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2-13 14:56
[인물]뉴욕 김태희선생댁 방문하고 놀랐다
 글쓴이 : 편집실
조회 : 1,851  

노길남 민족통신 편집인은 이번  뉴욕과 보스턴 여행중 별도로 시간을 갖고 곳을 방문했다. 중의 한곳은 뉴저지의 포트리에서 뉴욕의 스테이튼 아이랜드로 가는 과정이었다. 자체가  관광이었다고 말한다. 오늘은 김태희 선생 댁을  방문하기로 하고 버스, 전철, 페리 연락선을 타고 여행한 이야기를 다뤘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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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뉴욕 김태희선생댁 방문하고 놀랐다



[뉴욕=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스테이튼 아이랜드(Staten Island) 가는 버스, 전철, 그리고 페리(Ferry) 배를 타는 과정은 한마디로구경거리 여행이었다. 이날 기자가 가장 놀라운것은 김태희 선생댁을 가는 구경거리 보다는 그의 집에 초대받아 주택내부에 놓여 있는 그의 삶의 발자취에 크게 놀랐다.

 

뉴저지 티네크에서 버스를 타고 허드슨 강을 건너 뉴욕시의 42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터미널 지하로 내려가면 전철이 있다. 2달러 50센트를 주고 시니어 시티전 왕복표를 구입하여  전철 1번을 타고 35분가량 South Ferry까지 내려갔다. 페리 연락선은 수백면이 탈수 있는 관광연락선인데 25 거리의 바다를 건너 가는데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스테이튼 아이랜드는 뉴욕시의 5개행정(Borough)구역(맨하탄, 브루클린, 브롱스, 퀸즈, 그리고 스테이턴 아이랜드) 하나인데  인구는 45만명이며 리치먼드 카운티를 형성하고 있다. 페리 연락선을 타고 가는 도중 소위 자유의 여신상 세워져 있어   섬을 드나드는 페리 연락선은 무료 관광배라고 불리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1661 네덜란드가 맨해튼에 이어 섬을 차지하여, Staten이라는 이름을 붙여 섬의 명칭이 되었다. 후에 영국으로 넘어갔고, 미국 독립 전쟁 당시에는 격전지였다. 1898 뉴욕 시에 정식으로 편입된 교외 주택지로 발전하였다.

 

1백년 전에는 인구 10만명이 안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때의 인구에 비해 45만여명이 되어서  4.5배가 넘는 숫자로 증가되었다. 현재 인구의 78% 백인이고 흑인이 10%, 아시아계가 6%, 그리고 서반어계와 기타인종들이 합처 12%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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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튼 아이랜드의 동포현황

 

미국생활 40여년 이곳에서 35 거주한 김태희 선생(74) 이곳에 사는 동포들은 7천명 내지 9천명 가량 된다고 추산하면서 동포가 운영하는교회가 6, 천주교성당이 1개가 된다고집계하는 한편 이곳에사는 동포들은 대부분자기 집을 갖고 있고, 의사나 간호원 전문직들에 종사하는사람들로 뉴욕주, 뉴욕시에거주하는 시민들의 세대당 평균소득보다 높은 소득을 갖는 계층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안정된 경제생활을 하는 계층의주민들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곳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이런 저런 주제의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함께 점심을나눈 다음에 김태희선생의 집으로 초대되었다. 그의 집안 분위기와책꽂이, 그리고 방마다진열되어 있는 음악 테이프와 CD, 카메라들  나열하여 놓은 진열장, 귀한 우표 수집장, 동포사회에 기여한공로로 받은 감사패와공로패, 그리고 불우아동돕기로 받은 표창장들이 방마다 가득 놓여 있었다. 한마디로미국에 오기전에 그리고미국에 와서 지금까지동포사회를 위해 좋은 일들을 많이 하였다는것을 가정환경에 놓여 있는 상패들과 공로패들을 보고서  놀랄정도로 직감할 있었다.

 

남녘언론들에 대화제가 됐던 

이민 오기전 김태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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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상패들 중에 김대중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대통령이 되기 전에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있던 시절인1985 515일에 그들로부터 받은 감사장도보였고, 이민오기 직전인1977 2월초에 남녘언론들로부터 대화제를불러일으킨 아름다운 이야기도있었다. 당시  거의 모든 신문들과 사설에서 집중적으로 다뤘던 그의 선행에 대한 이야기가 가정을 방문한기자의 관심을 끌어 당겼다.

 

기자가 관심을보이자 김태희 선생은당시에 보도되었던 기사들을보관한 엘범을 꺼내와보여주었다. 보수인문이고 개혁지향신문이고 거의 모든 언론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전부 다뤘던미담이다. 그는 미국으로이민가기 때문에 한국전력회사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게되자 퇴직금을 받은 돈과 집을 판돈을합쳐 모두 1천만원을불우아동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아마 지금가치로 따진다면 8억원 내지 10억원이 될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을 미국 돈으로환산하며 적어도 1백만 달러가 되는 거액의돈이다. 이것을 가난한아동들에게 장학금으로 내놓고빈손으로 이민길을 떠난다는선행이 당시의 모든 언론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미담은특히  자기만을생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자들의  이기주의에 충격을주기에 충분한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김선영 시인은 일간지에 《눈 시울적신어느 전공의 1천만원》이라는 제목을 글을 통해  사랑의장학나무기사는 내가 읽은 어떤 걸작보다도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고 지적하면서  《이 나라에서 명예도권세도 부도 누리지못했던 이름없는 꽃풀 같은 그가 사실은누구보다도 아주 커다란인간이었고 애국자였고, 빛과 꿈의 부자였다는 사실을알았을때 부끄럽고 당황한사람들은 많으리라….당신이예수인가. 무엇때문에 당신이일생에 한번도 못만져 거액을 아낌없이던지고 구겨진 값싼 점퍼를 걸치고 있는가. 더구나 여유만만한 웃음을웃고 있는가.》라고감탄하고 도박이나 부정불의로 거액을 챙기려는사람들이 허다한데 어찌하여그대는 가진것이 없는자가되려는 용기를 가지게되었는가를 묻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이민와서도 처음 1년동안직장생활을 했고, 합동통상회사를 설립하여 사장(1978~1993)으로서 15 동안 사업을 하면서, 기독교장로로서 무료봉사 많은 일들을 왔고, 이민사회 불우아동돕기를 비롯하여 좋은 일들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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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선생,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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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선생은1943 1112  ()의주에서출생했다. 11남매(83) 밑에서세번째이다. 1946년  7남매가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다가 1977 2월에 미국 이민을 오게 되었다. 남녘 땅을 떠날때 가진 재산을 모두 불우한사람들을 돕는 곳에 기증하고 무작정 미국으로 이민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자영업을 경영하게 되었다. 다행히 일이 잘풀려 처음에 운송회사 직원으로 1 일하다가 다음해인 1978년부터 합동통운회사를 운영하면서 매년 이웃돕기 성금을 하며 남을 돕는 일을 지속적으로 왔다. 1993년까지 15년동안 운송회사를 운영하다가 사업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부동산 관리일과 자식의 사업을 돕는 일을 왔다.

 

그러던중  2001 아리랑축전행사에 미주동포들을 모집한다는 여행사의 광고를 보고 20여명이 북조선 관광을 하게 것이 고향땅을 다시 밟게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처음 북녘 관광을 갈때 주위에서는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면 잡힌다 위협적인 말들이자자했다. 지난 시기에 지주계급이었기 때문에 북을 방문하면 북에 체포된다고 하면서 가지 말라는 것이 주위사람들의 일관된 자세였다고 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동족을 멀리하라는 민족분열세력의 상투적인 선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고 돌이켜 보기도 한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의 불우아동을 도왔고, 이민와서도 오랜동안 이웃돕기 성금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왔기 때문에 남은 생애는 힘닿는데까지 고향 땅에 있는 북녘 동포들을 돕는게 자신의 도리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고향땅을 20여차례방문하고 느낀점은 조국통일이 되는게 최상이다.”라고 깨닫게 되었다면서 평양봉수교회에 가서 울면서 기도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핵무기없는 통일은 허수아비라고 말하면서 나라가 힘이 없어 대국들한테 시달린 역사에 대해서도 거의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과거 우리역사에서 고구려와 고려의 지위와 역할을 분석하는 한편 신라가 나당연합을 통해 사대주의를 한것을 신라통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역사관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지금 남한이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독도문제와 성노예 문제에대해 단호하게 맞서지못하고 멍하게 바라보며 일본에 질질 끌려가는모습은 분노를 자아낸다고 밝히면서 우리 남과 북이 힘을 합쳐야 그런 주변국들의 잘못된 점들도 고쳐 나갈 있다고 뼈있는 말들도 쏟아냈다.

 

김태희 선생은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못보는경우도 있다고말한다그는 겉보기에는 우락부락한 성격으로 보이지만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의 잔정과 진지한 성품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북조선 태권도선수단이 미국을 방문했을때도 지원한바 있었고.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도와야한다는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또한 해방전후 시기에 나온 우표들도 수집해 왔는데  중에  일부 우표는북조선 관계부처에 기증했고,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있는 우표들 중에 귀한 우표들을 조선 우표박물관에 기증하려고 한다면서 기회만 있으면 조선이 필요한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작은 힘이나마 돕고 싶다는 것이 남은 생애에 하고 싶은 그의 심정이다.

 

 

[인물]유태영,이종천,리준무 선생등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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