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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중국심양시 조선문학회 김창영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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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2-24 12:43 조회10,7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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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남 특파원은 방북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에 중국 심양에서 22일 심양시 조선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창영 시인과 특별대담을 갖고 그의 작품들을 포함 재중
동포들의 삶의 일부를 조명해 보았다. 그는 특히 그의 작품들을 통해 남과 북의 분단상황을 아타깝게 생각하며
하나되는 모국을 염원하는 내용들도 묘사하고 있다. 대담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특별대담]

중국 심양시 조선문학회 김창영 사무국장




심양시 조선문학회 김창영 시인(사무국장)은 그의 시집중 하나인 <<석탑>>에 담은 99편의 연작시들 가운데 통일염원을 그린 작품들도 포함시켜 나의 관심을 갖게했다. 통일염원관계 작품들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탑.62

한라에서 백두가는 길
언제면 열릴가나?
금강에서 설악에 이르는 길
또 언제면 틔일가나?

버려진 신세여도
버릴수 없는 그곳
탑이 낸 길은
여기서 탑의 마음따라
한라 백두에 닿고
금강 설악에 이른다.

여기 탑아래 모두 모여라
모여 탑아래 우리
"나의 살던 고향"도 소리내여 부르며
꽃피는 탑의 고향에
한라 백두의 얼 심자.
금강 설악의 혼 살리자.



[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반갑습니다. 중국 심양 땅에서 조선족 시인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특히 남과 북을 하나의 모국으로 보는 통일지향 동포시인을 만나니 더욱 반갑습니다. 두권의 시집("산처럼 물처럼"과 "석탑")에 담겨진 시들을 훌훌 다 읽은 다음에 김창영 시인(심양시 조선문학회 현 사무국장, 료녕성조선문보 기자)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바쁜날에 시간을 내 주어 감사드립니다.

<##IMAGE##> 김창영 시인:제가 일하고 있는 료녕성신문사의 한 성원으로부터 노길남 선생을 소개받고 저도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알게되어 반갑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질문]중국에는 56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료녕성에서 심양시가 아주 큰 도시로서 중국전역에서 알려진 도심지로 알고 있습니다. 내년에 중국전국체육대회가 이곳에서 열리게 되어서 그런지 여기 저기 공사판 현장들이 보입니다. 매년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곳 심양시에는 우리 조선족이 얼마나 사는지요?

김창영 시인:심양시는 760만명의 인구가 있습니다.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약8백만명 정도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료녕성 전체에는 24만1천명으로 집계되고 있는데 그 중 심양시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약10만명이 됩니다. 그 중에 석탑(시타)이라는 곳이 외부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코리아타운”입니다. 여기에는 조선식당들도 10여개 있고, 한국식당들도 여러 개 있습니다. 이곳에는 관광지로서도 유명합니다.
코리안타운 서탑거리는 국제적 도시인 심양시의 중부지역에 위치하고있다. 심양시는 료녕성 정부 소재지이고 중공업도시이며 동북3성의 금융, 문화, 상업, 무역, 화물집산, 상업유통의 중심지가 됩니다.

[질문]심양시를 소개하여 주어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김창영 시인에 관한 이야기부터 물어볼까 합니다. 조선족으로서 중국에 살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아가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며 혹은 자긍심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먼저 듣고 싶습니다..

김창영 시인:: 글쎄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조선족으로 중국에 살게 된 동기는 나의 의지라기 보다는 부모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니까 자연스레 중국에서 살게 된 거죠. 지금까지 중국에 살며 어려웠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조선족학교에 다니며 우리 말을 배우고 우리 말로 대학입시에 참가하고 지금은 우리 말 신문 기자로 사업하고 있지요. 우리 민족이 경제, 교육,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타민족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과 조선이 있다는데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질문]재미동포들을 포함하여 다른지역의 해외동포들, 그리고 남과 북 동포들을 위해 지금 대담을 하고 있는 김창영 시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먼저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지난 해 8월 우리말로 된 시집 <<산처럼 물처럼>>과 99편의 연작시를 담은 <<서탑>>이라는 두권의 시집을 출판하여 이곳 동포사회에 많이 알려진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성장해 온 발자취를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창영 시인:현재 심양시에 호적을 올리고 생활하고있지만 태어난 고향은 길림성 집안시입니다. 고구려 제2도읍으로 집안은 압록강을 사이두고 조선 만포시와 마주하고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압록강에서 물장구치고 낚시하며 지내다보니 중한수교전까지는 한국보단 조선에 더욱 익숙했고 자연스럽게 조선에 더 깊은 감정을 가지고있었습니다. 1986년 7월 연변대학 사범분원(당시 연변제1사범학교라 불렀음)을 졸업하고 고향<##IMAGE##>에 돌아와 교편을 잡았습니다. 1992년 젊은 열기로 학교에 사표를 내고 당시 조선족으로는 국내 최대 사영기업으로 하북성 진황도시에 본부를 두고있는 창녕그룹에 입사하여 창녕그룹자제학교 설립에 일조하고 제1임교도주임을 역임했습니다. 반년후 총부의 수요에 따라 창녕그룹 선전부 간사로 자리를 옮겨 3년동안 사업하고 1994년 개인사업을 위해 회사를 떠났습니다. 1995년 10월 회사를 아내(안해)에게 맡기고 료녕조선문보에 초빙되여 편집, 기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2000년도에 료녕 반금시에 있던 회사를 심양시에 옮기며 료녕조선문보에서 나와 개인회사를 운영하다 2009년 1월 다시 료녕조선문보에 입사하여 현재 기자활동을 하고있습니다.

[질문]지난해 8월에 두권의 시집을 내셨는데 문학을 하게된 동기에 대해 듣고 싶군요.

김창영 시인: 1982년 연변대학 사범분원에 가기 전까지는 작가의 꿈이 없었습니다. 조선족이 적은 나의 고향, ‘집안’의 한 자그마한 산골마을에서 자라다 보니 문화의식이 결여했지요. 연변에 와보니 우리 말을 잘 배워 고향에 가면 아주 유용할 것이란 생각에 "장백산"잡지사와 "천지"잡지사에서 조직한 문학통신반과 흑룡강신문사에서 조직한 문학통신반에 참가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된 셈이죠.

[질문]료녕성 조선족 문학의 위상이 중국문단에서 차지하는 정도가 어느 수준이 될까요? 또한 우리 글로 창작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애로되는 문제들은 없는지요?

김창영 시인: 중국작가협회 회원이였던 박화시인이 전국소수민족문학상을 수상하며 중국문단에 알려졌지만 몇 년 전에 타계하고 정철(본명 정준기)시인이 한문으로 시집을 출간하고 리창인선생이 수집 정리한 민담이 한문으로 발표된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미소하다고 봅니다. 근년에 들어 한문으로 창작하는 정용호씨가 수필 "아버지"로 전국문학상을 받으며 일정한 영향을 일으키고 있지만 질양적으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말로 창작활동을 하는 데는 아주 자유로운 편입니다. 연변지역 활동에 비해 개방됐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질문]심양의 코리아타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석탑(시타)에 나가보면 남한(한국)과 북조선(조선)의 식당들과 상점들이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시인님은 조선의 작품이나 작가, 시인들과도 교류하고 있는지요? 그리고 접해 본 한국작품들에 대한 소감은?

김창영 시인: 조선의 문학작품도 보고, 한국문학 작품도 보았습니다. 한국문학은 중한수교이후 대량으로 받아들였다면 조선문학은 그 이전 "조선문학"잡지나 “통일문학” 및 기타 단행본들을 통해 상당히 흡수하였습니다. 지금도 천세봉의 장편소설 "석개울의 새봄"을 자주 펼쳐 보군 하는데 언어표현이 한국의 어느 소설에 비해도 짝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학에 비해 이념에 따른 주제의 설정이 단일하다고 할가요?

그리고 한국 문학계와의 접촉이 체계적이 되지 못하고 특정작품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여 어떻다 말씀드리기 어려운데 표상적인 느낌으론 인성이나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린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퇴폐정서를 발로하는 작품에 비해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를 나타내는 작품이 적다는 인상도 강하게 받았습니다.

[질문]한국에서는 민족문학을 둘러싸고 그 동안 논란이 많았습니다. 특히 세계화 시대라는 어휘와 함께 민족문학에 대한 문제들이 시련을 겪었다고나 할까요? 이점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창영 시인: 문화는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견지에서 민족문제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어쩐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포해외민족사에 있어서 조선족만큼 기나긴 유랑의 삶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도 흔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 시대를 이른바 세계화 시대라고 말하며 민족문학을 홀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조선족의 삶 자체가 민족문학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것을 홀시하는 것은 우리의 삶자체를 부정한다는 말도 됩니다.

[질문]심양시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작가들 현황과 단체들에 대해 궁금합니다.

김창영 시인:심양시에 거주하는 조선족 작가(연변작가협회 회원에 준함)는 30명 정도이고 료녕성내 심양시조선족문학회 회원은 80여명입니다. 소설부분에서는 단편소설 "종착역"으로 한국 해외동포 최우수상을 수상한 강재희 소설가를 비롯하여 최태열, 김군, 차경순 등 소설가들이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시인들로는 시집 4권을 출간하고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리문호시인을 비롯하여 정철시인, 한창선시인과 시조시인으로 리창인선생 등이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수필문학에서 호황기를 맞이하여 해마다 근 60여 편의 수필이 공개간행물에 발표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현재 심양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순 문학단체는 사단법인 심양시조선족문학회가 유일합니다. 1987년에 설립된 심양시조선족문학회는 명칭상 심양시로 되어 있지만 료녕성내 14개 도시에 8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회는 20여 년간 해마다 여름철 문필회를 견지해왔고 특히 최근년간 대내외 문학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습니다. 북경과 장춘의 문인협회와 합동세미나를 진행하고 한국 춘천문인협회와 10여 년간 교차 문학교류를 해오고 있습니다.

심양시에 조선족 순 문학잡지는 현재 심양시조선족문학회 회원들의 작품을 위주로 하는 "료동문학"뿐입니다. "료동문학"에 앞서 민족출판사에서 발간하던 "갈매기"가 있었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페간되고 "료동문학"에 앞서 심양시조선족문학회에서 발간하던 "연창재료"와 "서탑"잡지가 선후하여 경제난으로 페간되었습니다. 2001년 고고성을 올린 "료동문학"은 1년에 2권을 발간하여 현재까지 19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외 료녕조선문보 압록강문예부간이 있는데 한달에 2기로 성내외 기성작가들의 문학작품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질문]그리고 중국조선족문단에서 활동하는 여성문학계 인물들에 대한 내용도 듣고 싶습니다.

<##IMAGE##> 김창영 시인: 중국조선족문단에서도 인정을 받고있는 여성작가들은 섬세한 세부를 틀어쥐고 깨끗하게 글을 짓는 최영옥이나 서정의 흐름을 중시하고 수필의 기표에 능숙한 서정순을 꼽을수 있구요. 김희자, 최정옥, 박애자, 김춘련, 로춘애 등 나름대로의 수필세계를 구축하고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기자 출신이었던 박애자를 제외하고 모두 교원입니다.

[질문] 베이징 중앙민조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을 일한 장춘식 박사, 장춘에서 <북두성>잡지 주필을 지낸 허승호 선생이 김창영 시인의 작품 <<서탑>>에 나오는 연작시 99편을 읽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강원도 강릉대학의 장연수 교수(시인, 문학박사)가 김창영 시인의 작품 <<산처럼 물처럼>>을 읽고 역시 높이 평가해 준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김창영 시인은 언제부터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요?

김창영 시인:1985년 첫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현재까지 근근히 300여수의 시를 "장백산", "연변문학", "료동문학" 등 문학지와 료녕조선문보, 흑룡강신문 문예부간에 발표하여왔습니다. 다산은 못되며 그만큼 발표에 "인색"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8월에 <<산처럼 물처럼>>, <<석탑>> 두권의 시집을 한꺼번에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석탑>>, 중국말로는 ‘시타’라고 말하는데 김창영 시인의 연작시 99편을 읽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 문제, 남북 분단으로 인한 재중동포로서의 안타까움과 모국이 하나되는 것을 염원하는 마음들, 그리고 같은 해외동포로서 격는 애로점들의 공통성 등을 접하며, 그리고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반일투쟁, 항일투쟁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서 재중동포들, 다시말하면 중국내 조선족들에 대해 한층 더 가까운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세계에 산재해 살고 있는 해외동포들간의 교류가 좀 더 활발해 지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특별히 이번 대담을 통하여 많은 소식들을 들려주어 감사드립니다.

김창영 시인:좋은 인연이 되어 기쁨니다.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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