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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발표 논문] 미주민족운동 100년사 편찬의의</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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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3-08-04 00:00 조회2,3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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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 편찬위원회」는 2003년 8월2일 로스엔젤레스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이날 이자리에서 창립기념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된 논문들중 양은식 박사의 발제내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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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사
편찬위원회 창립 총회 기념 세미나

2003년 8월 2일
South Vermont Avenue, Los Angeles

「미주민족운동 100년사」 편찬의 역사적 의의

*서굉일 박사(한국 한신대 교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



목 차
서론

1. 「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2. 이민과 한인 사회의 형성
3. 근현대 백년과 민주주의의 성취
4. 민족해방 운동기(1903-1945)
5. 민주화 평화통일 운동기(1945-?)

글을 마치면서


서 론

suhkwingil-2.jpg역사란 꿈을 만들고 실천해 가는 변화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지난 100년 미주지역 한인들은 어떠한 꿈을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또 그꿈을 달성하기위하여 어떠한 행동으로 실천을 해왔으며 그래서 오늘날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또한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에 어떠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내일을 위하여 어떠한 꿈을 설계하고 내일에는 어떻게 또 변화할 것이며 다시 고쳐나갈 것인가 하는 작업의 연속을 역사라고 합니다

사람은 100년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이 100년만에 한번씩오는 세기의 바뀜을 경험하기란 쉬운일이 아닙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 중 몇분은 20세기 전반기에 태어난 사람으로써 그 많은 어려움을 넘기고도서 21세기를 맞이하게 된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100년의 고난의 역경을 직,간접으로 경험하였고 한 세기가 바뀌는 순간을 또한 경험하게 되는 행복을 갖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주동포가 살아온 100년의 세월을 세계사와 민족사의 흐름과 연결시켜 하나의 역사를 쓰고자 합니다. 민족사의 흐름속에서 하나의 괘도위에 올려놓고 지난 100년을 들여다보는 역사를 쓴다는 일이 쉬운일은 아닐 것 입니다.

이 동안의 역사는 1.구한말 시기 2.일제의 강점기 3. 분단의 시기 로 구분될 것 수 있을것입니다. 미주 이민사회는 이러한 민족사의 시대구분 속에서 첫째 미국땅에서 한인사회를 형성하였고, 둘째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며, 셋째 분단된 민족사의 현실을 평화통일로 바꾸는 일에 힘써왔습니다. 인간의 해방과 민주주의의 성취, 이것은 지난 100년을 통틀어 한인 사회 이주 동포들의 삶의 목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제 이러한 측면에서 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사의 과제를 논의해 볼까 합니다.
우선 이 연구를 위하여 설정 해야 될 문제점을 함께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사」(이후에는 100년사로 씀)를 서술함에 있어서 그 바닥에 흐르는 큰 줄기가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100년사의 중추부에 흐르고 있는 지도원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민족의 현대사는 봉건왕조에서 식민지배로,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민족사회로, 그리고 다시 분단의 질곡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민족운동이란 이민족의 지배에서는 독립운동으로 나타나고, 민족이 분열되어 나뉘어져 있을때는 통일운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는 저항운동과 함께 내재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를 성취하고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러므로, 민족해방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은 그 전체 과정이 민주주의 운동과 병행되어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인류사의 발전과정과 동일합니다.

100년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먼저 무엇을 쓸것인가, 누구의 입장에서 쓸것인가, 또 언제 쓸것이가, 어느 장소에서 쓸것인가를 판단하여야 합니다.
100년사는 이주 한인들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민중들의 살아있는 역사이어야 합니다. 성공한 역사와 함께 실패한 역사도 기술하여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우리 민족 사회의 미래를 열어가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현재성에서 기술되어야 할것입니다.

역사를 서술함에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식민지 시대 민족해방운동을 담당했던 세력들이 해방이후에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관계로 식민잔재 청산이 이루어 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과 동족 상쟁이 일어남으로써 민족사의 고난이 계속되었습니다. 분단체제의 정치, 사회적 제약으로 민주주의를 전진시키기 위한 고난이 간단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선행되는 조건들로 말미암아 민족사의 운동과정서에는 수 많은 파벌의 역사가 존재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우리역사를 부정적으로 서술할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00년사의 특징은 무엇이며, 왜 이책을 쓰려는가, 누구를 위한 책인가 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실패의 역사도 잘 들어날수 있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구체적 사례를 소상하게 ㎱봤이 되었으면 합니다. 역사를 기술하여놓고, 상반된 평가 때문에 출판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그 조직이 분열되는 경우도 있기때문입니다.
지난100년, 이 중요한 시기는 새시대의 희망을 가진 이들만이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수 있을 것이며, 100년사를 통해서 이민사회의 한민족 동포가 한층더 성숙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과거를 검토할 뿐만 아니라 새시대를 향한 이정표라 생각합니다.
이주동포 모두에게 재미있게 읽히는 책으로 역사의 대중화, 의식화를 이루는 민중을 깨우치는 책으로서 기술되기를 기대합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 서술된 당파성을 극복하여 파벌중심의 이주사회가 치유되는, 그리하여 화해와 일치, 상생의 세상으로 바뀔 수 있는 이주사회의 동덕의 실록이 되어지기를 기대합니다.



2. 이민과 한인 사회의 형성


미주지역에서 한인사회가 형성된 시기는 1903년 하와이 한인의 미주 이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와이는 사탕수수 농업이 크게 발달하여 외국인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중국인과 일본인의 뒤를 이어 한인 노동자들이 미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은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중단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이주 한인의 숫자는 총 65척의 배로 7226명에 달했습니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들은 하와이, 마우이, 오하우, 카우아이 등의 섬에 산재한 30여곳의 사탕수수 농장에 많게는 500명-600명 에서부터 적게는 몇십명씩 분산고용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된노동과 저 임금 농장주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시달리며, 고난의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와이 이민이 본격화될 무렵에 맥시코와 쿠바 지역의 한인 노동이민이 전개되었습니다. 배락쿠르스, 유카탄 반도 등지의 산재한 20여 곳의 농장으로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이들의 이민생활은 하와이보다 더욱 열악하였고,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가혹한 노동에 종사해야만 했습니다 미주로의 한인 노동이민이 본격화 되면서 유학생, 상인, 사진신부의 이민도 이루어졌습니다.

사진신부의 이민은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하와이의 951명 미주 본토에 151명이나 되었으며 또한 유학으로 이민은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 500여명에 이르렸습니다. 하와이 한인들은 1905-1907년사이에 1003명이 미주 본토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들 한인들은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차츰 미국의 중동부로 생활터전을 확대하여 갔습니다. 1919년을 전후로 하와이를 포함한 미주 한인들의 전체숫자는 약700여명이 되었고, 해방직전까지도 일만명을 넘지않았습니다.

중국, 일본계 이민과 비교하여볼 때 전체적으로 적은 숫자였지만 이주 한인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권인옹호와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기위한 각종 단체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민초기부터 하와이에서는 농장단위로 동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또한 한인 상호간의 친목도모와 권인보장,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운동 단체들이 결성되었습니다. 한국이민의 경우, 농촌보다도 경인지구 같은 도시에서 미국선교사들이 앞장서서 이민을 주선한 관계로 첫 이민자 중에서 반수이상이 기독교도 였습니다. 또한 농민출신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이 도시에서 거주하던 무직자, 퇴역한 군인, 학생,관가의 아전 과 함께 소수의 양반출신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노동에는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이민의 성분은 애초부터 군관리 출신과 공부에 뜻을둔 학생들과 도시사람들이 다수 섞여 있었습니다.


3. 근현대 백년과 민주주의의 성취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사는 국민국가수립운동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봉건국가가 끝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양반관료, 지주의 나라가 아니라 민중의 나라, 백성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의 경우는 민중의 힘에 의하여 봉건 왕조가 청산되지 못하고 일제 간섭으로 봉건왕조가 멸망하고, 식민지 시대로 전환되었습니다. 민족사의 내부에서 진행되어야할 국민국가수립운동이 성취되지 못하고, 외세의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민주주의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탄압과 압제로서 한민족을 통치하였고, 우리민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부분에서 민주주의적 발전은 유보된채 식민지 시기의 질식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두에 식민지 시대 민족운동이 국권회복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의 병행이라고 말했습니다만 민주주의 운동은 차선책이었고, 오직 독립운동에만 매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우리민족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오직 유일하게 민주주의적 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미주 이주한인들은 이주사회에서 한인들의 결속을 다질뿐만 아니라 열명만 모이면 민주적 절차에 의하여 동회를 결성했고, 민주적 방법으로 선거를 통하여 동장을 선출했고, 자체적으로 민주적질서를 유지하면서 나라일을 걱정하였습니다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 백성들이 스스로 조직한 단체는 1903년 8월에 탄생한 “신민회”입니다. 신민회는 이주사회의 널리 퍼져있는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정치조직이었습니다 신민회는 민족의 단결을 기하고, 백성들을 계몽시킴으로써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를 발족시켰고, 1905년 공립협회로 개편하여 정치단체로 출범시켰습니다

미주에서 성립된 이 단체는 1907년 국내에서 비밀결사 신민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애국계몽운동기에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지만 신민회야 말로 역사의 방향을 임금의 나라가 아닌 백성의 나라임을 선포한 국민국가 운동의 출발이었습니다 안창호는 미주에서 1909년 대한인국민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민주와 자유평등을 이념으로 하였고, 미주, 만주, 시베리아에 까지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조직을확장하였습니다 국민회의 회원들은 의무금이라는 세금을 납부하였습니다. 양반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이며 스스로 깨어난 민중들은 조국광복에 주체가 되었고, 민족운동의 세로운 지도력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안창호는 미주지역의 한인들을 단결시켜 범 민족적인 조직을 구상하고, 추진하였습니다 1913년 미주의 국민회는 대한인국민회로써 이주한인들의 대표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수 있었고, 1914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취득하여 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였습니다 여권없이 입국하려는 한인들은 국민회의 보증만으로 미국입국이 허락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안창호의 신민회 운동과 국민회 또한 이승만의 동지회 운동등은 민중들의 자발적인 결속과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 훈련을 일제강점기에 미주한인 동포사회에서 실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을 도모할수 있었습니다 일제의 무단 탄압속에서 민주적 훈련이 봉쇄당한 국내의 사정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4. 민족해방 운동기(1903-1945)



한인 이주민들은 거의가 노동자로써 불확실한 삶을 어렵게 살아갔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조국의 자주독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자신의 생활비를 절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바쳤습니다 그 당시 하와이의 한인들은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불리울 정도로 애국자 였습니다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것인가를 고민하였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사업에 헌신하면서 고난의 생활속에서 결속하였습니다 국망의 위기가 가까워 오면서 20여개의 정치단체가 결성되어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미주한인들의 민족의식은 더욱강화되었고, 합성신보,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등의 항일언론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보도하였으며 그 불법성을 규탄하였습니다 재미한인들의 당면한 의무를 교육과 실업진흥 항일독립운동 등으로 삼아 해외 한인들의 민족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08년 3월23일 장인환, 전명운 의사는 스티븐스를 의거 처단하였습니다 합방의 위기속에서 미주지역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정기를 맞습니다 그들은 민족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민주한인사회의 안녕과 자치 그리고 조국독립의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기위하여 지방총회 등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을 116개소나 조직하였습니다 이러한 한인 단체들은 미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1910년 9월1일 대한인국민회는 일제의 강제합병에 반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여 전세계에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알렸습니다. 도산 안창호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도모하고 이승만은 외교활동으로써 독립을 달성하려고 했다면 박용만은 우리의 독립은 무력으로 완성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병학교를 세워서 국사훈련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재미한인들은 3.1운동이후 상해임정을 위하여 애국금을 헌납하였습니다 1919년 하와이와 미주본토에서는 16만 달러를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구미위원회를 지원하였습니다 당시 미주의 한인들은 막노동으로 최저임금을 수령하는 근로자 였음으로 이들 호주머니에서 나온 군자금은 독립을 위한 피땀어린 돈이었습니다 한인 노동자들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이 또한 빛도 없이 싸우다 죽어가는 최전방의 병사처럼 허리가 휘도록 노동을 해서 번돈을 독립운동가에게 바침으로써 소박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독립투쟁의 방법에 있어서 다양한 방략들이 재시되었고, 민중들은 지도자의 이념에 따라 온 몸을 바쳐 헌신하였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중국사이에는 암담한 불신이 일어났습니다. 이때에 백범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열활동을 일으켜 독립운동사의 신기운을 창출하였습니다 백범 김구가 애국단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것은 미주지역의한인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혈세를 바쳤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이승만의 외교지상, 안창호의 자력갱생, 박용만의 무력투쟁 이모두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의 풍토에서 나라사랑의 의식화된 이주한인들의 자발적 역사참여의 행동에서 가능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울분과 타향살이의 서글품에 겹쳐서 미주한인들은 교회에 모였고 하나님께 민족의 독립을 열열히 기도하였으며 그들은 경제적 안정보다고 나라의 독립을 더 우선하였습니다

한인들의 미국이민은 중국이민보다 반세기이상이 늦었고, 국가적으로 조직적으로 이민한 일본인 보다는 열악한 상태였지만 여러 개층이 망라되어 이민하였고, 망명객, 독립운동가, 학생 들이 서로 연결하여 이주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한민족 해외이주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이 될때까지 결코 포기하지않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 한민족 독립운동사의 특징이 되었음이 확인됩니다. 일제시기 식민지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잊혀진 존재였으나 미주 한인들의 노력으로 일제의 통치실상이 세계에 알려졌고, 식민지 한국의 비참한 존재와 한민족의 독립 열망이 세계에 전파될수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 한국의 독립문제가 세계열강들 사이에 정식으로 재기될수 있었던 것은 미주한인들의 지속적인 선전 외교활동의 힘입은바 컷음을 과소평가할수 없습니다.



5. 민주화 평화통일 운동기(1945-?)


해방이후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송하여 건국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단장 한시대, 부단장 김원용 등 14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국내에 1년간 체류하면서 구호 및 경제지원 활동과 국내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재미 한인들은 신 국가 건설사업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대표단 출신 김호, 김원용 등은 미 군정의 입법의원으로 피선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표단은 신진당을 결성하여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독립국가 수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에서 정치상황에 큰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정신과 박용만의 국민회 정신을 건국사업에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던점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것이라 생각됩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해방으로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슬프게도 3.8선의 획정으로 남북분단의 민족적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8.15광복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의 노력으로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한미 유대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1950년 6월25일 미명을 기해서 3년간에 걸친 처절한 한국전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한국에서의 국제평화와 안보를 수호하기 위하여 참전합으로서 한미간의 혈맹관계는 한국전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전쟁의 3년간은 180억달러의 전비가 투입되었고, 미군의 전사자만도 54248명 부상자는 103,288명 실종자는 5866명의 엄청난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가장 처절했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종식되었습니다 그후 워싱톤에서 역사적인 한미상호 방위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방위조약으로 한국은 안정과 독립을 유지할수 있다는 보장을 얻게 되었고, 미국측은 이러한보장을 해주는 대신 한국군의 작전 지시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에는 우호통상 항해조약이 체결되어 호혜주의를 존중하고, 상대국에서의 과학교육, 종교 및 자선활동을 최대로 보장하였습니다

1950년대 한국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저해하고 북진통일 정책이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미주 한인사회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하여 비판적 안목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반공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유신론의 의식속에서 자유당 정권을 옹호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장면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장면정권에 어떠한 의견도 발표하지 못했고 참여할수도 없었습니다 일년도 못가서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 또는 장면정권의 유엔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위한 평화적 자유민주통일안이 제안되었을때에 미주 동포들은 이에대한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4.19주역들의 평화통일안은 남한의 보수세력과 북쪽과 전쟁을 했던 남한의 군부및 미국에게는 크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박정희 중심의 군부 쿠데타를 성공하게 했고, 쿠데타 세력은 집권하자마자 4.19공간에서 활성화했던 평화통일 운동을 간첩세력으로 규정하고 엄청난 숙청의철퇴를 가하였습니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영도하는 제3공화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한미관계는 밀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군부정권은 30년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키고, 평화통일운동을 계속탄압하였습니다 1965년 미국정부가 권유한대로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고, 월남파병을 단행함으로써 한미간의 혈맹관계는 돈독해졌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방위문제, 경제개발문제, 한미간의 통상교육의 문제, 과학발전의 문제, 한국통일문제 등 제반 문제에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박정희대통령이 이끄는 제3공화국이 발족됨에따라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어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경제는 70년대에 접어들면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였고, 한강의 기적을 낳았습니다. 미국정부는 1976년 9월30일 무상원조를 종결하고, 유상군사원조, 차관공여방식으로 경제원조 방식을 전환하였습니다.

한국은 유신정부의 군사적 통치속에서 경제적으로는 발전하였으나 자유시민을 투옥하였고, 심각한 인권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이에 한국의 기독교 세력들은 세계기독교 단체의 후원을 얻어 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5년 캄보디아가 적화되고 월남이 공산화되는 과정속에서 한반도의 안보문제에 불안을 느낀나머지 해외 이민이 급증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민족주의사조가 고개를 들게 되었고 70년대 고도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국은 자주국방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한국의 인권문제와 결부하여 코리아 게이트라는 박동선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미국의회에서 지지를 얻기위해 불법적인 로비활동을 전개하다가 한국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한미관계는 그 어느때보다. 불편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박동선 사건을 계기로 한미양국은 상대방을 종래와 다른 관점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단순한 반공의 보루로만 보지않게 되었고, 한국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미국을 동반자로 간주하였습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레이건과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전두환 대통령은 한미관계를 불편한 관계에서 상호 우호 친선의 동반자로 바꾸었습니다.미국정부는 한반도가 가지고 있는 반공보루로서의 안보적 가치를 중요시 생각하였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면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이 깨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국의 안정과 평화는 일본 나아가 미국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다는 안보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유신체제하의 한국의 인권문제와 결부하여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권문제를 기화로 한반도가 적화된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사태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한미 양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공통의 의견을 갖고 접근하였습니다

20세기 후반기 우리민족의 당면과제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민족문제의 평화적 해결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성립된 정권들은 모두 이 두가지 문제에서 정당성 확보할수 있습니다

1960년대초에 박정희 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에서는 민주민족운동세력이 직접적인 저항을 하지못했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준비와 조직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80년 5월에 전두환 세력이 개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권력을 강화해간 과정에서 가장 크게 군사정권에 대하여 거대한 항쟁을 감행한 것은 해외에서 미주지역에 민주민족운동세력이었습니다 20년 가까운 박정권 통치기간을 통해 가혹한 탄압아래에서 국내 국외 민주민족운동 세력의 역량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전두환세력은 이렇게 확대 강화된 민주 민족운동 역량을 탄압하면서 성립됨으로써 그 정당성을 가질수 없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을 지지한 미국정부에 저항하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미주지역과 국내운동은 서로 연결되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힘들이 1987년 6월민주화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한반도의 민주화 운동의 성공은 분단구조의 변화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미주지역의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분단을 극복하고 또다른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외세가 아닌 민중의 손으로 민족 자주 통일을 이룩하는 것만이 민주화를 가능하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 80년대는 새로운 동서긴장완화의 막이 오르고 군비를 감축하고 평화공존과 상호협력이 역사의 큰 흐름을 이루게 됨으로써 스스로 한반도의 아픔과 고통을 해결하고자 분단된 반쪽의 민족의 생명을 안고자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태평양건너에서 울며 바라보다가 현상유지를 꾀하는 주변강대국들이 구축해놓은 재방의 개미구멍 뚫기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통일의 장래를 위하여 민족의 새벽을 알리는 파수꾼처럼 새로운 역사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민족사적 사랑이 2000년 6.15남북 합의서를 이룩해 내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모든부분에서의 민주주의가 전진하고 전쟁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닌 올바른의미의 평화통일정책으로 정착되어가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통일 정책이 선거에의해 정권의쥔 민주세력에 의해 혁명적이 아닌 방법으로 서서히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미주지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후원이 있었기에 1998년 김대중 정권은 성립될수 있었습니다 김대중정권의 반군사 독재운동,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미주지역의 민주통일운동 세력은 희생적으로 김대중정권의 성립을 도왔다고 판단됩니다

이제 한반도는 세계에서 평화적으로 분단민족이 통일을이루는 큰사명을 갖고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기위해서는 동족의 한쪽을 적으로 간주하는 민족의식 및 역사의식이 크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한반도에 정착하기위해서는 미국이주한인들이 앞장서서 민족동질성의 역사의식을 선진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700만 한민족과 남과북을 포함하는 모든 한민족 구성원이 함께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작업을 미주지역에 이주한인들이 앞장서서 이룩해 나갈 것을 기대합니다

이주100년사는 분단의식의 역사인식이 아닌 통일민족주의 역사인식으로 남북을 대등하게 통일전선론적인 역사인식으로 기술되어야 할것입니다


글을 마치면서


통일 시대의 걸림돌과 주춧돌을 구분해 보고자 합니다.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이 주로 일제강점 시대의 경찰이나 행정관료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정권이었던 데 비해,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 시대의 일본군부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된 정권이었습니다. 불행했던 일제강점 시대의 조선사람으로서 제국주의 일본의 군인이 되어 그 침략전쟁을 도운 사람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민족적 정통성이 약한 친일세력 정권일수록 민족의 평화통일문제에 소극적이거나 오히려 반통일적입니다. 5.16군사 쿠데타 직후 박정희군사정권은 ‘혁명공약’에서 ‘반공’을 국시로 4.19운동후 급격히 성장했던 평화통일 운동세력을 대거 검거하고 평화통일운동을 불법화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반공주의는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박정권은 남한을 반공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했던 미국의 요구로 국군의 월남전 파견 협정을 맺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군사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았으면서도 이를 묵인했습니다 . 미국은 이러한 쿠데타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이용해서 박정권을 압박했던 것입니다.-후에 제5공화국의 전두환정권에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박정희 정권은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북한정권과의 정통성 경쟁에 맞서기 위해, 반공주의와 함께 외자에 의한 경제개발을 앞세우며 ‘조국근대화론’,’한국적 민주주의론’,’민족주체성론’ 등을 내세웠습니다.
1970년대 후반기로 오면서 부마항쟁등 박정희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 그러나 4.19와 같은 민중의 직접 항쟁으로 유신체제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결국12.12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18광주민중항쟁을 짓밟는 폭력적, 불법적과정을 거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신군부 정권이 성립되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핵심세력이 박정희 유신 독재를 밑받침한 정치군인 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집권과정이 불법적이고 비민주적이어서 역시 정통성에 큰 결함을 가진 정권이었습니다. 따라서 반공주의, 반북주의, 대북대결주의에서는 민족사적 정통성에서 결함을 가진 이전 정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이에 전두환정권은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은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면서,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국민운동을 벌이면서 대북 긴장고조정책을 썼습니다. 또한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대통령 간접선거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광범한 반독재 민중이 주도한 1987년6월 민주화 운동-6.10항쟁-으로 대통령직접선거제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직선제로 치뤄진 제13대 대통령선거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후, 민족민주운동은 1988년에 들어서면서 제24회 올림픽 남북공동개최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등 9개단체가 ‘8.15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하는 한편, 사회운동세력들은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한 민주단체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족통일운동이 민족민주운동세력 전체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1989년 3월25일 전민련 고문 문익환 목사는 북쪽의 초청으로 평양에 가서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를 합의하였습니다. 사실 1980년대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치우쳐서 통일운동은 상대적으로 부진했습니다. 문목사의 방북은 미주지역의 동포들의 북한방문에 뒤이은 민간통일 운동의 계속적인 활로의 모색이었습니다. 미주지역의 통일운동가들의 통일론의 배경에는 반공주의와 분단국가주의를 극복한 올바른 의미의 민족주의정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문목사는 바로 그러한 노선을 따라 북쪽을 찾아간 것입니다.

미주지역 동포들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힘입어 1998년 김대중을 정상으로 하는 민주화세력의 정권이 성립되었습니다. 김대중 정권과 김영삼 정권사이에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김영삼 정권은 북에 대한 적대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군부출신 정권과 합당으로 성립된 정권인데 반해 김대중 정권은 야당의 위치에서 성립된 정권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반군사독재운동과정을 통해서 더 적극적으로 투쟁한 정권이며 미주 지역의 이민 동포사회의 지지가 컸던 정권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대북문제, 통일문제에서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김영삼 정권이 군부세력 및 그 유착세력과 합당으로 이루어진 정권인데 비해 김대중정권은 해외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세력의 협력으로 성립된 정권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남북합의서를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이행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북 합의서란 남북정부 당사자들이 타협과 협조로서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을 한다고 하는 것을 전재한 것입니다. 북쪽이 식량과 비료상황의 악화로 인해 경제적인 거려움을 격고있는 현실속에서 1998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 501마리를 이끌고 방북한후 북쪽에 대한 경제적 투자와 식량지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남과 북의 교류가 열렸습니다. 경수로 공사를 위해 우리의 노동자들이 북쪽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서울과 평양에서 운동경기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적극적으로 화해정책, 포용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보수세력의 끈질긴 제동에도 불구하고 포용정책은 일관되게 추진되었습니다. 포용정책이 일관 대게 추진될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부터 온갖어려움을 무릅쓰고 북한을 방분하였던 미주동포들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일정한 철학이 김대중 정권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회담이 갖는 큰 의미는 통일 문제가 우리민족 내부의 역량과 책임에 의해 다루어 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민족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해 가기위해서는 민족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겠다는 확고한 철학이 서야 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통일지향적 공조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옳은 의미의 민족주체성회복이 요청됩니다.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인격을 가졌을 때 사람대접을 받습니다.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인격이 있습니다. 촛불시위는 반미시위가 아닙니다. 한민족이 그 자신에게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자신에 대한 민족각성의 운동이라 생각됩니다. 분단고착적 20세기 공조체제를 극복하고, 옳은 의미의 민족주체성 회복을 열어가야 할 때 입니다.

이상과 같은 통일운동 과정에서 민족사가 평화통일의 시대로 전개될수 있도록 물꼬를 튼 이들은 분단을 뛰어넘어 북쪽을 방문했던 미주지역, 캐나다지역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세력들의 공로라 할 수 있습니다. 허리잘린 반도를 하나되게하고, 장애인이 되어린 민족의 아픔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고자 온 몸을 내던진 이들의 진정한 뜻이 무었인지 역사에 기술되어야 합니다. 민족사의 문제는 당파성이 존재할수 없습니다. 미주동포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은 비교적 알려진바 있으나 민족통일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자전적 기록인 ‘분단을 뛰어넘어’ 외에는 기록이 없었습니다. 하루빨리 미주지역민족통일운동에 관한 노력의 사실들이 기술되어 민족사의 미래를 여는 좌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준하 선생은 통일을 민중의 일로 보았습니다. 씨알들의 통일적 가치관과 역량의 비축만이 통일의 길을 열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는 온세계에 흩어져있는 700만 한민족동포와 남북 7000만 한민족을 깨우는 쇠북종소리가 될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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