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5-27 12:03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①~⑨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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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본다①

"사실상 남북 총선을 통해 수립된 정부"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 이북사회와 이북 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이북의 지도자와 정치운영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면 의문이 풀린다. 일반적으로 남녘 동포들이나 자본주의 나라에서 살아 해외 동포들은 이북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왜냐하면 남녘 언론들이나 서방 언론들이 이북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이북을 폄하하고 왜곡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북의 실상을 말하는 것도 죄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할말도 제대로 못하고, 가고 싶어도 못가고, 연락하고 싶어도 못해 왔던 것이 우리 남녘사회의 현주소였다.

 

 

 

1930 630 가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진로> 밝힌 김일성 주석

 

오는99일은 이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탄생된 날이다. 북조선 정부가 수립된 날이라고 말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북이 남녘의 정부수립된 날보다 늦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승만 정부는 단독선거로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전락하여8.15해방정국을 맞아 국내 정치에 관여하려던 세력들을 모두 제거 또는 가로 막았다. 그래서 백범 김구도, 몽양 여운형도 반민족 세력에게 죽어야만 했다.

 

북조선은 사실상 남과 총선을 통하여 수립된 정부라고 말할 있다.(후에 자세해 설명) 이승만 정부는 북조선 정부를 가리켜 불법정부, 괴뢰정부라고 선전해 왔지만 실제적인 괴뢰정부와 불법정부는 이승만 정부 자체라고 말해야 그것이 역사를 왜곡하지 않고 정직하게 지적하는 말이 된다.

 

말이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미국이 정당한 이유없이 이라크를 대량살상무기(WMD) 있다고 허위보고를 내세워 하루 아침에 침략하고서 자기 하수인을 내세워 남의 나라 정치권력을 장악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사담 후세인 이라크의 대통령을 포함하여 그의 주요 각료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시킨 사건을 기억하면 이른바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과정을 쉽게 이해할 있을 것이다. 다음에 미군정이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우리 남한을 강점하고 자기 세력을 앞세워 지금까지 틀어쥐고 있는지 생각하면 과정을 다소 이해할 있을 것이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8.15해방이후 일제시대에 반일투쟁을 벌여 왔던 민족주의자들을 어떻게 대우하였고, 그리고 소위 친일분자들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과정의 기초지식이라도 갖는 사람이라면 한국정부가 어떻게 하여 탄생되었는지 이해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군통수권을 미군에 넘겨준 과정과 이후 지금까지의 남한 군사주권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를 곰곰하게 반추하여 보면 미군과 이승만 정부와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있을 것이다.

 

입은 삐둘어도 말은 바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의 하수인 정권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괴뢰정부라고 불리워야 대상은 북조선 정부가 아니라 한국정부가 된다는 말이다. 이승만 정권이 일제 임시정부에 관여했던 지도자들을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기초지식만 있어도 이승만 정권의 성격이 어떤 정치권력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1]북조선 정부수립의 역사적 배경

 

 

북조선의 역사는 요약하면 사회를 이끌어 지도자들의 민족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되어 왔다. 철학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민족대단결 사상이다. 항일투쟁 시기 전반에 걸쳐 강조되어 왔던 민족사상이다. 시기에 계기마다 강조되었던 것은 반일민족통일전선 노선이었다.

 

일제40년을 돌이켜 보면 역사의 구석 구석에는 파벌과 분파로 복잡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31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동족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통에 항일투쟁 역량이 제대로 묶어 없었다. 임시정부의 내부도45열되었다. 임정은 1920년대 중엽에는 참의부도 있었지만 여기에 화요파, 서울파, 북풍파, 엠엘파, 서상파 등으로 나뉘어 파벌싸움으로 골치를 섞혔다. 장준하 선생이 회고록돌베게 보아도 그가 일제 때에 임정에 들려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파벌싸움으로 날을 세우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은 그것이 하도 딱하여 종파, 파벌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목적으로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든 일화에서도 임정 내부의 갈등과 파벌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같은 상황에서 임정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으로는 일제를 타승하기 도저히 힘들다는 평가들이 민족주의 계열 내부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지향 청년들 사이에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바로 이런 정세에서10대의 어린 김일성 청년이 이끄는 진보계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내외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19261017 이른바 (타도제국주의 동맹)조직이 결성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청년들의 동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이들 청년들의 움직임에 대해 위협을 느끼면서 적대시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1929 가을에 일어한 소위, “왕청문 참사사건은 이념갈등과 종파투쟁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국민부(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통합체) 우두머리들이 소집한 남만총청대회에 공산주의 청년들 6명이 이들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끌려가 공산주의 선전을 한다는 이유로 이들 청년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국민부 우두머리는 공산주의자들과는 손잡을 없다는 것이다. 이만큼 당시에도 이념갈등이 심화되었던 시기였다.

 

이후 진보계 청년들은1930630일부터 72일까지 카륜에서 회의를 갖고 역사적인조선혁명의 진로 발표한다. 내용도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강조한 것이었다. 노선은 우리 민족사에서 민족대단결 사상 효시라고 말할 있다. 김일성 주석이 당시 발표한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원래 혁명은 인민대중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인 만큼 광범한 인민대중이 참가하지 않고서는 승리할 없습니다. 더우기 우리가 조선사람 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타승하고 전민족을 해방하려고 하는 만큼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하나로 굳게 결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자, 농민은 물론 종교인, 양심적인 민족자본가에 이르기까지 반일적인 사상을 가진 모든 세력을 반일의 기치하에 굳게 결속하여야 합니다.(김일성 저작집, 1 9~10)

 

김일성 주석은 이듬해인193112 명월구에서 열린 공청간부회의(겨울 명월구회의)에서 구체화했다. 그는 여기에서도 빈부와 귀천, 당파와 종교를 가리지 말고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애국역량을 무장투쟁에 총동원하자고 호소하면서총있는 사람은 총을 내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며,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여 전민족이 반일무장투쟁에 총궐기하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분은 이듬해인1932425별동대 내오고 이것을 확대재편성하여 반일인민유격대 조직하고 전민항전을 선포했다. 6월에는 통화지방에 있던 독립군 부대의 량세봉 부대와의 합작실현에 성공하였으나 워낙 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있는데다가 첩자들의 방해책동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량세봉은 일제의 간교한 음모에 의해 임종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항일유격대와 합작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로부터 4년후에 3백여명의 독립군 부대원들이 최윤구 사령의 인솔로 인민유격대에 편입하였다. 같은 사건은 류하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김일성 주석의 동지로 활동했던 최창걸이 국민부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주석은 동지를 잃은 분노를 삭이고 반일민족통일전선정신을 고수했고, 결과 성공적인 합작이 이뤄졌다.

 

한편 김일성 항일유격대는1932 좌경분자들의 극좌적인 민생단투쟁으로 심각한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민생단이란 1932 일제가 간도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며 조중 인민들 사이에 쐐기를 박기 위한 목적으로 조작한 간첩 모략단체였는데 이것을 반대한다고 나선 좌경분자들이 반민생단 극좌운동을 벌이면서 멀쩡한 사람들을 첩자라고 몰아 분열현상을 일으켰던 사건이 당시로서는 아주 심각한 현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 주석은20 초반에 들어온 시기인1936227일부터 33일까지 남호두 소자지하에서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혁명에서 주체확립을 위한 사업이 절실하다고 강조하면서 반일민족해방 투쟁의 새로운 단계에로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51일부터 보름동안 무송현 동강의 수림속에서 각계각층이 참석한 대표들을 묶어 전국적인 규모의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조직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인 조국광복회조직이다.(다음에 계속…)

2011.2.10

[기획]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본다②

 

조국광복회민족대단결의창조물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남녘 언론인들이나 지식인들, 그리고 자본주의 나라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은 이북의 실체를 접할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남녘의 어처구니 없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이북의 실상이 남녘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도 현실이었다. 그런가하면 이북에 대해서 정체성을 알고 있는 동포들도 알고 있는 지식을 마음놓고 이야기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북을 아는 사람이 사실을 말해도 친북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불이익을 당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한다. 그래서 <민족통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수립과정과 정체성을 알아보는 기획을 마련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이어 두번째 연재기획을 소개한다.

 

이북 정부 수립의 뿌리는 전통과 정통성이 우리 민족의 반외세 자주 투쟁의 정신이 어려있는 역사 깊은 항일투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뿌리는 우리 민족의 진보운동사에서 기둥이 되는 조선공산주의 청년운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사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초가 되었다.

 

 

전국규모의 각계 각층 대표들이 모여 조직된 조국광복회

 

 

항일투쟁시 백두밀림에서 최후공격전을 지시하는 김일성 주석(1945.8.9)

 

김일성 주석은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가장 강조하여 것은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이었다. 중에 가장 괄목할만한 조직이 조국광복회 였다. 조직은 1936 51일부터 보름동안 무송현 동강의 수림속에서 각계 각층의 대표들로 묶어진 전국적 규모의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 평가받는다.

 

조국광복회 창립선언문에서도 김일성 주석의민족대단결 철학 반영된다. 여기에서도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일심동체가 되어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총동원된다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김일성 주석의 의지가 발견된다. 창립 모임에 참석한 모든 대표들은 그의 민족해방 철학에 모두가 감동과 감격을 받고 그의 두리에 뭉친다.

 

이러한 조직이 결성되기 년전에 유사한 조직으로 우리가 많이 들어 <신간회> 있었으나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신간회 1927 2 조직되어 1931 5월까지 운영되어 왔으나 일제의 음해책동을 물리치고 조직을 능숙하게 운영해 중추적 지도역량이 부재한 탓으로 불행하게도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한 과정의 연장 선상에서 전국규모의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 부상한 조직이 바로 조국광복회이다.

 

또한 조국광복회 견인할 기관차로서반일인민유격대조선인민혁명군으로 조직되어 백두산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반일민족해방 투쟁의 사령부가 자리잡은 강력한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조직력 때문에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이듬해인 1937 6 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다. 소식은 당시 동아일보 뿐만아니라 내외 동포들의 입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소식을 들었던 당시의 우리 동포들은역시 김일성 장군하면서 기쁨으로 충만했다.

 

 

조국광복회역량 확대사업에 동분서주한 김정숙 항일여성투사

 

조국광복회 활동 영역과 역량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재생산 되었다. 김정숙 항일여성투사의 활약도 눈부시게 돋보였다. 장백현 도천리 지구와 17도구, 신파지구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꾸리고 신파지구를 발판으로 하여 장백현 일대에 반일청년동맹, 반일부녀회, 반일노인회, 반일소년회 계층별 조직을 확대하면서 일대의 대중을 포섭하여 '조국광복회' 끌어 들이기 위해 김정숙 항일여성투사는 동분서주하였다.

 

김정숙 투사는 풍산지구의 천도교인들을 반일운동에 포섭하는 한편 지난 시기신간회 깊이 참여하였다가 쉬고 있던 리주연(후에 공화국 내각 부수상 역임) 등을 만나 단천지구에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했고, 차호지역에서 리준 열사의 아들 리용(후에 공화국 내각 초대 도시경영상 역임) 설득하여 그가 운영해 오던반일회조국광복회 편입시켰고, 북청지역에서 1925 조선공산당 창립활동에 관여하였던 리영( 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 역임) 만나 사업하여 그를조국광복회 가입시켰고, 이어서 강원도, 평남도, 경상북도 일대에 이르기까지 조직망을 확대시켜 나가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함경남도 노조, 농조들을 수습하여조국광복회조직을 강화하는데 기여하면서 김일성 주석의조국광복회사업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조국광복회 이후에도 함경남도 대부분 지역과 강원도 철원, 평강, 평안북도의 후창, 동흥, 신의주, 평안남도의 평양, 남포, 경기도의 서울, 인천, 경남 부산 등지에 뿌리를 내렸고, 불길은 일본 땅에까지 번졌다. 조국광복회, 조직은 김일성 주석을 비롯하여 김정숙 항일여성투사 등이 종자를 묻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그야말로 민족대단결의 위대한 창조물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역량들에 기초하여1940년대에 들어 와서는 일제를 향해 전면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19437 함북 은덕군(경흥군) 록야리 곰산에서 열린 곰산회의 방침에 따라조국광복회 중심으로 전국 도처에서 반일 전면무장항쟁을 개시하도록 치침을 주었다. 그는 1945 6 간백산 밀영 군정간부회의에서 88 조선인민혁명군의 대일작전 개시를 선포하고, 89 최후 공격명령을 내렸다. 조선인민혁명군은조국광복회산하 모든 조직들을 동원하여 만주와 조선관 내를 맹렬하게 공격하여 일제를 괴멸하는데 혁혁한 승전고를 기록했다.

 

이러한 항일 투쟁을 통하여 축적한 역량이 있었기 김일성 주석은19458.15 이후 다른 외세에 의해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는 시기에 돌입하자 남과 각계 각층 대표들을 불러 통일정부를 호소하며 민족통일전선을 강조했다. 그는1946722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위원회에는 진보정당을 비롯한 4 정당과 13 대중단체 대표들이 6백만명의 회원들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모임에서 김일성 주석은 남녘에 거주하는 인사들에게 친히 편지를 보내어민족대단결 호소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대주의 진영은 이러한 통일정부를 반대하면서 미국 지배세력에 기생하여 통일정부를 거부하고 단독정부, 단독선거에 매달리면서 민족주의 세력들을 탄압하고 살해하는 반역행위들을 서슴치 않았다. 과정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은1947719 서울 한복판에서 미제국주의와 앞잡이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김일성 주석은 애국자 여운형 선생과 각별한 관계였다. ‘조국광복회 조직할 때에도 함께 활동하였지만 후에도 조국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던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민족자주 사상> <민족대단결 사상> 두분의 관계를 맺어 주었다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조국반도에는 민족세력대 반민족 세력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민족세력에는 진보사상, 민족사상, 반일사상을 가진 지도자들이 그리고 반민족 세력에는 이승만을 비롯한 소수의 친미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인물들과 과거 일제시대 친일사대주의를 지향하면서 우리 민족 성원들을 괴롭혀 왔던 인물들이 가담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와 함께 조국반도 남녘에는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간 반민족 세력이 미국의 지배세력에 편승하여 정치권력을 쥐게 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여기에 백범 김구 선생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민족주의 세력과 진보진영 세력들은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통일정부를 부르짖기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북녘의 김일성 주석은19484 역사적인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한다. (다음에 계속…)

[기획]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본다③

 

"남북연석회의 민족구심 역할 주동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북부조국은 우선 제도와 실천 양식이 독특하고 독창적이라고 말할 있다. 그래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남북관계 차원에서 보면남북연석회의등을 통해 민족구심 역할을 하여 것은 조금도 부정할 없다. 그러나 국제 진보사회 측면에서 보면 북조선은 사회주의를 하면서도 과거 소련, 러시아나, 중국과 다른 톡특하고 독창적인 사회주의를 운영하여 왔기 때문에 일반적인 다른 사회주의와 같은 선상에서 없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북 동포들 자신들도 일반적인 사회주의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식 사회주의> 또는 <주체사회주의>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북녘 동포들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운영하고 유지하고 있는 주체사회주의가 내용면에서 그리고 질적인 면에서 우월하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번째 기획연재로 이북 정부가 수립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함께 이북정부의 핵심이며 정점인 김일성 주석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하여 절차를 밟아 왔는가를 들여다 봄으로써 이북정부의 정체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이북정부 수립의 과정은 남한의 이승만 정부의 수립과정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은 김일성 주석은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이승만 세력과 미국은 그것을 반대하면서 단선과 단정을 고집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은<단선단정> 민족을 분열시킨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어떻게 해서든지 남과 북이 하나의 통일정부를 만들기를 염원한 나머지 마지막 순간까지 단선과 단정을 반대하면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소집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역사적인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항일의 혈로를 헤치며 조국해방투쟁을 벌여 김일성 주석

 

1948 419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북조선 로동당, 조선민주당, 천도교 청우당을 비롯하여 3 정당, 12 사회단체들과 남녘의 남로당, 근로인민당, 신진당, 청우당, 근로대중당, 민주한독당을 비롯한 31 정당, 사회단체를 포함하여 도합 56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1천만여 명을 대표하는 성원들) 69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야말로 민족대단결의 마당으로 개최되었다.

 

모임을 반대했던 세력은 오로지 미군정과 이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승만 정치세력 뿐이었다. 남북연석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정견과 신앙,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오로지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모인 애국자들이었다.

 

이들 남북연석회의 대표들은 특히421 속개된 2 회의에 나와 감동적인 연설을 김일성 주석에게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그의 연설 내용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김일성 저작집 4, 286)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망국적 단독선거를 단호히 거부하여야 합니다. 거족적 투쟁에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파와 종교의 소속, 정치적 견해를 가리지 말고 반드시 단결하여야 하겠습니다. 단결만이 우리의 승리를 보장할 있습니다. 우리는 회합에서 민족적 역량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며 민주주의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어떻게 투쟁하며 무엇을 것인가 하는 대책들을 반드시 세워야 하겠습니다.”

 

이승만 세력과 미군정의 단선단정 수립을 반대하고 조국의 자주적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민족대단결의 회합인 역사적인4 남북연석회의는 마침내 우리 민족사에서반미구국투쟁사로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고 423 막을 내렸다.

 

역사적인 회합은 첫째로 정치적으로 상반되는 지역 애국인사들과 정치세력이 민족공동의 요구와 이익에 기초하여 해방후 처음으로 민족대단결의 회합을 이뤄냈다는 , 둘째로 회합은 민족공동의 이념에 기초하여 북녘의 사회주의자와 남녘의 민족주의자 사이에 단합을 이뤄냈다는 , 그리고 셋째로 민족분열이냐, 통일이냐 하는 엄중한 시기에 민족운명 개척의 주체로서 겨레가 거족적인 단합을 이뤄 점은 우리 민족단결사에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회합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과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이 손을 잡은 것은 우리 민족 대단결사에 빛나는 역사를 아로새겼다. 김구 선생이 연북연공으로 전환한 것은 민족대단결사에서 획기적인 선례가 되었다. 김구 선생은 당시 평양에 머물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관찰한 일화들이 있다.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에 참관했다가 임시정부 시절 교육부장을 지냈던 이종익 선생이 학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았고, 량세봉을 비롯한 독립군 자녀들이 학원에 재학하고 있는 것도 알게되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도 요직에서 일하는 모습을 발견했고, 평양시내 곳곳의 공장들이 활기차게 돌아가고, 거리의 학생들이 명랑하고 씩씩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김구 선생은 평양을 떠나오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일어났던 일화가 있다. 김구 선생은 담화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지참하고 갔던 임시정부 국쇠(인장) 김일성 주석에게 건네주며이것은 김일성 장군이 소지하여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은 사양하면서저는 인민대중의 두터운 신임만 있으면 그만입니다라고 반응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같은 일화를 남기고 남녘으로 돌아 김구 선생은 자주적, 민주적 통일정부를 건설하기 위해 남녘에 와서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수를 촉구하며 성명전을 벌였다. 그는 한국독립당을 포함하여 민족자주연맹 80여개 단체로 이뤄진통일독립촉진회 결성하여단선단정 분쇄하고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을 벌이던 1949 626 미제국주의 세력과 이승만 정권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북조선 정부는 남북총선 실시후 수립

 

 

북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북총선거 실시후 그에 기초하여 수립된 것을 아는 남녘 동포들이나 해외동포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단선단정을 반대한 세력들을 탄압하고 살해하면서 모진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남녘에서는 비공개리에 서명형식으로 선거를 실시(1948 76일부터 20일까지)하여 1,080명의 인민대표를 뽑아 이들이 황해도 해주에 821 모여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비밀투표로 선출했다. 한편 북녘 동포들은 825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출했다.

 

  8.15 맞았지만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바람에 해방은 단지 23일뿐이었다. 그리고 분단된 어언 6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남녘에서 선거가 실시된 것은 기적 같았다. 미제국주의와 하수인 세력인 이승만 정권의 탄압속에서도 범민족연합 정권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선거는 북녘 유권자 총수의99%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참가하였고, 남녘에서는 유권자의77.5%(6,732,407)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참가하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러한 과정과 결과에 기초하여 수립되었다. 194899일로 결정된 과정은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가 1948 92 소집되었고, 여기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날자를 1948 99 결정했다. 북조선 정부수립은 이승만 정부가 날조에 의해 수립된 것에 비하면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남북이 참여한 선거에 기초하여 수립된 정부라고 말할 있다.

 

김일성 주석은 정부수립을 선포한 이후에도 분단된 조국을 통합하기 위해19495월초 민족적인 통일전선체 결성준비위원회 1차회의를 열것을 남녘의 제정당 사회단체들에게 호소하여 525 1차회의를 갖고 626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했다.

 

그런데 미국은194910 우리 문제를 또다시 유엔제4 총회에 상정시키고 유엔한국위원단의 권한을 군사분쟁과 관련된 감시, 보고의 책임을 지게하는데까지 확대하는 한편 일본기지에 있던 극동군의 역량을 강화하고 남한군대를 급격히 강화하여 8개사단 5개사단을 38도선에 배치하고 북진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입만 열면 북진통일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미군은 이미 1949 해동안 황해도 벽산지역으로부터 강원도 양양지역에 이르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무려 1,860회에 걸쳐 무장 침습을 강행한 것으로 집계될 정도로 정세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남북을 통합하기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195067 평양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를 통해 <평화적 조국통일방책 추진에 관한 호소문> 발표하는 한편 85일부터 8일사이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적 입법기관을 창설하며 8.15해방 5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1차회의를 서울에서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주석은 이어 619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결정으로 <평화적 조국통일 추진에 관하여>라는 호소문을 발표하며 남북입법기관의 단일기구를 제언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정부는 결국 평화제안을 거부하고 말았다.(다음에 계속…)

 

[기획]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본다④

"친일파 청산하고 민족정기 살려 민족구심이다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본다는 기획이 나가자 <민족통신>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며 지속적으로 공갈과 협박으로 괴롭히는 사건도 일어났다. 어떤 세력이 무엇 때문에 이런 유치한 행위들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이 판단해 주기 바란다.

 

 

 

일제때 반일투쟁가들, 친일분자들 서로 갈등

 

사실상 이승만 세력은 반역의 길을 걸었다. 친일매국노들을 폭로하고 이들을 청산하기 위해 조직된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약칭 반민특위) 1948 8 남녘 국회에 구성되었고, 이어 9 특별위원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통과시켰으나 이승만 세력에 의해 폭력적 방법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남녘 정부의 본질과 성격이 드러났다. 이에 비해 이북 정부의 본질과 성격은 친일세력을 청산한 측면에서 그리고 남북연석회의에서<민족대단결> 강조하는 한편 참석대표자들에게 약속한대로 소련군을 그해 1948년에 철수시키고 이후 지금까지 대내외 정책에서 일관적으로 보여준 입장과 자세들에서도 정체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북 정부는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살려 민족구심이라고 말할 있다.

 

그런데 친일세력으로 구성된 이승만 세력은 미국지배세력을 등에 업고 출발하여 정권이 남녘 민중들에 의해 타도되기까지 자행하였던 반민족 행위와 반역의 횡포들은 이루 말할 없었다.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의 암살 뿐만 아니라19581 이른바진보당 사건 조작하여 죽산 조봉암을 사형에 처했고, 남녘의 군사주권(군통수권) 통채로 미군에 넘겨주는 반민족 행위를 포함하여 수많은 애국자들을 폭력으로 탄압했고, 이북정부와 지도자들을 중상하고 모략하면서 사실을 오도했고, 남녘의 애국자들이 평화통일을 말하면 이들을 빨갱이로, 간첩으로 탄압한 것이 그의 정치행로였다.

 

 

 

반민특위 구성되어 초기에 친일분자들 체포된 모습

 

우리는 이승만 세력이 남녘 내부의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살해한 행위에 대한 반역적 사건에 대해서도 분노하지만 이와함께 군통수권을 미군에 통채로 넘겨준 사대매국 행위에 대해서도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노래했고, 과정에서 코리아 전쟁이 발생했다.

 

당시 미군과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일으킨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북의 남침이라고 선전하면서 이북 정부를 호전적이라고만 중상하고 모략해 왔다. 심지어는 국제사회 전문가들인 부르스 커밍스 교수(‘The Origin of Korea War’ 저자:시카고 대학) 포함하여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I.F Stone(The Hidden Story of Korea War 저자), 조영전 공저로 출판된중국인이 코리아 전쟁’(윤영무 번역, 한백사 1991 615 출판), 이도영의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쏴라’(자주민보 2000 5.18 발행), 북의 차준봉 박사가 펴낸누가 조선전쟁을 일으켰는가’(사회과학출판사 1993 발행)등도 같은 사실들을 뒷받침 한다.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약칭 반민특위) 폭력적 와해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약칭 반민특위) 미군정에 의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7 친일잔재청산을 위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제정한 있다. 그러나 미군정은 법안이 미군정의 동맹세력인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정치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준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남한 정부수립 후로 넘어가게 되었다.

 

 

 

반민특위 구성후 초기에 친일분자 재판모습

 

남한 국회는 처음에는 남한 민중들의 요구를 의식하여19488 헌법 101조에 의거하여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되고, 이어9 특별위원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일단 통과시켰다. 법에 의하면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 독립운동가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 이상의 징역, 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10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형식에 불과했다.

 

일단 반민특위는194915 중앙청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8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자 이승만은 담화를 통하여 견제하기 시작했는데, 요지는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되며 안보상황이 위급한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장(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 김병로는 반민특위활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계속 비협조로 일관하더니 2 24 반민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반민법 법률개정안을 2 39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결과는 부결되었으며, 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기간 동안 특위의 활동성과는 취급건수 682 기소 221, 재판부의 판결건수 40건으로, 체형은 고작 14명에 그쳤다. 실제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으며,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결국 미국과 이승만 세력은 폭력을 자행해서라도 친일파 청산을 가로막아야 한다는 심보였다. 결과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사건과6•6경찰의 특위습격사건을 겪으면서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국회프락치사건이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의원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위축시켰다면, 특위 산하 특경대에 대한 경찰의 습격은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써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북 동포들이1946 친일매국노들을 심판하라고 촉구하는 시위

 

이승만 세력과 미국은 남녘 민심과는 거리가 행위로 나갔다. 8•15광복 직후 무엇보다도 신속히 친일파를 척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초기에 기회를 놓쳤고, 이후 미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수립하여 미국의 패권주의를 확장하기 위하여 이북 사회주의세력에 대항한다는 구실로 친일파를 등용하여 이용하려고 반민특위 활동을 반대했다. 따라서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의 국익과 배치된다는 논리에 의해 진전되지 못했다. 이러한 논리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통치구조를 부활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어 이승만 정권을 하수세력으로 세워 미군정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이어받게 하였고, 친일파를 기용하여 이승만의 정권장악을 도모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도록 공작했다. 이를 위하여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친일세력이 후에도 남한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남한 민족주의의 좌절과 단절을 맛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북 정부의 정체성은 민족정기를 살려 민족구심이다

 

 

김일성 주석은 코리아 전쟁 직전에도 그리고 직후에도평화통일 일관적으로 호소해 왔다. 1950 619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으로평화적 조국통일 추진에 관하여라는 호소문을 통해 남북입법기구의 단일화를 촉구했고, 코리아전쟁의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인 1954 1030 최고인민회의 1 8차회의에서 평화통일문제를 위해 정당, 단체 각계 각층 대표자 연석회의 혹은 최고입법기구의 합동회의 소집을 위한 호소문을 채택하도록 했다. 김일성 주석은 다음 해인 1955 3 다시금 각종 군사조약의 철폐와 남북무력축소, 평화통일 문제를 위한 토의협상을 제기했고, 다음해인 1956 4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3차대회 보고에서는 이승만 파쇼정권에 반대하며 전체 애국역량을 망라한 통일전선 실현을 위한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제기했다.

 

당시 남녘에는 처음으로 이승만과 노선을 달리한 진보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조봉암을 위원장으로 진보정당이1956 1110 출현한다. 세력은 외세의존적인유엔감시하의 총선거안 거부하면서 자주적인 입장과 자세를 보였다. 같은 바람은 남녘 대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봉암 진보정당 후보는 미국과 이승만 세력이 모든것을 틀어잡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승만 후보를 위협할 득표(2백만표 이상 획득) 얻어 세상을 놀라게 한바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인 역할은 지속되지 못하고 이승만 세력과 미국의 음모에 의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고 말았다. 누명은 반세기가 넘어서야 무죄로 되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가 점철되어 왔다.

 

김일성 주석은1960 이승만 정권이3.15부정선거에 의해 일어난4.19의거로 붕괴되자 같은 8.15해방15주년을 맞아 시종일관 자주적 평화통일의 기본방침을 재천명하며 과도기적 대책으로 남과 북의 연방제를 실시할데 대하여 제안하는 이번에는 주로 경제적인 문화발전을 공동적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했다.(김일성 저작집 14 243~244)

 

우리가 말하는 연방제는 당분간 남북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이듬해인19619 소집된 조선로동당 4차대회에서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민족대단결노선을 보다 구체화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남녘의 당국은 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남녘의 움직임은19708.15경축사를 통해 그리고19714 남녘의 대선기간을 통해평화통일 구상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540만표를 득표하여 90만표 차이로 박정희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을 시기이다. 김대중은비정치적 문화교류 거치는평화통일의 실현등을 내용으로 하는 3단계 통일구상 놓았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시기인1971413 최고인민회의 4 5차회의에서 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촉진시킬데 대하여 토의하고 8개항목의 구국방안을 제기했다. 중국은 미국과 화해 움직임을 보였고, 1971 715 리차드 닉슨 미국대통령의 중국방문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즈음 -미핑퐁외교가 전개되었고,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문화교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갔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다음과 같이 남북관계 입장을 발표했다.(김일성 저작집 26 232)

 

우리는 남조선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개별적인 인사들과 아무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이어197186 연설을 통해 과거불문하고 남북협상 방침을 밝히자 남북당사자간 협상의 새로운 장이 마련된다. 그의 연설이 발표된 6일만에 남녘 당국이 응답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래서 1971 812 남녘 적십자회담제의 형식으로 응답했고, 1972 53 남북당국자간 비밀접촉에서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 합의되었다.(김일성 저작집 27 165)

 

나는 우리나라 통일문제는 반드시 외세의 간섭이 없이 자주적으로,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 원칙에서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여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결과 남과 북은197274 같은 시간에 동시적으로남북공동성명 발표했다. 이에 따라 내외 동포사회에는 거대한 통일운동 물결이 파도쳤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반대하는 미국의 음모가 다시 진행되었다. 워싱턴 디씨의 방해공작은 이듬해인 1973 623일에 나타났다. 느닷없이 남북의 유엔동시가입 문제가 남녘 당국에 의해 발표되었다. 발표는 소위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7.4남북공동성명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같은 배신적 성명이 발표된 시간만에 김일성 주석은 조국통일 5대방침 통해 단일한 국호에 의해 남북이 하나의 나라로 유엔게 가입하자고 제언한다.(다음에 계속…)

 

 

[기획]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본다⑤

 

《조국통일 3대헌장》정립한 자주적 통일지향 세력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보는 기획연재는 일부 보수진영의 추한 반응들도 있었지만 의외로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되었다고 말하는 감사의 표시들이었다. 내외 동포들 가운데 상당수는 남북관계가 수구족벌언론들에 의하여 번번히 북에 의해 중단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연재기획을 통하여 역사의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반응들이다. 지난 주에 나타난 반민족, 반평화, 반통일 진영의 욕지거리와 공갈협박의 반응들과는 대조를 이뤘다. 이번에는 다섯번째 연재기획으로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비롯하여조국통일 3대원칙’,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 한데로 정립한 《조국통일 3대헌장》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방안은 이북정부가 어떤 통일을 말하며 통일의 내용들이 어떠한 것인가를 진단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이북의 통일정책과 정체성을 이해할 있다.

 

 

김정일 위원장,《조국통일 3대헌장》정립

 

 

김정일 위원장은199784 그의 노작《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에서 조국통일3대원칙(1972.7.4)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1993.4.6),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1980.10.10) 조국통일의 3대헌장으로 정립한다고 발표해 세가지 문건 내용을 남북통일을 위한 주요지표로 설정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김정일 위원장은199784 그의 노작《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에서 조국통일3대원칙(1972.7.4)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1993.4.6),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1980.10.10) 조국통일의 3대헌장으로 정립 

 

《조국통일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은 김일성동지께서 위대한 주체사상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과정에 이룩하신 고귀한 경험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의 근본원칙과 방도들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조국통일의3대헌장이다. 조국통일3대헌장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생명으로 여기는 민족자주정신으로 일관되여있으며 북과 남의 화해와 전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여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는 숭고한 조국애와 민족애를 구현하고있다. 3대헌장은 북과 남에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오래동안 존재하여온 우리 나라의 현실적조건과 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의 한결같은 지향에 맞게 하루빨리 조국통일을 실현할수 있는 가장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인 방도를 밝혀주고있다.

 

여기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정립한조국통일3대헌장가운데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1980.10.10) 내용을 아래에 별도로 전재하여 소개한다. 이것은 이북 정부가 어떠한 통일을 원하는 것인가를 있고, 그리고 어떤 통일정부로 시작하여야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있는 대목이기 때문에 별도 수록한 내용을 독자여러분에게 필독을 권유한다.

 

왜냐하면 이것은"남북갈등과 통일비용 없이 통일할 있는 가장 합리적 "(노길남 박사 평가)으로 진단되고 있다. 이러한 구상은 이미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 사이에 이뤄진 6.15남북공동선언 2항에 언급되어 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1980.10.10)

 

 

김일성 주석은198010 《조선로동당 6차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에서 역사적인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 제시했다. 이것을 발표하게 취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김일성 저작집 35 347)

 

《우리 당은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통일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방도는 북과 남에 있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북과 남이 연합하여 하나의 연방국가를 형성하는것이라고 인정합니다.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우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체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것을 주장합니다. 연방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북과 남의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대표들로 최고민족연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연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북과 남의 지역정부들을 지도하며 연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하도록 하는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최고민족연방회의와 상임기구인 연방상설위원회는 연방국가의 통일정부로서 전민족의 단결, 합작, 통일의 염원에 맞게 공정한 원칙에서 정치문제와 조국방위문제, 대외관계문제를 비롯하여 나라와 민족의 전반적이익과 관계되는 공동의 문제들을 토의결정하며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모든 분야에서 북과 남사이의 단결과 합작을 실현하여야 할것입니다. 연방국가의 통일정부는 북과 남에 있는 사회제도와 행정조직들, 각당, 각파, 각계각층의 의사를 존중히 여기며 어느 한쪽이 다른쪽에 자기 의사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것입니다.

 

《북과 남의 지역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지도밑에 전민족의 근본리익과 요구에 맞는 범위에서 독자적인 정책을 실시하며 모든 분야에서 북과 남사이의 차이를 줄이고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것입니다. 연방국가의 국호는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나라 통일국가의 이름을 살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북과 남의 공통한 정치이념을 반영하여 고려민주련방공화국으로 하는것이 좋을 것입니다.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쁠럭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국가로 되여야 합니다.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있는 북과 남의 지역을 하나의 연방국가로 통일하는 조건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 중립국가로 되는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것입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은 우리 나라의 영토와 전민족을 포괄하는 통일국가로서 전체 조선인민의 근본이익과 요구에 맞는 정책을 실시하여야 할것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그래서1970년대 남북 당국이 합의한“7.4남북공동성명 80년대 김일성 주석이 발표한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그리고 90년대 김일성 주석이 발표한 민족 대단결 10강령 《조국통일 3대헌장》으로 정립한다고 천명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통일염원이 담긴 뜻을 유훈으로 받아 안고 철저히 관철할 것을 내외에 선언했다.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김일성 주석은199346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발표하면서 민족대단결의 원칙과 방향을 천명했다. 당시 강조한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 반세기에 걸치는 분단과 대결의 역사를 끝장내고 조국을 통일하는것은 민족의 한결같은 요구이며 의지이다.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전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무산자이건 유산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나가야 한다.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모두다 나라의 통일과 통일된 조국의 융성번영을 위하여 특색있는 기여를 함으로써 민족분열을 끝장내고 통일된7천만겨레의 존엄과 영예를 세계에 떨쳐야 한다.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요점은 (1)전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2)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단결하여야 한다. (3)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하여야 한다. (4)동족사이에 분열과 대결을 조장시키는 일체 정쟁을 중지하고 단결하여야 한다. (5)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같이 가시고 서로 신뢰하고 단합하여야 한다.(6)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며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고 조국통일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나가야 한다. (7)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재부를 보호하여야 하며 그것을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데 리롭게 리용하는것을 장려하여야 한다. (8)접촉, 내왕, 대화를 통하여 전민족이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며 단합하여야 한다.(9)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북과 , 해외의 전민족이 서로 연대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10)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10 강령을 담은 전체 내용을 읽어보면 과거에 어떤 죄를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가진자나 갖지 않은 자나 막론하고, 보수나 진보나 모두가 함께 서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함께 단결하여 혜택을 받을 있는 방도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북 정부 당국자들이나 이북 동포들은 해외동포들에게도 혈육의 정을 갖고 임해 왔다. 이북동포들은 특히 해외동포들이 조국통일운동에 나선다면 모든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극진한 자세로 교류한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북과 해외동포들과의 교류가 빈번했다. 비엔나에서, 헬싱키에서, 독일에서, 중국에서 열린 북과 해외동포들의 대화모임은 어느때보다 활발한 시기였다.(다음에 계속…)

 

[기획]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본다⑥

 

1980년대는 북과 해외동포간 연대활동 활발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남녘 동포들과 자본주의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은 남녘 족벌언론들과 미국을 비롯한 일본 일부 서방언론들의 왜곡된 보도에 영향을 받아 심지어는 이북을 뿔달린 사람들이 사는 , 혹은 미개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원인은 첫째 남녘과 미국 당국의 보수세력들이 건네주는 허위정보들을 어떤 검증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사실을 굴절시키는 한편 이북의 형상을 깎아 내린 보도자료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족통신> 창간이후 지금까지 이북제대로 알리는 정보들을 수집하여 보도해 왔다. 이번에는 여섯번째 연재기획으로 북조선의 1980년대와 1990년대 통일정책과 당시의 내외 상황을 통하여 이북의 정체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1984 1215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5 북과 해외동포대회> 기념촬영

 

1980년대에 들어서자 남녘 동포들과 해외동포들은 남한의 정치세력이 반민주, 반평화, 반통일 세력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확인하는 계기를 갖는다. 분기점이 바로 5.18광주민중항쟁이다. 때부터 우리 민족사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시대가 펼쳐진다. 5.18항쟁의 진짜 주범은 남한의 군사주권을 틀어쥐고 있는 미국의 지배세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청년학생들은 양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군사정권과 함께 미국 제국주의세력을 향해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한다. 광주문화원, 부산문화원 등이 학생들에 의해 불탔다. 청년학생들은 열띤 시위를 벌이면서양키 고홈 외쳤다. 그리고 1960 4.19의거시에 나타났던 구호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라는 구호도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기에는 시민항쟁도 일어났고,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라고 소리 높이는 노동운동도 일어났다. 1989년에는 문익환 목사, 임수경 학생, 문규현 신부 해외동포들이 집권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을 향해 들어가 조국통일 문제를 토의하면서조국은 하나다 외쳤다. 결과 1990 8.15해방 45주년을 맞아 평양에서 역사적인 1 범민족대회가 열렸고, 자리에서 남북 해외동포들이 함께하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기틀이 마련된다. 이러한 통일물결도 역시 이북 동포들이 주동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당시의 남한 당국도 지금의 이명박 정권처럼 이러한 통일열기를 가로 막으며 애국자들을 탄압했다.

 

이북의 지도자들과 당국은 언제나 조국통일 정책에 대해서 일관성을 보였다. 민족의 자주 입장을 비롯하여 평화통일의 입장, 민족대단결의 입장을 철투철미하게 견지하여 것이 이북정부의 통일정책 기조였다. 이러한 이북 정부의 통일정책은8.15해방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빗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동안 남녘의 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 운동을 오던 해외동포들은 본격적으로 북녘에 관심을 갖고 이북동포들과 교류를 본격화했다. 이북 당국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북 정부 통일정책과 해외동포간의 교류강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남 정부 당국이 조국통일에 대한 관심이 없을 뿐만아니라 남녘 통일운동 세력을 탄압하자 남녘과의 교류 통일관계 사업을 진전할 없었던 조건에서 이북 정부 당국은 해외동포 기독자들과 학자 통일운동 세력과 적극적인 교류 연대활동을 활성화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대해 미국, 유럽, 카나다 동포 기독자들과 학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교류사업에 응했다. 결과 1980년대 10 동안 해외와 평양에서 공식적인 북과 해외동포간의 통일대회가 평균 1년에 한번 정도 오스트리아, 중국, 핀란드, 독일, 그리고 평양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주요 행사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결과 11 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 모임 1981 11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 하델스톨프 쉬바이쳐 하우스에서 개최되었다. 북측에서는 허정숙, 려연구, 전금철, 김경화, 안병수, 렴국열, 김득룡, 고기준, 김옥선(인민배우) 무려 30여명이 참가했고, 미주측에서는 선우학원을 비롯하여 강위조, 김운하, 김충자, 이선  

 

비엔나에서 북과 해외동포 대회를 갖는 모습

 

, 전순태, 전충림, 최덕신, 최도식, 최정열, 최홍희, 강원진, 폴장, 그리고 유럽측에서 이화선, 이영빈, 김순환, 임민식 수명이 참가했다. 행사에서 당시 서독에서 참가한 이영빈 목사는조국통일을 위한 기독자의 과제 대해, 그리고 북측에서 참가한 전금철 박사는고려연방제에 대하여라는 주제를 각각 발표했다.(미주의 신한민보와 카나다의 뉴코리아타임스가 보도: “미주동포 민족운동100년사”-선우학원, 노길남, 윤길상 공저-134~156, 2009 1215 일월서각 출판, “미주동포들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차종환, 이봉수, 박상원 공저 111~122 나산출판사 2004 51 출판)

 

2 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 모임은 1982 123~5 필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개최되었다. 북측에서는 조선기독교연맹 부위원장 김득룡을 위시하여 고기준, 리성봉, 림현달, 김운봉, 김성문 통일신보사 부주필 기독자들과 허정숙, 양형섭, 김경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한종순 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사회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33, 미주측에서는 김성락, 차상달, 선우학원, 노의선, 홍동근, 강위조, 송석중, 최익환, 강광석, 양은식, 최정렬, 김동수, 김운하, 노성걸, 국영길, 예정웅, 최진환, 이세방, 노영희, 폴장, 오봉도, 허응명, 김충자, 유럽측에서 이영빈, 김순환, 최기환, 임민식, 강무의, 김영희, 박경희, 김광호, 유은진, 박성옥, 김복순, 이승자, 선경석, 임원섭, 조명훈, 이요한, 오석근, 안상훈, 그리고 카나다 측에서 최홍희, 전충림, 김순영, 김현두, 정해수, 한삼수, 김태정, 신오식, 박정태 최홍희, 최덕신, 류미영 남북 해외동포 1백여명이 참석했다. 행사기간 최익환 박사는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김대중 선생의 석방 대한 강연이 있었고, 홍동근 목사가 평양에 교회건립을 제언하기도 했다. 결과 1988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이북정부 수립기념절인 9.9절에 건립되기도 했다.

 

 

 

1983 7 평양에서 3 북과 해외동포학자간 모임에 참석한 대표들 일부가 기념촬영

 

다음 해인198375일부터 15일까지 방북기간중 12일과 13 양일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3 모임이 열렸는데 모임 명칭은북과 해외동포 학자간 모임으로 진행되었다. 해외측 학자들은 김동수, 김기항, 선우학원, 송석중, 양은식, 최익환, 그리고 카나다에서 전충림, 김순영 등이 북측에서는 전금철, 전영률, 진영걸, 손종철, 김성원, 차인동 등이 각각 참석했다. 행사기간 김동수 박사가 <평화와 통일>, 양은식 박사가, , 3각군사동맹”, 송석중 박사가통일과 지성인의 과제”, 김성원 교수가통일의 장애물”, 전금철 박사가조국통일의 기본방도”, 진영걸 교수가주체사상과 민족문제 대해 각각 발표했다. 대회가 끝나고 해외동포 학자들은 참석자들이 수필들을 모아 방북기를 출판하기로 합의하고분단을 뛰어넘어 1984 419일자로 고려연구소에서 출판했다.

 

4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4 615~18 중국 베이징 국제구락부에서 열렸다. 북측에서는 전금철, 최장룡, 우달호, 리수근, 한인호, 전영률, 김광식, 손종철, 김성률, 차인덕, 안병수 15, 해외측에서는 선우학원, 양은식, 김동수, 송석중, 백숙자, 최익환, 노성걸, 장정문, 2세운동가 17명이 각각 참석했다. 행사기간중 전금철의 “ 3자회담에 대하여”, 선우학원의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김광식의미국의 핵전쟁 정책의 정치적 목적에 대한 분석”, 노성걸의평화와 평화적 통일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여건”, 우달호의대화와 협상의 필요성”, 리수근의자주성과 전쟁과의 관계 대해 각각 발제하고 토론했다.

 

5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4 1213~16 오스트리아 비엔나 엘도라도 호텔에서 열렸다. 북측에서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김룡중, 고기준, 김운봉 35, 해외측에서는 선우학원, 양은식, 홍동근, 강광석, 김동수, 김기항,  

 

해외에서 열린 북과 해외동포간의 대화 모임

 

노의선, 송석중, 백숙자, 최익환, 노성걸, 신성려, 박기식, 최덕신, 최진환, 최장길, (유럽)에서 공광덕, 강문의, 김순환, 선경석, 윤무근, 오대석, 오석근, 이영빈, 조병옥, 최기환, (카나다)에서 김태정, 박정태, 임훈재, 전충림, 최홍희 등이 각각 참석했다. 행사에는 려연구가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역량 연합에 대하여”, 강광석의핵전쟁의 위험을 막기 위하여”, 전금철의 “3자회담 실현으로 자주적 평화통일 촉진에 대하여”, 선우학원의 ,, 3각동맹 저지를 위하여등을 각각 발표하고 토론했다.

 

6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5 1214~16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렸다. 북측에서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5, 해외측에서는 미주에서 강위조, 노성걸, 선우학원, 양은식, 차상달, 유럽에서 강문의, 공광덕, 박성옥, 오대석, 이영빈 등이 각각 참석하여조국통일을 위한 동포사이의 광범한 연대의식 강화”, “자주적 평화통일 촉진 대한 문제를 토의했다.

 

 

 

1980 일본 도꾜서 열린 2 민족통일 심포지움

 

7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6 1018~19 양일 동안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렸다. 북측에서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류호준 8, 해외측에서는 미주와 카나다에서 강광석, 김광훈, 전순태, 김동수, 김수영, 정귀근, 노성걸, 선우학원, 송석중, 양은식, 전충림, 차상달, 최익환, 최장길, 홍동근, (유럽측)에서 강문희, 김순환, 이영빈, 오대석 4명이 각각 참석했다. 행사는 류호준의조선반도를 비핵지대,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내외 동포들의 과업에 대하여”, 선우학원의남한에서의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과 우리의 과제 발표하고 토론했다.

 

8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한해 건너 다음 해인 1988 715~17 핀란드 수고 헬싱키에서 열렸는데 주제는주체사상과 조국통일에 대하여 진행되었다. 북측에서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박승덕, 고기준 10, 해외측에서는 미주에서 김동수, 강위조, 강은홍, 김광훈, 김정식, 김태종, 김현환, 김영숙, 김수영, 고정옥, 선우학원, 서정자, 신성려, 양은식, 전충림, 전순태, 조덕천, 차상달, 최익환, 최정열, 최장길, 홍동근, 유럽에서 이영빈, 김순환 수명이 각각 참석했다. 행사내용은 전금철의주체사상과 민족통일”, 선우학원의주체사상과 민족문제”, 박승덕의주체사상의 원리”, 양은식의주체사상과 의식화 문제”, 김동수의주체사상에 대한 이해 대해 각각 발제하고 토론했다.

 

9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9 79조국통일 촉진대회형식으로 남과 , 해외동포들이 대거 참석하여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특히 13 세계청년축전에 참가한 해외동포와 평양시민들 1만여명, 중에 일본, 미국, 유럽,   

 

1986 627 로스엔젤레스서 열린 9 민족통일 심포지움

 

, 소련,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등에서 참가한 해외동포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종의 통일부흥회를 방불케 했다. 북측에서는 리종옥 부주석, 허담 위원장, 리계백 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최덕신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윤기복 위원장, 고위급 간부들이 대거 참석했고, 해외측에서는 일본 총련의 한덕수 의장을 포함하여 서만술 부의장, 카나다의 최홍희 총재, 미국의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에서 차상달, 선우학원, 홍동근, 양은식, 독일기통조직에서 이영빈, 중국에서 백성현, 황영두, 오상현, 최영희, 그리고 소련에서 채종만, 양영자, 최덕진, 김성 등이 참석하여 주석단에 자리를 함께 했다. 대회는 허담의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내외 동포들의 과업”, 선우학원의조국통일을 위한 평화통일을 촉진하자”, 서만술의조국통일 3대원칙에 기초하여 연방제로 통일하자”, 리문준의두개 조선책동을 규탄하자”, 이영빈의민족대단결로 조국통일 이룩하자”, 채종만의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단결하자등이 발표되었다.

 

10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91 131 독일 후랑크후르트 아놀즈하인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열렸다. 북측에서는 전금철, 리성봉, 김운봉, 조길남, 정영춘 수명, 해외측에서는 미주에서 강위조, 고마태오(종옥), 나진복, 선우 학원, 안중식, 조덕천, 홍동근, 유럽측에서 김순환, 이영빈, 권오성 수명이 각각 참석했다. 행사에서는 선우학원의국제정세 변혁에 있어 조국통일과 4대강국”, 전금철의  

 

1985 1215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북과 해외동포들 행사이후 기념촬영

 

조국통일을 위한 북의 정책과 실천”, 악셀 노악의독일 통일에 있어 전후 과정”, 권오상의이남 민중의 통일투쟁과 기독자들의 책임”, 조덕천의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민족교회 신학정립”, 리성봉의조국통일을 위한 기독자들의 책임과 과제등을 각각 발표하고 토론했다.

 

한편 해외동포사회에는 이와 같은 북과 해외동포사회 교류가 빈번하자 해외동포사회 자체에서 진행되는<민족통일 심포지움> 연례적으로 개최되어 통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79년과 1980년에 도꾜에서 개최되던 심포지움은 1981 314~15 최초로 워싱턴 디씨에서 3 민족통일 심포지움이 열렸고, 5 민족통일 심포지움이 스위스 제네바, 1986 627~29일에 로스엔젤레스에서, 1989 622~24일에 로스엔젤레스에서 11 행사, 1992 626~28 13 행사를 로스엔젤레스, 93 910~12 14 행사를 로스엔젤레스, 그리고 1994 91~3 15 행사를 미국 수도 워싱턴 디씨에서 개최되었다. 행사들은 처음에는 일본의 최경태의 발기로 시작되었고, 후에 미국에서는 주로 선우학원, 양은식, 김현환 등이 참여하여 주동역할을 왔었다.

 

1990년대에 접어 들면서 이북 당국의 통일정책은 1980년대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북 당국자간의 관계가 90년대 초반에 잠시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있었을 당국자간의 관계 개선이 여의치 못해 북과 해외동포들 사이에 교류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괄목할 것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결성되면서 민간단체의 3자연대운동이 개막의 기치를 올렸다는 것은 우리 조국통일운동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음에 계속…)

 

[기획]이북정부와 정체성을 알아본다⑦

 

90년대는 범민련 시대로 3자연대 운동개막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이북 당국은 당국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정책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남북 당국간 사이에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시기에는 해외동포들과의 연대활동에 관심을 갖고 실천해 왔다. 이런 경우에도 이북 당국은 항상 민족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해외동포들과의 통일운동 사업도 적극성을 보여왔다.

 

 

남북 해외 3자모임(1990 7) 노태우 정부가 막바지에 파탄

 

 

 

 

1990 814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1차범민족대회 행사중 전야제 모습

 

1990년대는 조국통일과 관련한 측면에서 보면 남과 , 해외 민간단체 동포들이 3자연대를 선언하고 실천한 시대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시대 개막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남과 , 해외 애국동포들은 3자연대를 간절하게 갈망하였으나 당시의 남녘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애국적인 움직임을 동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1990 7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해외 동포 대표들이 1차범민족대회 준비회의를 하기로 하고 남녘동포 대표들(신창균, 박순경, 이해학, 이창복, 이희선, 조성우) 해외동포 대표들(일본에서 양동민, 신기성, 미주에서 노길남, 이행우, 은호기, 유럽에서 이종현) 이미 도착하여 북녘 동포들을 기다렸으나 판문점을 가로 지르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는 처음에는 허용해 놓고 마지막 순간에 말을 바꾸며 이를 거부하고 말았다.

 

때문에3자회의가 성사되지 못하고 남측 대표들과 해외측 대표들이2자회의로 합의 사항들을 해외 대표들이 북측에 가서 마무리 합의를 통하여3 합의로 범민족대회를 치르기로 했다.

 

 

해외대표들 서울서 회의갖고 평양가서 3자합의로 범민족대회개최 결정

 

 

 

해외 대표들은 귀가하여 돌아가자 말자 즉시 준비하여 평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미주에서는 이행우와 노길남2명이 대표로 가기로 했으나 이행우의 수속미비로 노길남 대표1명만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는 준비회의를 위해 유럽에서 임민식 이종현, 일본에서 양동민, 신기성, 그리고 재일총련 대표들, 재중대표들, 재소대표들이199086일과 7 양일 동안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 3차예비접촉> 갖고 남측에서 합의한 내용들을 가지고 토의한 1차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고려호텔 별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내외에 선포했다. 이에 앞서 이를 위한 1 준비회담은 1990 4 일본 도꾜에서, 그리고 2개월 후인 1990 62일과 3 양일 동안 베를린에서 범민족대회 준비를 위한 실무회담, 73일에 일본 도꾜에서 범민족대회 촉진대회 등이 개최된 있었다.

 

이렇게 준비회담과 실무회담을 거쳐 평양에서는1990814 김일성 경기장에서 1차범민족대회 전야제가 열렸고, 이곳에 참석하지 못했던 남녘에서는 연세대학에서 범민족대회를 지지하는 대회가 대규모로 열렸다.

 

 

김일성 주석 90 818 함북 경성서 해외대표들 접견

   

90 8.15 판문각에서 범민족회의를 마친 해내외 대표들이 판문점 행사에 참가하여 단합대회를 진행하는 모습

 

평양에서 열린 1차범민족대회에는 미주, 유럽, 일본, 중국, 소련 지역 동포대표들이 참가하였다. 대회가 평양, 판문점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나서 지역대표 임원들은 818 함경북도 경성( 이름은 주을) 김일성 주석 전용 별장에서 열리는 축하오찬에 초대되어 김일성 주석과 함께 오찬을 나누는 기회도 가졌다. 자리에는 일본 대표들 곽동의, 최만술, 김지영, 신기성, 김정부, 재미동포 대표들 선우학원, 최정열, 양은식, 은호기, 노길남, 유태영, 이행우, 전순태, 유상준 9명이, 유럽대표들, 임민식, 정규명, 이종현, 어수갑 , 카나다 대표로 강원진, 그리고 재중동포들, 재소동포들 수명이 참석했다. 남측 대표들로는 황석영 부부가, 북측 대표들로는 전금철, 려연구 등도 함께 자리를 같이해 김일성 주석과 오찬시간을 가졌다.

 

행사를 통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하자는 제의가 합의되어 후에 내외 지역에 범민련 조직이 결성되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해외 3자연대 조직이 건설되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조국통일을 향한 , 해외 겨레의 의지를 모아 지난 90 1120 결성을 선포하였다. 90 1216일에는 해외본부(초대 의장 윤이상), 91 125일에는 북측 본부(초대의장 윤기복), 91 123일에는 남측본부 준비위원회(초대 위원장 문익환), 95 225 남측본부가 결성(초대 의장 강희남)되어 조국통일을 향한 , , 해외의 목소리가 온전히 하나로 담기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범민족대회와 범민련 조직은1991 2차범민족대회를 서울서 개최하기 위해 준비회의를 독일 베를린에서 1991 629~30 양일 동안 <의장단 회의>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남녘 동포들이19908.15 범민족대회 성공을 위해 판문점서 연대지원의 뜻을 표시하는 모습

 

참가자들의 명단은 해외측 본부에서 임민식, 황석영, 중국본부에서 이철재, 최영희, 일본본부에서 곽동의, 양동민, 강종현, 재일조선인본부에서 황병태, 김정수, 박문국, 유럽본부에서 이민자, 최기환, 최영숙, 카나다 본부에서 한장환, 한옥선, 호주에서 김승일, 미주본부에서 양은식, 배강웅, 이행우, 한호석, 북측본부에서 전금철, 최철웅, 남측본부에서는 강희남, 배다지, 문정현, 한철수 (참석치 못함)으로 기록되었고, 그리고 참관인들은 전대협 대표들 성용성, 박성희, 유럽본부 성원들 이희세, 이준식, 김대천, 한계일, 신옥자, 이영빈, 김순환, 조명훈, 이영준, 이종현, 송수율, 정정희, 하양희, 심재화, 김진향, 장일중, 클라우스 등이었다. (2 범민족대회 자료집, 33, 범민련 해외본부 사무국, 1991 1031 발행)

 

1992 3 8.15범민족대회도 남한 당국의 반통일 정책으로 평양과 서울서 분산 개최되었다. 미주동포들을 포함한 해외동포들은 모두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참석했다.

 

1993 4 범민족대회도 서울서는 한양대 교정에서 열렸고, 해외동포들은 평양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다.

 

 

김영삼 정권도 5차범민족대회 체루탄으로 가로막아

 

 

1994 5차범민족대회도 서울에서는 김영삼 정권의 악질적인 탄압책동으로 2만여 명이 참가한 통일축제 행사를 페퍼포그와 체루탄으로 가로 막았으나 끈질긴 투쟁으로 폐막식을 가졌다. 행사기간 김영삼 정권은 24백여 명의 참석자들을 연행했다.1995 6차범민족대회는 남측본부(전창일, 이종린, 신정길) 남측준비위(박순경, 함세웅, 이수갑, 황인성)간에 이견들을 교환하는 과정을 통하여 진행,

 

 

 

1990 62~3 베를린서 범민족대회 남북 해외 실무위 대표들

 

1996 7차범민족대회는 서울, 평양, 심양에서 3 측이 각각 분산개최하기로 합의하고, 남측은 연세대 입구에서 개막식하고 진행,

 

1997 8차범민족대회도 분산개최되었다. 남측은 남측본부 신창균과 민족회의 이창복간에 회동이 있었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못한 광주 조선대에서 대회가 진행되었고,

 

1998 9차범민족대회는 범민련과 한총련을 중심으로 17백여 명이 서울대에 집결하여 범청학련 8차통일대축전과 함께 범민족대회 행사가 진행되었고,

 

 

10차범민족대회 평양행사에

남측서 나창순, 서원철, 이성우, 강형구, 박기수, 황혜로 대표 참가

 

 

1999 10차범민족대회도 서울과 평양에서 분산개최되었지만 평양에서 열리는 대회에 남측 대표들(나창순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서원철 청년대표, 이성우 전국연합 부산연합의장, 강형구 전국연합 부대변인, 박기수 전북노동자통일대녹두 집행위원장, 범청학련 황혜로 대표 6) 남한정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참석했다. 평양대회는 이들의 참석으로 뜨거운 분위기 속에 범민족대회 행사가 진행되었다. 해외동포들도 지역에서 대거 참석하여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민족통신》특파원이19995 인터네트 일간언론으로 창간하여 평양행사를 직접 취재하여 현지 보도한 것은 통일대축전 행사(10 범민족대회) 처음이었다. 보도를 통해 《민족통신》이 창간된 얼마 안된 기간에 남녘과 해외동포 사회에 빠른 속도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1990년대는 북녘동포들로서는 가장 가슴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난 시대였다. 이북 당국자들과 동포들은199478 이북의 최고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자 슬픔에 잠겼고, 아픔이 사라지기도 전인 이듬해인 1995 여름에는 세기에 한번 정도 오는 대홍수( 물난리) 만났다. 북녘 땅에 농사 지을 있는 경작지의 75% 가량이 파괴되었다. 이북동포들은 같이 엄청난 자연피해로 말할 없는 고난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이른바동서냉전 시대 종말을 고했으나 소련과 위성국들이 제대로 진보사회를 건설하지 못하고 붕괴하는 바람에 이북 당국은 다른 진보나라들과의 교역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한층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북 당국은 설상가상으로 미국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대결해야만 했다. 미제는 동서냉전이 끝난 시기를 악용하여 1극체제에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북압살고립 정책을 전개해 왔다.

 

 

1990 86 1차범민족대회 준비위원들 평양 고려호텔서 기자회견 모습

 

이러한 시기에도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남북화해와 협력을 외면했고, 이른바 , , 3각동맹에 편승하여 동족을 적으로 몰면서 외세들과 함께 이북 당국을 괴롭혀 왔다. 노태우 정부는 동서냉전체제가 해체되는 시기에 이른바 공산국가들과 외교수교를 맺는 이른바북방정책 추진하였는데, 과정에서 1990 남북한 고위급회담을 갖고 이듬해인 1991 9월에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2월에 남북한간의 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으나 이렇게 놓고 이남 당국이한미군사합동훈련 벌인 문제와 소위북핵문제등이 불거지면서 합의서는 체결 8개월 만에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남북관계 합의사항들은 언제나 남녘 당국에 의해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져 왔다.

 

특히 이남 당국이 미국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구조적 모순관계, 군사주권까지 미국에 의해 장악된 상황 때문에 남북관계가 원만히 이뤄졌어도 미국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 이남 정부 당국은 이상 진전하지 못하는 제한성을 갖고 있다. 문제가 가장 장애물이 되어 왔다는 것은 만인이 주지해 사실이다.

 

 

1990 416 해외동포 대표들이 범민족대회를 추진하기 위해 일본도꾜에 모여 준비회의 마치고 기자회견

 

이에 비해 이북 정부는 남북관계 정책에서 어떤 장애도 받지 않았다. 이북 당국이 언제나 주장해 왔던 것처럼민족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 보장된다면 남북관계에서 어떤 장애물이 있을 없었던 것이 이북당국의 일관된 자세였다. 미국이나 서방국가들이 남한 당국이 미국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을 관찰하면서 북조선 당국도 중국이나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데 이북 정부는 전혀 외풍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북이 생명처럼 여겨온 것이 바로 주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국자들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향해 북조선에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이북 당국의 실체를 너무나 모른다는 무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북 정부 당국의 통일정책은 언제나 원칙들에 의거하여 반영되어 왔다. 그런고로 이북정부의 정책은 조선 로동당의 정책이며 동시에 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