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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장편소설:《해외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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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3-12-30 03:09 조회14,5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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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서 나온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림종엽 지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0)가 분단된 상황에서 남녘동포들과 해외동포들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큰것 같다. 자주민보 고정필진 중국시민이 쓴 글을 여기에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파독광부, 간호부”들에 대한 색다른 조명
[통일문화 만들어가며](208)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3/12/28 [23:11]  최종편집: ⓒ 자주민보
 


또 한 해가 저물어가니 분단역사의 연륜이 한 눈금 더 늘어남을 실감하게 된다. 2차대전의 종말과 더불어 분열됐던 패전국 독일(도이췰란드)이 통일된 지 20년이 넘는데, 애매하게 당해 분열된 반도의 남쪽에서는 남북가상첩보전을 소재로 하고 베를린을 무대로 삼은 영화 《베를린》이 인기를 몬다니까 기분이 씁쓸하다. 연중에 나온 독일과 관계되는 보도들도 떠오른다. 금년은 광부, 간호부 “파독” 50돌이 되는 해인데, 큰 기념행사는 없었으나 일부 광부, 간호부들이 어느 단체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갔다가 사기를 당했다던가. 곧 무마되어 크게 번지지는 않았으나 그 단체의 우두머리가 청와대 현주인 및 옛주인과 얼기설기 얽혔다는 설들이 한동안 화젯거리로 되었었다.
 
그때 한국에 간 전 광부, 간호부들은 아마도 생계형인물들이었던 모양이라 한국을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헌데 이른바 “친북”으로 분류된 전 광부, 간호부들은 입국금지당했다 한다니까 분열은 해외동포사회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모양이다.

광부와 간호부들이 서부독일에 가서 일한 역사사실에 대해 좋게 말하면 선진기술을 습득하는 국위선양이고 중성적으로 말하면 노무수출이다. 대전 후 서부독일은 심각한 노동력공백을 메우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외국인들을 끌어들였는데 일부 종족들은 독일사회의 구조를 변경시키면서 심각한 종교, 문화 갈등의 원인으로 되었다 한다. 한국인들은 그래도 독일내부에서 큰 문제로 되지는 않은 모양이나, 우리 민족내부에서는 많은 화제를 만들어냈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파독 광부와 간호부들을 다룬 한국의 문학예술작품은 보지 못했다. 상업영화들도 가상첩보전을 그릴지언정 실제 인간들을 외면했다. 오히려 조선(북한)에서 10여 년전에 장편소설을 하나 내놓았으므로 이번에 소개하여 파독 광부, 간호부들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림종엽 지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0) [자료사진= 중국시민]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림종엽 지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0년 3월 출판발행, 도합 327쪽, 사진)는 제목 그대로 해외에서 보내온 편지들이 대부분 편폭을 차지한다. 1인칭으로 나오는 “내”가 전쟁시기의 옛 전우이며 친구인 의학박사 허달명의 새 성과를 취재하여 잡지에 내기 위해 오래간만에 찾아갔더니 허달명은 전에 모르던 딸이 해외에서 편지를 보내왔더라고 이야기한다. “의용군” 출신인 그는 남쪽에 아내가 살아있고 해외에 딸이 살아있음을 안지 고작 몇 해이다.
 
허달명의 딸이 5년 여에 걸쳐 보내온 편지들을 읽어 본 “나”는 “…원한의 분계선때문에 달명의 가정에 어떤 불행이 강요되였고 얼마나 기막힌 아픔이 들씌워졌는가를 알게 되였다. 아니 이것은 달명이네 한 가정에만 한한것이 아니라 우리 단일민족에게 들씌워진 불행임을 절절히 감수하지 않을수 없었다.”(5쪽) 하여 허달명 박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편지들을 지상에 공개하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서장이고 그 다음부터는 딸 허부영(아명 북향)의 편지들이 시기별로 장절을 이루다가 “나”의 감수와 추억들이 잠깐 끼이고 종장에서는 현실로 돌아와 비행장에서의 묘사로 소설이 끝난다.

서장의 묘사에 의하면 “나”와 허달명은 “전략적인 일시적 후퇴시기” 한동안 같이 지내면서 인연을 맺었는데 “나”는 공업학교의 무전기술과에 다니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입대하여 무전훈련을 새로 받지 않고도 무전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기에 쉽게 정찰중대에 편입되어 활동했고, 허달명은 연대군의소의 군의로서 군의소가 후퇴대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우연히 만난 정찰중대에 편입되어 재진격이 시작될 때까지 함께 행동했다. “나”는 중대의 막내여서 “애기무전수”라는 별명이 붙은 걸 질색했고, 허달명은 군의로서 “무쇠주먹”이라는 별명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 별명을 달아준 사람은 바로 “나”였다. “혀”를 잡으러 간 정찰조가 미군 장교를 가죽주머니에 넣어 메고 집결지점으로 가는 길에서 장교가 버들쩍거리며 못되게 굴기에 허달명이 주먹으로 한 대 안겼는데 풀어헤치고보니 반주검이 되었고 급히 인공호흡을 시켰으나 살려내지 못했다. 부대와 무전결속을 하고 적정을 송신하려고 대기하던 “나”는 화가 벌컥 나서 쏘아붙였다.

달명동지, 거… 무슨 주먹이 그래요. 제발 그 무쇠주먹을 잘 건사하라요.”(4쪽)

그 바람에 주눅이 들어버린 허달명은 투박한 손을 뒤통수에 대고 어줍게 웃었다. 고려의(한의사)이면서도 기운이 좋고 주먹이 드세다는 허달명의 어딘가 모순되는 특징은 딸의 특징도 어느 정도 암시해준다고 볼 수 있겠다.

책 뒤에 붙은 창작후기에 의하면 저자 림종엽은 광복 후 인민학교로부터 시작해 원산공업학교(초기에는 원산전기학교) 무선기술과에 입학하여 나라의 기둥감이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공부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선기술자”의 자격으로 국가의 기밀통신을 보장하는 무선전신국에서 전쟁 전기간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림종엽은 황해남도 중앙통신사 지사, 황남일보사에서 기자로 문필활동에 종사했고 어릴 때부터 희망하던 문학공부와 창작수업을 했다. 그후 현실체험을 위해 은률광산에 진출하여 노동생활을 체험하다가 작가동맹의 성원으로 되었다. 작가동맹에서 오랜 기간 문학통신원들을 키우는 사업을 했고 20여 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했다. 후에 건강관계로 작가동맹에서 나와 황해남도 고려약관리국에서 문필사업을 하면서 《다시 출발지점》에서를 비롯한 5편의 단편소설을 창작발표했고 1999년 말에 첫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를 탈고했다.

이런 경력들을 살펴보면 소설 속의 “나”는 저자의 경력에 비추어 만들어낸 인물임을 알 수 있는데, 저자는 이렇게 창작동기를 설명한다.

제가 조국통일주제의 장편소설을 창작하게 된것은 조국통일이 우리 민족에 있어서 한시도 미룰수 없는 초과제이기도 하지만 광복후와 전쟁시기 자신의 체험, 분계연선생활체험 등이 저로 하여금 이 주제에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제 나이 이제 환갑을 넘기고보니 조국통일의 절박성을 더욱 애타게 절감하게 되고 통일이라는 말마디만 들어도 눈굽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제가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를 쓰게 된 결정적동기는 의용군출신인 한 로병에게 온 스위스에 사는 그의 조카딸의 편지때문이였습니다.
편지에서는 의용군출신로병이 새파랗게 젊은 안해를 두고 떠나온후 장장 4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자신도 알수 없는 사이에 남쪽에서 아들이 태여나 성장했을뿐아니라 한번도 보지 못한 조카딸이 삼촌을 그리며 조국분렬의 엄혹한 현실이 빚어낸 가슴아픈 만단사연을 펼쳐놓고있었습니다.
그 조카딸의 편지가 의용군로병의 손에 닿기까지 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이 한가정에만 국한된 일이겠습니까.
조국분렬의 비극은 우리 민족의 누구에게나 있으며 가슴속에 고패치는 설음이며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가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우리 인민들의 투쟁에 조금이라도 고무적역할을 논다면 저에게는 그 이상 더 큰 기쁨이 없겠습니다.
”(327쪽)

이런 소개를 통해 저자가 실제 사실에 기초하여 인물관계들을 적당히 조절했음을 알 수 있다. 장편소설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전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소설의 묘사순서를 무시하고 허달명의 형편부터 소개한다.

강원도 울진군에서 허씨 가문은 대대로 의술이 높아 명성을 떨쳤고 숱한 시험일지들을 남겼다. 허달명의 아버지는 성인과 아동들의 목숨을 빼앗는 돌림병을 고치기 위해 약초를 구하려고 바위를 톺아오르다가 크게 다쳐 사망했는데, 허달명은 아버지가 발견한 약초로 마을사람들을 살려냈다. 일본에 가서 고학도 했던 그는 전쟁시기에 의용군에 가입하여 북으로 갔다. 진지방어전이 벌어지던 1953년 봄에 최고사령관의 명령으로 군복을 벗은 허달명은 대학으로 가서 의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의학과학원 ㅎ분원에서 연구사로 사업했다. 조수 리순옥과 사랑하게 되었는데 둘이 가정을 이루지 않는 바람에 분원의 일꾼들이 골머리를 앓을 때,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던 “내”가 취재차로 ㅎ분원에 갔다가 허달명과 10여 년만에 상봉한다. 30살이 훨씬 넘고도 홀아비생활을 하는 허달명을 보고 “나”는 자신을 뉘우친다. 1953년 봄 허달명이 대학으로 떠난 뒤 “내”가 소속된 정찰조는 울진으로 갔었다. 허달명이 알려줬던 마을은 이미 폐허로 되었는데 알아보니 1951년 초여름의 폭격과 포격에서 살아남은 고 몇 사람 가운데는 허달명의 아내가 없었단다.

허달명에게 기쁜 소식을 안고 가리라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말았다. 그러나 어찌 대학공부를 떠난 그에게 슬픈 소식을 안겨주랴싶어 알려주지도 못했고 또 전후에 서로 주소도 알수 없어 전해주지도 못했던것이다.
허달명은 이런 소식도 모르고 지금껏 아내를 기다려 홀아비로 남아있었다.
이리하여 나는 허달명에게 가슴아픈 사연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달명과 순옥의 결합을 권고하였다. 이들의 결합은 그후 1년나마 끌다가야 이루어졌었다.
허달명이와 순옥의 관계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본의는 아니지만 이들에게 제때에 찾아오지 못한 자책감을 떨어버릴수 없었다.
조국이 분렬된 상황에서 이들의 관계를 이루어지게 한것이 잘된 일인지 아니면 잘못된 일인지 확정하여 말할수는 없으나 어쨌든 분렬이 가져다준 비극이 아닐수 없었다.…
”(201쪽)
 
이산 1세들의 혼인은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내었고 특히 남에서는 유산상속분쟁까지 이끌어냈는데 장편소설과 이 글의 중점이 아니므로 간단히 넘어간다.

한편 허달명의 아내는 전란 속에서 요행 살아남아 남편도 임신사실을 모르던 딸애를 낳고 아명은 북향, 정식이름은 부영이라고 지어준다. 부영은 아버지 없는 아이, 빨갱이의 아이로서 갖은 차별을 당하면서 설움을 겪는다. 학교에서도 정훈교육 담임교사의 무서운 눈길과 말들은 늘 부영을 괴롭힌다. 정훈교사의 주장에 의하면 반도의 북에는 중중첩첩 높은 산만 가득하고 남에는 넓은 들이 무연히 펼쳐져 가슴이 후련해진다, 벌판의 논과 밭에서는 낟알, 남새와 과일들이 생겨나는데 산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산에서 감자를 심는다고 대답했던 부영의 주장은 무참히 꺾힌다.

산에서 감자를 심기 위해 부대기나 일쿠는걸 농사라고 하긴 힘들지요. 부대기를 일쿠느라면 숱한 산림을 불태워버리기때문에… 아주 나쁩니다. 무연한 들판에서는 오곡이 폭포 쏟아지는듯하지만 부대기를 일쿼야 기껏 감자 몇알을 캐면 다지요.

남에서는 쌀이 쏟아지고 오곡이 산보다 더 높이 솟아오르기때문에 누구나 다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지만… 북에서는 산만 많아서 농사를 짓지 못합니다. 그래서 북쪽사람들은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뿔질을 하며 낯을 붉히며 싸우기때문에 얼굴은 새빨갛고 머리엔 뿔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보기 흉한지 모르지요.
”(14쪽)

남에서 20세기 5, 60년대에 정말 이런 식으로 반북교육을 진행했는지는 모르겠다만 70년대에 나온 “똘이장군”을 비롯한 만화영화들의 수준을 보면 5, 60년대는 훨씬 더 유치찬란했으리라는 짐작이 든다. 정훈교사는 자기의 구미에 맞게 대답을 한 리라라는 학생에게 표창으로 유선화화분에서 북쪽으로 향한 못된 아지를 자르는 특전을 준다. “북으로 향한 아지는 나쁘고 남으로 향한 아지는 좋”(14쪽)다는 게 그의 논리다. 우쭐해나 가지를 자르는 리라는 군수의 첩이 낳은 딸자식으로서 부영과 오랜 세월 사사건건 얽힌다.

어렵사리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얻지 못하던 부영은 아버지의 옛 친구로서 신의학(서양의학)을 신봉했던 남무성의 도움으로 서독에 가서 간호부로 일하게 된다. 당시 서독의 수도 본의 어느 한 병원에 배치된 그녀에게는 중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피고름이 엉킨 환자복을 씻는 것쯤이 마음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야박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게르만인의 우월감이 동양인을 깔보는 형태로 나타날 때에는 정말 괴롭다. 고생스레 일하는 한편 약제사, 의사검정고시를 통과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부영은 고등학교상급생이며 서독에 와서 고학하는 김학명이 이끄는 동아리-“고행친목회”에 들어간다.
 
동아리에서 한국유학생 준식과 스위스 유학생 에디 등과 만나서 차차 익숙해지는데 동아리이름을 “고려친목회”라고 바꾸자마자 김학명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목숨을 잃는다. 부영은 자기를 꼬이다가 실패했던 의사 구스타프와 자기를 유흥업소에 넘기려고 했던 한국대사관 담당노무관의 사고현장출현을 통해 교통사고가 음모라고 단정한다. 또한 부영과 김학명의 상봉 및 활동에는 항상 리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리라 역시 유학생으로서 서독에서 사는 중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참사로 되어 대사관에서 활동한다.

상실의 아픔을 이겨낸 부영은 우리 글과 말을 애써 배우면서 사랑까지 고백한 에디를 따라 스위스로 옮겨간다. 그보다 앞서 본주재 한국대사관앞에서 “국가보안법”철폐와 이민동포들에게 가해진 비행을 규탄하는 재서독동포들과 유학생들의 집회가 있었는데 선진적인 서독주민들도 참가했다. 중앙정보부의 밀령으로 시위 “주동분자”들을 이북과 연결시켜 남산지하실로 끌어가기 위한 행동이 전개되었는데, 시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리라를 비롯한 감시자들의 시선을 돌리는데 일조했다고 인정된 부영도 명부에 끼었다. 하여 리라는 부영에게 귀국을 종용했고, 부영이 동료간호부인 영미를 추천하니 화를 막 낸다. 고려친목회의 신임 회장인 준식이가 부영에게 몸을 피할 것을 권해 스위스행이 결정된 것이다. 워낙 고려친목회의 목적 중 하나가 고려약의 연구와 보급인데 준식은 부영에게 스위스에서 그 일을 잘 하라고 권한다.

스위스로 간 부영은 이족청년과의 사랑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결정하지 못하다가 뜻밖에도 남미에서 고생하다가 스위스로 옮겨와 사는 에디의 부모가 조선사람임을 알게 된다. 두 노인은 부영의 모습을 통하여 민족을 숨기고 살던 자신들을 뉘우치게 된 것이다. 헌데 이족이라는 부담은 덜어졌으나 에디의 사랑을 받아들일 정도까지는 감정이 발전하지 못했던 부영은 에디의 도움으로 쮸리히에 있는 관광업소에 취직한다. 이 직업명칭을 한국에서는 “가이드”라고 음역하여 쓰는데 소설에서는 “안내양(안내지도원격이지요)”(207쪽)이라고 묘사한다. 1970년대에 관광객들 가운데서 일본인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관광업소에서는 일본어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부영은 한문을 좀 아는 덕분에 일본어를 쉽게 자습했으며 또 간호부 경력도 취직자격의 하나로 되었다. 직업담보금 따위 이러저러하게 드는 돈을 에디네 가정에서 대주어 취직한 부영은 계속 고려약연구를 심화시킨다. 할아버지 대부터 시험하던 대장균에 미치는 현초의 약효와 심장질환에 두충나무우림엑스가 노는 약효 등이 목표이다.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소설을 다시 읽어보다가 부영의 직업활동과 연구활동을 그린 대목에서 잠깐 시선을 멈추었다. 아마도 조선이 건설한 마식령스키장이 수많은 화제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인 것 같다.

관광업소에서는 겨울에 대체로 젊은 관광객들을 많이 받아들이지요.
그들은 주로 스케트장과 스키장을 찾아서 모여들지요.
이 나라의 높은 산지대에는 년간 6~7개월간이나 눈이 내리기때문에 스키와 스케트 애호가들이 활개치는 계절이고 활무대라고 할수 있어요.
7월에는 이 나라, 특히 알프스산지의 기온이 신선하여 피서생활을 하기 위해 나이많은 관광객들이 주로 찾아오지요.
관광업소에 입직한지 2년반세월이 흘렀어요. 그래서 이 나라의 네 계절을 다 맞고보냈지만 역시 바쁜 계절은 여름철 피서생활시기였어요. 더위를 피하여 관광객들이 물밀듯이 쓸어들어 여름 한철은 관광업소의 호경기나 다름없었어요.
”(216쪽)

고려친목회성원들과 서독의사 윌리의 참여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고려약기술센터의 발족을 눈앞에 두었을 때, 부영은 뜻밖의 관광객을 안내한다. 어딘가 눈에 익어보이는 사나이는 부영의 석사논문 《특이수질에 대한 현초엑스의 작용원리에 대하여》를 더 심화시켜 박사논문으로 승격시켰으면 좋겠다고 제의하면서 고국에 돌아가기를 권한다. 명예와 재부와 어머니를 내건 유혹의 힘은 크지만 부영은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젓는다. 고려약기술센터의 발기문에 “남과 북의 고려약전통을 승계한다”(230쪽)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남북의 내왕을 불허하는 “국가보안법”에 걸리니까 센터에서 발을 일찍 빼야 된다는 게 관광객의 논리이고, 대장균에 작용하는 고려약을 빨리 스위스국규에 통과시켜  센터의 발족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자금을 조금이라도 보태겠다는 게 부영의 생각이다. 여러 날 함께 보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던 관광객은 나중에 알고 보니 리라의 아버지이다. 예전의 집회시위사건과 그 뒤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소요사건 때문에 요시찰대상으로 되어있던 탄부들과 간호부들이 공작목표로 되었는데 스위스에까지 중앙정보부의 손이 뻗친 것이다. 당시 탄부와 간호부들의 형편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대사관직원들이)심지어 간호부와 탄부들이 고국에 보내는 송금에까지 부과소득세를 붙여 떼여먹으니 불만이 쌓이고쌓여 소요사건으로 폭발되군하지요.
소위 선진기술을 습득하여 국위를 선양한다는 명목으로 끌리여 온 동포들이 서부도이췰란드사람들의 기피직종인 탄부나 정신병자와 중환자를 돌보는 간호부자리를 얻어 당하는 고통이란 헤아릴수 없지요.
특히 탄부들은 섭씨 30도가 넘는 천척지하막장에서 2~3리터짜리 물통을 목에 걸고 60키로짜리 쇠동발을 메여나르는 고역을 당하고있는 형편이예요.
그런데 이런 육체적인 고역만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떤 간호부들은 로무관의 간계에 걸려들어 륜락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져 비관끝에 자살의 길을 택하는 일이 부지기수이고 탄부들은 지하막장에서 생매장을 당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고있지요.”(237쪽)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만 완전히 허구라고 보기도 어렵겠다. 어쨌든 탄부, 간호부들이 하던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미남미녀들이 총놀음을 하는 첩보전보다 볼거리가 없어서인지 문학예술작품에서 별로 다뤄지지 않는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부영과 리라의 아버지는 겉으로는 점잖게 헤어졌지만 그 이튿날로 관광업소에 신소가 들어갔고 업소는 관광객에게 불손했다는 이유로 부영을 강하게 추궁했으며 부영은 업주 측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사직한다. 다시 직업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며 애쓰던 부영은 그만 대형 벤츠차를 타고 온 괴한들에게 납치되는데 리라가 곧 얼굴을 드러낸다. 부영은 가죽트렁크에 넣어지고 국경을 넘은 차는 한국대사관에 들어간다. 감금되어 심문과 고문을 당하던 부영은 동료였던 영미도 끌려오는 바람에 그녀의 불행을 알게 된다. 어머니와 동생이 죽은 다음 서독의 유명한 루루탄전으로 옮겨가 약혼남과 가정을 이뤘던 영미는 대형사고로 남편이 하반신마비로 되는 바람에 노동조건개선투쟁에 나섰다가 잡혀온 것이었다. 둘이 마음을 합쳐서 심문에 불응하는데, 며칠 지나 괴한들이 나타나 여기 대사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일체 불문에 붙이라는 전제를 강조하더니 놓아준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김대중납치사건의 결말이 연상되었다.

대사관을 나서니 숱한 사람들이 맞이한다. 납치사건을 간파한 에디가 사회여론을 환기시켰고 스위스 해당기관을 통해 석방운동을 벌였으며, 윌리와 부영이 근무하던 병원의 수석간호부 수잔나(전에 괴벽한 성미와 변덕으로 부영을 괴롭히던 여자)가 나서서 서독사람들을 불러일으켜 규탄과 항의의 목소리를 높인 덕에 석방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풀려난 뒤에도 직업을 얻지 못했던 부영은 남무성이 스위스에서 세운 병원이 뒤늦게 개업한 다음 간호부로 되었고 김학민이라는 조선이름을 얻은 에디와 결혼한다. 또한 논문을 완성하여 석사학위를 받는다.

루루탄전에서 수십 명의 이민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가 일어나 의사와 간호부들이 구조활동에 뛰어들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쟁의가 폭발하였을 때 부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대중 앞에 나서서 통일을 호소한다. 한편 쟁의현장에 나타났다가 맥없이 물러난 리라는 한때 중앙정보부와 손을 잡았다가 물러나 탄부들을 도와준 구스타프를 원망하면서 공원에서 넋두리한다.

소설의 종장은 범민련유럽지역대표로 평양을 방문하기로 되었던 북향이 40여 만 동포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활동하기 위해 아버지와의 상봉을 미루고, 남무성이 평양 비행장에 나타나 허달명과 상봉한다는 내용이다. 허달명에게 닿은 것은 편지 한 통뿐이다. 허달명과 함께 비행장에 나갔던 “나”는 편지를 받아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 우리 민족을 더 많이 통일위업에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국땅- 로스안젤스로 갔다.
(하지만 북향이는 결코 조국과 멀리 떨어진 길을 간것이 아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그는 통일된 조국과 잇닿은 길, 조국통일을 위한 길만을 줄기차게 가고있다!)
나는 북향이가 가있을 머나먼 이국땅을 그려보며 점도록 편지에서 눈길을 뗄수 없었다.
”(325쪽)
 
저자가 이런 글귀로 끝나는 소설을 완성한 1999년 11월부터 어느덧 14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반도의 통일은 여전히 미완성형이다. 남북교류가 원활하게 이뤄지다가 막히는 변화를 겪은 지금에 와서 민족구성원마다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자주민보》의 독자분들이 스타들이 연기를 자랑하는 상업영화들만 보는데 그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를 소개한다.(2013년 12월 28일)


첨부자료 1종:
01: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


나라의 분렬로 하여 해외로 가게 된 허북향의 경력을 통해 해외공민들의 생활상과 통일성업을 위한 투쟁모습을 보여주었다.
림종엽 지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0년 3월 출판발행, 도합 327쪽

나오는 사람들

허부영(애명 북향) 서부도이췰란드 모집간호부
김학민(초기 이름 에디) 스위스 출신 서부도이췰란드 류학생, 부영의 애인
김학명 서부도이췰란드 류학생
영미 서부도이췰란드 모집간호부, 부영의 동무
남무성 서부도이췰란드로 이주한 의사, 후에 스위스에서 개인병원 설립
수잔나 서부도이췰란드 병원 수석간호부
리라 서부도이췰란드 류학생, 중앙정보부 요원, 부영의 어릴적동무

차례

서장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종장
장편소설 《해외에서 온 편지》 창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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