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2-26 00:00
[기고]서구문명의 소비자본주의와 개발광기에 어두워진 태국
 글쓴이 : y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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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은퇴 목사,뉴욕 거주)는 이번부터 남미,아프리카 나라들의 연구를
마치고 아시아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인도네시아에이어 두번째 나라로 서구문명의 소비자본주의와
개발광기에 어두어진 태국을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서구문명의 소비자본주의와 개발광기에 어두워진 태국

쿠테타 18회로 계속되는 태국의 위기는 어디로?




유구한 불교문화의 역사를 가진 태국의 공식 국명은 1939년까지 <시암 Siam> 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부패한 친서방 독재정권이 나라 이름을 <타일랜드<br /> Thailand> 로 바꾸었고, 이 국명이 지금은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한국은
<태국> 이라고 부른다.

태국의 총면적은 513,115km2로 한반도의 2.3배이며 인구는 6,500만이다. 주요민족은 타이족 81.5%, 화교 13.1%, 말레이족 2.9% 그리고 기타 2.5%이며 공용어는 타이어이다. 태국은 유명한 불교의 나라로 95%가 불교도이다. 회교 4%와 기독교는 1%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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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중남미 나라들과 아프리카 나라들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처럼 식민지가 된 적은 없다. 하지만 태국은 서구 제국주의가 접근해 옴으로 인하여 오랜 불교문화의 역사적 전통이 표면적으로는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미명하에 실질적으로 문화침략과 경제적 침략을 위한 문호개방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유명한 역사 영화 <왕과 나 King and I >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일 왕이 영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태국은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몽쿠트 Mongkut> 왕은 영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스웨덴, 프랑스 독일 등 서구나라들을 함께 받아들이는 문호개방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독립국이라는 명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방콕에 살고 있던 상류층 태국인들은 서양식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흉내내기 시작함으로 서양의 문화적 식민지화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한 예로 1855년에 태국에 도착한 영국인 존 보우랑은 표면적으로는 외교관계 수립이라고 했지만 개방을 강요했고, Mongkut 왕의 아들을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는데 성공했다. <출라롱코른 Chulalongkorn > 왕자를 영국으로 끌어가 명목상 유학생이 됐다.

하지만 태국의 왕자는 유학생활을 통하여 서양의 문화생활 양식에 너무나도 빠르
게 매료되여 서양의 문화, 의학, 과학 기술, 교육제도 등을 무차별하게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그때 태국에는 <상가>라고 하는 승려들의 공동체가 엄존하여 태국의 불교전통과 교육제도 등 문화전통을 오랜 세기동안 지켜오고 있었는데 이러한 태국의 승려들은 갑자기 어리둥절하여 혼란에 빠지게 됐다.

이것은 한국에서 일본이 이조 말엽에 조선왕조를 매수와 협박으로 일본으로 끌고갔던 수법과 상통하는 침략자들의 전술이었다.

영국에서 세뇌교육을 받은 줄라코른 왕자는 왕위에 올라 1868년에서 1910년까지 42년동안 태국의 왕으로 재위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영국은 영국의 성공회교회 가 형식적으로는 정교분리라고 하는 리론을 내세우면서 태국의 불교도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아전인수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이리하여 태국의 불교는 망해가는 나라의 운명을 구원해야 할 구국의 사명을 제한당하고 민족을 위한 불교의 역할을 포기했으니 태국의 불교는 맛잃은 소금이 되는 비운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태국의 불교는 여전히 정말 맛잃은 소금이 되어 불교의 형체만 겨우 생존하고 있다. 오늘날 태국의 대통령에게 자문을 해 주는 사람들 중에서 승려 출신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태국의 승려들은 개인의 복지와 안녕을 위하여 기원하는 불교의식만을 치르고 있다. 사회문제와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고 개인을 위한 <기복불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재 태국의 대통령을 위한 자문위원들은 하바드대와 런던대학 등 서구의 명문대학 출신의 경영학, 외교학 그리고 경제학자들 뿐이다. 비록 그들이 불교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미국과 영국 등 서방문화와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은 태국의 불교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국의 불교를 원망하고 멸시하고 있다.

오늘 태국의 도시들은 2/3 가 서구도시처럼 변모했다. 젊이들은 불교사원보다 청바지를 입고 콜라를 즐겨 마시고 백화점에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도시의 자본가들이 땅을 사들임으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큰 도시의 빈민가로 모여 들었다.

미국의 개발지상주의라는 병폐가 태국의 국토에서 앞뒤 가릴 것 없이 천연자원을 갈취하였다. 그 결과로 태국은 소비문화와 퇴폐문화만 급속히 번창해짐으로 인하여 도시마다 매춘과 마약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무조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젊은이들 중에서 경쟁력이 약한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서 막노동을 하거나 일본, 홍콩, 독일 등지에서 매춘에 종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서구의 <소비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가 불교를 대신하여 태국의 젊은이들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태국의 불교전통에는 <시누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함께 일하면서 편안을 누린다>라는 뜻이다. 경쟁보다는 협동을 중시하는 불교의 가치관을 말해 준다. 옛날 태국인들이 지금보다는 더 어렵게 살았다. 하지만 그래도 마을에 있는 절을 중심으로 정신생활과 사회생활을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태국 사회는 수백년 지켜온 고귀한 가치는 거의 붕괴되어 없어 졌고 서구적인 소비자본주의의 거센 파도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은 모두 다 파산되고 표류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문화의 생활양식을 모두 다 없애 버리고 무조건 소박한 농경사회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태국의 고귀한 불교의 전통문화와 서구의 기독교문화가 하등 마찰을 일으키지 말고 두 종교의 바람직한 장점을 모두 함께 받아 들이는 <종교다원화주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 된다.

종교적 대립주의를 뛰어 넘어 진정으로 모든 종교들은 한결같이 동등한 입장과 동등한 자격으로 상호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참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태국의 불교문화와 서구의 기독교문화가 상호간 가지고 있는 독특성을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종교다원주의>에 입각한 두 문화권의 화해와 평화적 교류와 발전을 기원하면서 태국의 어제와 오늘의 역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불교의 나라 <시암 Siam>의 역사


시암으로 알려진 땅에 약 2만년 전부터 여러 다양한 토착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에 AD 10 세기경에 중국과 인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인하여 문화적으로
불교의 영향하에 놓여져 있었다.

1230년경에 처음으로 시암에 불교국가인 수코타이 왕국이 세워졌다. 14세기 중반에 아유타야 왕국이 창건되었고 왕국의 위세를 떨쳐 이웃에 있는 군소 왕국들을 병합하여 시암에 불교적 궁전문화권을 이룩하였다.

1569년에 아유타야 왕국은 미얀마인들의 침공을 받아 15년동안 지배를 받았다.
1582년에 미얀마인들을 물리치고 차크리 왕조가 창건되고 영토를 확장하여 라 오스, 말레이 반도 그리고 캄보디아까지 지배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서 시암의 군주들이 서유럽 국가들과 정치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서유럽 나라들이 시암과 관계를 맺은 것은 서방이 시암의 위력을 의식하고 시암을 침략하기 위한 공격의 한 방법이었다. 이로 인하여 유럽의 영향력이 시암에 점점 더 확대되여 압박하고 있었다.

1867년에 시암은 캄보디아, 라오스와 말레이반도에 대한 관할권을 프랑스와 서구 나라들에게 모두 다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쿨랄롱크른 왕 (1886-1910)은 영국식 개혁정책에 그대로 문호개방을 했다.

시암의 마지막 왕으로 왕위에 오른 라마왕 7세는 1932년에 군부의 쿠테타에 의하여 퇴임하여 영국으로 추방을 당했다.

시암의 라마 왕 7세가 영국으로 추방됨으로 인하여 시암의 뿌리 깊은 전통적 <절대 군주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그 후로 <입헌 군주제>가 새로 시작됬다.

1939년에 국가의 공식 면칭을 <시암>에서 <타이, 태국>으로 바꾸었다.

1932년에 송크람 대령이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세워 1932년부터 1992 년까지 60년간 군인들이 통치를 했다. 그런데 이 60년 동안의 군사정권 기간에 태국에서 군사 쿠테타가 17번이나 일어났다. 쿠테타가 17번이나 계속하여 일어나 정권은 바뀌었지만 군인들이 통치하는 군정통치는 변함없이 60여년 동안 계속됐다.

태국의 절대군주 왕정을 군인들이 무너뜨리고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군인들끼리
매 3년 6개월마다 다시 쿠테타를 일으켜 모두 17번 쿠테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태국에서 쿠테타는 민주주의의 적이 되고 있었다.

쿠테타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아무 상관없이 군인들은 군정을 더욱 더 강화하고 정당화시킬 뿐이었다.

태국의 국왕은 지금도 명목상 나라의 수반으로 존속하고 있다. 하지만 국왕은 아무 실권이 없다. 군부가 지배하는 군정하에서 군인들이 실권을 잡고 계속 하여 통치하고 있는데 군정이 바뀔 때마다 국왕은 바뀐 군사정권을 뒤에서 추인해 주는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 2차대전때 태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태국내에는 반일운동 단체 Seri Thai 가 친서방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태국은 UN 에가입 했으며 냉전시기에는 친서방-친미노선을 선택하여 반공주의 친미국가로서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의 역할을 했다.

태국에서 쿠테타가 17번 일어 났지만 친미적인 친위 군부쿠테타 임으로 미국은 끄떡없이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매번 성공한 쿠테타와 군정을 변함없이 지원해 주었다.

태국에서는 친미이기만 하면 그 무엇이든 만병통치의 약이 된다.

2 태국에 친미 최고의 재벌 탁신 총리 등장


쿠테타가 17번이나 일어난 암흑의 태국이라 할지라도 그 어둡고 캄캄한 사회에서 새로운 시민사회의 출현에 대한 꿈이 기적처럼 서서히 움트고 있었다.

시민사회 안에서 정치적 공간이 점차적으로 확장되고 저항운동이 서서히 발전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토론문화가 확산되고 있었다.

새로운 사회단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민중이 더 많은 자유와 더 넓은 사회참여를 요구하는 저항운동이 군부를 대항하여 1970년대, 1980년대에 극히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일어났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특히 1992년 5월 항쟁을 비롯하여 그 후부터는 민중의 저항운동이 소극적인 국면을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의 저항운동으로 전개됐다.

이와 같은 저항운동이 군부와 민중의 충돌로 이어지면서 학생들과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수백명이 죽임을 당하고 또 비인간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97년에 군정은 시민사회의 투쟁에 굴복하여 드디어 군인통치의 헌법을 전폭적으로 개정하여 중앙집권적 독재정치를 종식하고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새헌법에는 교육에 관한 법, 보건 복지법 및 분권화를 포함한 다양한 의제들이 반영됐다.

위에 기술한 태국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기회주의적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태국의 최고의 재벌가 탁신이었다.

탁신은 뛰어난 사업가로서 업계에 뛰어든지 20년만에 통신재벌의 자리에 우뚝 올라 신화적인 화제의 인물이 됐다. 탁신은 태국의 경제를 살려주리라는 민중의 기대를 한몸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성공한 기업인이 정치에도 성공할 수 있을지 민중은 주목하고 있었다(한국의 정주영이나 삼성재벌을 연상하게 된다).

탁신은 뛰어난 사업가로서 1994년에 정계에 서서히 입문하기 시작했다. 1998 년에 탁신은 <타이락 타이당>을 창건하여 태국 정치의 중심적 인물로 우뚝 섰다.

2001년에 탁신은 태국 역사에서 제일 첫번째로 97년에 개정된 새헌법에 의한 전국민의 총선에서 압승하여 민선에 의한 첫번째 총리로 취임을 했다.

불교적 절대군주왕국의 길고긴 역사와 60년의 군부쿠테타에 의한 친미적 군사독재정권은 끝이 났다. 새로 태어난 탁신의 정권이 민선에 의한 민주적 정권이라 할지라도 세계의 안목은 태국의 민주화에 대하여 의혹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탁신 총리에대한 평가와 전망은 어떠했는가?

태국은 60년 동안의 군사독재로 인한 권위주의 지배와 IMF체제 하에서 대량의 실업자와 빈부의 격차 등으로 아시아의 대표적인 문제국가이다. 특히 태국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소득격차는 부자들과 1:19에 달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태국의 민중은 오랜 고통속에서 <가난한 자들의 모임>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생존권을 위한 투쟁으로 IMF와 ASEM 반대운동에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있는 것이 태국의 현실이었다.

이렇한 사회적 문제의 한 복판에서 <성공한 재벌>이라는 영웅적 모습으로 등장한 탁신 총리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 극에서 극으로 엇갈리고 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친미 독재정권하에서 재벌이 된 사람에게서 바랄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니다. 시민사회의 개혁에 의하여 선출됐으니 개혁정신을 보일 것이다. 민중은 지혜롭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허망된 희망으로 속기도 잘 한다.

결론적으로, 탁신 총리는 집권 초기에는 시민사회진영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이는 척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간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사회와 적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탁신 총리는 가난한 민중보다는 그를 둘러싼 대자본에 대한 보호를 우선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보여 주었다.

탁신 총리는 정권을 <기업>으로만 생각하고 민중의 권리와 자유는 안중에도 없고 국민을 다만 <소비자와 생산요소>로만 여김으로써 탁신 정권은 또 다시 암흑의 군정 일당독재시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태국의 사회정의를 위한 민중의 저항세력은 또 다시 정권의 채찍을 맞았다. 특히
무슬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남부 지방에서는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대량 실종되고 언론은 탄압받고 공무원들은 탁신 정권에 맹종하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탁신 정권은 말로만 민선정권이라고 크게 선전하면서 <빈곤과의 전쟁>이 아니라 <빈민과의 전쟁>을 벌리고 있었다. 탁신 정권은 TV와 리디오 방송을 장악하여 정부를 찬양하는 긍정적 방송만 할 수 있는 제한된 자유만 허락 했다.

탁신 총리는 경제정책을 우선순위로 내세웠지만 자신은 세금 한 푼도 내지 않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주식을 외국기업에 팔아 국가를 배신했다. 탁신 총리의 재직 동안에 탈세한 액수가 1400만 달러라고 하니 부정으로 착취한 돈은 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탁신 총리가 처음 취임할 때 개인 재산이 1천 760 만 달러였고 부인 재산도 2억4천300만 달러였는데 재임동안에 부정 축재로 모은 재산은 태산 같다. 탁신 총리가 외국에 감춰 놓은 재산도 많다고 하는데 중국에 사 놓은 집 한 채의 값만 해도 850만 달러라고 했다.

2001년에 탁신 총리가 집권한 후에 태국은 <친탁신>과 <반탁신>으로 두 동강났다. 옛날의 왕실과 군부독재의 위상이 다시 되살아나는 정책으로 인하여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이라는 민중의 희망은 완전히 실종됐다.

이와 같은 결과는 무었 때문인가? 탁신 총리의 통치이념과 통치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탁신 총리는 <국가가 회사>이고 <회사가 국가>라고 생각하는 <최고경영자 CEO>적 발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라고 하는 고집과 교만이 태국을 망쳐 놓았다.

한국의 민주화가 10년 후퇴하고 있는 오늘의 이명박 정권의 현실을 그 무엇으로 설명할까? 태국의 탁신 총리가 최고경영자(CEO)적 발상으로 태국을 망친 것처럼 바로 오늘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도 최고경영자(CEO)적 발상으로 한국을 망치고 있지나 않은지? 어찌 그리 일맥상통하고 있는지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발상은 <한국이 회사> 이고 <회사가 한국이다> 라는 엉뚱한 생각으로 CEO 귀신에 미친것 아닌가 ?

탁신 총리는 2005년에 재선에 승리하여 제2기 집권을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9월에 쿠테타로 쫓겨났다. 탁신 총리가 영국에 출장 중이었는데 그 사이에 본국에서 탁신 총리의 부패정권을 항의하는 일부 군인들이 반정부 쿠테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탁신 총리는 영국에서 발이 묶인채 귀국하지 못했다.

탁신 총리는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60년 군정을 종식시키는 새 역사를 창조 하기는 했지만 탁신 총리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또 다시 군인들이 제18회 쿠테타를 일으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귀국도 못하는 방랑객의 신세로 전락했다.

탁신은 입국이 금지됐고 탁신이 창건한 정당은 5년동안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
탁신은 영국을 비롯하여 일본 필리핀 등 많은 나라들에게 망명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해 국제적 고아가 되고 말았다. 유일한 길은 본국으로 돌아가 감옥살이를 하는 길밖에 없지만 그래도 쌓아 놓은 돈이 많아 방랑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3.부정축재로 축출된 탁신의 측근자 사막 총리


2008년 1월에 새로 선출된 사막 총리는 태국 각료직을 다섯 번 지냈으며 부총리와 방콕 지사를 역임한 유명 정치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사막은 태국 민중의 증오의 대상인 탁신 전 총리와 매우 가까운 측근인물 이다. 사막 신임 총리는 현재 홍콩에 숨어서 도피 중인 탁신과 지금도 수시로 잡촉하여 태국의 국내사정을 토의하면서 탁신의 귀국의사를 경청하고 있다. 하지만 사막 총리는 <나는 탁신 전 총리의 꼭두각시가 아니다>라고 극구 변명을 했다.

사막 총리의 변명을 곧이듣는 민중은 한 사람도 없다. 태국의 민심은 이상하게 양분되고 있다. 축출당한 탁신 전 총리와 신임 사막 총리를 절대 지지하는 <국민의 힘 PPP>이 있고 이를 절대 반대하는 <국민민주주의 연대 PAD>의 두 진영이 대립하고 있었다.

<국민민주주의연대>는 부패하고 도주 중인 탁신을 강제로 소환하여 국민의 심판을 받아 처형하고 부정축재한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에 횐원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뿐만 아니라 탁신의 무사귀국을 모의하며 음모하고 있는 사막 총리의 즉각 퇴진을 웨치면서 수만의 군중이 데모를 추진하고 있었다.

사막 총리는 수도인 방콕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반대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사막 총리를 지지하는 일부 군부세력과 기득권세력은 결합하여 민중의 항의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는 오히려 더 확산되고 있었다.

친 탁신 계열의 대표적인 인물인 사막총리는 과거 방콕시장 시절에 많은 비리와 횡령으로 의혹을 일으켰으며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투성이 정치인이었다.

사막 총리는 군정시대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학생운동을 탄압하는데 앞장섰으며 학생운동가들을 살해하는데 관여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었다.

또 사막 총리는 탁신정권의 내무차관 시절에 <공산주의자들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폭언을 했으며 내무장관 시절에는 태국의 사회주의운동가 수백명을 체포하고 처벌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사막 총리는 <정치 공룡, 거친 돼지, 개 주둥이> 등 별명을 가지고 있음으로 오히려 막노동꾼들과 친교하는 야릇한 면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쨌던 사막 총리는 총리직에 오른지 7개월만인 2008년 8월에 헌법재판의 위헌 판결을 받아 끝내 불명예 퇴진을 당하고 말았다.

사막의 퇴진으로 인하여 발생한 정치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태국의회는 임시의회를 열어 후임 총리로 솜차이를 선출하고 2008년 9월에 전격 임명했다.

새로 임명된 솜차이 총리는 <국민의 힘 PPP>당의 부총재이며 법무부장관과 노동부장관을 지낸 판사 출신의 유능한 정치가이다.

하지만 솜차이 신임 총리의 임명은 절대로 순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솜차이 총리는 축출된 탁신 전 총리의 매제로서 처남남매의 관계였다. 이 어찌 순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추방된 탁신의 숨어 있는 정치적 영향력이 아직도 태국의 정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산 증거였다. 솜차이 총리는 7개월 만에 물러난 사막 전 총리처럼 탁신의 대리인이라는 민중의 불신과 심판을 절대로 면할 수가 없었다.

반 탁신 시민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대>가 이끄는 시위대는 솜차이는 사막과 마찬가지로 탁신의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청사를 점거하여 항의농성을 벌였다. 태국의 정국은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솜차이 총리는 취임 1개월에 민중세력과 민중세력을 업고 있는 PAD 그리고 일부 군부의 반대의 목소리에 의하여 퇴진압력을 받고 있다.

시위대는 수완나품 국제공항과 돈무엉 공항을 점거하여 솜차이 총리가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두 곳의 공항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태국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병력을 동원했다. 심지어 쿠테타설까지 퍼뜨리고 있었다. 군부의 실세인 육군참모총장은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도대체 군은 태국의 두 악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는지 알수 없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태국의 정치는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탁신의 권력과 사막의 지지세력인 <국민의힘 PPP>당이 합력하여 아직 건재하고 있었다. 솜차이 신임 총리도 이 양대 세력의 배경으로 임명이 됐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뒤에 있기 때문에 사람은 바뀌었지만 당의 권력기반은 여전히 튼튼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국민민주주의연합 PAD>은 독선적이며 엘리트 왕정주의자들의 집단이다. 하지만 탁신계와 PPP와 싸우기 위해서는 민중의 편에 서서 공동보조를 취하고 시위와 항거에는 민중의 힘과 합친다.

학생운동단체들과 노동조합 등 민중개혁운동 단체들은 PAD와 함께 싸우면서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은 노선의 근본적 차이점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국의 <군부>와 <헌법재판소> 그리고 <의회>는 모두 3대 악들이었다. 그 중에서 어느 악을 선택하고 어느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하여 항상 방황하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친재벌 편에 설 것인가? 시위대의 위협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미국의 압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대답은 태국의 민중 속에서 찾아야만 했다. 근본적인 질문과 그 대답을 찾는 옳은 길은 계속되는 태국의 위기 속에서 부르짖는 <태국의 광주항쟁> 속에서 찾아야만 했다.

<그 누가 태국 민중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가?> 그것은 바로 미국이 아닌가?

어쨌던 태국의 헌법재판소는 2008년 12월 2일에 의회가 지명한 솜차이 총리를
불법적 지명이라고 판결했다. 솜차이는 앞으로 5년간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솜차이는 겨우 3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퇴임을 당했다.

4.민주당 7년반만에 아비싯 총리로 임명


태국의 민주당은 2001년의 총선에서 탁신에게 패배한 후 7년반만에 2008년 12월 15일에 제27대 총리로 민주당의 총재인 아비싯(44세)이 선출됐다.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당원들은 의사당 통로를 가로막고 아비싯 총리의 임명을 결사반대하여 항의시위를 했다. 여야가 완전히 뒤바뀐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비싯 총리는 제일 첫번째 과제로 PPP당의 중도파를 흡수하고 3개 군소 정당들을 통합하여 연립정부를 세우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첫 성명에서 밝혔다.

신임 아비싯 총리는 누구인가?

아비싯 총리는 태국의 엘리트를 대표하는 지식층의 인물이다. 그는 영국에서 출생했으며 영국의 명문사립 이튼학교와 옥스퍼드대를 나왔다. 부모는 모두 의학 교수들이다.

정치평론가들은 젊고 참신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이나믹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탁신 전 총리는 부정부패와 독재로 악명이 높기는 했지만 자기 고향 농촌을 직접 찾아가서 돈을 마구 뿌려 의료보험과 생계비 지원 등을 전개하여 순박한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단이 풍부했다. 그런데 아비싯 총리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아비싯 총리는 태국의 왕정을 지지하는 화이트칼라 지식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농민과 노동자 민중의 지지를 받기에는 력부족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아비싯 총리가 계층간의 통합을 이루기에는 한계점이 있다고 평한다. 아비싯 총리는 명석하고 참신하다. 하지만 서민과 농민의 정서를 몰라 한계점이 있다고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탁신 전 총리 진영인 PPP 측에서는 최근 군부와의 불편한 관계를 노골적으로 표시 하면서 아비싯 총리를 군부의 앞잡이라고까지 악평을 했다. 아비싯 총리의 등장은 군부의 무혈쿠테타이라고까지 혹평을 하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와같은 PPP당의 악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탁신의 잔당들이 바로 몇 일 전에 <독재저항민주주의연합전선 UDD>을 새로 창건하여 아비싯 총리에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포문을 연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비싯 총리의 새 정권은 또다시 수렁 속으로 빠져들 우려가 높은 것 이다.

UDD 사람들은 탁신의 지지자로서 PPP의 옷을 벗어 버리고 변모된 모습으로 아비싯 총리와 싸우기 위하여 UDD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2009년 2월 13일 보도에 의하년 <국민민주주의연대 PAD> 5000명이 모여 국왕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으로 노란색 옷을 입고 정치적 집회를 했다. 이에 대항하여 친탁신 UDD 측에서는 상대와 구별하기 위하여 빨간 옷을 입고 시위를 했다. 이들에게 <민족>은 없고 오직 <반탁신>과 <친탁신>만 있을 뿐이다.

탁신정권이 2001-2006년에 집권을 하면서 저지른 폭정으로 수백명이 숨지고 수천명이 투옥됐다. 태국의 인권탄압에 대하여 녹색연대, 인권평화국제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그리고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등 수없이 많은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이 오래전부터 오늘까지 공식적으로 문제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로 태국과 미국이 체결한 IMF, FTA, ASEAN, 군사동맹 등 수십가지 조약과 협정들에 의하여 태국이 움쩍달삭도 못하도록 묶어놓아 속박된 상태에서 제아무리 인권단체들이 국내외에서 웨친들 무슨 반응이 있겠는가?

게속되는 태국의 위기와 비극 속에서 들여오는 소리는 처량하다.
<혼란 속의 태국이여 사희정의 민족운동은 어디로 가고 있나? 그 누가 민중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있는가?>

1992년 5월19일은 <태국의 검은 5월>이라는 역사적 날이었다.
이날은 태국의 민주화 운동의 분기점이 되었던 날이다. 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그날에 흘린 민중의 피에 대하여 1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태국정부는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를 명령한 군벌의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우지 않고 있다.

한국의 80년의 5.18 광주항쟁을 또다시 태국에서 보는 듯하다.

이 글의 끝을 맺으며,

태국의 양심이며 추방당해 망명생활을 했던 불교학자인 술락 시바락사 박사는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평화운동가이다. 그는 12개의 NGO 를 창설하였고 국제평화단을 지도한 정의의 사도이다.

술락 박사는 서양의 소비자본주의가 태국의 본래의 모습을 파괴 했다고 비판했다. 영국과 미국은 태국의 엘리트들을 교육시키고 세뇌시켜서 <개발의 논리>를 주입시켰는데 그것은 곧 <착취의 논리>라고 규탄한다. 침략적 개발의 광기는 태국의 자연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태국 국민의 인간성과 민족성까지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불교학자로서 태국의 재건과 재생을 념원하여 다음의 세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살아 있는 과거를 역설한다. 프로이드 식의 과거로의 은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락 박사는 태국의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비판하고 그 비판이 미래를 이끌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 준다고 역설하고 있다.

둘째 일상화의 불교를 제시한다. 수락 박사가 신봉하는 불교는 개발의 암흑성을 폭로해 주는 종교라고 설명한다. 그 시대의 사회변혁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불교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 지난 역사를 반추해 보면서 지배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민족의 자주를 지향하는 희망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오늘의 무기력한 태국의 볼교계를 한탄했다.

셋째 강대국을 향한 태국 불교의 고뇌에 찬 권유의 말을 했다. 태국은 강대국에 시달리는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옛말에 <태국에는 쌀이있고 강물에는 고기가 있다>는 속담이 있다. 서구 강대국들에 의하여 지금은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 없어지고 오직 <시장경제>만 확산되고 있다.

불교가 세계평화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람의 각성이 세계평화의 출발점이라는 신념이 태국불교의 답변이며 신념이다.

큰 것 만을 숭상하는 강자의 논리는 결국 자멸의 길로 달려가는 어리석음이라고 태국의 옛 지혜는 말해 준다. 약한 것과 작은 것으로 대표되는 존재의 내면적 완성이야 말로 인간사회와 나라와 민족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하여 고귀한 정신임에 틀림없다고 술락 박사는 불교적 소신을 밝히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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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인생 15-01-08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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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물들여 타락함이 절정에 달한 개발도상국사람들이여 차라리 북녘땅으로 가시라 거기가면 건전하고 아름다운사람들이 사는곳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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