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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중남미 흑인왕국 <아이티> 통해 제3세계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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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7-12-03 00:00 조회30,4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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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통일운동 원로 유태영 박사는 "미국 지배세력은 국내 뿐만 아니라 지구촌 제3세계 나라들을 간섭하고 방해하며 주권을 강탈하는 것을 밥먹듯 해왔다. 제3세계 나라들의 정치세력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반대세력을 육성하여 쿠테타를 일으키는가 하면 암살, 파괴 등의 방법들을 동원하여 다른나라들을 괴롭혀 왔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사례는 이제 만인이 주지하는 사실로 밝혀졌다고 말한다. 그는 중남미의 흑인 나라 <아이티>를 통하여 제3세계 나라들의 처지를 설명해 준다. 남한도 <아이티>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시사되고 있다. 그의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중남미에 유일한 흑인왕국 <아이티>를 통해본

제3세계 나라들과 초강대국 미국과의 관계를 조명한다.

*글:유태영 박사(뉴욕거주 재미통일운동 원로)


흑인의 나라 이라면 먼저 아프리카대륙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카리브해 국가들중의 하나인 아이티는 흑인의 나라이다.아이티는 1804년에 독립을 쟁취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총 인구8백80만 중에서 흑인의 수 95%를 유지하고 있는 명실 공히 확실한 흑인의 나라이다.

1. 프랑스 노예 해방


<##IMAGE##> 1492년 10월에 그리스토퍼 코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의 첫 발자국을 남긴 곳이 현재 카리브해 국가 중의 하나인 아이티섬 이였다. 코럼버스의 뒤를 따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식민지 침략의 열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 했다.

1500년대초에 스페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아이티섬에 상륙하여 식민지 침략을 시작했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등을 재배하면서 침략의 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스페인 초기 침략자들은 토지개발보다 더 먼저 시작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이티 섬에서 수천년동안 폴리네시아 문화권속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 아라와크(Arawaks) 부족을 전멸시킨 잔인한 살상행위 이였다.

원주민들을 전멸시킨 후에 그 아름다운 섬에서 백인들만이 잘 살겠다는 스페인 침략자들의 잔인한 꿈은 일단 성취 되었다. 그들의 잔인한 꿈은 성취 되었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그 것은 원주민들을 전멸시킨후에 농지를 개척 하자니 일손이 턱 없이 부족한 문제였다.

식민지에서 일손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하여 생각해 낸것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붙잡아 오는 방법이였다. 그리하여 흑인노예 제도가 1512년 이후 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의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루를 잡는것 처럼 흑인들을 붙잡아 신천신지 아메리카로 싣고 와서 농장주들에게 팔아 넘겼다. 밑천 안드는 장사를 하여 서로 이득을 보는 백인들의 흑인노예시장은 그후 부터 수백년동안 계속되었다.

기독교문화가 세계를 지배 하고 있는 오늘 21세기에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비인간화 문제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것 처럼 그 옛날 아프리카에서 인간 사냥을 하여 노예로 팔아 먹은 그 당시의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그 무지한 죄악들을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세월이 얼마 지난후에 작은 섬나라, <아이티>를 포기하고 보다 더 큰 욕망을 채우려고 남아메리카의 광활한 대륙을 향하여 떠나가고 말았다.

1697년에 스페인이 다 떠나간 후에 프랑스는 “리스위크조약”을 맺고 아이티를 프랑스의 령토로 만들었다. 원주민들은 모두 다 학살사태로 사라져 없어고 흑인노예들만 다소 남아 있는 아이티의 새 주인으로 프랑스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아이티의 새 주인이 된 프랑스는 아이티에 사탕수수와 커피농장을 확대하여
유럽으로 수출 하는 새로운 식민지로 출발을 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노예 장사꾼들을 통하여 흑인노예의 수를 50만으로 대폭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아이티를 대대적인 열대 농산물을 수출하는 수출의 원산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아이티에 항구도시를 건설하여 당시 뉴욕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화려한 항구 도시를 만들고 여기에서 프랑스 본국의 경제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50만 흑인 노예들의 피땀의 대가로 프랑스 제국의 영예와 번영을 100년 동안이나 누렸다. 하지만 이 100년의 세월은 흑인 노예들에게는 알몸으로 채찍을 맞으면서 피눈물의 고역을 치루는 절망과 분노의 길고 긴 100년이였다.

이랑과 고랑이되는 역사의 변천을 막을 수 있는 제국주의는 이 세상에 없는것이다.
100년의 암혹 속에서 절망과 분노로 살아가고 있는 흑인 노예들에게 대서양을 건너 희망의 불씨가 날아 왔다. 그 희망의 불씨는 프랑스 혁명의 소식이였다. 또 그때 마침 미국에서도 George Washington대통령이 주장한 만민 평화평등 사상에 대한 소식이 들여오고 있었다.

1791년 8월에 드디어 아이티 프랑스령 산도밍고에서 흑인 노예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의 진전을 예민하게 주시하면서 아이티에서 항쟁에 박차를 가하였다. 폭동은 아이티 전역으로 확장되여 3년동안 게속되었다. 프랑스 나폴레옹 장군은 강력한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흑인 노예들의 거센 저항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퇴진하고 말았다.

1804년1월1일에 양부모가 다 흑인 노예인 데살린 (Jean J. Dessaline이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에 역사이래 처음으로 “아이티 흑인공화국” 이 창설 되였다. 이것이 바로 아이티 흑인공화국 역사적 시발점이였으며, 공영어는 물론 그때부터 오늘까지 프랑스어 이다.

2. 독립 후유증을 악용하는 미국



아이티 흑인나라의 독립은 중남미의 모든 나라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아이티의 혁명을 본 받아 흑인들과 원주민들도 각 지역에서 혁명을 일으킬 기회를 꿈꾸게 되었다. 또 극심한 착취와 학대에 대하여 유럽의 백인들에게 전면으로 항의를 하려는 추세를 나타나 보이기도 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관련국들과 연대하고 협력 하여 내적으로는 분렬을 조장하
고 외적으로는 봉쇄와 고립을 시킴으로써 아이티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온갖 시도를 다 했다.

로마 교황청은 아이티와의 단절을 선포하고 사제들을 철수시켰다. 프랑스는 식민지 통치하에서 아이티에 투자했던 모든 자원에대한 대가를 변상하라고 사정
없이 압박 했다.

미국은 아이티 주변을 군사적으로 둘러 싸 위협하고 내적으로는 분렬과 하극상을 은근히 부추기고 후원 함으로써 아이티에 정변을 일으켜 사회적 불안을 확대시키는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아이티는 독립 후에 사정 없이 불어닥치는 “독립후유증”으로 인하여 날이 갈수록 혼돈과 험란한 역사를 헤메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선한 사마리아 인처럼 가장하면서 사실은 아이티의 점증하는 위기를 악용
만 했다.

미개한 아프리카 밀림에서 짐승모양으로 붙잡혀와서2대,3대4대에 걸처 줄곳 노예로만 살아 온 그들이기 때문에 비록 혁명으로 자주 독립을 쟁취 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독립국가를 자주적으로 운영해 나아가는 정치적 지도력에 있어서는 큰 한계점이 있었고 또 엄청난 위기와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혁명을 지휘하고 독립을 선언한 혁명투사 Jean Dessaline 초대 대통령이 취임한지 2년후에 흑인들끼리 싸우는 분쟁에 희생되여 정적에의하여 암살榮.

1806년에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Chrisopher 대통령은 권력에 굼주렸던 흑인들의 한 풀이를 하는 듯 광적으로 자기와 같이 노예 이였던 국민들을 향하여 무서운 독재를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유일한 흑인왕국을 과시 할 목적으로1,000미터의 높은 산꼭대기에 화려하고 웅장한 왕궁을 건설 하기위하여 인민에게 노예처럼 강제 노동을 명령했다.

왕궁에 올라가는 길을 닦는 데만3,000명을 강제로 동원했다.
독립된 새나라를 기뻐하는 흑인들은 오히려 흑인대통령에게 극심한 구박과 중노동을 강요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에 빠지고 있었다.

자기를 대통령이라 부르지말고 “앙리 1세 국왕” 이라고 부르 라고 국민에게 명령을 한 이 독재자는 결국 반대파에 쫓겨 도망을 치다가 자살로 생을 끝내고 말었다.

1820-1844년에 Pierre Boyer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기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새로 창설되고 분리되여 갈라저 나감으로써 나라는 동서로 분리 榮. 혁명으로
흑인이 주권을 가지는 새나라를 창건 하기는 했지만 나라의 불행한 사건들이 끝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와같이 싸움과 분열이 계속되는 후유증의 그 원인이 무엇일가?
첫째는 근본적으로 아이티 흑인의 무지와 혼란을 악용하여 뒤에서 조정하면서 재침략을 노리는 미국때문이다.

둘째는 흑인사회는 “순종아프리카 흑인”과 “혼혈흑인” 들이 두개의 세력으로 분리 되는데 이들중에서 “혼혈흑인” 들이 경제권을 장학하고 있음으로 늘 두 세력간에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셋째는 오래 뿌리 박힌 노예생활로인하여 형성된 문화적 후진성과 열등의식 그리
고 민주주의 에대한 훈련이전혀 없는 역사성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 이라고 볼 수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독립 후1800년대 말에 있어서 아이티 흑인 공화국의 정세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혼미 가운데 빠지고 있었다. 새로운 대통령들만 자주 등장했다가 또 즉시 물러 나가는 호란속에서 경제는 퇴보하고 외국자본들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속수무책 이였다.

이와같은 혼란속에서 미국은1905년을 기점으로하여 간접 또는 직접적인 방법으 로 아이티에 대한 경제적 통치권을 완전히 장학하고 있었다. 그렇다가 1915년 7 월에 드디어 미국은 아이티의 내분을 구실로 삼으면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은근슬적 아이티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아이티 흑인공화국을 점령하고 통치한 그 과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미국의 외국자본 투입과 경제적 침투 1820년대부터 시작하여 1915년 까지.
2. 미국의 군사적 침략과 군정통치 1915년 --- 1934년
3, 미국이 쿠테타로 세운 독재 정권 1934년 --- 1990년

자유의 꿈이 고통과 시련을 맞나게되는 경우를 인류역사를 통하여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이티의 흑인들이 민중봉기로 획득한 자유의 꿈은 고통과 시련을 맛나는 정도가 아니라 미국에의하여 감당하기 힘든 최악의 재앙을 당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아이티에서 군정을 20년동안 게속한 후에1934년에 형식적으로 군정을 끝 냈다. 하지만 미국은 군정 이후에 또 다시 쿠테타를 이르켜서 군정보다 더 극악한 친미 독재자 뒤발리아(Duvalier) 를 세워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게속 하여 장기집권을 하도록 뒤에서 조종하면서 1990년까지 66년 동안 식민 통치를 펄 첬다. 그러기까 미국은 모두 75년동안 이나 군정과 쿠테타로 아이티를 지배하고 통치를 했다.

3. 해방신학 신봉자 가톨릭 신부 아리스티드 대통령



<##IMAGE##> 아이티는 불란서의 영향으로 총 인구의 80%가 가톨릭 교인이다. 1804년 독립 후187년의 긴 세월이 흘러갔는데, 아이티 역사 이래 비로서 처음으로 국제적 여론의 뒷 받침을 받으면서 민주주의에 의하여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 졌다.

이른바 좌경 민중신학 신봉자라고 불리움을 받는 아리스티드(Bertrand Aristide) 가톨릭 신부가 역사이래 처음으로 민중들의 투표에 의하여 당선이 되였다. 1990년 12월에 당선이 되여 1991년 2월에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노예 흑인들이 그들의 손으로 혁명을 일으켜서 독립을 쟁취했으며, 187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또 역시 그들의 손으로 투표를 하여 역사이래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을 선출 하여 취임을 하게 되었던것이다. 노예시장을 통하여 아이티 섬으로 팔려 왔을 때 부터 따진다면 어언간 400여년의 세월이 흘러 갔다. 400년 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민주주의와 민선에 의하여 민중을 위주로하는 흑인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리스티드는 빈민가 출신으로 미국, 이스라엘, 캐나다에서 유학한 뛰어난 신학자 였다. 그는 빈민들의 대변자로 역할을 하면서 암살의 위협
을 받기도 했다. 그는 탁월한 인품과 강한 신념으로 민중의 지도자로서
희생봉사를 했기때문에 70%의 득표로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1991년 2월에 취임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결코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민중신학의 신봉자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취임한지 불과 9개월이 지난 어느날 갑짜기 또 쿠테타를 당했다.

이번 쿠테타에 대하여 유럽의 어느 internet Web Site는 다음과 같이 논평을 발표 했다. “a coup made in the USA” “미국 산 쿠테타가 발생했다” 라고 노골적으로 비평을 했다.

미국이 같은 해인 1991년에 이락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락전의 이유는 독재자를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회복 시키기 위함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아이티에서는 독립후에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선 대통령을 쿠테타로 제거하고 미국이 지원하는 독재자를 그자리에 세우기 위함 이였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정 반대의 모순 덩어리 미국인가?
그러면서 미국은 평화를 위하여 싸운다고 말한다. 이것을 거짓과 위선의 이중잣대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을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 지배세력을 그 동안 수많은 약소국들을 제 마음대로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켜 왔다.

쿠테타의 주역은 미국의 Bush와 프랑스의 Chirac 대통령 두 사람이였고 하수인들
미국의 CIA와 미국에서 훈련 받은 아이티 군 장성 세드라스(Raoul Cedras) 였
다.

아리스테드 대통령을 축출하고 쿠테타로 집권을 한 세드라스는 3년동안 지독한 친미 독재를 했다. 미국이 만들어 낸 쿠테타로 인하여 죄없는 아이티 중5,000명이 생명을 잃었고,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와서 3년동안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다.

3년 동안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아리스티드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UN과 미국을 향하여 아이티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위하여 모든 원조를 끊고
고립시켜 달라고 주장을 했다. 만일 원조가 끊어지면 당장 민중들의 고난과 고통이 심화될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그는 판단 했다.

아리스테드의 주장대로 미국은 모든 원조를 끊고 독재정권을 고립시켰다.
그 이유는 독재가 너무 심해지면 미국에게 모든 원망이 돌아오고 반미감정이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아뭏든 아리스테드의 유일한 희망은 어떻게 해서든지 속히 아이티로 돌아가서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정권을 회복 하겠다는 것이였다.

1994년에Clinton 대통령의 지원과 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아리스티드는귀국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미국은 3년전에 쿠테타로 권좌에 앉게 한 군장성 세드라를 이번에는 외국으로 축출하고 아리스테드를 대통령직에 다시 복귀시키고 그의 남은 임기기간을채우는 조건으로 1996년까지 대통령직에 복귀 시켰다. 그리고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미군을 또 다시 아이티에 주둔 시켯다. 미국의 이중 플레이는 이와 같이 아무 차질도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헌법에 대통령직을 연임할 수 없기때문에 아리스테드는 1996년에 평민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리스테드 대통령은 남은 임기를 다 마치고 퇴임하면서 그의 측근인 르네 프레발 (Rene Preval) 을 추천하여 후임 대통령이 되게 했다.

4년 동안 평민으로 지내다가 아리스티드는 2000년에 다시 출마 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민중들은 아직도 아리스테드에대한 애정과 기대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군부와 기득권 유산층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선이 되었다.
당선이 되여 대통령에 또 다시 취임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앞에는 태산같은 문제들이 쌓여 있었다.

4. 병주고 약주면서 또 약주고 병 주는 미국



아이티에서 oil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또 지하자원이 욕심날 땅도 아니다.
그러면 왜Bush는 아이티를 침공하여 민선 대통령 아리스테드를 취임 한지 9개월
만에 쿠테타를 일으켜서 미국으로 납치했을까? 왜 3년후에는 아리스테드를 대통령으로 복귀 시켰다가 또 다시 축출 시켰을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찾아 볼 수 있다.

1. 미국의 공화당 보수세력은 민중신학 신봉자인 좌경화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오래동안 존속 하는것을 원치 않고 속히 제거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와같은 보수 진영의 여론이 부쉬를 압박했다. 부쉬는 이 여론을 등에 업고 해병대를 투입시켜 쿠테타를 일으켜서 아리스테드의 정권을 무너 뜨렸다.

2. 아이티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막강한 군부는 뿌리 깊은 친미보수 기득권 세력들 이다. 이 군부세력들은 아리스테드 대통령의 정권이 등장함으로 민중의 세력과 충돌하개 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친미 보수 세력들이 미국의 우익 보수 세력과 야합하여 쿠테타를 성공시켰다.

3. 부쉬는 이락 전쟁으로 인하여 국제적 여론의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적 여론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를 원하고 있다. 즉 “미국은 오직0il 만을 위해서 저쟁을 하는 나라가 아니다” 라는것을 과시 함으로써 국제적 관심을 조금이라도 전환 시키려는 의도도 깔려있다고 본다.

4. 부쉬는 해방신학자 아리스테드를 공갈과 협박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편으 로는 부드럽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득 매수하여 앞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리하여 그를 미국으로 망명을 시켜서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여러 가지 타협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복귀하면IMF를 수용 하겠다는 타협이였다.
미국의 의도대로 아리스테드는 결국 그렇게 설득 매수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

2000년에 아리스테드 대통령이 복귀하여 대통령에 재 취임을 했다. 취임을 한후 미국은 외면하면서 원조를 일절 끊어 경제난에 빠지게 했다.

전임 독재정권들이 망처 놓은 경제로 인하여 빈부의격차와 일반 서민들이 당하는
빈곤은 전 세계에서 최하권으로 떨어 다. 절대 다수인 서민들은 하루에 $1이하로 겨우 살아가는 실정인데도 미국은 모든 원조를 끊었다. 이것은 미국이 아리스테드 대통령을 복귀시켜 놓고 다시 버렸다는 뜻이다.

곤경에 빠진 아리스테드 대통령에게 미국은 IMF를 수용하라고 강요했다. IMF수용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비밀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것이였다.
아리스테드 대통령이 IMF를 순수히 받아 들이는것을 보고 그를 지지하던 민중들은 일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맹렬히 규탄했다. 이것은 마치도 남한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모습을 보는 것과도 같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리스테드 대통령을 위험한 좌파 지도자라고 몰아 부쳤다.
진퇴양난에 빠진 대통령은 양진영에서 매일 같이 벌리는 데모와 폭동을 막기위하
여 할 수 없이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 진압을 강행 했다. 언론은 아리스테드 정권을 민중을 위한 정권이 아니라 무서운 독재정권이라고 규탄했다.

2004년1월은 아이티 흑인 공화국 창건 20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해야할 날이다.
하지만 기념은 고사하고 우파와 좌파 양진영에서 아리스테드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외치는 소요와 혼란으로 인하여 200주년을 맞는 아이티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미국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격으로 아이티의 보수진영과 우익 강경파들에게 막대한 돈을 대주면서 아리스테드 정권을 무너지도록 조종하고있었다. 미국은 2004년2월29일에 이른바 유엔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2,300명의 군인들을 아이티에 다시 상륙 시켰다. “미국산 쿠테타” 는 또 다시 성공했다.

2004년5월31일에 아리스테드 대통령과 그의 가족은 미국 국회의 흑인 대표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남아프리카 Johannesburg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아리스테드 대통령의 첫번째 망명지는 미국 이였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망명지는 본래 흑인들의 본 고향인 아프리카가 되었다.

5. 해방신학 신봉자 아리스테드 신부의 마지막 정치적 고백


조상의 땅 아프리카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한 아리스테드 신부에게 그 지역의 명문 대학이나 운동 단체들로부터 강연의 초청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일체 응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프리카, 조상의 나라의 원어인 Zulu어 공부에만 열중하여 언어학의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이제는 영어나 불어 뿐만 아니라 Zulu어를 유창하게 말 할 수 있게되었다.

아리스테드 신부는 어느 날 취재차 방문 해온 유명한 저술가 Naomi Klein에게 Catholic의 사제로써 양심적 마지막 정치적 고백을 숨김 없이 털어 놓았다.

다음은 그의 고백적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내가 미국 Washington에 붙잡혀 있을 때 미국이 나에게 강요한 말은 오직 세개의
단어 뿐 이였다. 즉 사유화, 사유화, 사유화.

Clinton 행정부는 나를 대통령으로 복귀시키는 조건으로 아이티의 정치적 체제를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라고 강요하면서, 기존의 경제적 프로그람들을 일체 다 쓸어 버리고 새 틀을 짜자고 요구했다”

그 새틀이란 무엇인가?

1. 모든 사회봉사 프로그람을 대폭 삭감하라.
2. 자유무역의 문을 활짝 열라
3. 쌀과 옥수수등 수입의 관세를 절반 낮추라.
4.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체들을 사유화 하라. 특히 통신과 전기를.

“내가 그때 미국에 붙잡혀 있으면서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감히 반대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타협적 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제시 했다“

1. 공기업을 사유화하면 오직 개인 기업주들이 독점을하여 빈부의 격차가 더 심화되여 사회문제가 대두됨으로 조건을 붙여야한다. 그 조건은 “독점금지법”을 먼저 국회에서 통과 시켜야 한다.

2. 공기업들을 사유화하여 얻는 이득을 근로자들과 분배하기 위하여 주식분배 소유제도를 세워야 한다.

미국은 아리스테드의 제안을 완전히 묵살하고 사전에 약속했던 5억달러($500 million)를 단박에 취소하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히 경제적 쿠테타이다 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이상과 같은 상황하에서 어쨌던 아리스테드 대통령은 미국 망명 생활 4년만에 미군 2,300명의 호위(감시)하에서 아이티로 돌아와 대통령직에 복귀했던 겄이다.

아리스테드 대통령이 4년만에 돌아와 보니 아이티는 친미 독재정권 하에서 경제적으로 파탄은 말 할 것도 없고 사회 악은 극도에 이르러 유엔이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법죄율이 세계에서 132위라고 했다.

그러면 아리스테드 대통령이 두번째로 2004년5월 31일에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로 영구적 망명을 했는데, 그러면 그 후에 아이티는 오늘 어떻게 되고 있는가?

미국은 과도기적 군정을 속히 끝내고 선거를 통하여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드디어 2006년2월7일에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다.

극도의 혼돈과 절망속에서 해방신학 신봉자 아리스테드 대통령에게 일시 실망하고 등을 돌렸던 민중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민중들의 그에 대한 미련과 추억은 잊을래야 잊를 수 없는것 이었다.

아리스테드 대통령의 최대의 측근자이며 또한 아리스테드 대통령의 공석을 메꾸어 일시 대통령이 되였던 르네 프레발(Rene Preval 1996 - 2000) 이 민중의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다.

군부 독재기득권 세력은 프레발을 지지하는 민중의 열망을 도저히 막을 수 가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제동을 걸어 득표의 계수를 트집 잡아 선거 무효 소동을 일으키기 까지했다.
득표 계수를 하루 중단하는 우연곡절을 겪은 후에 드디어 프레발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확정 발표되었다.

프레발 대통령이 취임을 한 후에 제일 첫번 발언이 무엇이였을까?

“ 나는 아프리카에 망명중인 아리스테드 전 대통령이 집으로 다시 돌아 오기를
원한다”

특정 상황에서 미국이 태산같이 큰 힘이 될 수 있지만 , 다른 상화 아래서는 연약한
민중의 힘이 태산을 넘어 앞으로 달려간다는 사실을 오늘 이스파노 아메리카는 이곳 저곳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끝)

2007년12월2일 유 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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