고 이제 편히 편히 잠드시기를 기도합니다

 

2013
817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

……………………………………………………………


안용구 선생님이 가시다니요?

 

 

 

 

멀리 카나다에서 민족통신을 통해 통일음악가 안용구 선생님이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통일을 사랑하시고, 음악을 사랑하시고, 가족을 사랑하시던 선생님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에 눈시울이 적셔집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카나다 

김수해 올림

 

 

 

 

   

안용구 박사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이준무 선생님 디시로 내려가며 급한 전화 주셔서 소식 들었었습니다



항상 인자한 웃음으로 맞이해 주시며 사모님 농담에도 빙긋이 웃음으로 동감을 표해주시던 어른 안박사님 그리움이 문득 솟구칩니다. 뉴욕에 
오시면 항상 늦은 시간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같이 웃음 장단 맟추어 주셔서 우리 후학들 힘이 되었습니다.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조용히 삶의 자세를 보여주신 어른이십니다



좀더 여기 계시며 저희들 이끌어 주셨으면 하는 욕심입니다만, 이제 편안한 곳으로 가셔서 계속 저희들 통일운동 격려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가시는 편안한 여행길 되시길 빌며 또한 통일사업 진전되어 환하게 웃으시며 다시 뵈올 기다리며 머리 숙여 하직 인사드립니다



사모님께는 가뵙지도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씀 전해주십시요




2013.8.17


뉴저지에서 
김수복 드림

 

   

 

안용구 선생님이 가시다니 이게 웬일 입니가. 



사모님과 더불어 언제나 저희들을 자상하게 살펴주시고 

무엇이던 나서서 도와  주시던 어른께서 가시다니요



푸근하고 인자한 미소에 잔잔한 말씨로 반겨 주시던 예술가

우러러 보며 따르고 선생님이 계셔서 든든한  마음으로 

하면 했다는 격려로 힘을 실어 주시던 선생님



옛날 말로는 제금 독주가 안용구의 70 음악일기

<
마리 새가 되어미국에서 남과 북을 넘나들며 친지와 

음악인들을 만나는 얘기를 읽으며 가슴 메이던 일이 생각 납니다



어느 봄날 저녁, 사모님을 처음 만나 들려드렸다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자택 거실에서 켜주시던 노래가 지금 다시 들려 옵니다

2층에 마련해 놓으셨다는 나의 침실을 향해 걸어 올라갔던 바로 

층계에서 넘어지셨다는 얘기가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저의<평양에 두고 수술가방> 출판기념 파티를 주신다고 

50
부부를 자택에 초대했다가 당일 갑작스런 폭설로 길이 막혀 

취소해야 했던 2011년의 1월의 뜨거운 사랑의  생각도 납니다



선생님, 선생님아직도 이루지 못한 조국의 통일을 놔둔 어찌 

이리 먼저 떠나십니가저희들이 이제  누구를 보며 누구에 기대어 

일을 나가야 합니가. 지금은 그저 먹먹하기만 합니다

, 그래도 슬픔 달래고 나면 다시 계속 해야지요



어디에 계셔도 저희들 내려다 보시며 격려해 주실 압니다

고난과 설음, 애타던 고통 멀리하시고 편히 쉬십시오

저희는 저희 몫을 나가겠습니다



안용구 선생님 영전에 삼가 합니다

 



2013
814,

 

오인동

로스앤젤레스 근교 파싸데나에서

 

 

 

***관련보도 자료 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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