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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9. 불굴의 혁명투사 이현상선생 70주기를 맞이하여 회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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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6-20 10:54 조회2,0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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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9

불굴의 혁명투사인 이현상선생 70주기를 맞이하여 회고해 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이현상 선생

이현상선생은 1905년에 충남 금산군에서 400석지기 부농이며 공덕비가 세워질 만큼 명망가였던 리면배 부친과 김행정 모친 사이에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보통학교 때부터 댕기따고 다니면서 일제 선생을 때려 패는 반일 운동기질을 갖고 있었다.

고창고보를 거쳐 서울 중앙고보로 진학 중 중퇴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수업 기간에 1926년 6.10만세 운동과 1929년 광주 학생운동에도 참여하여 선두에서 투쟁을 벌리었다.

선생은 1925년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조선공산당이 불법화화 되어 총 12년 8개월의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선생은 서울 서대문 감옥에 살 때 항일 무장투쟁하다 서울 감옥에서 살고 있는 박달 동지와 리재순동지를 만나 김일성 장군님의 전민항쟁방침을 전해 듣고 한층 투쟁에 의욕을 불태운 끝에 21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 과정을 통에 얻은 결론은 “제 아무리 열성을 가지고 투쟁해도 옳은 로선에 입각하여 영도자의 령도를 받지 못하고 투쟁하는 것은 종이 위에 불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40여일을 쉰다음 지리산으로 들어가 학도병 기피자와 애국청년들을 모아 무장대오를 결성하여 친일 경찰서, 친일매국노, 악덕 지주들을 청산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미제와 리승만의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은 조선공산당 간부부 부장을 하다 삼당 합당 후도 간부부 부장을 했다.

선생은 1946년 초여름에 두 번째 북상하여 김일성장군으로부터

다시금 투쟁방향을 지시 받고 생의 마지막까지 지니게 될 한자루의 권총과 아내에게 선물해 줄 금시계를 선물로 받았다.

김일성 장군님과 생에 마지막 만남이 되었던 그 자리에서 4자녀의 장래 문제를 의탁할 것도 잊지 안았다.

그리하여 1948년 11월에 설한풍이 몰아치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5년동안 세계사에 다시 찾아 볼 수 없는 처절한 투쟁을 계속했던 것이다.

김일성장군님의 지시에 의하여 적후에서 유격전을 강화하여 적의 통신수단을 파괴하고 적의 참모부와 전투기자재를 분쇄하라는 주석님의 지시를 받들어 락동강시절이라 불리는 대격전을 벌리게 된 것이다.

인민군 주력부대가 적들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락동강도하작전에 많은 희생을보았으나 이현상부대는 락동강을 건너 미제주둔지를 습격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고, 1950년 9.28 일시적 후퇴를 당하여 후퇴하면서도 적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인적 물적 많은 피해를 주면서 후퇴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후퇴지를 향해서 북상하고 있는데 강원도 후평에서 6km떨어진 가려주마을에서 리승엽을 만나 북상하지않고 재 남진하기위해서 10일간 휴식을 취하는데 부대를 재편하여 다시 남진하게 되었었다. 이현상부대는 병단을 해체하고 재 4지대로서 남진하게 되었다. 이 때 중국 인민지원군부대가 참전한 전투에서 적들에 대한 섬멸적 타격을 주면서 남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리산을 향해 남진하면서 청주해방작전에서 청주감옥을 해방시켜 구속된 재소자들을 무조건 석방시켰다. 이중에 안창화동지는 끝까지 따라남아 영웅적으로 잘 싸웠다 한다.

이현상부대는 민주지산에 와서 일주간 머물면서 지위부대를 비롯한세 개 부대로 나누어 지리산을 향해 전투하면서 달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영웅적인 전략간부로서 총참모장인 박종화 동지의 희생을 보개 되었다.

그리하여 이현상부대는 박종화부대와 김지회 부대로 나누어 투쟁하다가 결국에는 김지회부대로 재편 되었다.

1951년 5월에 덕유산 토옥동 골작에서 6개도당 공동회의에서 남부군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1951년 11월 4일 당중앙 94호 결정에 의하여 남부군은 해체되고 지대로 재편 되었던 것아다.

이현상부대는 제4독립지대로서 지리산에 영웅적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1952년 2월 19일에 지리산 대성골에서 이현상부대와 경남도당이 대 참패를 당하였다.

이 때 부상당한동무들이 수류탄을 입에물고 자결함으로서 지도부를 구출해내는 결사옹위정신을 창조해 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경남도당은 남경호 위원장을 비롯한 도당 간부들이 총무과장 하나 남고 대 참패를 당하였던 것이다.

공세가 일시적으로 끝난 후 새로 경남도당을 건설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적들은 심지어 네이판탄까지 퍼부어 2000여명의 동지들을 숯덩이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당시 이현상부대는 뱀사골에서 대성골로 넘나 들 때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는가는 꽃대봉(지금은 토끼봉이라함)은 참꽃나무로 봉우리를 이루는데 1952년 4월5일에 이현상동지를 찾아가는데 꽃대봉 참꽃나무 가지가 거의 부러지지 않는 나무가 없었다는 것을 내가 직접 확인했던 것이다. 이만큼 꽃대봉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후 1952년 동기공세가 일시적을 끝난 후 한 개 부대를 조직하여 중앙과 선 연결을 위해 북상시켰으나 태백산맥을 넘지 못하고 모두 희생을 당하였던 것이다.

1953년 8월에 박헌영 리승엽도당들의 미제의 고용간첩이 적발되어 제 5지구당은 중앙과 선연결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체 조직위를 열어 자진 해산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현상동지를 비롯한 간부 5명이 자진 평당원으로 되어 53년 9월18일 지하로 내려가기 위하여 10여명이 지리산 빗점골 너들강을 건너다 적들의 매복에 걸려 왼골 산태골 절골에서 흐르는 합수부에서 희생을 당하였다.

당시 필자는 꽃대봉 (지금의 토끼봉)에 올라 새벽 정찰을 정찰을 하고 있는데 아침 해 뜰 무렵 빗점골에서 총소리가 바글비글 났었다. 그후에 안 일이지만 매복에 걸린 희생자 중 한사람이 살아나와 그 참상을 알게 되었다.

그때 이현상동지의 희생은 경남 연락원의 변절에 의한 것이었다.

적들은 시신을 사진 찍어 비행기로 삐라를 대대적으로 남조선의 산야에 뿌렸던 것이다. 결국 시신은 섬진강 모래사장에 화장해서 섬진강물에 뿌렸다고 한다.


이현상선생의 유품에는 두자루의 권총과그의 작은 수첩에는

“바람세찬 지리산에 서니 앞은 일망무제한데

검을 품고 남쪽 천리를 달렸구나

내 한시인들 조국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가슴엔 필승의 지략 심장엔 끓은 피 있노라”고 쓰여 있었다 한다

이현상선생에 대하여 조선에서는 1951년에 국기훈장 1급, 1952년 도애는 자유독립훈장 1급, 1953년에는 공화국 영웅칭호, 1990년에는 조국통일상 수여, 1968년에는 열사증 제1호가 수여, 1972년에는 70살로 세상을 떠난 최문기부인을 합장시켰다 한다.

진달래산천팀은 매년 빗점골 이현상 희생지를 찾아 추모제를 지내며 오는 9월 16일 70주기를 맞아 크게 지낼 예정이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후대에게 맡기고 조국통일의 길 위해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이번 6월 18일에는 전 농민회 총연맹 의장했던 배종렬선생이 건강이 좋지 않아 죽기전에 이현상 선생 희생지를 찾고 싶다 해서 전 한도숙 의장이 주선해서 농민회 동무들과 관심 있는 인사들이 찾을 예정이다.

2023년 6월 15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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