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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미주]김양무열사 3주기 행사[2003.1.24]</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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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3-01-25 00:00 조회2,2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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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무열사 정신계승미주사업회(회장:백승배 목사)는 24일 로스엔젤레스 소재 남가주노동상당소 회의실에서 고인의 3주기 추모모임을 갖고 1부에서는 추모식, 2부에서는 추모기념 발표회(이용식님:김양무 열사 애국애족 정신이 이 시대에 주는 교훈), 고인의 사모 양은찬 님의 시의 세계와 작품들 소개(김영희님 발표), 그리고 참석자들과 갖는 좌담회 순서로 진행됐다.

kimyangmu-4.jpg 백승배 미주사업회 회장이 김양무열사 3주기 기념추모행사에 대한 의의와 취지를 설명하고 추모집회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날 좌담회에 참석한 각계단체 성원들은 미주추모회 사업을 통하여 김양무님의 애국정신을 접하게 되었다면서 그의 백절불굴의 애국정신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미주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의 원로인 양은식 박사,현준기 선생, 박천흠 선생과 같은 인사들을 포함하여 민주노동당 미주후원회 정건이 회장, 청년단체 통일맞이나성포럼의 송현정 회장, 민들레 육영빈 대표, 노래지기의 김하림, 남장우님, 자주연합 남가주지부, 재미동포서부연합회, 남가주노동상담소, 민족통신 등 성원들이 참석하여 김양무님 3주기를 뜻깊게 추모하고 그의 애국정신과 실천문제를 놓고 의미있는 좌담회를 갖기도 했다.

kimyangmu-2.jpg이날 참석자들은 또 매년 추모회를 통하여 김양무님의 애국정신과 실천들이 한층 더 귀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소감을 밝히는가 하면 일부 참석자는 이번 추모회에서 처음으로 김양무님의 애국활동과 귀중한 정신을 알게 되어 기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특히 이용식님의 주제발표와 김영희님이 소개한 고인의 사모 양은찬님의 시의 세계와 작품소개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는 소감들도 소개해 이날 모임은 지난 추모회 경우들에 비하여 참석자들에게 많은 느낌을 선사한 행사로 평가된다. 여기에 이용식님과 김영희님의 발표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1]


<<김양무열사 애국애족 정신과 이 시대와 주는 교훈들>>

*발표: 이 용식(민족통신 편집위원)

김양무 선생은 1950년 9월 21일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여 73년 유신헌법 철폐 투쟁으로 강제 입영되었고 90년 범민련 결성 준비위원 때부터 범민련 생활을 한 범민련 전사이다. 그는 94년 7월 5일 범민련광주전남 결성 사건으로 구속된 이래 95년 범민련남측본부 결성사건, 97년 이북 큰물피해돕기 사업으로, 98년 범민족대회 관련으로 구속되었다가 직장암 진단을 받고 구속집행정지로 출소하여 수술을 받고 99년 1월 5일 수술을 받은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범민련정신으로 투병" 범민련 남측본부 활동을 시작하신 분이다.

99년 6월 3일 10차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추진본부장으로 추대되었고 8월 13일 체포영장이 발부, 8월 16일 탄압에 항거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명동성당 범투본 농성투쟁에 돌입 중 10월에 병세가 악화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시다가 2000년 1월 26일 범민련정신으로 한 평생을 사신 김양무는 "나를 평양으로 보내주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영면하신 분이다. 선생의 평양으로 보내 달라는 유언은 자신의 병 치료를 원해서가 아니라 남과 북은 하나의 조국이라는 선생의 소신이십니다. 즉 범민련 정신인 남과 북은 하나라는 민족주의정신입니다.

kimyangmu-3.jpg 가. 선생의 혁명정신의 뿌리

선생의 혁명정신의 뿌리는 멀리 증조부부터 시작된다. 증조부는 동학농민혁명시(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왕이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일보군대를 끌어들여 동학군을 정벌한 것입니다) 김개남 장군의 휘하에서 활동하다 30대에 참수를 당하셨습니다 선생의 민족의식은 반외세, 반봉건의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김양무 선생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민족주의자이신 할아버지는 김선생의 아버지인 큰아들을 일본놈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교육의 기회마저 포기했고 "우리나라가 아닌데 왜 세금을 내야하는냐?."고 항변하고 세금 불납운동을 벌여 그 돈을 임시정부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내신 분입니다.

또한 김선생의 어머니는 반상의 계급이 뚜렷하던 그 시절에도 머슴과 아버지가 한 상에서 쌀밥을 먹게 하시고 그의 밥을 안 먹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못 먹고살던 시절에 덕을 쌓으신 큰 가정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계신 곳은 항상 갈라진 사람들의 화해가 있었고 먹을 것이 있었으며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 김양무 선생은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애국, 애족 민족주의를 배웠고 어머니로부터 평등과 자애 동지애의 정신을 배운 것입니다. 김선생은 결혼 후에도 추운 마루에서 지낸 일이 많은데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감방에는 장기수 선생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김선생의 동지애와 일상생활에서의 그의 행동철학을 느낄 수 있는 예기입니다.

나. 평생을 범민련 정신으로 살은 김양무

김양무 선생은 평생을 범민련 정신으로 사시었습니다. 범민련 정신은 남북을 하나로 보는 정신,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틀어쥐고 나가는 정신이요 남, 북 해외의 우리민족은 하나라는 3자연대 연합의 정신, 원칙고수의 정신입니다. 김양무 선생은 이런 범민련의 정신으로 사셨기에 범민련이 원칙 고수냐 개량주의냐의 기로에 있을 때 원칙을 틀어쥐고 범민련을 지켜내신 분입니다. 그런 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범민련 남측본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선생은 특히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선생 스스로가 원칙을 지킴으로 본이 되었고, 변혁이론에도 뛰어 났으며 젊은이들을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하였기에 많은 학생들이 선생의 병 투병기간 동안 진심으로 그의 병 수발을 하였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니 돌아가시고 나서도 치열한 장례투쟁 속에서도 그들의 진정 어린 사랑을 받고계신 것입니다.

선생은 투병 중 이런 말을 하였답니다. "나는 범민련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작년 발병하였을 때 이미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입니다, 암은 암으로도 죽지만 암에 대한 공포로도 죽는다고 합니다. 난들 왜 암에 대한 공포가 없겠습니까? 시시각각 몰려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국통일에 대한 생각에 미치면 그런 공포쯤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조국통일을 인생의 목표요 아니 인생의 전부를 조국통일에 걸고 사신 분입니다. 삶 자체가 조국통일이요 삶 자체가 범민련이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양무님은 육체는 갔어도 그의 애국애족 정신은 부활하여 살아 있는 것입니다.

다. 선생의 범민련활동 중 일화

80년대 말 김양무와 같이 활동을 했던 김영인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선생의 활동을 전한다. 범민련 운동의 탄압이 극에 달해 벼랑 끝으로 몰린 통일운동진영은 "지금의 범민련운동은 한계에 부딪혔으니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예기가 나올 때 광주 전남에서도 "새로운 통일운동 주체를 꾸려야 많은 군중을 쟁취할 수 있고 탄압을 피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선생은 "안될 일이다 새통체 건설론은 3자연대의 틀을 깨려는 정부의 수작에 놀아나는 일이다"라고 지적하며 범민련 운동을 지켜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면서 "우리가 열심히 투쟁하여 국가 보안법만 깨면 수많은 군중은 쟁취 할 수 있다"며 대중 투쟁을 독려했습니다. 김양무의 범민련 정신을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한총련 사랑의 일화입니다 1996년 연세대에서 열린 7차 범민족대회에서 김영삼 정권은 살인적인 진압으로 애국청년조직 한총련을 압살시키려 하였고 여기에 발 맞추어 언론들은 변절한 재야 인사들과 야당총재의 입을 동원 한총련을 폭력, 좌경용공집단으로 연일 왜곡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일반시민은 물론 운동권 일부에서도 "이제 한총련은 해체되어야 한다.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수근거릴 때 "한총련이 어떤 조직인데. 두고 보라. 이 조직은 우리의 희망이다. 한총련은 끄덕없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한총련이 언론과 정권의 마녀사냥을 이겨내고 청년학생 대중조직으로 우뚝 섰을 때, 선생은 "한총련은 다시 살아나고 있어"하시며 매우 기뻐 하셨답니다.

한가지 더 소개합니다 선생이 94년 첫 번째 구속되었을 때 선생은 안기부 화정동 청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안기부 일당들을 대할 때 선생은 3가지 원칙을 정해놓고 심문에 임했다고 합니다.

첫째, 동지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다.
둘째, 조직내부의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셋째. 어떤 일이 발각되면 자신이 다 뒤집어쓴다. 선생은 이런 원칙과 사랑으로 수많은 동지들을 보호한 것입니다.

라. 선생이 우리에게 주신 교훈

1. 선생은 우리에게 범민련 정신으로 행동을 하며 사는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범민련 정신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반외세 자주의 정신, 간고분투의 정신, 혁명적 낙관주의의 정신인 것입니다. 선생은 이론뿐 아닌 실질적인 행동으로 애국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2. 선생은 신심으로 사신 분입니다. 통일된 조국을 믿는 마음, 민중을 믿는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우리주변에는 민중을 믿는 마음이 부족하여 개량주의로 나가고 원칙을 포기하는 많은 사람을 봅니다. [단적인 예로 이북에서 보여주는 고난행군도 바로 이런 신심과 혁명적 낙관주의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3. 선생은 사람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동지애를 실천하시며 사람 사업을 하신 분입니다. 그는 한번 믿은 한총련을 한번도 의심 없이 끝까지 사랑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동지를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투쟁을 하는 동지애를 보였습니다. 동지간의 믿음, 사랑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귀중한 것이기에 우리의 귀감이 됩니다. 이런 사랑,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대중들 속으로 파고드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우리 동지들끼리의 단결과 믿음이 없이는 대중 사업도 실패하고 대중 속에서 설자리가 없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풍요하고 탄압이 없는 세상에서 사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김양무 선생이 보여준 가장 쉽고 원칙적인, 동지애와 신심, 원칙고수의 정신이 없이는 우리의 운동이 빈 수레와 같고 요란한 빈깡통 소리만을 반복할 것입니다. 남녘 운동의 과제는 절대적으로 자주권의 확보입니다. 작금의 모든 전쟁위협과 핵사태는 자주권이 없이 외세에 빌붙어 살아온 50년의 결과(그 뿌리는 더욱 깊지만)입니다. 우리분단의 청산은 얼마나 빨리 남녘이 자주권을 회복하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타오르는 반미의 촛불을 끝까지 켜서 민족자주의 길로 나가는가 다시금 촛불을 끄고 예속의 길로 사대주의의 길로 나가는 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민중을 믿는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투쟁하라고 김양무 선생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민족은 2000년 6.15선언을 필두로 <우리민족끼리> 힘을 모아 통일을 이루자고 약속하고 실천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6.15선언을 구체적으로 이루려는 우리 해내외 동포들의 자세에서도 김양무 선생의 애국정신과 그의 실천들은 귀중한 민족자산이라고 확신합니다. 2003년 초두 김양무님의 백절불굴의 애국정신을 되새겨 볼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쁜 마음을 아울러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2]


고인의 사모 양은찬 님의 시의 세계와 작품들 소개

*발표: 김영희 님(작가,시인)


kimyangmu-5.jpg민족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분들의 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약점중의 하나가 구호위주의 상투성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2년반 전에 나온 양은찬시인의 시집 빙점의 사랑과 그리고 양시인이 민족통신에 올린 몇편의 시들을 읽어보면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민족시들을 읽게 됩니다. 지루한 상투성대신 아름다운 서정성이 도처에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시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시인의 시세계를 드÷ 세계, 드높은 세계---이렇게 크게 둘로 나누어 봅니다.

드÷ 세계는 이 지상의 만물과 한몸, 한생명이 되는 경지입니다., 가족, 민족뿐 아니라 길거리의 돌맹이, 풀 한포기같은 미물조차도 우리와 같은 생명체임을 느끼는 깊고 섬세한 감수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양시인의 시집에는 그 드÷ 세계관을 느끼게 하는 직관적이면서 아름다운 시들이 한두편이 아닙니다. 특히 짧은 단시중에 그런 시들이 많습니다.

**단감 낭독
씨앗이 다칠까봐/조심조심 베어먹었다/씨앗 속에는/작은 숟가락 하나/햇볕 떠먹고/이슬 떠먹고/무럭무럭 자라면/나무가 되잖아!/

**민들레 꽃길 낭독
민들레는/왜/키가 작은지/잎사귀는/왜/층계처럼 놓였는지/알게 될 거야/날개를 잃은 작은 벌을 보면/땅을 기어가는/꿀벌을 위해/이슬 한 방울/꽃받침에 아껴두었지/귓속말처럼/낮은 향기로/이리와/이리와/환한 등대를 켜고 있잖아!/

두번째 드높은 세계는 황홀한 현실참여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한 때 단란한 소시민가정의 행복을 꿈꾸었던 양시인은 병석에 누운 김양무님을 돌보면서, 그리고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그의 뜻을 물려 받습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6.15에 대해서, 미군주둔에 대해서 , 범민련투사에 대해서 푸른 파도 넘치는 시를 쓰게 됩니다. 80년대, 90년대를 풍미하던 한국 민족시인들의 대부분이 진로를 바꾸어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의 시는 더욱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렇다고 설익은 감정을 함부로 보이지 않습니다. 절제, 인내, 포용력 같은
힘으로 그의 시는 깊어지기도 합니다.

드높은 시의 세계로 들어간 양시인은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시인보다도 자유롭게 높이 올라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 완성된 힘으로 지구의 축대를 지켜내십시오(2001.10.10)라는 시가 있습니다. 북한 인민군 창군 기념일을 맞아 양시인이 민족통신에 올린 시인데, 저는 당시 그 시를 읽으면서 양시인이 국가보안법으로 혹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했습니다.

*** [시]완성된 힘으로 지구의 축대를 지켜내십시오[2001.10.10] 낭독

열과 열이 만난 날 태어났으니
온전한 숫자 완성된 힘으로
지구의 축대를 지켜내십시오.

아침 노동자들을 위해
시인이 시를 짓고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지요.

기름때 주름살에 흐르는 땀은
자랑스런 일터의 보석이지요.

이마에 띠를 두른 노동자들이
기본권 쟁취 아우성 대신에
창조적 생산에 한결같이 행복하다지요.

열과 열을 곱하여 일백,
곱게 늙은 백살 어르신들의
진심어린 축복을 받으십시오.

지뢰 묻힌 땅에서도 꿋꿋하게 피고지는
들꽃들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열과 열이 합하여 스물,
이 땅에 태를 묻은 젊은이들의
힘찬 축복의 함성으로 나아가십시오.

외세의 횡포에 시달리다 간 영령들에게
하늘과 땅의 원동력을 받으십시오.

진달래 강산에 새로 태어날
미래의 주인공들에게도
무한한 시간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열과 열이 만난 날 태어났으니
온전한 숫자 완성된 힘으로

단군이 세운 나라 통일 조국의
든든한 축대로 버텨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말슴드리고 싶은 것은, 남북분단시대 가장 아름다운 사모곡들을 그가 노래하지 않았나 하는 것 입니다. 숫자로 불리워지는 당신의 이름, 큰 새 생각, ,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 기쁨은 슬픔의 반대말인줄 알았지, 꽃향기 속에서 동지들을 맞이하는 당신, 눈물을 보석이 되게 하는 당신등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시가 한두편이 아닙니다. 양시인의 드넓은 시의 세계, 또 드높은 시의 세계에서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가장 큰 중심은 바로 이 님에 대한 영적 사랑(Spiritual Love), 영원한 사랑(Eternal Love), 그것을 영적 사랑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생일 낭독

몸통 잃어버리고
영혼만 남은 당신과

정신 잃어버리고
몸통만 남은 나

합하여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족통신 1/25/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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