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박문재박사 누님유골, 평양서 시카코로 반출 > 사회, 문화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4월 25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사회, 문화

[화제]박문재박사 누님유골, 평양서 시카코로 반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5-17 11:12 조회6,625회 댓글1건

본문

[사진]박문재박사와 그의 누님, 박경재가수가 운명하기 1년전인 2011년 모습 

[시카고=민족통신 종합]박문재 박사가 최근 평양을 방문하여 평소때 그의 어머니 소원이던 누이의 유골을 시카고로 반출할 수 있어 기쁘다면서 최근 방북하여 이뤄진 이야기를 민족통신에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이미 15일과 16일 워싱턴 디씨에 본부를 둔 미국의 소리(VOA) 백성원 기자가 보도한 내용을 연합뉴스를 포함하여 서울의 경향신문 등이 받아 보도해 국내외 일부 동포들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박문재 박사가 이 이야기의 배경을 민족통신에 들려주어 기사화하게 되었다.

 박문재 박사는 미국에서 유명한 심장내과 의사로 명성을 떨쳐왔다. 그는 또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수석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동시에 북조선 의료사업 지원단으로도 활약해 왔다.

박문제 박사는 서울태생으로 24녀중 장남이지만 그의 위에는 누나 한분이 있었다. 바로 이 누님이 전쟁시기에 유명한 성악교사였던 김자경 선생의 수제자 중 한사람이었기에 코리아전쟁 시기인1951년 자발적으로 이북으로 가서 그 이후 44년 동안 그의 생사를 알수 없었다. 그러던 중 미국 공영방송인 PBC가 남북이산가족 문제를 다루는 기록영화가 계기가 되어 1995년 꿈에도 그리던 누님을 44년만에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17년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누이가 2012 10월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박문재 박사는 그 때부터 누님의 유골을 시카고 있는 어머니 곁에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005 96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박문재 박사의 어머니 지영자 여사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도 딸의 이름, 박경재를 찾았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박문재 박사는 돌이켜 본다.

그래서 이번 방문때 뉴욕의 유엔대표부 한 참사에게 조심스럽게 요청하였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요청을 하면서도 그 요청이 쉽사리 이뤄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북-일 유골반환협상 같은 경우를 보아도 미국 시민의 요구를 북측 당국이 쾌히 응해 줄 것인가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요청은 성사되었다. 박문재 박사가 지난 53일 국내외동포들의 의학과학자토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 북 당국이 그에게 그의 요청을 허가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면서 그 당시 무척 기뻤다고 회고한다.

그는 북측 당국의 배려로 지난 10일 평양만경대 인근 공동묘지에서 누님 유골 일부를 유골함에 담아 미국으로 가져왔다고 밝히면서 북 당국의 인도주의적인 자세에 대해 감사한다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지금 미국으로 안고 온 누님의 유골을 어머니 곁에 묻어 두기위해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와 의논중인데 조만간에 그토록 소원하던 어머니 곁에 누님의 유골을 모시려고 협의중이라고 말한다.

그의 누님 박경재에 대해 궁금했다. 그의 24녀중 오로지 누님만 북으로 갔다는 것이다. 남동생은 지금 시카고에 살고 있고, 다른 세 여동생들은 한분은 시카고에, 다른 한분은 샌디애고에,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뉴저지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큰 누님이며 이 집안의 장녀인 박경재 가수만 전쟁통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수십년 동안 그 생사를 모르고 있다고 4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상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민족분단의 비극과 코리아전쟁에 대한 비극을 돌이켜 보게된다.

그의 누님, 박경재는 누구인가? 그는  코리아전쟁 시기에 자신을 아껴주던 은사와 함께 월북한 인물이다. 누님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성악가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인민군협주단에 단원으로 활약할 수 있었고, 전쟁시기에도 그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북 당국에서 어려운 조건에서도 그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유학을 보내 공부시킨 다음에 귀국후 유명한 조선의 피바다 가극단의 전속 소프라노 가수로 활약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었다고 한다.

박경재 가수는 이러한 인연과 배경으로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이었던 송방원 중장( 3개 간부)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박문재 박사는 할아버지때 그 이전, 그 이후 16대 가문이 전부 의사의 경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심장내과 의사로 활약하고 있고, 다른 형제자매들이 모두 행복한 삶을 누려왔기에 집안에 걱정은 없었으나 큰 누님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늘 그리워했고, 운명하는 그 순간에도 큰 누님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보고싶은 딸이었기에 이번에 가져온 누님의 유골을 어머니 곁에 모시는 것은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주는 자식의 도리이며 의무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누님의 유골을 평양에서 미국으로 가져오게 허락한 북측 당국에 대해 "저는 이번 누님의 유골 반출을 허락한 북조선의 아량이,  저의 과거 극히 미소한 북을 향한 의료봉사, 그리고 민족화해 를 위해 애좀 쓴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워낙이 인간성이 원래 풍부한 우리 북부 사람들의 자연적인 동정심의 발로라 여기며, 남북을 합처 모두 가족을 중요시하며, 함께 모여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우리민족(Koreans) 정신의 발로로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이런 우리 민족의 가족중시 생각이 통일에로의 길 이 쉽게 열리는데 도움이되지 않겠는가 생각히며, 또 북부의 이런 아량 있는 태도가, 두어달전의 가족상봉 을 무조건 받어드렸던 그들의 태도와도 상통해, 앞으로의 남북 관계 개선을 좀더 낙관시 하는데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라고 그의 소감을 밝힌다.(끝)


pakmoonje-sister.jpg

[사진]박문재박사가 평양에서 가져 온 유골함(뒤) 앞에 고인이 된 누님의 사진들이 보인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리준무님의 댓글

리준무 작성일

비록 유명을 달리한 모녀간의 이야기이지만 어머니께서 생시에 얼마나 북으로 간 따님을
보고 싶으셨을까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안타까워진다.
생시에 못이루었던 꿈을 저 세상에 가서라도 이루게 되었으니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님이 북의 일류악단에서 인기가수로 활약하였다는 사실을 어머니생전에 아셨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고마워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런 면에서 박문재박사는 어머님이 원하는 일을 해드린, 효자라는 칭송을 받아야 될 것같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