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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재 박사, 누님유해를 어머님 곁에 묻고 끝내 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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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5-11-20 03:27 조회6,255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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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재 박사는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누님의 유해를 시카고 가족묘에 있는 어머니 곁에 안장하여 생전에 염원하던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렸것만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지울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안장식때 소낙비는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분단70년의 세월을 비바람 맞으며 살아 온  우리 민족이다. 이날의 소낙비는  우리 겨레 전체의 아픔이며 눈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없다.박문재 박사 누님의 안장식에 참관한 노길남 민족통신 대표의 참관기와 이날 행사를 촬영한 자료를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소낙비 속에 진행된 안장식 예배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LqbTrfTJLjI



 



박문재 박사:


누님유해를 어머님 곁에 묻고 끝내 오열



[시카고=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어머님 곁에 누님의 유해를 묻는 순간 박문재 박사(심장내과 전문의, 교수,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수석부회장, 81) 끝내 흐느끼는 눈물을 쏟아냈다.

 

기자는 박문재 박사가 얼마전 초청한 박경재님 안장식 참가하기 위해 시카고에 도착하여 그의 누님, 박경재님의 안장식에 참석한 토요일 아침 1030(2015 1031) 유난히도 소낙비가 쏟아져 비를 맞으며 취재했다.

 

카메라에 사진 몇장을 박았지만 그것보다는 캠코드로 찍은 장면들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궁리 저궁리 하면서  65번째방북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그 마무리 작업들을 하느라고 시간이 많이 흘러 동영상 제작이 늦어지고 말았다.

 

자라나는 2, 3세들을 위하여 안장식에 임하는 소감에 대하여 영문으로 하나 써달라고 부탁하자 엇그제 박문재 박사는 10  어머님께서 임종순간까지  북에있던 딸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던 감회를 돌이켜 보며 영문으로 소감을 보내주었다.

 

나는 캠코드로 찍은 영상들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이것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여 기록물로 남기자는 목적으로  그의누님, 박경재님이 생전에 불렀던 노래 두곡을 삽입하여  동영상 제작했다. 그리고 박문재 박사에게  제작완료하기전에  한번보아 달라고 하고 파일을 보내 의견을 들었다. “예술적으로 잘되었다 하여 부족한 기록물이지만 이것을 독자들과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여기에 소개한다.

 

안장식때  쏟아진소낙비는 비단 가정의 아픔만 아니었다. 분단70년의 세월을 비바람 맞으며 살아 우리 민족, 우리 겨레 전체의 아픔이며 눈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없다.

 

박문재박사는 안장식을 마친 이후에  “ 65년만에  어머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게 되었다 고백한다. 그의 누님 박경재님은 전쟁시기인 1951  가깝게재내던 음악계 선배와  함께북녘으로 올라갔다. 나이가 17 소녀였다.  그는 인민군협주단 가수로 활동했고, 전쟁시기 이후에는 폴란드와 체코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북의 유명한  피바다 가극단 전속 소프라노 가수로 활약했다.

 

박문재 박사가 세살 위인  누님과 상봉할 있었던 것은 헤어진지 44년만인 1995년이었다.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북녘 병원들과 인연이 되어 의료봉사를 하며 그리고 의학자 학술세미나 등을 통해 북을 방문할 있어 누님과의 만남은 꾸준히 이뤄졌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3년전에 누님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문재 박사는 10년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시카고 가족묘에 묻혀있지만 생전에 누님(박경재님) 찾으며 그리워했다비록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려고 북의 누님 가족들과 의논하여 유해 일부라도 어머니 곁에 두자고 호소하여 요청이 이뤄지게 되었다. 1년전 유해를 가져와 집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이번에  안장식을 통해 어머니 곁으로 보냈다고 말한다.

 

클라랜돈 힐스 묘지에 안장하는 순간박문재박사는 흐느끼고 흐느끼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유족들은  그 유해함 위에 꽃송이들을 뿌리며 작별인사를 했다. 소낙비는 멈추지 않고 이날 하루 종일 쏟아져 내렸다.

 

 그 이튿날이 되어서야 비는 멈추고 오랜만에 태양이 솟았다. 가족들은 이튿날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묘소에 헌화하고 인사를 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기자는 안장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치미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없었다. 비극은 무엇때문에 일어났는가비극은 또한 1천만 이산가족들의 아픔이자 남북 해외 동포들 8천만의 아픔이 아닌가?

 

그렇다면 비극을 초래한 주범은 과연 누구인가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자들이었다. 지금 이순간까지도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있는 세력이 바로 미국의 인구 1% 해당하는 소수의 기득권 세력들이다. 전쟁무기 장사꾼들인 미군산복합체들을 포함하여 기름장사하는 재벌들, 돈놀이하는 대금융기업들이 바로 제국주의세력의 중심을 이뤄왔다. 이들 소수세력이 바로 우리민족 근대사의 비극을 연장시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누려온 우리 민족내부의 분열주의 세력들인  친일사대주의매국세력과 친미사대주의 매국세력의 만행에 분노하지 않을 없다. 이러한 세력의 뿌리를 가진 정권이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우리민족의 비극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같은 세력들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우리 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누리기 어렵다. 매국세력 세력들을 생각하면 수록 심장에  쌓였던 분노는 화산처럼 터져 나온다.

 

 박문재박사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인 동시에 분노의 눈물로 여겨졌다. 이것은 가족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민족 전체의 눈물이며 동시에  우리민족 전체의 분노라고 생각한다.

 

슬픔과 분노를  반복하여  되새기는동안 비행기는 벌써 로스엔젤레스 공항에 착륙했다.(




박문재박사 누님과 유골.jpg

박문재박사가 마지막 만난사진.jpg


박문재 박사 누님안장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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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정말 안타까운일이네요? ㅠㅠㅠㅠㅠ 북녘에서 성악가였던 누님의 유해를 거기 미국에서 안장하고 그렇게 통곡하셨으니....!!!! ㅠㅠㅠㅠㅠ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박문재박사님, 힘내세요~!!!!

김삿갓님의 댓글

김삿갓 작성일

박문재박사님의 비극적 경우도 분단에 비롯된 것입니다.
 분단의 주범과 이 세력에 엎혀 기생한 매국세력을 족쳐야 합니다.
 아래 내용에 동감하여서 ... 옮겨 씹어봅니다.

<<그렇다면 이 비극을 초래한 그 주범은 과연 누구인가.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자들이었다. 지금 이순간까지도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있는 세력이 바로 미국의 인구 1%에 해당하는 소수의 기득권 세력들이다. 전쟁무기 장사꾼들인 미군산복합체들을 포함하여 기름장사하는 재벌들, 큰 돈놀이하는 대금융기업들이 바로 제국주의세력의 중심을 이뤄왔다. 이들 소수세력이 바로 우리민족 근대사의 비극을 연장시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누려온 우리 민족내부의 분열주의 세력들인  친일사대주의매국세력과 친미사대주의 매국세력의 만행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세력의 뿌리를 가진 현 정권이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우리민족의 비극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박문재 박사님의 슬픔을 같이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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