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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민족통일 열사 한기명선생 조국통일의 길에서 영생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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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4-02-25 12:20 조회7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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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민족통일 열사 한기명선생 조국통일의 길에서 영생 하시라!


2024년 2월 21일 12시부터 유족들과 대구 시민단체 성원들, 서울의 전 범 남측본부 성원들, 양심수 후원회원 성원들이 한기명 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하괸식을 거행했다.

전 범민연 남측본부 경북연합 의장인 한기명선생은 남편인 이영락선생과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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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명 선생은 1929년 9월 12일 서울 창신동에서 2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은 1942년 동덕여고 학장시절부터 민주학생연맹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1948년부터 2..7구국투쟁과 5.10 단선투쟁 과정에서 2차에 걸처 구속되기도 했다.

1950년 인민군에 의한 해방 세상을 맞이했을 때 동대문구역당 선전부에서 활동하다가 9.28 전락적 후퇴를 맞아 10월5일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감옥살이 하다가 1953년 마산 감옥에서 3년만에 병으로 형집행정지로 출옥했으나 1년만에 다시 구속되어 서대문감옥에서 고 박정숙선생, 김선분선생을 만나 같이 감옥살이 하게 되었다.



1955년 형을 살고 출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6년에 이영락선생과 결혼하여 딸 3형제를 두었다.

1968년 남조선 해방전락당 건으로 남편의 10년간 옥바라지 하면서 온갖 장사를 다해 가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1978년에 10년의 형을 체우고 출옥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남편은 사망하고 말았다.



1990년에 조국통일 범연합 남측본부 결성과 함께 다시 통일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5년에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에 따라 대구경북 범민련 의 부회장부터 시작하여 의장까지 했으며 동시에 양심수 대구경북지구 공동의장까지 하는 등 재야단체 상임 또는 공동의장까지 하는등 다양한 중책을 맞고 자기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특히 범 경북 대구지구 의장으로서 몸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거르지 않고 참가하는 적극적인 정성을 다했던 것으로 유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월은 야속하게도 한기명선생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미제와 주구 윤석렬정권의 극악한 침략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조국정세 속에서 좀더 건강하게 살면서 뛰어난 임무가 절실히 필요한 때 드디어 2024년 2월 18일에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니 그 슬픔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후대에게 맡기고 선생이 못다 한 경험과 교훈은 후대들에게 항상 거을처럼 비쳐 줄 것이니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유족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맘을 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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