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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 동포들 홍정자 선생을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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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6-07-18 01:20 조회3,3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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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홍동근 목사의 사모, 홍정자(백정자)선생을 추모하는 모임이 고인을 아는 인사들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통일운동진영의 미주동포들은 7월16일 시내 평화의 교회에서 홍정자 여사를 추모하는 모임을 갖고 고인과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남편 홍동근 목사가 통일운동에 기여한 업적들을 돌이켜 보았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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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 동포들 홍정자 선생을 추모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통일운동진영의 미주동포들은 7월16일 시내 평화의 교회에서 홍정자 여사를 추모하는 모임을 갖고 고인과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남편 홍동근 목사가 통일운동에 기여한 업적들을 돌이켜 보았다. 


이날 모임은 백승배 목사(범민련 재미본부 의장) 사회로 윤길상 목사(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장)의 추모의 말씀, 고인의 약력(하용진 선생 소개), 북부조국의 조전(김현환 목사 소개), 정신화 목사의 조가, 양은식 박사의 조사, 시애틀 강산 선생의 추모사(사회자 소개), 박승우 선생과 노길남 선생의 '고인을 추억하며...", 그리고 평화교회 김기대 담임목사의 축도로 끝났다.


이날 순서에 나온 인사들은 고인의 헌신적인 통일운동분야에서의 업적을 비롯하여 남편인 홍동근 목사를 내조하며 여러가지 마음고생들을 감내하면서 함께 통일운동진영에 참여하며 남긴 업적들을 회상해 주었다. 윤길상 목사는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교로 조롱받고 있는 시대에 이들이 남긴 업적들을 가리켜 "홍동근-백정자'의 사건"이라고 정리하면서 '예수의 사건'이 해방을 의미하였듯이 이들 부부의 사건도 해방을 의미하는 측면에서 같은 사건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양은식 박사는 고인의 마지막 생애에서 마지막 한두달을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물 한두잔으로 병원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조국의 피눈물 나는 역사에 온 생을 던진 고인 부부의 고귀한 애국업적들을 가슴뜨겁게 회상해 주며 미안한 생각만 떠오른다고 고백했다. 박승우 선생은 20년전에 홍정자 선생의 '내가 만남 북녘 사람들'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고 북부조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고 회고했고, 노길남 선생은 홍정사 여사가 생전에 가장 가깝게 지내던 분들은 홍순호장로와 홍문재장로라고 소개하면서 추모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 헐리욷교회 시절에 만난 장로님들, 육재규-육정자 장로부부,곽건영 목사부부, 그리고 아담스에 있던 '선한사마리안 교회' 교인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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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자선생은 1992 25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2000930일에 『백두밀림의 항일투사 김정숙 어머님을 추모하여』를 발행한 이래  번째 탐방기를 출판했다.  책들에서 소개된 사진들만 해도 150여장이 된다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상대로 대담한 대상들의 숫자만 해도 150여명이나되고  대상의 분야들도 다양하다저자는  대상들과의 깊은 대담을 통해 이북 동포들의 생활과 마음 깊숙한 부분까지 반영해 준다 화백과 대담한 북녘 동포들은 하나같이 순수했고 아름다운 마음의소유자들이라고 설명한다서로가 가슴으로 만났기 때문에 저자인 고인은 그 당시 이들을 탐방취재 하면서 많은 눈물을 보았다고 술회했다.

 

고인은  1988  방문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30 차례나 방문하면서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만났다이들을 탐방 취재하기 위해 해외동포들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아오지 탄광"까지도 돌아보며 이북의 구석구석을 소개해 줬다

 


그리고 홍정자여사가 2004년에 출판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탐방기는 아무도 흉내내기 어려운 정도로 뛰어난  솜씨가 돋보였다아마도 뛰어난 예술가 집안에서 자라나서인지 그의 묘사력은 남달랐다그의 글은 가슴 가슴마다에 자국을 남겨준다.


*관련보도자료: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7527


 북부조국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에서 유가족들에게 보낸 
위로 편지의 사본입니다. 



홍정자선생의 유가족들에게 
  
    우리는 해외조국통일운동의 원로였으며 재미동포전국련합회 고문의 한사람이였던 홍동근선생의 부인인 홍정자선생이 별세 하였다는 뜻밖의 비보에 접하여 슬픔을 금치 못하며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선생은 민족분단의 아픔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가 자주통일 운동의 앞장에서 재미동포전국련합회의 강화발전과 민족의 화해와 단합, 조국통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쳐온 열렬한 통일애국인사였습니다. 

    홍정자선생이 비록 그토록 념원하던 통일의 날을 보지 못하고 우리의 곁을 떠났으나 조국통일의 길에 바친 선생의 고결한 생애와 애국의 넋은 모든 해외동포들과 우리들의 심장속에 영원히 길이 남아있을것입니다. 

    다시한번 홍정자선생의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주체105(2016)년 7월 6일

 


                                    

                                                                               

홍정자 선생님 추모사   


       시애틀의 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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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년전 고인을 만남 강산 선생

 

홍정자 선생님,

 

3년 전 뵈었을 때만해도 건강하셨던 것 같은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아파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다정다감한 모습과 차분하게 들려주던 말씀은 귓가에 쟁쟁한데 선생님은 이미 소망하던 하늘나라로 떠나셨군요

 

3년 전에 로스앤젤스를 방문하였다가 홍정자 선생님을 꼭 만나뵙고 싶다는 저의 부탁을 받은 노길남 박사님의 주선으로 옛날 뵌 지28년 만에 홍정자 선생님을 다시 만나뵐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그 이후로 몇 번의 전화로 대화를 나누면서 선생님의 저서 가운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여러 권을 제게 보내주어서 그 귀중한 책을 이곳의 통일운동 동지들에게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제가 선생님께 보내드린 것은 겨우 이곳 시애틀의 자연 속에서 직접 채취한 미역과 고사리 말린 것 정도였지요겨우 그 작은 선물을 받으시고도 저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던 선생님의 음성이 또렸하게 떠오릅니다.


 

북부조국을 제가 방문한 후 방문기를 쓰는 동안 그것을 읽고 싶으시다기에 방문기를 프린팅해서 우편으로 보내드렸던 것을 읽으시고 전화를 주셨던 것도 생각납니다통일운동에 뛰어든 제게 고맙다고 하시면서 한편으로 제가 힘들고 지칠까해서 걱정해주셨지요옛날 홍동근 목사님이 저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셨듯이 홍정자 선생님께서도 저를 배려하고 깊이 사랑해주신 그 마음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어디서 또 다시 선생님과 같은 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홍정자 선생님이 홍동근 목사님과 함께 제가 살던 하와이의 빅아일랜드 섬을 찾아오셨던 것이 벌써 31년이나 되었군요그때 홍동근 목사님은 빅아일랜드 섬에서 의사로 일하던 옛 제자와 연락이 되어 수십 년만에 상봉하였었는데 당시 아무도 갈 생각조차 품지 못하던 북부조국을 방문하여 어머님을 만나뵙고 통일운동을 하는 홍동근 목사님을 뵙는 순간부터 저는 홍 목사님의 새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었지요홍동근 목사님 또한 저를 제자로 받아주셔서 소장하였던 수많은 책들을 제게 보내주셨고 시시때때로 편지를 보내주시면서 제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제가 마지막으로 받았던 책이 김 주석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제목의 저서였지요저로 하여금 때가 되면 꼭 통일운동에 나서리라는 마음을 굳게 다지도록 하였던 귀중한 책이었습니다.

 

홍동근 목사님과 홍정자 선생님의 책을 읽은 독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의 반공세뇌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모두가 거짓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북부조국은 인민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인민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하는 곳또한 인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약한 자, 가난한 자, 아프고 병든 자를 위하여 희생하기를 너도나도 앞장서는 아름다운 세상이란 것을 깨닫게 되지요그야말로 예수님의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지상의 명령이 이미 실현된 지구상의 유일한 곳이 북부조국이란 것을 깨닫게 만드는 소중한 책들을 두 분께서는 우리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홍정자 선생님, 멀리 떨어져 살아가느라 선생님의 추모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이렇게 선생님을 잃은 슬픔을 짧은 글에 담아 선생님의 영전에 올립니다.   홍동근 목사님과 홍정자 선생님, 두 분께서는 이 세상을 먼저 떠나셨지만 두 분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늘 살아계십니다두 분께서 평생을 통하여 추구해오던 조국통일은 남아있는 우리들이 꼭 이뤄낼 것입니다통일을 위하여 좀 더 힘을 다하여 추구하고 이루는 것이 바로 두 분의 뜻이고 두 분의 삶을 우리들이 이어서 살아가는 것이라 확신합니다.

 

홍정자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요소망하던 하늘나라에서 홍동근 목사님과 먼저 간 모든 애국자와 통일동지들과 함께 안식하소서통일을 이루는 그날을 지켜보소서


               

                  2016년 7월 15일  

               시애틀의 강산 올림

 

 
우리 곁을 떠난 홍(백) 정자 님에게


*백승배 목사(범민련 재미본부 의장)

홍정자추모-백승배.jpg



지금 내 앞에 우리의 모국 북녘의 천재화가 오은별의 글이 펼쳐져 있다. 
그 나이 아홉 살 되던 날 밤에 쓴 글이다.


“홍정자 선생님에게

봄날에 오신 선생님
빨리 보고 싶네
다정한 목소리
정다운 얼굴모습
이제 꿈속에서 만날래
그러면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줄거야.‘
1989. 4. 12 밤에
은별

정자야, 
지금 나는 그대를 이렇게 부른다. 
“정자야” “내 동생 정자야!“ 
생전엔 이렇게 불러보지 못한 그대의 이름 ‘백정자’
생전에는
“사모님” “홍 사모님”
이렇게 불렀지. 
그대도 나를 “백목사님” 하고 불렀지만
“오라버니” 라고 부르고 싶었잖아?

이제 그대는 이 땅에 없다.
“정자야!” 불러도 대답할 네가 없다. 너,
저 세상으로 우릴 두고 훌훌 떠났다.

그래, 정자는 4월의 봄 여인이었지,
푸릇푸릇 새싹 새잎이 돋고
들에는 냉이, 질경이, 봄나물이 돋고 
산에는 진달래 개나리 철쭉 활짝 봉오리 지고
수줍은 소녀처럼 숨조리다
수채화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는 봄의 여인이었지

그래, 너는 4월 봄의 여인이었지
근 40여년 조국의 분단으로 잃었던 조국을 방문하여 
잊었던 잃었던 북녘 형제자매들을 발견하고
4월 봄의 여인이 되었었지.
4월 봄이 오면 우리의 북녘 조국을
예술인들을 이끌고 방문하곤 했지. 
4월 축전을 위해, 경축을 위해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일찍 고국을 떠나
만주 산하와 백두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한 김일성 주석님이 태어난 달
4월 경축, 봄의 축전을 위해

정자야, / 더 살고 싶었지? /목메어도 그리는 조국통일, 완전한 해방의 날까지
살고 싶었지? /그러나 찾아오는 병마를 누가 이길 수 있나.
생 로 병 사 /생명체는 다 그렇게 살다 돌아가는 거지. /어머니 품으로

그대 육체는 떠났어도 그대가 산 71년의 세월
그 중에도 88년 이후 28년의 세월은 값진 것이었지
잃었던 북녘의 형제 자매들을 재 발견한 세월
쉽지만은 않은 고난도 있었지
쫒기듯 두려움의 밤샘도 있었지
그러나 보다 큰 기쁨과 보람 있었지.
민족의 재 발견
인물의 재 발견
사람의 재 발견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기쁨도 있었지.
숨은 보화 찾는 기쁨도 있었지.
그래, 그것이야 금은보화보다 더 귀한
사람 찾는 기쁨

그러나 그게 그렇게 어려웠지! 힘겨웠지.

그대가 쓴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에
은별이의 88년 10월 10일 일기에 이런 글이 있다.

“내가 동무들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게 무엇이니?
그러자 한 아이가 ‘보석이야’ 했다. 그래서 보석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이니?
하니 또 한 아이가 ‘금이야’했다.
그래서 나는 보석도 금도 귀중한 건 맞아.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건 사람이야.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있어야 금도 쓰고 보석도 만들어 줄 게 아니니 했다.
나는 전에는 몰랐댔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가르쳐 주신 건 우리 어버이 수령님이야 했다.“

그래, 사람이야. 사람을 찾는 일이 가장 귀한 거야.
사람이 제일 귀한 거야.
돈이 아니야. 사람이야.
사드가 아니야. 사람이야.

1986년 8월 28일 은별의 일기.
“나는 통일문을 그렸다.
통일문도 개선문처럼 언젠가 생길거야.
통일문을 더 그렸는데 날짜를 쓰지 못했다.
나는 날짜를 쓰겠다 했으나 아버지는 통일이 될 때까지 쓸수 없다 했다.
언제나 통일이 되나.“

언제 통일이 되려나?
통일을 보지 못하고. 그대도 
사랑하는 남편 홍동근 목사따라
이 세상을 떠났다.

깨알처럼 노트에
유치환의 ‘바위’ ‘편지’, 이육사의 ‘청포도’, 노천명의 ‘만추’ ‘유월의 언덕 ’ 에밀리 디킨슨의 ‘만일 내가’, 헤세의 ‘흰구름“ 과 ‘안개속’, 보들레르의 “stranger', 조지훈의 ‘파초우’, 박두진의 ‘밤비둘기‘, 쟝 꼭또의 ’히야신스처럼‘, 타골의 ’석양의 노래‘, 워즈워드의 ’무지개‘, 로버트 프로스트의 ’목장‘ ’눈나린 저녘 숲가에서서‘ , 알렉산드로비치의 ’미친 듯 살고 싶어라‘를 베껴쓰고,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을 지나, 풍운아 홍동근 목사를 만나 결혼, 드디어 88년 북녘 조국을 방문 4월의 봄의 여인이 되었었지. 이제 ’폭풍과 각성의 계절을 지나 자전적 소설을 완성했지만 남녘 노예 조국엔 출판해줄 출판사가 없다. 베스트 셀러가 될 있겠지만 고소가 두려워서. 정권이 두려워서. 돈이 두려워서.

그러나 이제 그대 꿈대로 ‘조용히 묵묵히 이 실같이 가느다란 물줄기를 타고 자꾸만 자꾸만 흘러가 이제 대해를 만나게 되었노니 편히 쉬게나. 꿈의 여인, 화가, 저술가, 조용하나 혁명의 여인, 정자여. 비록 사랑하는 동생 백건우를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그대 영혼 자유롭게 건우를 만나거라. 그리고 
계속 통일의 꿈을 꾸어라. 
저 나라에서라도.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 
우리도 그 꿈 잊지 않고, 잃지 않고 정진하리라.

2016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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