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3-19 00:00
<font color=red>[기획]강대국들 희생양 되어온<br><아프가니스탄>의 피투성이 역사</font>
 글쓴이 : minj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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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중앙아시아의 나라 <아프가니스탄>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이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나라들 합쳐 총 43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고 분석했다. <아프가니스탄>은 특히 지금 이 순간까지 전쟁이 지속되고 있어 세계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이다. [민족통신 편집실]




[기획]강대국들의 희생양이 되어 온 <아프가니스탄>


영국, 러시아,미국의 침략전쟁으로 시달려 온 피맺힌 역사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미국은 911 대규모 폭파사건의 배후 조정자를 오사마 빈 라덴 이라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 (FBI)은 빈 라덴 직계 가족 52명과 그의 모친에게도 DNA 채취를 강요 했다. 아프가니스탄의 혹독한 추위에 오사마 빈 라덴의 시체가 부패하지는 않겠지만 설사 오사마 빈 라덴의 시체가 부패한다 하더라도 DNA 분석은 가능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그런 강요를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오늘까지 죽이지 못하고 있다. 빈 라덴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중동의 석유를 도둑질하여 터무니 없이 석유값을 싸게 조작하고 있다고 미국을 비판하면서 <석유값은 배럴당 144 달러가 돼야 한다>라고 큰 소리로 예언한 바 했다.

그런데 9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 그의 잠꼬대 같은 예언이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이 되고 있는 것을 빈 라덴은 친히 바라보고 있다. 미국이 국민을 속이고 있는 것은 이것 뿐 만이 아니다. 미국은 국민들이 허무감과 분노를 일으키는 정치적 암흑 세계를 만들어 놓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다.

영국은 10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괴롭히고 세 번씩이나 전쟁을 일으켰다. 세 번씩이나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였나? 그것은 페루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가 인도를 향하여 점점 남진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로 붙들어 놓기 위한 전쟁 이었다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영국이 러시아와 경쟁을 하면서 1800년대 초에 제멋대로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선을 그어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아프가니스탄의 영토가 형성 되였던 것이다. 그 크기는 우리 나라 조국반도의 3배 가량되는 영토이다. 아프가니스탄 영토는 영국이 식민지배를 하기 위하여 편이상 그어 놓은 국경선이 이였다.

1. 인도를 지배하던 대영제국과 싸워 모두 승리한 아프가니스탄


1830년경 러시아는 페르시아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러시아의 세력을 인도 방향으로 점점 남하 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를 염려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를 영국의 방어선으로 지정해 놓았다. 그리고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영국군을 파송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영국의 동맹국이 될 것을 협상하자고 강요했다.

하지만 1761년 아프가니스탄 왕으로 즉위하여 69년 동안 통치하고 있던 무하마트 왕은 영국이 강요하는 동맹국협상을 완강히 거부했다.

영국은 이미 인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하고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아프 가니스탄의 무하마트 왕이 감히 이러한 동맹국협상을 거부하는데 대하여 분개 한 나머지 무하마트 왕을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왕을 세우기 위하여 인도의 총독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

마침내 영국은 말을 잘 듣지 않는 아프간의 무하마트 왕을 쫓아내기 위하여 인도 군을 앞세우고 영국군의 병력을 대규모로 편성하여 아프칸 침략을 시도했다. 이 침공이 이른바 제1차 아프칸 전쟁 이였다. 영국은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원정군을 동원 했는데, 벵골군 9500명, 샤 수자군 6000명, 봄베이군등 총 2만명의 병력과 그리고 민간인 지원 3-4만 명을 동원 했다. 낙타와 우마차 8000개를 갖춘 큰 병력으로 아프칸 제1차전을 1838년 2월에 개전했다.

영국군은 1939년 8월에 아프칸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입성 했다. 하지만 아프칸의 무하마트 왕은 이미 피신하였기 때문에 체포하거나 폐위 시킬 수 없었다.

그 결과 영국은 나이 어린 X 푸테를 아프가니스탄의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 놓았다. 그런데 카불에서 시작된 반영국 봉기는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이에 당황한 영국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유명한 노장 윌리암 장군을 카불에 급파하여 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윌리암 장군의 참전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1841년에 영국군은 카불에서 철수 도중에 1만 명 이상의 군인들이 살해당하는 참패를 당했다. 살아 남은 병력은 겨우 4500명 이였다. 1842년 9월 17일에 영국군은 아프칸에서 완전히 철수 했다. 제1차 전쟁에서 영국군과 인도군은 약 2만 명이 사망했고 2만 파운드의 재정이 군비로 지출되었다.

그러자 아프가니스탄의 무하마트 왕은 다시 왕위에 복귀했다.

그렇지만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제2차 전쟁<1878-1880년> 제 3차 전쟁<1919년>으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대영제국이 아니라 정반대로 <알라 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치는 아프칸 민중들이 승리했다.

영국은 전쟁에서 패전하게 되면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명목상으로 협약이니 혹은 협정이니 하면서 구실을 내세워서 조약을 맺는 수법을 상투적으로 사용해 왔다. 1919년에 제3차 전쟁에서도 영국은 역시 패전하고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인정하는 <강화조약>을 체결 함으로써 영국의 <팍스 브리태니카> 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제3차전 에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는 전략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아무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드디어 상호간에 <리왈핀디 평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그 동안 10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괴롭히던 침략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1919년 영국이 완전히 떠나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은 무너진 왕국을 다시 회복하여 제7대 왕으로 아무눌라 칸이 왕위에 올랐다. 칸 왕은 전통적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이웃의 주요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넓혀 나갔다. 칸 왕은 전통적인 무슬림 여성 베일을 폐지하고 초 중학교 의무교육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남녀 공학제도 등 파격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로 인하여 보수주의적인 종교지도자들과 개혁을 꺼려하는 일부 부족들의 지도자들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

1921년에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 칸 왕은 군부의 압도적 반대와 보수주의적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왕위에 오른지 3년 만에 강제로 퇴위를 당했다.

그 후에 아프가니스탄은 2-3차 정변을 겪으면서 1933년에 제9대 왕으로 19살 된 자히르 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적극적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그의 숙부인 마흐무트 칸을 총리로 임명했다. 칸 총리는 국정을 맡아 적극적으로 개혁통치를 했다. 마흐무트 칸 총리는 1973년까지 40년 동안 총리로서 무난히 아프가니스탄의 왕국을 존속할 수 있도록 통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프가니스탄은 왕권과 총리의 통치제도를 원만히 유지하면서 중립적인 국가로서 전쟁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대전 이후에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인하여 조성된 냉전시대에도 어느 한편과 직접 동맹을 맺지 않았다.

하지만 벌서 소련과 미국은 경쟁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접촉하여 서로 호텔과하수도 건설 사업 등을 제공하면서 영향력을 얻으려고 숨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 때에 벌서 아프가니스탄 에서 이란으로 가는 2차선 도로가 개통되고 있었다.

1973년에 지하르 샤 왕이 국외로 순방 중에 있을 때 아프가니스탄 국내에서는 무혈 쿠테타가 일어났다. 무함마드 다우드가 주도하는 쿠테타가 성공하여 샤 왕은 40년 동안의 왕권을 상실하고 퇴위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왕권제도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쿠테타에 성공한 무함마드 다우드는 <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을 배경으로 삼고 쿠테타를 일으켰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정당 출신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과 소련에 대해서는 양편을 모두 다 의존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파키스탄을 멀리하는 모호한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무함마드 다우드 대통령의 이와 같은 불투명하고 모호한 정책이 바로 훗날에 있어서 아프가니스탄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 될 것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2. 미국의 함정에 빠진 구 소련의 아프칸 침공


1973년에 아프가니스탄의 <인민 민주당>이 쿠테타를 일으켜 왕정시대를 종식시키고 다우드 대통령이 집권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역사에 있어서 놀라운 변혁이며 또한 민중시대의 새로운 출발을 뜻한다.

하지만 다우드 대통령이 집권한지 5년 만에 쿠테타 세력의 내부에서 극심한 갈등과 분규가 일어 나 <인민 민주당> 은 산산조각으로 분열되었다.

1978년 4월에 위대한 혁명으로 알려진 <인민 민주당>의 반란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여 다우드 대통령은 <인민 민주당>의 동지들의 불신임으로 인하여 취임한지 5년 만에 살해 되고 말았다.

다우드 대통령이 살해 당한 것은 그의 모호하고도 불투명한 정책이 신생국인 아프가니스탄의 험란한 앞길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서 역부족하고 부적절 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1978년 5월1일에 <인민민주당>은 무함마드 타라키를 선츨하여 재2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타라키 대통령의 등장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소외를 당하고 있던 파슈툰족이 소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파슈툰족은 남쪽 험악한 산악지대에 널리 퍼져서 살고 있는 서민층으로써 불개미처럼 단결하고 용맹스러운 족속으로 유명하다. 파슈툰족은 왕정통치를 오래동안 반대했으며 불의와 싸우는데 후퇴를 모르는 전투적 속성을 소유하고 있는 부족이다.

권력을 장악한 타라키 대통령의 <인민 민주당>은 우선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농민들의 부채 탕감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여성의 권리와 평등 교육 등 사화주의적인 주요한 정책을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정치적 희망으로 제시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타라키 대통령과 인민 민주당>은 친 소련 성향의 정권 이였다. 정치적 지향점은 반보수적이며 세속적인 진보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국호를 <민주 공화국>으로 개칭함으로 친소련적인 사회주의 국가건설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1979년 3월에 <민주 공화국>은>은 또 다시 분규가 재발하여 타라키 대통령이 축출되고 아민이 잠시 동안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카르말이 소련을 등에 업고 제3대 대통령이 돠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친소련 정권이 계속하여 불안정 상태에 빠져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친미쿠테타가 일어 났다. 친소련 정권이 계속 수난을 당하다가 결국 우파 쿠테타에 의하여 붕괴되는 것을 보고 소련은 구경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79년 12월에 친소 정권을 보호한다는 명복으로 소련이 <아프칸 침공>을 단행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하여 <올 것이 왔다>라고 반기는 나라는 물론 미국이였다. 미국과 소련의 동서 대결의 냉전시대가 노골화 되고 있을 때 소련과 미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을 선호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미국은 절대로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밀정보를 획득하고 분석하여 비밀공작을 꾸미고 있었는데 그 비밀공작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ㄱ. 아프가니스탄의 세속화 정책을 보수적 이슬람 민중들이 반대하도록 유인한다.
ㄴ. 타라키 대통령의 농민과 서민위주의 정책을 도시인들이 반대하도록 유인한다
ㄷ. 왕권을 중히 여기는 계층들이 타라키 대통령의 개혁을 반대 하도록 유인한다.
ㄹ. 시간이 흐를 수록 소련의 영향력이 점점 깊이 민중들 속에 파고 들어가고 있는것을 당분간 주시하고 지켜 보면서 기다려야 한다.
ㅁ 보수적인 이슬람 교도들과 도시의 지식인들을 결집시켜 친소련 정권의 타도를 전개하도록 서서히 공작 한다.
ㅂ. 보수적 계층과 지식층을 총집결 시킴으로써 사회주의적 친소련 정권을 붕괴
시키도록 최종적 총공세를 계획 한다.
ㅅ. 소련을 정치적으로 자극시켜서 직접 개입하여 아프칸 침공을 감행 하도록 적극 유도한다.

위에 기술한 미국 정보국과 연방수사국 (FBI)의 정보입수와 분석 그리고 치밀한 비밀 공작들은 소련을 함정에 빠지도록 하는데 크게 성공했다. 소련은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켜서 드디어 <아프칸 침공>을 감행 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로 실현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에 기술한 비밀공작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 당시 미정보국의 국장이였으며 현 재는 오바마 행정부의 국방장관인 로버트 게이츠가 1996년에 집필한 그의 회고록 중 에 숨김없이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 들이다.

<음지부터: 냉전에서 승리한 다섯 대통령의 숨은 이야기>의 회고담의 일부 내용 중에서 몇 개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미국은 1979년에 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고의적으로 유도했다. 사실은 침공 6개월 전부터 반정부 <무자헤딘 게릴라>를 조작하여 지원하기 사작했는데 그 이유는 친소련 정권을 위기에 빠지게 함으로써 소련이 자극을 받아 군사개입을 하도록 유인을 한것이다…

… 게이츠와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 두 사람은 미국이 반정부 <무자헤딘 게릴라>를 사전에 미리 6개월 전부터 비밀로 지원할 계획을 지미 카터 대통통령에게 사전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이런 작전은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하도록 유인하여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 또 카터 대통령에게 보고 하기를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전쟁으로 몰아세우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였습니다> 라고 보고 했다...

그 결과 미국의 함정에 빠져들고 또 미국의 유인책에 말려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에서 반소 쿠테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친소련 정권을 도와주기 위하여 1979년에 <아프칸 침공>을 감행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소련의 아프칸 침공을 정면으로 대항하여 싸운 우익 무장세력은 <무자히딘> 이였다. 미국은 <무자히딘>의 반소쿠테타 세력을 키우기 엄청난 비용을 들이며 지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이 <무자히딘>을 키우고 무진장 지원한 것은 지미 카터 대통령 행정부 때 시작하여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가 크게 확대 했는데 이른바 <레이건 독트린> 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과 사우디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들이 <무자히딘>을 지원 했다.

소련이 <아프칸 침공>을 감행한 것과 또 미국이 지원 한 < 무자히딘>의 반격 으로 인하여 180만명의 사상자와 550만명의 이재민들이 발생했다.

미국은 냉전시기에 소련이라고 하는 거대한 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해서라도 반소 쿠테타와 테러집단을 만들어 놓고 그들을 활용했다. 하지만 그 이용 가치가 없어지게 되면 그 뒤로는 미국이 만들어 놓은 테로 집단을 하나의 범죄집단으로 낙인 찍고 잡아 죽이는 수법을 상습적으로 전개해 왔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좌익정권에 대한 우호와 친선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 분규사태에 직접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미국은 이것을 소련의 불법적인 <아프칸 침공> 이라고 낙인 찍었다.

소련은 1989년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10년 만에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의 철수로 인하여 양대 세력의 대립에 있어서 미국이 이념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미국은 전세계에 과시 했지만 미국이 승리를 과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승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내전을 확대 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을 뿐 오히려 더 큰 혼란과 국가적 비극이 전개되고 있었다.

친미 군벌들은 서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투쟁을 했고 <무자히딘>은 여러 정파로 분열되여 저마다 독자적 정권창출을 위하여 반민족적 중상과 모략을 일삼고 있었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분파와 당파들의 싸움으로 인하여 1994년에 카불 한 곳에서 만도 1만여 명 이상이 사망 했다. 이와 같은 비극이 6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대 혼란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의 등장 이였다.

탈레반의 정체와 그 역할은 무엇인가?

<탈레반>은 본래 페르시아 어로 학생 이라는 뜻인데 파키스탄의 이슬람 종교의 전통적인 <신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탈리반의 생성 과정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에 있는 파슈툰족의 절대적인 지지와 해외의 보수적 이슬람 분파들의 합류를 이루어 1994년에 25,000명의 학생들과 지도자 <오마르>를 중심하여 조직한 수니파의 무장 정치조직이다.

19세기에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고 있을 때 러시아와 이해관계로 파슈툰족의 거주지역을 둘로 분리시켜 놓았다. 이 때 부터 파슈툰족 38%는 아프가니스탄의 국민이 되었고 12%는 파키스탄의 국민이 되었다.

오늘 이 지역에서 국경 문제와 민족문제 그리고 종교문제로 얽키고 설킨 원인은 본래 영국 때문이며 영국이 혼돈을 조장한 제공자로 진단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탈레반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탈레반>은 일종의 민족해방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이 철수한 후에 군벌들과 <무자히딘> 분파들이 서로 싸우며 나라를 또 다시 외세에 의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혁명을 일으켰던 세력이 곧 <탈레반>진영이었다. 탈레반은 1996년에 수도 카불을 전격적으로 점령하고 정치와 종교 세력들을 규합하여 이슬람 토후국을 창건했다. 탈레반은 7년 동안 통치하면서 이슬람의 전통을 강화시킴으로써 외세를 물리치고 사회적 질서를 바로 잡으려 했다.

<탈레반>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엄격히 제한 시키고 타 종교에 대하여 절대적 금지를 법으로 강제했다. 또한 아편 생산을 일체 금지 시켰고 절도범이나 중범자들에게 엄한 정책을 폈다. 즉 이러한 중범자들에게는 이들의 손이나 발을 절단하는 가혹한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또한 <탈레반>은 공산주의자들의 뿌리를 뽑아내는 역할도 했다. 이 같은 탈레반의 가혹한 정책에 대하여 남부의 파슈툰족을 제외한 다른 많은 부족들 세력은 <탈레반>의 입장에 저항 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하여 국제적으로도 탈레반 정권의 가혹한 정치 행태에 대하여 냉혹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훗날에 탈레반 정권에게 큰 약점으로 작용 했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시인해 주고 아무 말 없이 당분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왜냐하면 탈레반 정권이 반공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력을 일정 정도 이용해 온 자세도 보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이중잣대는 <탈레반>에게 병 주고 약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3.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유가 의문이다


<탈레반>은 1996년에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쟁취한 후 5년 동안 통치했다. 탈레반 정권은 5년동안 통치를 하면서 부시 행정부로 부터 <눈의 가시> 처럼 괴로운 존재로 취급을 받았다.

2001년 8월에 미국은 탈레반 정부에게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는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하여 협상을 강요했다. 미국 국무성 관리 로카(Rocca)는 탈레반에게 다음과 같이 폭언했다.

<미국이 주는 <선의의 융단>을 수락 하십시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들을 <융탄 폭격>으로 파묻어 버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부시 행정부는 2001년 9월 10일에 탈레반 정권에게 터무니 없는 요구를 강요했다. < 만일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넘겨주지 않으면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키겠다>라고 위협적인 멧시지를 전달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그 다음 날인 2001년 9월 11일에 <9.11 사건>이 발생했다.

놀라운 것은 비행기 납치범 19명이 미국 플로리다에서 테러훈련을 받았다는 사 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미국 미네소타에서 그들은 비행 연습을 받았다고 한 다. 그리고 납치범 19명은 모두 다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아니며 아프가니스탄에 서 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01년 10월 7일에 아프가니스탄 침공했다. 그 침공의 이유는 9.11 테러의 배후 조종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찾아 내라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했다고 하는 그 혐의 하나 때문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마구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개시한지 한달 후인 2001년 11월 26일에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완전히 소탕시키고 12월 5일에 미국이 시인하는 4개 어용정파들을 앞세워 과도정권을 수립하게 했다. 그리고 과도정권의 수반으로 친미파로 활약해 온 카르자이를 세웠다.

2004년 10월에 과도정부는 헌법을 준비하여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창설하였으며 미국의 감시하에서 관선선거를 실시하여 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지 9년이 되었다. 오늘 현재 미국군 6만 8천명과 외국군 3만 6000명 모두 합해 10만 4천명이 아프가니스탄을 강점하고 있다. 여기에 아프칸 보안군과 경찰 2만 5천명이 또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군 3만 명을 추가 파병하여 미군의 병력을 확 대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0년 2월 16일 아침 현재의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아프칸 침공> 이후 오늘까지 미국군인 사망자 수는 1,609명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 외에 다국적 군인 사망자와 미국의 민간인 사망자의 수도 엄청 많이 있다고 보도 했다.

그러면 탈레반의 전투 병력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의 <병력과 무력>만을 가지고는 절대로 무찌를 수 없는 세력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다.

그 이유들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이에 대해 다음 몇 가지로 분석해 본다.

첫째,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은 깊은 민족적 신념으로 오랜 투쟁의 역사를 통하여 보다 더 끈질긴 투쟁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난공불락의 민족이다.

둘째, 아프가니스탄 영토는 지형이 기형적으로 험난한 산악 지대를 형성하고 있음으로 적의 공격을 능히 막을 수 있는 자연적 요새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강대국들의 오랜 침략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정규군과 비정규군 외에도 전 민중들이 모두 다 전투요원으로서 게릴라전투에 자원봉사자로 참전을 하고 있다. 미군에게는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는 모든 지역이 다 위험한 전투 장들이다.

네째, 미국이 훈련시키고 무장한 아프가니스탄의 정부군은 사실상 어용군인들이다. 그들은 미국편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있어서 민중 편에 유리한 행동을 하고 있다. 미군의 통역관으로 있는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이 고의적으로 미군에게 불리 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예가 허다하다.

다섯째, <미군의 무기로 미군을 공격한다>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쉽게 벌어지고 있다. 미국이 제공하는 아프가니스탄 정규군에게 보급된 무기들이 어 느 새 탈레반들의 손안에 들어가 있으며 탈레반들은 그 무기들을 가지고 미군들을 살해하고 있다. 특히 지금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탈레반의 손에 쥐여지게 될까를 크게 염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섯째, 탈레반의 자금줄은 풍부하다. 탈레반은 일년에 생아편 8,200톤을 생산한다. 그 외에도 귀중한 광물을 무진장 생산하고 수출하여 <글로벌 경제력>을 확보 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하여 걸프만의 수니파 에 속하는 부국들이 막강한 재정지원을 <알라의 사업>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탈레반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일곱째, 미국과 나토 정보 당국자들은 탈레반의 세력의 조직력이 날이 갈수록 확대되여 응집력이 효율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르자이 대통령의 정부군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이 세워 놓고 미국이 지원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관리들은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와 정반대로 탈레반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크게 증가하여 현재 탈레반은 전국 34개주 중에서 33개 주가 탈레반의 예비내각이 구성되어 있다.

탈레반의 지도자 모하마도 오마르는 미국이 지원하는 카르자이 대통령의 정권이 무너질 날을 대비하여 벌서 자체 정부수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외신 보도들은 전해 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런던에서 지난 1월 28일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힐러리 국무장관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이 참석하는 국제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 의제는 8년 이상 진행되는 아프칸 전쟁의 출구전략을 논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탈레반 대원들을 돈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5억 달러 마련을 추진한다고 했다. 하지만 70여 개국이 모인 회의에서 1년 안에 1억 4천만 달러를 조성하여 탈레반 회유 자금으로 쓰기로 결의 했다는 것이다.

용병으로 탈레반을 잡겠다는 미국이었는데 8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유엔은 돈으로 탈레반을 잡겠다고 70개 나라 대표들이 모여서 자금을 모금한다고 한다. 유엔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길을 잃고 있으며 유엔의 도덕성을 스스로 붕괴시키고 있다.

신념으로 뭉친 탈레반을 돈으로 회유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미국과 유엔은 부질 없는 짓을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과 영국이 국제회의를 주도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실효를 얻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4. 오사마 빈 라덴과 <탈레반>의 관계


9.11사건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상천외한 세기적 사건 이였다.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은 사건 발생 즉시 빈 라덴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세계의 이목이 라덴에게 모아졌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57년에 사우디아라비아 에서 재산 50억 달러를 가진 거부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 났다. 그런데 거부의 아들로 태어 난 그가 국제적인 테러리스트가 된 연유가 무엇일가?

1979년 12월에 소련군이 <아프칸 침공>을 했을 때 빈 라덴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이스람 신학을 공부한 정의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빈 라덴은 자신이 직접 불도저를 몰고 지하 벙커를 파기도 하고 터널을 뚫으면서 소련군과 싸웠다. 그는 당시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는 아프가나스탄 군부와 함께 싸워 소련군을 물리쳤다. 한때 미국과 밀월관계에 있던 빈 라덴이 어찌하여 미국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테러리스트가 되었을가?

그것은 1991년 걸프전 때 미국의 안하무인적인 비도덕적 잔인성을 보고 격분하게 된 동기라고 했다. 그때 그는 약소민족의 비애를 느끼며 통분했으며 그 후에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을 극구 반대하여 사우디 왕국은 물론 미국의 미움을 받게 되였던 것이다. 1993년 빈 라덴은 사우디 왕국으로 부터 사우디 국적을 박탈당하고 해외로 추방 당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오사마 빈 라덴을 따르는 추종자들은 늘어만 갔다. 아랍인들이 오사마 빈 라덴을 존경하고 추종하는 이유는 오직 그의 청렴한 신념과 그의 뜨거운 신앙심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알카에다>는 오사마 빈 라덴을 지도자로 하는 무슬림에 의한 국제무장 세력의<네트워크>이다. 오늘 전세계에서 미국 제국주의적 침략행위에 대항하여 반미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국적과 종교를 초월하여 알카에다에 대하여 심정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탈레반의 지도자 오마르는 반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의 지도자이다. 오마르와 오사마 빈 라덴의 관계는 1970년대에 있어서 소련의 침공을 물리친 두 기둥이었으며 혈맹적 동지들로써 각별한 동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별히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의 국적을 박탈당한 국제적 고아로서 수니파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은 그의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의 카르자이 대통령은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와 빈 라덴과의 뜨거운 관계를 질투하고 증오하여 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유혹하고 있다.

카르자이는 <만일 탈레반의 지도자인 오마르가 오사마 빈 라덴 과의 인연을 끊고 결별만 한다면 탈레반을 수용하고 관계정상화를 하겠다>며 유혹하고 있다.이와 같은 유혹은 미국이 탈레반에게도 표명하면서 동시에 <만일 이제라도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미국에게 넘겨 주기만 한다면 미국은 곧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5. 이 글을 끝 맺으며...


미국은 이래도 지고 저래도 질 전쟁인데 8년이 지나도록 그 어떤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헤 메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진퇴양난 상태에서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임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의 여론조사도 미국 정부의 대아프가니스탄 정책에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2009년 말에 실시한 CBS 여론조사에서 미국민들은 아프칸 전쟁에 참가한 미군 주둔병력을 감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42%, 증가에 32%로 나타났다. 또 전쟁 반대에 58%, 전쟁지지에 41%로 반영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칸 파병 3만 명을 고집하면서 지도력의 좌표를 잃고 표류하고 있는지 안타깝다는 여론이 미국 내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아프칸 전쟁의 늪에 빠져 나토 동맹국들에게 추가파병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동맹국 나라들은 한결같이 <미국을 따르자니 국민과 돈이 울고..>하면서 모두 다 난색이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냉담한 반응만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이러한 현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국민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미국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끝)



<출처:민족통신 20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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