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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약사, "남한사람들 시각 개선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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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9-24 10:15 조회21,2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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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약사가 남한에 와서도 약사자격증을 땃고 그 동안 그럭저럭 살아왔다. 그러나 추석 전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됐다. 한반도 비핵화, 남북한 경제교류, 인도적 대북지원 등 여러 쟁점들이 다시 사회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조국반도에 진정한 평화체제가 구축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경향신문 백철기자가  탈북지식인을 통해 그의 생각을 들어보는 대담을 했다. 이 보도를 전재해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탈북약사.jpg

 

 

 

남북한 1호 약사

“북한을 열등한 사회로 보는 우리시각 개선돼야”

 

글·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기자

 

·남북한 1호 약사 이혜경 박사


·“북한은 1956년부터 무상치료제를 실시했다. 북한 주민들은 임금의 1%를 사회보험비로 내고, 그 재원을 가지고 북한 사회의 2개의 기둥으로 불리는 무상치료와 무상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추석 전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됐다. 한반도 비핵화, 남북한 경제교류, 인도적 대북지원 등 여러 쟁점들이 다시 사회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체제가 구축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탈북 약사인 이혜경 박사가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탈북 약사인 이혜경 박사가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남북한 약사 1호’로 알려진 이혜경 통일학 박사(53·사단법인 새삶 대표)는 북한을 지나치게 열등한 사회라고 보는 우리의 시각이 개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 박사는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남북 주민들의 의료·건강상태가 하나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북한의 의료제도와 현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함흥약학대학을 나온 이 박사는 북한에서 12년간 약제사(약사)로 일하다 북한을 탈출해 가족과 함께 입국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약사로 활동한 경력이 인정되지 않아 약사시험을 볼 수 없었다. 이 박사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통일학을 공부하는 한편, 삼육대 약학대학에 편입해 다시 약사시험을 준비했다. 2015년 약사시험에 합격한 이후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북한의 의료제도를 전반적으로 소개한 <북한 무상치료제에 대한 이해>를 펴냈다.

-북한에서 12년간 약사로 일했는데 통일학을 공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2007년부터는 탈북민들의 북한 학력을 인정해 줬지만 저는 그 이전에 탈북한 터라 학위 인정이 안 됐다. 통일교육원에서 강사를 하면서 알게 된 교수, 대학원생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남한에서도 배움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북한에선 남조선 말만 꺼내도 큰일이었는데 여기서는 북한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고 해서 놀랐다. ‘이거라면 내가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통일학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북한의 보건일군(보건의료인력)에 관한 것이고 7월에 펴낸 책은 북한의 의료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대학원에서도 주로 북한의 의료실태에 대해 연구한 것인가.


 

“제가 잘 아는 분야이기 때문에 그쪽을 주로 공부했다. 이번에 쓴 책도 학위논문을 쓰면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 북한의 무상치료제가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제도다. 그동안 안보교육이 어떤 식이었나. 우리는 이렇게 자유롭고 이렇게 좋은데 북한은 그렇지 않은 나라라고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했다. 북한의 좋은 점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북한은 1956년부터 무상치료제를 실시했다. 북한 주민들은 임금의 1%를 사회보험비로 내고, 그 재원을 가지고 북한 사회의 2개의 기둥으로 불리는 무상치료와 무상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1972년엔 아예 헌법에 무상치료를 공민의 권리로 명시했다. 물론 제도는 선진적이지만 북한의 의료사정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경제난과 식량난이 겹치면서 무상치료제는 허울만 남았다. 제도는 좋지만 인프라가 부실하고 의약품이 부족하다. 자동차는 있는데 기름이 없어서 굴러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책을 보면 북한도 의료인력이 잘 갖춰져 있고, 유엔에서도 의약품에 대해서는 인도적인 지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90년대부터 의료뿐만 아니라 북한의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이 무너졌다. 특히 의료분야에서 시장화가 많이 이뤄졌다. 무상치료제는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자신의 필요에 맞는 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탈북한 보건일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근 들어서는 약을 사려면 돈을 내야 하고, 수술을 받으려면 달러가 필요하다고 한다. 어떤 의사 출신 탈북자는 선물용 담배도 없이 온 환자에게는 기계가 고장났다고 핑계를 대고 진료를 하지 않은 적도 있다고 한다. 모아둔 돈이 없는 상태에서 병에 걸리면 꼼짝없이 죽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상비약’을 갖추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 이 상비약은 편의점에서 파는 감기약, 해열제 이런 게 아니다. 큰 병에 걸렸을 때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을 북한에서는 상비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탈북약사 이혜경 박사 / 우철훈 선임기자

경기도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탈북약사 이혜경 박사 / 우철훈 선임기자

 

 

-북한에서의 약사 생활은 어땠나.

 

“김일성 사망 이후 1994년 가을부터 북한 전역에서 콜레라가 발생했다. 한창 약사로 일하던 시절이었는데 몇 달간 집에서 한숨도 못잘 정도로 바빴다. 보건일군들은 각자 맡은 구역이 있다. 그 구역에서 오늘은 설사를 몇 명이 했고 열이 높은 사람은 몇 명인지를 매일 저녁마다 만나서 총화(상황공유)한다. 겨울이 되면서 콜레라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런데 이듬해 3월부터 다시 각종 티푸스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콜레라나 티푸스는 수인성 전염병이다. 북한 사회가 전반적으로 마비되는 과정에서 영양 공급도 부실해지고, 상수도 시설 관리도 제대로 되지 못해서 전염병이 갑자기 늘어난 것이다. 길바닥에 앉아서 이상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발진티푸스 환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김정은 시대 이후에는 전염병이나 식량난 문제는 크게 줄어들었다고 알고 있다.


“제가 평화와 통일을 말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생명이다. 생명을 지키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의학이 있는 것이다. 사실 남한에서 북한 사람들의 건강실태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보다 영양이 부족하고 키가 작다는 것 정도만 알지 구체적인 건강 데이터는 알지 못한다. 북한 당국은 콜레라도 ‘급성 설사증’이라고 바꿔 쓰는 등 공식적인 자료에서는 전염병이라든지 북한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공개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탈북자들의 건강 데이터를 연구한다면 북한 사람들의 생명건강 데이터를 유추해낼 수 있다. 제가 연구하기로는 탈북자들 중에 전염병 보균자이거나 전염병의 경험이 있는 사람의 비율이 35~40%에 달한다. 온 집안이 전염병으로 앓아 누웠는데 나 혼자만 일어나서 북한을 나왔다는 분도 있었다. 제가 이런 내용을 연구하려고 지난해까지 3년간 통일부에 북한 전염병 문제를 연구주제로 제출했지만 아직까지 연구주제로 선정된 적은 없다.” 

-남한에서 약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사실 남한에서 북한을 너무나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북한에서 약학을 배웠다고 해도 남한 수업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여러 학교에서 입학이 거절됐었다. 그러다가 삼육대학교에서 편입을 받아준 거다. 아마 삼육대가 원래 평안도에 있던 학교라서 받아준 게 아닐까. 사실 남북한의 의료분야 교육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물론 북한은 의료인력에게도 김일성·김정일에 관한 정치 수업을 실시한다. 그 외에는 수강과목에서 양쪽에 큰 차이가 없다. 북한에선 의료용어를 라틴어식으로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Virus를 두고 북한에서는 비루스라 읽고 남한에서는 바이러스로 읽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오랫동안 북한이 고립된 사회로 지냈는데 남한과 교육수준이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나.


 

“사실 북한 의학교육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남한의 의대 교수들이다. 김일성이 직접 나서서 남한의 인텔리들을 데려오라고 강조했고 김일성의 말에 따라 납치된 남한의 의대 교수들이 쓴 교과서가 지금도 북한 교과서의 초석이 됐다. 남북한 의료교육은 비슷한 뿌리에서 시작한 것이다.

-현재 대표로 있는 사단법인 새삶은 어떤 곳인가. 탈북민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게 주목적인가.


 

“사람이 나쁜 사건을 경험하면 그게 큰 스트레스가 되고 트라우마가 된다. 북한을 탈출해온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스트레스가 많다. 저만 해도 남한에 산 지 20년 가까이 되지만 굳이 탈북자라고 말하고 다니진 않는다. 제가 말만 안하면 탈북자인지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 북한에서 오셨구나’ 하는 정도다. 물론 트라우마에서 의학적인 치료가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관심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삶은 탈북자들의 트라우마 극복을 도와주는 단체라고 보시면 된다. 예를 들어 탈북 대학생들끼리 서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동안 탈북 대학생들이 출신을 들킬까봐 말 한마디를 해도 조심했는데 그 자리에서만큼은 편하게 북한말로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 출신지역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동네 이야기도 많이 한다.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속에 숨기고 살면 그 자체로 얼마나 힘든 일이냐. 또한 저도 남한에 정착하면서 배움이 참 중요하다고 느꼈다. 배워야 남한 사회에 빠르게 섞여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탈북 학생들에게 꼭 독서활동을 많이 하고 독후감도 제출하라고 한다. 저도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일이 끝나는 날이 많지만 일 끝나고 나서는 꼭 학생들의 독후감을 읽어보고 평가도 써 준다.” 

-탈북 대학생들 외에는 또 어떤 분들과 자주 소통하는 편인가. 


 

“격주마다 탈북 여성들끼리 하는 합창단이 있다. 탈북 여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경력단절과 가족단절이다. 저만 해도 북한에선 약사였지만 남한에선 그 경력이 인정 안 되지 않았나. 그래서 청소도 하고 파출부도 하고 공장일도 하고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특히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탈북한 여성은 정서적으로 불안함을 호소할 때가 많다. 그래서 2년 전부터 격주로 합창 모임을 만든 것이다. 거기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함께 모여서 두 시간씩 노래를 부른다. 그거만 해도 다들 너무 즐거워들 하신다. 두 시간 노래 부른 기운으로 한 달을 살아간다는 분도 있고, 합창이 있는 날이면 빨리 노래시간이 왔다고 문자도 많이 들어온다.” 

-올해 들어 두 차례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70년을 이어온 분단상황을 하루빨리 걷어내자고 하는 게 정상회담 아니냐. 그동안 두 차례 정상회담의 성과는 그야말로 메가톤급이라 할 만하다. 김정은에 대해서도 남한에서는 폭군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말이 통하는 면이 있다 쪽으로 인식이 개선됐다. 하지만 정상들끼리만 친해진다고 해서 통일이 되는 게 아니다. 통일이 되려면 북한의 안 좋은 점만 볼 게 아니라, 좋은 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지금 남과 북의 차이가 무엇이고 이 차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을 마치 우리 동생네 식구들이라는 생각으로 식량이나 의약품을 지원해준다면 궁극적으로는 얻는 게 더 많을 것이다.” 

-추석 땐 어떻게 지낼 생각인가. 


 

               

“그동안 추석 때마다 탈북자들끼리 모여 강화도 등 북한과 가까운 곳에서 합동망향제를 지냈다. 올해 추석이 네 번째다. 다들 민족 최대의 명절을 맞아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고향을 찾지만 탈북자들에겐 괴로운 시기다. 망향제를 할 때마다 고향에 두고온 부모형제나 처자식을 생각하며 괴로움과 죄의식으로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는데, 탈북민들에게도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가 언젠간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사항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9231755001&code=940100#csidx13bc786876cd65eaf44b2b28a66b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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