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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조선신보 창간 60돌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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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5-11-03 00:00 조회11,9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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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재일 동포들의 길잡이가 되어 온 「조선신보」가 창간 60돌(10월10일)과 때를 같이 하여 새 건물로 옮겼다. 기자는 「민단신문」을 포함하여 한통련이 운영하는 「민족시보」, 조선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통신사」, 그리고 월간지 「통일평론사」를 두루 방문하며 이곳 언론들의 현황도 알아보았다. 특히 「조선신보」가 창간 60돌을 맞았다는 소식에 감탄과 함께 놀람을 금치 못했다.

<##IMAGE##> 조선신보 11대 편집국장인 최관익 선생(55)이 최근 발행한 「조선신보」를 비롯 우리 말 월간지「조국」, 일본어로 된 월간 화보집 「이어」등을 건네주면서 자신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조선신보가 걸어 온 길과 함께 조선총련의 역사 등이 담겨 있는 자료들도 준다.

그는 총련서 발행하는 영자신문 「People"s Korea」에서 다년 간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다가 지난 2002년 12월에 우리 글과 일본어 2중 언어로 발행하는 조선신보의 11대 국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고 소개하면서 "재일 조선대학교 문학부 외국어과(영어전공)를 졸업하고 조선총련 중앙본부 국제국에서 27년 동안 활동하다가 언론부서로 옮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조선신보」가 걸어 온 60년의 궤적, 그것은 지구촌 해외운동 역사에서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역사가 될 것 같다. 「조선신보」간부들은 창간 60돌을 회상하며 "김일성 주석님과 김정일 장군님의 지도와 사랑을 떠나서는 조선신보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북부조국이 걸어 온 길과 궤를 함께 해 왔다. 그것도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 땅에서, 그리고 개인주의가 극도로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민족의 존엄성을 생명같이 여기며60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디어 온 것이다.

이역 땅에서 해방을 맞던 1945년 10월10일 조선신보의 전신인 민중신문이 창간됐다. 13호까지 등사판 인쇄로 발행되던 신문이 14호(1946년 3월25일)부터 활판인쇄, 그 후 오사카에서 발행되던 「대중신문」과 병합하여 제호를 「우리신문」으로 고치고 2호까지 발행되다가 다시 9월1일부터 「해방신문」으로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49년 9월 역사에 유례 없는 대 폭압을 받으며 투쟁했다. 당시 머릿기사 제목에는 "폭압하면 할수록 우리는 궐기한다"라고 맞서며 재일 동포들의 투쟁의식을 고취했다. 49년 10월에는 또 일제 당국에 의해 동포들이 운영하던 학교가 폐쇄령을 받았다. 이듬해인 50년 8월2일 이 신문은 탄압의 광풍에 부딪쳤다. 신문사 시설들을 약탈당하고 파괴당하다가 끝내는 「해방신문」이 폐간조치 당하고 말았다.

52년 5월초 이 신문의 복간운동이 일어났다. 고 한덕수 선생이 복간위원장으로 나서서 이 신문을 살리기 위한 투쟁조직을 꾸렸다. 당시 복간사는 "폭풍은 드세어 질 수 있다. 그러나 해방신문은 재일 전 동포와 더불어 불멸할 것이다..."라는 결의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 드디어 55년 5월31일 조선총련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 신문은 57년 1월 「조선신보」로 제호가 바뀌었다. 북부조국은 전쟁시기인 53년 3월에 이어 61년 8월에도 북녘의 인쇄시설에 사용되던 활자자모를 「조선신보」에 보내주었다.

이들의 피나는 투쟁에 대해 북부조국은 1975년 "김일성 훈장"을 수여했다. 창간 40돌이 되던 85년 10월10일에는 김일성 주석이 축하문을 보내주기도 했다.

<##IMAGE##>「조선신보」는 초창기 타블로이드 판 활판인쇄로 발행되어 오다가 88년부터 컴퓨터화로 전환되었고 같은 해 평양에 상주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신문 규격도 정규판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신보」는 지금 일주일에 3회(월, 수, 금)에 걸쳐 발행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또 우리 말 월간지 「조국」, 그리고 일본어로 된 화보집「이어」 등을 출판하고 있다.

"1980년대 「조선신보」기자집단이 2백 여명이나 되었으나 지금은 일본경제 사정을 비롯하여 조건들이 과거와 같이 못해 조선신보와 영자기자 모두 합하여 38명의 기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최 편집국장은 말한다.

「조선신보」관계자들은 창간 60돌을 돌아보며 난관을 헤쳐온 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하면서 "앞으로도 조선신보는 동포들의 귀와 눈, 입이 되고 동포들의 뜨거운 지지와 사랑을 받는 신문으로 70돌, 80돌, 100돌을 내다보며 힘찬 걸음을 내 디딜 것이다"고 입을 모은다.

재일총련은 세계 제1의 단결된 해외조직

기자는 조선신보와 재일총련 성원들을 만나보면서 "조선총련은 세계에서 가장 단결이 잘된 해외조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어느 나라 해외동포들이 조선총련과 같이 단결단합이 잘 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문자답하면서 나온 결론이다.

조선총련은 또 해외동포 조직들 중에 거주국 당국으로부터 가장 탄압을 많이 받아 온 조직이다. 일본당국이 총련에 자행한 탄압은 세계 역사상에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그 탄압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국의 분단 때문에 이남 정부당국으로부터 받아 온 탄압도 말할 수 없다. 6.15시대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남한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고 있을 것이다. 과거 남한 정부 당국자들은 이들을 뿔 달린 사람으로 선전해 왔다.

조선총련의 단결단합은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세계 역사상 해외동포들이 재일총련처럼 끈질기게 투쟁해 온 조직도 없다. 조일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닥쳐오는 탄압을 투쟁으로 맞서야 했다. 남북관계가 대결구도로 전환될 때마다 직면하는 음모와 방해책동에도 투쟁으로 대처해야 했다. 조미관계가 악화될 때도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투쟁의 길에 나서야 했다.

이들은 민족차별을 받으면서 조선국적 포기를 강요당해 왔고 조선학교 탄압에 대처해 왔고 민족기업 유지를 위해 투쟁해 왔고, 조국방문을 가로막는 내외 세력들과 투쟁으로 맞서왔다. 재일총련은 반세기 이상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로 점철해 온 강철같은 조직이다.

돌이켜 보면 조선총련의 행보는 연속적인 고난의 행군이었다. 총련회원들은 그 숱한 고난의 가시밭길을 신심과 승리의 낙관으로 극복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총련 간부들은 "김일성 주석님과 김정일 장군님의 지도와 사랑을 떠나서는 조선신보의 역사도 총련의 역사도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난관이 조성될 때마다 실천으로 극복해 냈다. 1968년 프에블로 사건이 터지자 총련에도 탄압의 공세가 휘몰아 쳤다. 이때 100일간 혁신운동, 120일간 혁신운동(70년 7.1~10월 말)이 전개되었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100번 읽으면서 어려움을 극복했던 총련회원들은 "김일성 저작선집"도 학습하면서 학습을 생활화하는 운동을 벌였다. 70년대 초에는 150일간 혁신운동(71년 11.1~72년 4.15)을 펼치면서 새로운 발전을 위한 투쟁에 집중했다. 1975년 7월과 8월에는 핵전쟁 반대운동, 주한미군철수투쟁, 통일촉진 대행진을 전개하면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5백만 서명운동을 벌인 결과 515만 명의 서명을 받는 성과를 기록하기도 했다. 총련은 이어 75년 11월18일 유엔 제30차 총회를 통해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각종 투쟁을 벌인 결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자는 43개국의 공동결의안을 제출시키는 투쟁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80년대 들어서는 300일간 애국혁신운동(1981년 6.15~1982년 4.15)을 통해 2만1천5백명 회원증가 사업에 성공했고 100일간 집중행동 기간을 이용하여 6만9,364 가정을 방문하는 한편 6,038명과 담화를 통해 의식화 활동을 전개했다.

기자는 총련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비행기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결과 단합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품을 많이 들여야 되는가". 단결은 결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가야 할 올바른 원칙의 기초에 바탕 한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 구체적인 실천을 하면서 동시에 이들과 함께 투쟁을 통해서, 그리고 끊임없는 학습과 교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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