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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일본강제합병 100돌맞아 <민족시인 문학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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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7-25 10:43 조회5,9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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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 특파원]윤동주문학선양회 미서부지회(이성호 회장)가 24일 밤
로스엔젤레스 북쪽 멀리 외곽에 위치한 고만(Gorman)의 피라미드 레이크 RV 휴양지에서 주최한 일본
강제합병 100년을 맞아 빼앗긴 조국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들을 추모하는 <민족시인 추모 문학의 밤>에는
2백여명의 미주 동포들이 참석하여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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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일본강제합병 100주년 맞아

<민족시인 문학의 밤>열어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시들 낭송, 암송하며 기념




[고만=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 특파원]윤동주문학선양회 미서부지회(이성호 회장)가 24일 밤 로스엔젤레스 북쪽 멀리 외곽에 위치한 고만(Gorman)의 피라미드 레이크 RV 휴양지에서 주최한 일본강제합병 100년을 맞아 빼앗긴 조국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들을 추모하는 <민족시인 추모 문학의 밤>에는 2백여명의 미주 동포들이 참석하여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IMAGE##> 참석자들은 이날 민족시인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 윤동주 4인에 대한 민족시를 상기하며 이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를 통하여 일제41년의 참혹한 역사를 되돌아 보기도 했다. 특히 일본 도꾜학예대학 교수인 이수경 박사가 <일본의 문학행사로 보는 한일관계>라는 주제발표, 필그림 오케스트라(이재욱 단장)의 연주, 민족시인들의 생애와 작품 낭송, 민족시인들의 시 암송대회, 순서로 진행되었다.

참석자들은 북창동순두부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나누며 한-일강제합병 100주년을 맞는 2010년 여름 밤 민족시인들의 애국정신을 감상하며 민족잃은 설음이 얼마나 비극이었는가를 가슴저리게 상기하면서 다시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마음을 갖게 한 의미있는 대중모임이었다.

박선옥 시인의 사회로 묵념이 진행되고 이성호 회장(윤동주 문학선양회 미서부지회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올해는 강제로 한일합방된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 세기 전 3천리 강산은 산천초목도 통곡을 했고 나라 잃은 슬픔으로 자결한 애국지사들도 많았습니다. 중략...오늘 낭송할 시 한마디 한 구절마다 맺힌 님들의 애국과 애족을 되새기자"고 호소했다.

이수경박사(국립도꾜학예대학 교수)는 <일본의 문학행사로 보는 한일관계>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하면서 주로 윤동주 시인은 민족시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는 민족을 초월한 평화의 시인으로 부활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윤동주 시인은 20대인 1945년 2월16일 생을 마쳤는데 그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는 당시 규슈대학 의학부에서는 미군의 생체실험이 행해졌는데 이들도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옥사했을 것으로 보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고 이 교수는 전하면서 지금까지 일본 검찰이 공개를 꺼려 해 오던 시인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 전문을 열람하고 원문 복사본을 지난 8일 공개했다고 밝히며 이것을 열람한 일본인들의 숫자도 증가하여 1만2천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평화인권 도시라고 표방하고 있는 "우지강" 가운데 위치한 공원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려고 추진중이라고 전했다.

<##IMAGE##> 휴스톤에 거주하는 허도성 목사(텍사스 문협 부회장)는 이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먼길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이육사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에 대해 강연했다. 그는 "이육사도 17번이나 감옥에 들락 날락한 저항시인이었다"고 돌이켜 보면서 그 당시에는 생명을 내놓고 시를 쓰는 분들을 가리켜 저항시인으로 규정했다고 상기시키고, 이날 행사 참석차 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 명이 "백년 후라 미래"에 관한 제목의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우리 민족의 100년 뒤 모습과 그 정체성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고 간증했다. 그는 민족시인 이육사의 어머니가 7촌벌이라고 자신을 밝히면서 일제 때 화성총을 가지고 기관총 가진 일본군과 투쟁한 의병들을 생각하면 대단히 열악한 조건에서 항일투쟁을 한 점, 당시에는 민족저항시인 보다 친일문인들이 더 많았다는 점도 지적하며 오늘 날 조선일보, 월간조선을 비롯하여 언론들에 대한 심각성도 꼬집었다. 그는 또 민족시인 이육사의 장인이 의병대장이라는 사실도 알리면서 시인 이육사는 "마지막 고문으로 맞아 죽었어요. 딸은 있는데 3살때 아버지를 보았기에 기억 아물아물....죄수 두건 쓴 모습만 아련하게 생각난다"고 한 말을 소개하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조만연 선생(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의 내빈소개에 이어 <로스엔젤레스 필그림 오케스트라(이재윤 단장)>의 "선구자", "나의 살던 고향" 등 연주에 이어 시낭송들이 진행되었다. 김영애 수필가가 한용운 선생 시 <알수 없어요>, 김용현 칼럼니스트가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 정찬열 시인이 이상화 시인의 <나의 침실로>, 정옥희 수필가가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낭송했다.

이어서 시 암송대회가 이어졌다. 참가자들이 나와 민족시인들의 시들을 암송했고, 심사위원들 4명(문금숙, 배정웅, 오문강, 전달문) 이 이들의 암송을 심사했다. 참가자들의 암송한 시들은 다음과 같다.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한용운 시인의 <나룻배와 행인>, 이상화 시인의 <선구자의 노래>, 한용운 시인의 <꽃 싸움>,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용운 시인의 <비밀>, 이육사 시인의 <광야>, 작년도 최우수상을 받은 박복수 선생이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다시 한번 앵콜로 낭송했다.

암송대회 심사 발표가 끝나기 전에 대륜고등학교 동문회장이 주최측 이성호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지금까지 7회에 걸쳐 민족시인의 얼을 기리는 행사를 계속해 주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이날 암송대회에 참석하여 수상한 동포들은 1등 안선혜(최우수상), 2등 조순희(우수상), 3등 이초혜, 4등 고현서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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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일본강제병합 100년 맞아

이들의 발자취와 후학들의 근황을 돌아본다



이날 기린 민족시인들에 대해 민족통신은 인터네트 자료를 통해 이들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통하여 이들의 발자취를 알아보려고 한다.[민족통신 편집실]

(1) 이상화:



대구중앙도서관 23일까지 "민족시인 이상화 특별전"


대구중앙도서관은 2010년 4월 18일 - 23일까지 "민족시인 이상화 특별전"을 가온갤러리에서 가졌다.

국권찬탈 100주년을 맞아 대구가 낳은 민족시인 이상화선생의 43년 생애와 시정신을 새롭게 조명하는 특별전으로 이상화의 가족, 문우 및 문단활동 관련사진과 당시 대구풍경, 친필서한, 서예작품을 비롯해 월탄 박종화 선생에게 보낸 서간, 친필 가훈 등 이상화 시인의 삶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작품 76점이 전시되었다.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높다란 고층 아파트 바로 아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도심 속 골목 한켠에 마치 다른 세상인냥 고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이상화 선생의 고택입니다.

대구 출생인 이상화 선생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식민치하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 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했습니다.

고층 아파트 바로 아래 흉물처럼 방치되어 허물어져 있던 상화고택은 대구시민들의 오랜 숙원 끝에 2008년 빛을 보게 되어 지금은 이상화 선생의 시향을 느끼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1943년 4월 25일)는 한국의 시인이다. 호는 상화(尙火), 무량(無量), 상화(想華), 백아(白啞)이다.

목차

생애
2 작품 활동
3 평가
4 주석
5 바깥고리

생애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이며, 어머니는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큰형 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했고, 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주요 인물이 잡혀가자 서울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1922년 《백조》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갔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나자 수난을 피해 귀국했다.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시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 작문이었다. 이듬해 사직했다. 1937년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1943년 3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대구 자택에서 숨졌다.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1]

작품 활동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백조》 나머지 호,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조선지광》, 《별건곤》등 잡지에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상화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고,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과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평가

조연현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일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으나, 이상화의 중요한 특성으로 격렬한 미적 욕구와 그 강렬한 낭만적 의욕을 지적[2]하여 그의 문단 초기 활동인 <백조> 동인 활동, 즉 낭만주의적 경향에 주목했다.

김현은 1920년대 한국시의 두 가지 과제를 식민지 현실 직시와 새로운 시 형식의 모색이라고 분석하면서,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시인으로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세 사람을 꼽는다. 그러면서 이상화의 현실 인식이 식민지 현실은 한국 궁핍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하는 면에서 투철하며, 그 현실 인식이 현실 밖이라면 어디든 괜찮다는 극단적인 탈출 욕구를 낳는다면서 이상화의 시를 식민지 초기의 낭만주의적 성격의 한 상징으로 보았다.[3]

반면, 감태준은 이상화의 카프 활동에 주목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조소〉, 〈선구자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상화가 낭만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현실에 대한 불신을 적극적 저항 내지 수용으로 변모시켰다고 보았다.[4]

이명재는 이상화 시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20년대 초엽의 감상적인 퇴폐성의 낭만주의 시, 중후엽의 항일 시, 30년대 이후의 민족적 비애를 담은 우국 시의 삼단계로 나누고, 이상화의 문학사적 위상을 항일 민족 문학의 구현자로 자리매김했다.[5]

조병춘도 이명재와 비슷하게 이상화 시의 세 단계를 감상적 낭만주의 시, 저항적 민족주의 시, 민족적 비애와 국토예찬의 시로 나눴으며, 특히 40년대에 문인들 거의가 친일문학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은 그의 민족정기와 문학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6]

주석

1.↑ 달성공원 홈페이지
2.↑ 조연현 (1969년 9월 5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성문각, 451쪽
3.↑ 김윤식·김현 (1973년 8월 30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민음사, 231~242쪽
4.↑ 김윤식·김우종 외 34인 (1989년 8월 20일). 《한국현대문학사》. 서울: 현대문학, 133쪽
5.↑ 대구문인협회 (1998년 3월 30일). 《이상화 전집》. 대구: 그루, 285~293쪽
6.↑ 조병춘, 〈한국 현대시의 전개양상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79) 174쪽


(2) 한용운 (호: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한국의 시인, 불교 승려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호는 만해(萬海)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변절한 친일파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이라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미 장례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전기로 고은의 《한용운 평전》(1975)이 있으며, 외아들 한보국은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한국 전쟁 때 월북했다.[1]

목차

1 생애
2 사후
3 연보
4 같이 보기
5 바깥 고리
6 주석
7 한용운을 연기한 배우들

생애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릴 때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주에서도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했으며, 1908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1913년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했고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심우장)에서 중풍으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연보

1879년 충청남도 홍성 출생.
1908년 명진학교(明進學校, 지금의 동국대학교) 졸업.
28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불문에 귀의.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
1925년 시집 님의 침묵 출판
1944년 서울에서 중풍으로 사망.
같이 보기 [편집]
만해한용운심우장
바깥 고리 [편집]
만해기념관 홈페이지
주석 [편집]
1.↑ 외아들 한보국은~: 《민족21》 만해 한용운과 외아들 한보국 (2004년 1월호)
한용운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유형관 - 야인시대 (2002년)


(3)이육사(본명은 원록)



[이육사문학관] 에서 민족시인이자 항일투사였던 이육사를 만나다.


봄햇볕이 강렬한 여름햇볕으로 바뀌어가던 지난 5월 어느 주말,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했습니다.2004년 이육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인 안동에 이육사문학관이 개관했습니다.

일단 이육사문학관 2층에 마련된 영사실에서 이육사의 삶에 관한 영상필름을 관람한 후 관계자분으로부터 그의 문학가로서의 삶과 항일투사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문학관에 방문하기 전에는 교과서에 수록된 <광야>와 <청포도>라는 시와 그가 항일운동가였다는 정보 외에는 별로 아는 게 없었는데 이곳을 방문하고 그에 좀 더 알게 된 후 그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깊은 감동과 숙연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육사문학관은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져있는데 1층 정문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젊은 시절 그의 얼굴을 본 따 만든 흉상입니다.

문학관내에는 그의 삶을 연대별로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문학세계에는 이육사의 시, 소설, 수필등 다양한 문학장르를 접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코너에는 그가 항일운동가로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엿볼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육필원고, 시집등 문학적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육사의 감옥생활과 조선 군사간부학교 훈련모습을 재현한 모형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학관 안에는 체험코너도 마련되어있어 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문학관 야외에는 연못과 분수대, 청포도샘과 청포도밭, 이육사동상을 볼 수 있으며 그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육우당(생가 모형)을 재현하고 있어 이육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육사, 그의 시인과 항일투사로서의 삶


이육사(1904년 4월 4일(음)-1944년 1월 16일)는 호가 육사이며, 본명은 원록입니다.

진성이씨 이가호(퇴계이황의 13대손)와 항일의병장 허형의 딸인 허길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육사는 조부 이중직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 동안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조양 회관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을 하게 됩니다. 1926년 중국 북경 등지에 유월한국동지회에 참가해 조직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육사는 학문적으로는 친가쪽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외가쪽으로부터는 항일정신 등 사상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데 의병활동을 하던 외가쪽 친인척 대부분이 월북을 했기에 이육사의 외갓집친인척 중 의병활동을 전개한 분들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역사적인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927년 여름 조재만과 동행하여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릅니다. 그 때 수인번호 이육사를 따서 호를 ‘육사’로 지었다고 합니다.

수인번호를 호로 지었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그의 삶이 가시밭길 임을 스스로 암시했음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고 암울한 시대에 투사로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고 이후에 총 39편의 시를 지었습니다.

다음 해에 북경과 남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1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 과정을 마쳤습니다.

194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여 6월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마흔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그의 주검을 본 이의 증언에 의하며 온몸에 핏자국과 멍자국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확한 사인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주검상태로 보아 고문 중 맞아 죽었다는 추론이 지배적입니다.

시인으로서, 항일운동가로서 암울한 시대에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보낸 그의 생애가 감동적이며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시절 이육사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8. 15광복은 좀 더 늦었을지도 모르며 좀 더 암울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분의 뜻을 이어받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진정한 나라사랑이 무엇인지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광 야




- 이육사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날릴 때에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4)윤동주-아명은 해환(海煥)



윤동주: 일제 강점기에 투옥된 시인---일제강점기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한 재판 판결문 원본이 일본 시민단체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됐다고 15일 세계일보가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지금껏 일본에서 재판받았던 우리나라 애국지사에 대한 재판내용은 물론 어떤 기록도 공개하지 않았다.

신문에 따르면, 일본 교토에 있는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대표·안자이 이쿠로)는 “지난 8일 윤동주를 기소한 교토지방검찰청이 판결문 원문의 열람을 허용, 이를 사진으로 찍어 공개하게 됐다”고 14일 밝혔다. 건립위원회는 지난 4월8일 교토지검에 윤동주의 재판기록 전면 공개를 요구했으나 교토지검은 열람만 허용했다.

1944년 3월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주문과 이유 등 모두 7쪽으로 이뤄져 있다.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망동을 했다”고 적었다.

현재 이 판결문 복사본이 한국 독립기념관에 소장돼있으나, 도쿄가쿠게이대 이수경 교수는 “(복사본이) 여러 부분에서 원문과 다른 점이 발견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건립위원회측은 15일 보고집회를 갖고 이번 열람을 통해 확인한 내용들을 밝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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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동주 시인님은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 영석(尹永錫),어머니 김 용(金龍)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명은 해환(海煥).

윤 동주 시인님이 시를 썼던 시대인 1936~1943년은 온 인류가 시를 외면한 시대였다. 그가 릴케와 프랑시스 잠을 노래했을 때는 포연(砲煙)이 장미의 향기를 쫓고 나귀 등에다 탄환을 운반하던 때였다.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과 바람과 별의 허공엔 공습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역사 중 사람의 생명이 가장 값싸게 거래되었던 시대였고,자유.평등.박애가 군국주의의 넝마주이 집계에 집혀서 오물처리장으로 실려 가던 때였다. 철학자에게는 복종의 철학이 강요되고,음악인에겐 군가 작곡이 명령되며, 시인에게는 원고지와 펜으로 탄환을 만들 것을 강요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엔 고향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성립되었고, 친한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까지도 감시를 받았다. 하물며 창씨 개명(創氏改名)도 하지 않은 "순이"에 대한 추억이나 "흰 옷"과 "살구나무"와 "희망의 봄"이야 영락없는 불온(不穩)이었다.

1940년 전후 지구는 군가와 화약냄새로 가득차 있을 때,한국 문학사는 이 시대를 "암흑기"로 말한다. 시와 소설의 발행고가 가장 낮은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질적인 면에서도 예술적 여과를 거치지 못했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식민 종주국의 이익에 보템을 준 것이 많아서, 암흑기란 시대적 명칭은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왔다.

윤 동주 시인님은 바로 이런 암흑기의 몇몇 유성 중 뛰어난 시인의 하나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학자 이 윤재(李允宰)와 시인 이 육사(李陸史) 그리고 윤 동주 시인님을 함흥과 북경과 후쿠오카(福岡)의 옥중에서 잃었다.

고문.영양실조.동상 그리고 정신적 고뇌 등으로 일관된 하루하루의 옥중생활을 윤 동주 시인님도 1943년 7월,체포 이후1945년 2월 16일, 죽는 날까지 반복했을 것이다. 윤 동주 시인님의 동생 윤 일주의 기록에 따르면 1944년 6월 이후 월 1매의 엽서 쓰기가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가 형(刑)이 확정된 때로, 그 이전엔 모든 외부와의 연락이나 독서가 금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생체실험 주사를 맞았다고 하는데, 그 내용물은 아직도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으며, 최후의 순간에 큰소리를 치며 죽었다는 간수의 증언도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모국어의 순수 시인이 우리말로 고함 지르고 죽은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왜 간수에게 일어로 한마디를 남기지 않았을까!


*윤 동주 시인님의 발자취를 알아보자*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 영석(尹永錫),어머니 김 용(金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해환(海煥).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함.

*1929년 송 몽규(宋夢奎) 등 급우와 함께 "새 명동" 이란 신문 형식의 등사판 문예

지를 만들어 동요. 동시 등 발표함.

*1931년 3월,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립자(大粒子)의 중국인 학교에 1년간 다

님.

*1932년 4월, 용정(龍井)의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교내잡지.스포츠.웅변 등 다

방면으로 활동함.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함.

*1935년 봄,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로 전입학, 기숙사에 기거하며 독서와 시작(詩

作)에 몰두함.

*1936년 봄, 숭실중학이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사건으로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

학원(光明學園)중학부 4학년에 전입학. 북간도 연길(延吉)에서 발행하던

하던 "카톨릭 소년" 지에 용주(龍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 "빗자루" 등
동요. 동시 발표.

*1937년 같은곳에 "오줌싸개 지도" . "무얼 먹고 사나" . "거짓부리" 발표.

*1938년 2월,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 졸업. 4월에 고종(姑從)인 송 몽규와 함께 서

울 연희 전문학교(延僖專門學敎)문과에 입학.

*1939년 산문 "달을쏘다"를 조선일보 학생란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발표.

*1941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발행인 "문우(文友)"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 발표.

12월에 연희 전문학교 문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自選詩集) "하늘

과 바람과 별과 詩"를 졸업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942년 일본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여름방학 때 마지막으로 고향 용정에 다

녀감. 가을에 경도(京都)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영문과에 편입학.입교대

학 시절의 시 5편이 마지막 작품이 됨.

*1943년 7월, 귀국하기 직전에 경도 제국대학에 재학중이던 송 몽규와 함께 독립

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가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

*1944년 6월, 경도 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송 몽

규와 함께 구주(九州) 복강(福岡) 형무소에 투옥됨.

*1945년 2월 16일, 위의 형무소에서 옥사함(3월10일 송 몽규 옥사) 3월 초에 고향

용정의 동산(東山)에 묻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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