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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25신)방북취재 이모저모 사진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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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길남 특파원 작성일13-05-22 02:09 조회11,95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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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러시아 할머니(맨오른쪽)가 친구 할머니와 함께 손녀 마리아를 데리고 이곳 평양에 와서 평양에 있는 대학에 유학시켜 자신의 조직을 이어 받는 지도자로 양성하기 할 생각이라고 한다. 후비를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한 할머니의 애국적인 자세가 존경스럽다.
민족통신 편집인겸 대표인 노길남 박사는 최근 방북취재(2013.4.10~5.8) 마치고 돌아와 당시에 평양에 체류했던 카나다의 에드문트에 거주하는 김원백선생을 포함하여 러시아에서 손녀를 데리고 할머니, 미국인 부인을 의사는 부부동반으로 3자녀를 모두 데리고 가족, 뉴질랜드에서 부자 조용하게 북부조국을 지원해 여러동포들도 만날 있었다고 회고하며  해외동포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모저모 3번째  사진들과  함께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평양-25)방북취재 이모저모 사진들(3)
 
[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평양에 체류했던 한달동안  카나다의 에드문트에 거주하는 김원백선생을 포함하여 러시아에서 손녀를 데리고 할머니, 미국인 부인을 의사가 부부동반으로 3자녀를 모두 데리고 가족, 뉴질랜드에서 부자, 경제활동을 하는 오스트랄리아 동포, 재중동포들, 재일동포들, 그리고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재미동포들 조용하게 북부조국을 지원해 여러동포들도 만나  많은 대화도 나눴다.
 
사재털어 나무심기통일운동에 헌신한 김원백 선생

김원백
선생(65) 사재를 털어가면서 북녘 땅에 나무를 심는 사업을 지원해 왔다. 그는 동안  푸른통일조국가꾸기운동대표로서 북녘땅에애국 양묘장 운영해 왔다.  북녘에 심은 속성 포플러 나무를 두고 북측 인사로부터 종자는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들여온 업적과 같다 말까지 들었다. 평범한 사업가로 단순히 나무심기를 돕는 과정에서 그는 분단역사의 발자취도 알게되었다. 이제는 나무심기에 전념해 왔지만 통일운동가로서의 위상도 갖게 되었다.
그는 1976 동포들 3~4천여명이 거주하는  카나다 에드문트라는 곳으로 이주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남쪽이 지금과 같은 경제활동을 갖추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의 부친이 1950
7월에 코리아전쟁 당시 전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애국심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남녘 사람들은 그를 고아 취급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싫어져서 땅을 떠났다.
아이들도 키우고 시간적 여유도 있었던 그는 그의  처의 친척을 찾기 위해 1990년대부터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중국을 방문했다가 중에 친척이 두만강 조중 국경에 살아서 곳에서 보니까 북쪽의 사정을 알게되었다. 당시 산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1990 처음으로 방북했고 년에 번씩 지속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런 과정에서 북녘동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당시 나무심기가 통일사업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무심기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계기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황주양묘장, 남포양묘장 등에 나무묘목들을 제공해 주는 사업을 포함하여 각종 나무심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재를 털고나서 지속적인 사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 이전의 6.15시대에 남녘의 통일부를 찾아가서 어차피 대북 협력단체들에게 지원금이 있지 않느냐, 최고 10억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어차피 통일을 위해서 준비해야 일이라면 나도 자금을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담당자가 하는 말이선생이 국적이 외국이라서 지원금을 지원하기 힘들다 해서 포기한적도 있다고 밝힌다.
그는 노후도 생각하지 않고 북녘 땅에 나무심기 사업에 매달리면서 자식들에게도 아버지에게 경제적으로 기대하지 말라고 설명하고 사업은 처에게 맡기고 남북을 드나들었다. 사업을 계속할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의치 못했고, 처에게 맡겨놓은 사업은 직원을 잘못 만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돌이켜 보기도 한다.
김원백 선생이 기부한 나무들의 양도 상당하다. 30~40여차례 나진, 회령, 온성 등에 보냈고, 묘목 나무 합쳐 120 그루 정도를 5차례나 보냈으니까 이것만도 6백만 그루가 된다. 정동영 통일부장관 시절에는 남녘의 도움도 받을 있었고, 언급도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와서는 대북협력체제는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며 몹시 안타까와 했다.
그는 남녘사회에서나 북녘사회에서 모두 나무심기 해외동포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바 있다. 6.15시대가 시작되고 6~7년이 지난 시기에는 사재털어 1억그루 북녘땅에 나무심기 운동 펼치는 해외동포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바 있었다. 그는 아직도 꿈을 살리기 위해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체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무심기 운동에 참여할 국내외 동포들의 성원도 간곡하게 바라고 있다.
*문의 연락처: email 주소는 wonkim0625@hanmail.net 혹은 wonkim@shaw.ca
카나다 전화는 780-903-8991
 
조국방문한  16 김디도 민족 느끼고 감동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고려호텔 3층에서 16 소년 김디도 군을 만났다. 그는 종교계에 종사하
아버지를 따라 이곳 평양에 처음으로 왔다고 대답하며 “4살때 아버지를 따라 뉴질랜드에 이민갔기 때문에 뉴질랜드 문화에 젖어 있었어요. 근데 여기와서 내가 뉴질랜드 사람이 아니라 코리안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이번에 조국에 오기 2년전인 2011년에 때도 아버지를 따라 이민 이후 처음으로 남 조국의 서울을 방문하였는데 때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 대해 별로 느끼지 못하고 나는 뉴질랜드 사람이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하였는데 이번 평양방문 일주일 동안에는 코리안의 정체성을 많이 느꼈다는 것이 그의 방북 소감이었다.
그는 이어 정말로 아버지가 여기에 데려오지 않았으면 나는 아직도 뉴질랜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꺼예요!”라며 이곳에 자신을 데려온 아버지에게 감사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조그만한 종이빽에서 편지봉투를 하나 꺼내서 내가 올때 나랑 가깝게 아는 코리안 여자친구가 있는데 우리반에서 코리안이 두명인데 애가 나에게 노스 코리아 친구들에게 전해달라며 편지를 써서 줬어요.”라고 설명하고 기자가 읽어보아도 좋다고 하여 한번 일고 내용이 좋아 취재수첩에 적어 놓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친구
나는 올해 17, 만으로는 15살이야. 아직 생일이 안지났거든. 남한에서 이민 사람이지만 지금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12시간이나 걸리는 나라,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어.
나라는 남한과 많이 달라 잔디가 많고, 동물들도 많아. 남한과 북한도 많이 다르겠지?
옛날엔 한나라였지만 이제는 서로 긴장하며 사는 슬픈 같아. 언젠가 전쟁의 두려움 없이 서로 사이좋게,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평화롭게 통일하는 날이 왔으면 정말 좋겠어. 전쟁은 무섭고 두려우니까
사랑, 민족, 가족이 죽는건 슬프고 짓이 못되니까. 우리 남한과 북한, 민족이었듯이 서로 아껴주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자!
북한의 어딘가에서 편지를 읽고 있을 너도, 너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
언젠간 백두산 위에서 남한을 내려 보거나 남산 타워 꼭대기에서 서울 불빛을 바라볼 날이 오기를 빌며.
숨쉬는 희망은 있으니까.
2013 4
너의 뉴질랜드 코리안 친구
의진(지니 )
(*선물은 동전넣는 지갑을 넣어 예븐 종이봉지에 넣었음)
 
김디도군은 이것을 보여주면서  아저씨도 북한을 많이 도와 주세요!”라고 어른스럽게 부탁까지 한다. 나는 천진난만하고, 때묻지 않은 소년의 마음에 감동해 버렸다. 그는 식사가 끝나기 전에 누군가 불러서 가는 바람에 이상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 못내 아쉽다.()


자신의 손녀를 평양대학에 유학시켜 후비를 육성하려는 할머니의 마음
 

 

[사진]러시아에서 할머니와 그의 친구, 그리고 손녀라고 하면서 고려호텔 1 로비에서 어디론가 가기 위해 우리나라 전통복장을 하고 있는 세분을 짤각하고 눌렀다. 잠시 나누는 대화가운데 할머니는 자신의 조직을 잇는 후비를 양성하기 위하여 그동안 북부조국 관계자들과 의논하여 자신의 손녀를 평양의 대학에 유학을 보내기로 하고 이번에 데려왔다고 한다 . 마리아라고 하는 손녀는 저는 할머니 말씀이 좋다고 생각하여 이번에 유학하려고 따라왔다.” 약간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이들 모습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민족의 얼을 러시아 땅에 이어주기 위하여 우리 말을 전혀 모르는 할머니의 손녀, 러시아계 혼혈아 마리아를 평양에 있는 대학에 유학을 보내려는 애국적인 마음에 감동했다. 이들 역시 바삐 나가는 바람에 자세한 이야기를 없어 아쉬웠다.()



[사진]안재완 목사가 인솔한 '우리는 하나'의료지원단 겸 북부조국바로알기 일행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어서 매일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예배를 들이는 의식을 갖는 한편 일요일에는 봉수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들 일행은 북녘사회가 기독교 중심 사회는 아니지만 서로의 신앙과 정견을 존중해 주는 사회이기에 마음이 편하다고 하면서 일주일 동안(2013.5.1~5.8) 이곳 북녘동포들과 친형제자매처럼 지냈다. 이들은 북녘동포들과 헤어지면서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들을 지었다. 북 당국 관계자들도 이들의 생활자세에 대해 높이 평가해 주었다. -민족통신 자료-


[사진]뉴욕의 리준무 우륵교향악단 단장겸 지휘자는 4월봄예술축전 시기에 김원균명칭음악대학 교향악단의 북녘 노래들을 지휘하여 큰 박수갈채받았다. 지휘하는 리준무 재미동포 모습.-민족통신 자료-



[사진]재미동포예술단은 리준무 뉴욕우륵교향악단 지휘자와 김희련 소해금 연주가가 공연에 출연하여 북부조국 음악들을 지휘, 연주하여 해내외 동포 참석자들의  우뢰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리준무 선생은 북부조국 음악 알리기에 지대한 역할을 해 왔다. 


[사진]재미동포들은 평양에서 남쪽으로 5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기원전 298년~기원전)의 무덤을 참관하고 고구려 천년 역사를 감상했다. 서기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위치에 이장한 동명왕릉에도 우수한 건축술과 함께 귀중한 유적지로서 북녘 땅의 명물중 명물로 이어져 왔다.


[사진]재미동포들은 평양에서 남쪽으로 5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기원전 298년~기원전)의 무덤을 참관하고 고구려 천년 역사를 감상했다. 서기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현재의 위치에 이장한 동명왕릉에도 우수한 건축술과 함께 귀중한 유적지로서 북녘 땅의 명물중 명물로 이어져 왔다.


[사진]해설원이 동명왕릉의 벽화들을 하나 하나 설명하며 이곳 왕릉 공원은 40정보(헥트알)의 소나무 숲을 포함하여 왕릉구역의 부지면적이 약 170정보이고 이 주변에는 산과 강, 벌들이 적절히 어울려 매우 아늑하고 풍치수려하다고 설명했다. 주위에는 사찰과 고구려 무덤 안에는 벽과 천정에 지금도 104개의 연꽃벽화와 판못, 장식품, 머리빈 등의 유물들도 나왔다고 설명. 왕릉 남쪽에 120메터 길이의 동명왕의 명복을 빌던 사찰 '정릉사'가 있다.



[사진]정릉사 사찰안의 모습.-민족통신 자료-


[사진]정릉사 사찰안의 불상들이 있다. 한 재미동포가 촛대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이 사찰을 비롯하여 동명왕릉은 외래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도굴 당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개건하는 사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1993년 5월14일에 그 준공을 선포했다. 이것을 기념하여 동명왕릉 들어오는 입구에는 김일성주석의 노고와 배려를 길이 전하기 위해 '동명왕릉기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민족통신 자료-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이 방북취재 기간(2013.4.10~5.8) 중 초기에 보내는 보도자료들은 민족통신 웹사이트가 해킹을 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고 임시통신으로 소개해 왔습니다. 그래서 평양-1신 보도부터 평양-9신 보도자료를 종합하여 여기에 한꺼번에 소개해 드립니다. 그리고 평양-10신부터 26신까지는 정상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애독자들에게 불편을 끼쳐드렸지만 너그럽게 양지하여 주면서 격려하여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초기 보도자료들은 트위터와 페이스 북에 소개한 자료들도 있습니다.초기 9신까지 자료들은 아래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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