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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고 정규명박사 사모, 강혜순여사 매일 남편 묘소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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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6-12 15:45 조회2,6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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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랑크후르트=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 특파원]강혜순여사(78)는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리고
정규명 박사가 운명(2005.12.9)한지 6년6개월이 되는 날인데 고인의 부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
매일 고인의 묘소를 방문해 왔다. 강혜순 여사는 “미주동포가 고인을 참배하기 위해 방문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하며 한층 더 기뻐한다. 고인이 생존하였을 때에는 국내동포들은 물론 해외동포들도
많이 만났던 정규명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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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고 정규명박사 사모, 강혜순여사 매일 남편 묘소방문




<##IMAGE##> [후랑크후르트=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 특파원]강혜순여사(78)는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리고 정규명 박사가 운명(2005.12.9)한지 6년6개월이 되는 날인데 고인의 부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 매일 고인의 묘소를 방문해 왔다.

강혜순 여사는 “미주동포가 고인을 참배하기 위해 방문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하며 한층 더 기뻐한다. 고인이 생존하였을 때에는 국내동포들은 물론 해외동포들도 많이 만났던 정규명박사였다.

고 정규명박사의 부인은 자택에서 우리들을 맞이하여 잠시 담화를 나눈 후에 우리들의 요청으로 고인의 묘소로 안내해 주었다. 고인의 묘지에는 우리말로 “조국은 하나다”라고 쒸어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것은 생전에 고인이 얼마나 조국의 통일을 갈망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고인의 부인께서는 ‘하이젠스탐’ 묘지를 안내한 직후 그 주위에 있는 중국식당으로 안내하여 점심을 대접해 주었다. 고인의 묘지에 참배하고 떠나려는 취재진 일행에게 식사를 하고 가지 않으면 섭섭하다고 말해 그 다음 일정을 미루고 점심을 함께 나누며 지난 시기의 이모저모를 되새겨 보았다.

분단의 희생자들이 많았지만 정규명 박사 가정의 경우도 가슴아픈 사연 가운데 하나였다.

<##IMAGE##> 1967년 6월에 독일 한국대사관 공관원들과 한국의 중앙정보부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정규명 박사는 까만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데려간 하루 후 그의 부인 강혜순여사와 2살반된 아들도 대사관에 간 고인이 와달라고 하여 어디론가 불려갔다. 이들 가족들은 모두 비행기에 실려 도꾜로 갔고, 도꾜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한국으로 끌려가 이름만 듣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이곳에서 2살반된 어린아이와 함께 한달가량 문초를 받은 다음에 서대문 구치소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그 동안 어린 아들을 돌봐주던 정보원의 한 여성직원은 아이가 너무 울고 격리된 아빠와 엄마의 방을 왔다갔다하며 애절하게 우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왔던지 그 여성직원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고 말한다.

부인은 남편인 정규명박사가 이북으로 간 오빠를 찾아주기 위해 동독에 있는 북 대사관에 찾아가 자기 처의 오빠를 찾아달라고 했고, 그 생존이 확인되어 부부가 혈육을 만나러 북에 갔다 온 것 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들 부부는 서대문구치소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무려 1년동안이나 재판을 받았다. 그 동안 겪은 고초는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서 서대문경찰서로 이송될 때 어린 아들은 할머니 집으로 맡겨야 하는 순간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서 발버둥치며 자지러지게 소리치는 그 순간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며 민족통신 특파원들과 대화를 주고 받는 동안 눈시울을 적신다.

재판은 끝났지만 그 1년은 정규명박사는 남자구치소에서, 그의 부인 강혜순여사는 여성구치소에서 각각 1년 동안 감금돠어야 했고, 그리고 재판을 받지 않는 날에는 정보원들에게 끌려다니며 잠도 안재우고 묻고 또 묻는 문초를 받아야 했다며 악몽 같은 그날들을 되새겨준다. 혈육을 만난 것이 죄가되어 남편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부인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IMAGE##> 그러나 남편은 사형선고를 받자 구치소에서 형무소로 옮겨갔다. 이에 대해 서독 정부는 그의 선고를 감형하여 석방시켜 줄것을 박정희정권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정규명박사가 갇혀있던 형무소에 위문을 오고, 영치금까지 넣어주며 위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박정희정권은 사형을 무기로, 그리고 4년만에 특사로 석방을 결정했다. 4년동안의 감금이었다. 그 결과 1971년 출소하여 정규명박사와 부인, 이들의 아들은 모두 함께 같은 해 6월에 독일로 도로 돌아왔었다. 그 당시 서독정부는 이들 가족들의 귀가에 필요한 항공료 왕복표를 마련하여 전달했으나 정규명박사는 언제 통일이 될지 몰라 가족들의 왕복표중 편도표만 남기고 나머지 표들은 서독정부에 돌려주었다고 말하면서 정박사는 정직하고 순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설명한다.

정규명박사는 2005년 12월9일 오전10시20분 부인곁을 떠났으나 그 후 단 하루도 잊어본적이 없었다. 부인은 매일 오전아침 고인이 묻힌 묘소를 찾아 갔었다고 밝힌다. 그 묘소가 부인이 거주하고 있는 주택에서 걸어서 갈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운동겸 묘소를 찾아 가는 일을 일상화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분이다.

남편은 생전에 학자이면서 동시에 민족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다른 학자들과 함께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위해노력해 왔고, 그 뒷바라지를 위해 부인은 성의를 다하여 지원해 주었다. 강혜순여사는 1934년 4월2일 공주에서 태어났고, 고향은 서산이라고 한다. 그는 소녀시절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인지 부인이 고인을 그리는 추모집에 올린 글 “조국은 하나다”라는 제목의 수필은 읽은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어 준다. 부인은 공주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선생을 하며 5년 세월을 지낸 것이 그의 한국에서의 직업이었다. 1958년 고인이 독일에 유학올 때 부모들간에 합의가 이뤄져 혼인할 수 있었지만 부인이앓던 병환때문에 지연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 결혼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 결과 1962년 6월에 부인이 독일로 왔고, 그 해 겨울에 고인과 결혼했다.

결혼한지 3년만인 1965년 이들 부부는 부인의 오빠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동독의 북 대사관의 주선으로 이북에 가게 되었고, 헤어진지 14년만에 오빠들을 만나보게 되었다. 그 상봉때에는 그저 눈물만 나왔다. 오빠들은 어머니에 대한 안부만을 되풀이하여 물어보았을 때 함께 못온 것을 무척 한스러워했다고 회고한다.

부인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하면서 정규명박사는“이북을 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영영 통일이 될 수 없다. 정치체제가 다를뿐 이남과 이북은 한 민족이다”라고 강조해 왔었다고 한다.

부인은 지금도 고인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매일 묘소에서 그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큰 아들은 독일음악계에서 작곡가로 활약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생물학 박사로서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인은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었기에 생기는 비극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고, 지금도 애국자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주, 민주, 평화통일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큰 과제라고 강조한다.

민족통신 특파원들은 이날 신옥자선생의 묘소도 방문하려고 했으나 아직 고인의 묘소가 정돈되지 않아 고인의 딸 김숙진씨만 만나고 돌아왔다.

*연락처: 06104-171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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