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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김수복선생 북녘 지식에 척척<br><br>“김정일위원장 현지지도 쫓아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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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1-21 19:27 조회2,5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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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주동포 수행원 역할을 해 왔다고 말하면서 북녘사회 지식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척척 대답하는 뉴욕동포가 있어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 주인공은 뉴욕거주 김수복 선생(67)이다. 그는 특히 이북의 기술과 지하자원을 많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이며 동시에 재미동포 통일운동 진영의 숨은 인재이다. 그는 이북에 대해,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지지도한 장소들과 그곳 사정에 대해 아주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기자는 이에 대한 배경에 대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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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김수복선생 북녘 지식에 척척

“김정일위원장 현지지도 쫓아다녀”



[뉴욕=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미주동포 수행원 역할을 해 왔다고 말하면서 북녘사회 지식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척척 대답하는 뉴욕동포가 있어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 주인공은 뉴욕거주 김수복 선생(67)이다. 그는 특히 이북의 기술과 지하자원을 많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이며 동시에 재미동포 통일운동 진영의 숨은 인재이다.

<##IMAGE##> 그는 이북에 대해,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지지도한 장소들과 그곳 사정에 대해 아주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기자는 이에 대한 배경에 대해 질문했다.

“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년 반 동안 현지지도한 장소들을 거의 빠지지 않고 i아 다니면서 살펴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북녘 지도를 펴 놓고 현지지도한 장소들을 일일이 지도에 표식을 해 가면서 현지 시간보다 약 이틀 뒤에 김정일 위원장의 미국 수행원이 되어서 북의 여러가지 생산 공장과 농장 과수원 여러 건설 현장 그리고 군부대 등의 사정을 꼼꼼하게 고찰하며 연구해 왔다.

김수복 선생이 파악한 정보들 대부분은 북녘 인터네트 언론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북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1976년에 도미하여 살게 되었지만 미국에 오기전 1972년에 국제경상학회가 파견한 일본 관서대학 교환학생으로 한학기 공부하던 시기에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는데 그 때 오사카에서 재일총련, 한통련 등 단체들이 그 회담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오늘 날 이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미국와서는 1980년대부터 미국의 청년운동에 불을 붙였던 윤한봉 선생의 영향이 컸고, 그 다음에 남녘 감옥에 있다가 2000년 북으로 돌아간 홍문거 선생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을 도우면서 그들로부터 배운 믿음의 역사, 살인적 구타, 배고픔, 인격모멸을 수십년간 계속되는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도 조국과 지도자에 대한 믿음, 죽을 지언정 배신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 장기수분들에게 경외심과 가장 큰 존경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이북을 두번 방문한 것이 우리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돌이켜 본다.

그는 애국열사릉 고주몽릉 등을 참관하고, 교예단 같은 것들을 보고나면 뉴욕 5가(5th Avenue)같은 곳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주눅들며 살아온 것이 “그게 아니구나”라고 가슴이 확터지는 기분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를 포함하여 5,000년 단군문화가 다시 15,000년전의 홍산문화와 다 연결이 되고, 그것이 다시 내려와서 주체철학과 맥을 잇는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만주 시베리아를 혹독한 기상에서 독립을 위하여 달리던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적 긍지심과 자부심이 다시 내 핏속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그는 이북동포들이 1994년 7월8일 김일성 주석의 서거이후 특히 95년 큰물난리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설상가상으로 소련연방이 붕괴된 1991년 이후 사회주의 나라들과 교역활동이 완전 단절되고,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으로 겹쌓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남 동포들은 어떻게 했고, 해외동포들은 또 어떻게 했던가를 반문하면서 미안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북동포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고난의 행군길을 걸어 온 과거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를 떠 올리면서 먹을 것을 줄여가면서 이룩한 인공위성 로케트 종합기술과 핵억지력 기술 기계제작 기술 등 엄청난 기초 산업기술을 성취해 놓은 업적들을 꼽는 한편 축구장 7배 크기의 ‘희천련하기업’을 위시하여 리승기 박사가 창조한 2.8비날론 공장의 내력, 즉 늘어나면 줄지 않던 비날론을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 신축성 있는 비날론을 다시 만들어 놓은 그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김수복 선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6년간의 긴 고난의 행군을 끝내고 드디어 2009년 석탄화학 기술을 기반한 비날론 즉 주체섬유를 다시 폭포수 같이 만들어 내고, 다시 석탄에서 주체비료를 만들어 내고 풍부한 철광석과 석탄으로 콕크스 없이도 돌아가는 최신 공법의 제철기술을 이룩한 북녘동포들의 피눈물 어린 역사들을 소개했다.

그는 이어 2010년 10월 10만 함흥군중대회를 통해 주체섬유 생산 실적을 축하한 역사도 설명하면서 흥남비료공장과 남흥청년화학공장에서 생산한 비료로 2012년에는 드디어 비료를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양곡생산의 획기적 증대를 기대할 수 있음을 소개했고, 만수대 살림집 건설 정형에 대해서도 설명하면서 특히 중국의 장치투(장춘칠린투문) 개발계획과 러시아 극동의 개발 계획이 겹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물류문제로 이것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등장한 라선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혜안이 10년은 미리 바라보는 이유에 대해서도 술술 설명해 주었다.

또한 북녘 땅에 매장된 지하자원은 이미 남쪽에서 이미 인정하고 있는 대로 약 7조원이 매장되어 있는데 이 숫치는 원유를 제외한 숫자다. 철광석(쇠돌) 70억톤, 석탄 150억톤, 그리고 석회석 1000억톤 등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이미 중국이 투자해서 개발을 시작한 서한만 분지의 석유도 660억배럴로 유추한다. 국제 원유가가 한배럴에 $50-$100를 넘나드니 석유만해도 천문학적인 가치이다. 우주선 등에 이용되는 마그네샤와 희토류도 엄청난 량이 있다는 것이다. 핵발전소 등에 이용되는 우라늄 매장량도 호주에 115만톤 가량 있다고 하는데 이북에 4백만톤 이상(비공식적으로 2천6백만톤)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석탄은 현재 남에서 사용하는 양으로 따지면 몇천년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그는 남과 북이 손을 잡고 서로 협력하기만 하면 세계 강국이 될 수 있는데 그 길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표정이다. 로케트나 인공지구위성 발사체도 자체의 것으로 만들어 성공시켜 왔는데 이런 기술도 남북이 함께 이용하면 구태어 다른 나라 기술진을 들여올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40년 전 일본 오사까에 교환학생으로 재학할 때 경험한 뜨거운 남북화해협력 분위기가 다시 재현되었으면 좋겠다고 기원하기도 했다. 그는 또 자신이 6.15동부지역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남과 북이 6.15선언 정신과 10.4선언 정신으로 가면 이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은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한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속담과 같이 적당한 시기에 북에 가서 한 번 직접 둘러 보기를 권한다. 웹사이트는 남녘의 통일뉴스를 포함하여 자주민보, 민중의 소리 등을 권유하면서 이북의 인터네트 언론 ‘우리민족끼리’로 들어가 ‘조선중앙통신’이나 ‘로동신문’ 등을 읽으면 북녘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재작년에 앞장서서 만들었던 대풍국제투자구룹에 대해서도 연대하고 앞으로 북의 경제를 좀더 이해하고 배워서 북과 해외 굴지 기업과의 경제적 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찾아서 해보겠다”면서 그 선결 조건인 북미간에 평화협정을 맺어 양국간의 국교정상화가 이룩돼야 한다고 말하고, 이를 위하여 재미동포들이 이런 일에도 힘써야 된다고 강조한다.

김수복 선생은 1944년 7월 공주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을 나왔다. 1976년 4월 도미해서 36년째 미국에 거주하며 재정융자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지금 퀘이커교 신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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