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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각계 방북취재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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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9-03-13 00:00 조회6,5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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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편집인 노길남 박사는 최근 방북취재 9번째 마지막 글을 통해 자신의 젊은 시절과 지난 시기를 돌아보면서《나는 지금까지 너무 무지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번 방북취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고 설명하며 열흘동안 심층취재로 농장원들과 공장노동자들, 학자들, 공무원들 및 이북 사회 각계 동포들을 만나고 돌아온 소감과 고백적인 마음들을 털어 놓았다. 그 마지막 방북취재 9번째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사진과 함께 보려면 맨 아래 순서를 짤각눌러 열람하면 됩니다.-민족통신 편집실


[방북취재-9]

《나는 지금까지 너무 무지한 삶을 살았다》


[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나는 남녘에서 소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오고 미국에 유학 와서 대학원을 나왔으니까 교육받은 햇수를 계산하면 모두 18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된다. 그렇게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너무 무지한 삶을 살았다”고 돌이켜 보게 된다.

<##IMAGE##> 그 어느 선생도 “이웃을 위해 공부하라”, “사회를 위해 공부하라”, “나라를 위해 공부하라”고 충고해 주시 않았다. 모든 교육의 방향이 취직이나 개인 출세와 결부되었다. 마지막 학교를 졸업하고서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입신출세에만 관심을 가졌지 사회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한다는 생각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갖지 못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우리 민족이 분단된 그 본질조차도 모르면서 지식인 소리를 들어가며 살아 온 것이 고작이었다. 단지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급선무였던 것이 나의 젊은 시절의 전부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누가 내 나이를 물으면 1980년 5월18일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실제로는 1944년 4월3일 시골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그 때로부터 36년 동안의 나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지한 삶의 연속>이었다. 연세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학생시위에 참여하고 때로는 주동도 해 보았지만 우리 민족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싫으니까 그저 군중심리에 이끌려 반 군사독재 시위에 참여했을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삶의 철학 하나도 정립하지 못했던 것이 나의 지난 젊은 시절의 전부였다.

내 인생 절반 이상을 허송세월로 보낸 셈이다. 대학시절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을 배웠지만 그 이론들 전부는 서양사람들의 것으로 거의가 관념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들만 들어서 철학이란 본래 어려운 학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알지도 못하는 교수들의 강의는 지루하기만 했다. 정치학도, 행정학도, 경제학도 모두가 서방교수들의 이론이지 우리 학자들의 이론은 없었다. 그래서 철학이나 그 외 학문들도 서양의 학문으로만 생각하기도 했다. 대부분 교수들도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학자들이었다. 남녘 학교들의 교육자료들은 거의가 미국에서 나오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IMAGE##>지금은 그 상황이 더욱 더 심화된 것 같다. 남녘사회 전체가 미국 판이다. 남녘에서 나오는 잡지들이나 출판도서들을 보면 이것들이 미국출판물인지 아니면 서양 어느 나라 출판물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래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 테레비죤을 보아도 같은 현상이다. 대부분의 남녘 정치인들이나 교육자들이 하는 말이나 자세를 보아도 매 한가지처럼 느껴져 왔다. 남녘의 대부분 언론들도,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도 모두가 남녘 사람들을 미국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한다고 지적한다면 이것을 지나친 비판이라고 반박할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남녘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말하는 “국제화, 국제화, 국제화”라하고 강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화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번 방북 취재를 마치고 돌아 오면서…>


나는 이번 방북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한층 더 나의 삶이 너무나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북의 학교들을 방문해 보면서 그리고 그곳 학자들과 지식인들, 농민들, 공장근로자들을 두루 접하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눠보면서 더욱 더 나의 인생이 너무나 무지한 삶이었다고 회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북의 학교들을 가보면 그런 생각들이 더욱 나의 뇌리를 때린다. 심지어는 소학교 교정들에서도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라는 구호가 눈에 띈다. 소학교 학생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조선을 위해서 배우자>라는 말, 이것은 단지 구호가 아니라 교육의 모든 지침이 인민복지와 나라 건설과 직결된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북녘의 배움터가 존재하는 곳들은 어디서나 교육과 사회, 나라와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교육 내용들도 대부분 주체사회주의 건설(혁명이라고 도 함)에서 실지 써먹을 수 있는 산지식과 실천능력을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교육과 교양을 결합하는 문제와 교육과 혁명실천을 결합하는 원칙문제를 중시하는 것이 이북의 교육방침으로 이해되었다.

<##IMAGE##>이 주체사회를 건설한 김일성 주석은 교육에 대한 개념에 대하여 《교육이란 사람들을 지덕체를 겸비한 사회적 인간으로 키우는 사업입니다 》라고 해명해 주었다.(김일성 전집 49권 356쪽)

이러한 교육은 비단 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졸업하여 직장에서 근무하는 모든 일꾼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고 있었다. 농장원들과 공장근로자들을 비롯하여 교수들, 관료들, 탄광노동자들, 어부들, 외교관들 등 모든 인민들 생활 자체가 교육이었고 혁명적 실천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북동포들처럼 공부를 많이 하는 사회는 없을 것 같다. 학교를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포들도 일주일에 한번은 교양 시간을 갖는다. 청량 음료상점에서 일하는 봉사원들, 식당 같은 상점에서 일하는 봉사원들도 모두가 교양학습을 하며 동시에 자기 업무에 대한 총화(평가) 시간도 갖는다. 이 생활총화는 매일 20분 정도 봉사원칙들을 놓고 서로 격려해 주거나 충고해 주거나 또는 반성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이 생활 총화도 여러 가지 원칙들을 놓고 자기총화, 상호총화를 한다. 이들의 봉사원칙들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손님이 백 번 물으면 백 번 웃으며 대답한다.”라는 것이다.

이북동포들을 보면 누구든지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고, 언제나 예절 바른 자세를 보인다. 이들은 그러면서도 내강외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느끼게 된다.



《북녘 동포들 모두가 ‘신념의 강자들’》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은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를 보고 여러분이 신념의 강자라고 말하지만 우리들이 조국(북녘을 의미)의 품에 안겨 인민들을 볼 때에는 이들 모두가 신념의 강자들”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한다. 북녘동포들이 신념의 강자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도 신심으로 극복해 낼 수 없었다고 돌이킨다. 선생들은 또 미군의 폭격기로 폐허가 된 평양을 설명하면서 당시에 40만 명 가량 되는 평양시에 미군이 퍼부은 폭탄의 수는 40만개가 넘을 정도로 잔인했다고 전재하며 그 때문에 완전히 폐허 된 땅을 남의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복구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고 되새겨 본다. 서방사람들은 당시 이렇게 폐허 된 땅을 복구하려면 적어도 백 년이 걸려도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불과 몇 년 만에 새 도시를 건설해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평양을 만들어 놓았다고 간증한다.

이것은 이북 동포들 모두가 <신념의 강자들>이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이 증언한 것은 그저 인사 치레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나라들이 무너져 무역관계가 어려웠고, 1994년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여 북녘 인민들 전체가 슬픔에 잠겨 있었고, 1995년 전례 없는 큰 물난리(대홍수)로 전체 경작지 75%가 망가졌던 그 어려운 시기, 여기에 반세기에 걸쳐 미국의 대북적대시 고립압살정책으로 시달려야만 했던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 북녘 인민들이 그 중첩된 난관들을 거뜬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 말로 북녘 인민들이 <신념의 강자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IMAGE##>북녘 동포들은 오히려 그러한 악순환의 경지를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그러한 어려운 사태들을 순경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을 창조했다. 이제 와서는 그 강인한 정신으로 군사강국, 사상강국을 이뤄놓았고 2012년 김일성 주석의 탄신 100돌을 맞은 해에 기어코 강성대국의 문패를 달겠다고 혁명적 대 고조의 폭발적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북녘 동포들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이 시간 현재도 그 어떤 좌절도 모르고 새로운 단계의 천리마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총 폭탄 정신으로 온 정성을 쏟고 있다.

나는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면서 이 같은 기적이 저절로 굴러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북녘 동포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존경하고 흠모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지도자와 인민들이 하나 같이 일심단결 된 것도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북녘동포들의 의식과 사상에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주체철학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주체철학이다. 건축에 비유하면 그 주체철학은 설계도와 같은 것이다. 이 철학을 독창적으로 창시한 분이 김일성 주석이고 이 철학을 발전시키고 풍부화 하신 분이 김정일 위원장이라는 사실은 이북의 내면을 아는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주체철학 사상은 비단 이북동포들을 위한 운명개척의 방도를 제시하는 나침판일 뿐만 아니라 인류 진보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구체적 방도까지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주체철학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사람을 중심으로 한 심오한 철학으로서 가장 진보적인 이론과 실천을 바탕으로 구성된 내용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국제사회 진보계 학자들도 주체철학이 갖고 있는 그 지위와 역할을 깨닫게 되어 지구촌 곳곳에 주체사상연구소들을 설립해 놓은 것으로 밝혀져 있다.

철학을 전공한 한 학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의 지식이 단순히 오늘의 주체철학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철학사에서 대표적인 유물론적 사상조류로 볼 수 있는 <기일 원론철학>과 연계된 인물들인 이규보, 김시습, 서경덕, 홍대용, 최한기 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봉건시대 철학자들의 지식과 잇닿아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 학자는 폭넓은 지식과 함께 심오한 사상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배운 철학사상과 지식은 모두 북부조국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의하여 터득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 기자의 질문과 관심사에 대해 진지하게 답변해 주면서 《조선철학사 개요》(최봉익 박사, 사회과학출판사 1986년 11월15일 출판)라는 340쪽짜리 도서를 소개해 주기도 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와 관련하여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 사람들의 관점과 입장은 오랜 역사에 걸쳐 발전하여 왔습니다. 지난 날 세계관의 발전역사는 상반되는 두 철학조류인 유물론과 관념론, 변증법과 형이상학의 투쟁역사였습니다.》라고 해석해 주었다.(《주체사상에 대하여》,73쪽)

<##IMAGE##>나는 북녘 동포학자들이나 지식인들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내 자신의 과거는 너무 무지한 삶을 살았다고 되풀이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북을 40여 차례 방문하여 이곳 저곳 구경하였지만 이북사회가 갖고 있는 내면의 진면목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이들의 일심단결이 혁명적 동지애로 똘똘 뭉쳐진 것도 알지 못했다. 지도자-당-군민이 완전히 하나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지도자가 인민들을 그렇게 극진하게 생각하는 줄도 몰랐었고, 인민들이 그토록 자기 지도자를 가슴 뜨겁게 흠모하면서 진정 어린 마음으로 존경하는 줄 몰랐다. 이들의 철학과 음악예술, 그리고 모든 학문들이 그렇게 심오하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갖고 있는 줄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남녘에서 받은 교육이나 미국생활 35년을 통해 얻은 이북에 대한 지식들은 모두가 사실이나 진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정보들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미개한 사회가 존재하고 있다. 남녘 사회는 21세기에 들어 온 오늘날에까지 이북의 진실을 아는 것을 금기 시 하고 있다. 이북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국가보안법>이라는 수단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 세상에 이런 사회도 있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유엔에서도 이런 문제를 지적해 왔다. 있는 사실을 말하고 쓰는 것을 <국가보안법>7조 2항에 의거하여 찬양 죄로 걸어 감옥에 가두는 나라는 세상천지에 남녘사회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나처럼 무지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녘에서 소위 <북한학>을 전공하여 이북 전문가들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북녘에 대해 하는 소리나 이들이 쓰는 글들의 내용은 거의 모두가 무지한 소리 일색이었다.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언론인들 대부분도 북에 대한 보도나 논평들에서 무지와 무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왔다. 이러한 무지와 무식은 서방의 언론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언론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왔다.

나는 방북취재를 마치고 내가 사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내 뇌리를 친 것은 “나는 지금까지 너무 무지한 삶을 살았다.”고 반추했다. 그 생각을 씹고 또 씹으며 나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되돌아 보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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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소개된 방북기 연재물(2009년 2월취재) 보기-아래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9)[방북취재-9]]《나는 지금까지 너무 무지한 삶을 살았다》
노길남 특파원 방북취재 마치며 그의 삶을 되돌아 본다.


(8)[방북취재-8]북 지도자 가문의 뿌리를 알아본다
뿌리없는 나무는 없다.현재는 지난 역사의 반영이다


(7)[방북취재-7]학자들과 지식인들과의 대화
모두가 인테리로서 대중들과 직결된 지식소유


(6)[방북취재-6]비전향 장기수 선생 부부와 가족들의 소품공연
공연 행사를 마치고 윤희보 선생(94세) 별도로 만나 환담


(5)[방북취재-5]<김일성 종합대학교> 방문
15개 학부 1만2천 명 학생, 교수진은 2,500명


(4) [방북취재-4]미곡 협동농장과 이들 삶의 현장을 방문
노길남 특파원 <황해북도 농촌 농토와 농민가정> 방문


(3) [방북취재-3]경공업 분야의 비단 실 생산현장 방문
노길남 특파원 <평양 제사공장> 방문


(2) [방북취재-2]경공업 분야의 기호품 산업현장
<평양 껌 공장>의 시설과 일꾼들을 접한 소감


(1) [방북취재-1][방북취재-1]혁명적 대 고조 열기가 뜨겁다
노길남 특파원 열흘동안 시골농촌 및 각계각층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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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최성익 북 민화협 부회장 남북관계 진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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