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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해외 이산가족찾기회 선구자 고 전충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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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1-18 18:01 조회2,9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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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고 전충림 선생 부인 전순영 여사는 남편이 17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도 24시간 고인과 함께 살고 있다. 방들마다 고인의 동상, 흉상조각품, 사진들과 고인의 흔적들이 구석구석에 놓여 있다. 주고 받는 대화에서도 언제나 고인이 된 남편 전충림 선생을 내세운다. 이산가족 O기사업도 고인이 세상을 떠난 후 전순영 여사는 정학필 선생과 함께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운영하면서도 항상 남편의 사업으로 내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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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해외 이산가족찾기회 선구자 고 전충림 선생




<##IMAGE##> [토론토=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고 전충림 선생 부인 전순영 여사는 남편이 17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도 24시간 고인과 함께 살고 있다. 방들마다 고인의 동상, 흉상조각품, 사진들과 고인의 흔적들이 구석구석에 놓여 있다.

주고 받는 대화에서도 언제나 고인이 된 남편 전충림 선생을 내세운다. 이산가족 O기사업도 고인이 세상을 떠난 후 전순영 여사는 정학필 선생과 함께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운영하면서도 항상 남편의 사업으로 내 세운다.

고인과 전순영 여사는 생전에도 잉꼬부부로 널리 알려져 왔다. 반세기 가까이 부부생활 하면서도 한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이들 부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17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부인은 오로지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 24시간, 그 어느 순간도 잊어본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기자는 얼마전 평양에서 만나고 다시 카나다 토론토에서 만나 반가웠다. 평양에서의 애도기간에는 해외동포들 사이에 대화가 별로 없었다. 분위기 전체가 경건하였기 때문에 어느 장소를 가나 목소리도 낮춰야 했고, 걸음걸이도 신발 뒤축을 들고 조용조용 걸어야 할 정도로 북녘동포들이나 해외동포들 모두가 조용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IMAGE##> 전순영 여사와 고 전충림 선생은 1994년 7월8일 김일성 주석의 서거시에도 맨 먼저 평양을 방문했다. 그 때의 분위기와 이번 분위기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 때는 더운 여름철이었고, 지금은 추운 겨울이라는 것 밖에 다른 점은 없었다”고 회고하는 전순영 여사는 “그런데 이번 국상은 겨울철 함박눈 내리는 기후에 영결식이 진행되었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구차가 지나갈 때 노변에 눈을 치우기 위해 목도리와 외투들을 벗어 아스팔트 길에 깔아 놓는 북녘동포들의 지도자 사랑에 대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먼데서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한 김정일 위원장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 전순영 여사는 “지도자와 북 동포들과의 관계가 이렇게 끈끈하다는 것은 그 때나 이번의 국상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고 돌이켜 보았다.


전순영 여사 부부가 1962년 카나다로 이민왔으니까 어언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그리고 이민온지 11년만인 1973년부터 카나다 토론토에서 ‘뉴코리아 타임스’라는 민주화운동 지향 신문을 발행해 왔다. 이들 부부는 미국 뉴욕에서 발행하던 해외한민보(발행인 고 서정균)와 로스엔젤레스에서 발행하던 ‘신한민보(발행인 김운하)’와 함께 한국의 군사독재자들로부터는 미움을 받아 왔지만 국내외 애국동포들로부터는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IMAGE##> 고 전충림 선생은 그 과정에서 생이별하였던 누나 전일림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이 1976년이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979년 평양에서 열렸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취재를 위해 전충림 선생이 해외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방북의 길에 나섰다. 그 해 4월23일 누나와의 역사적인 상봉을 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박창인(조카)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카나다로 돌아와서 ‘해외이산가족 O기회’를 조직하고 1980년 1월에 5명의 이산가족들을 신청하여 3명이 이북의 혈육과 상봉하는 업적을 기록했다. 이 사업은 전충림 선생이 운명한 1995년 4월17일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때가지도 수천여명의 해외이산가족들이 북녘의 가족들을 찾아 상봉의 기쁨을 맞았다.

이 사업은 고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지속되었다. ‘뉴코리아 타임스’신문이 창간되던 처음부터 함께 일해 온 정학필 선생이 원자력관계 일을 하면서도 파트 타임으로 신문제작과 함께 이산가족O기회 일을 함께 해 왔다. 2007년 8월현재 1만여명의 이산가족들이 이 조직을 통하여 북녘의 가족을 찾아 상봉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에서는 또 해외동포들과 남녘동포들이 북녘 이산가족들에게 보내는 송금도 취급했다. 지금도 이산가족 상봉사업과 송금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그리고 이산가족찾기회를 운영하면서 “좋은 일을 한다”고 격려의 말을 들어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빨갱이’소리를 들어가면서 숱한 수난과 고통도 체험했다.

<##IMAGE##> 이들부부는 1991년 한민족연구회가 제정한 제4회 민족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선한사마리안 교회 및 미주동포북미주협회(NAKA)에서 이산가족O기 공로상을 받았고, 그리고 북부조국에서 제정한 ‘조국통일상’을 부부 모두 각각 수상한바 있었다.

전순영 여사는 특히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뉴코리아타임스를 제작해 왔었는데 그 것은 전적으로 정학필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과 미국의 선우학원 박사님을 비롯하여 김재준 목사님, 이승만 목사님의 적극적인 지원 덕택이었다”고 회상한다.

고 전충림 선생은 1923년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태어나 1995년 4월17일 카나다 토론토에서 별세했다. 그리고 전순영 여사는 1927년 5월22일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전충림 선생과 결혼, 1962년 카나다로 이민왔다. 전충림 선생과 전순영 여사는 모두 기독교 출신으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전 여사의 외할아버지 배창근 선생은 일제시대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 죽어야 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전순영 여사 부모들은 충청북도 청주를 떠나 중국 땅 용정으로 가게되었다. 부유했던 가정생활은 짧았다. 전 여사는 5살 때 어머니가 별세했고, 9살 때 아버지가 생을 달리하면서 고생길에 접어 들었다.

한편 고 전충림 선생의 선친 전택문 목사는 문천에서 살다가 일가친척들을 데리고 용정으로 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1947년 이들 가족은 목단강을 건너 국경지역인 도문으로 나와 잠시 살게 되었고, 부모를 잃고 오빠를 따라 도문에 온 전순영과 만나게 되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두분이 만나게 된 배경이며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가담하게 된 과정이었다.

*이산가족 O기에 관한 문의와 북녘에 송금에 관한 문의는 사무실
416-925-3259 혹은 416-22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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