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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한영정씨,북《2.16예술상》가야금부문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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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7-04 21:36 조회4,4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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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한영정씨(26)가 북조선서 열린 제19차 《2.16예술상》 개인경연 가야금 부문에서 입상해
화제가 되고 있다.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맹원인 가야금연주가 한영정씨(26살)가 민족지탄악기
부문에서 3등을 하였다(1등수상자는 없음). 동 예술상은 북조선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음악예술경연이다.
평양대극장에서 진행된 시상식(4월 29일)을 끝내고 일본으로 온 한영정씨는 조선신보와 대담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재일동포 한영정씨(26),

북《2.16예술상》가야금 부문 입상



《2.16예술상》에서 3위 입상한 한영정씨,
민족의 가락 자랑차게 울리네



<##IMAGE##> 제19차 《2.16예술상》 개인경연에서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맹원인 가야금연주가 한영정씨(26살)가 민족지탄악기부문에서 3등을 하였다(1등수상자는 없음). 동 예술상은 조선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음악예술경연이다. 평양대극장에서 진행된 시상식(4월 29일)을 끝내고 일본으로 온 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초급부 고학년시기에는 롱구부에 속했었다. 학교가 끝나면 주에 1번 피아노교실을 다녔으나 남달리 음악을 좋아하는것은 아니였다.

어느날 누나가 다니는 가야금교실에 함께 따라갔다. 그때까지 가야금의 음색을 들어본적이 없었고 누가 연주하는 모습을 볼 기회도 없었으니 그날은 아직 어렸던 그에게 있어서 너무도 감동적이고 인생을 바꿀만한 충격적인 날이였다.

선생님이 가야금을 타는 모습에 매혹되여 초급부 6학년에 진급함과 동시에 그 교실에 다니게 되였다.

고급부 2학년시기에는 도꾜조선중고급학교 민족관현악소조에 들어갔다. 그러던 차에 공화국의 이름난 만수대예술단의 연주를 록음으로 듣거나 영상으로 보는 기회가 차례졌다. 그 과정에 더욱 민족음악의 세계에 끌려갔다. 이전부터 고급부를 졸업하면 음악대학에 들어가 피아노를 전공하려던 생각을 접고 평생 가야금을 추구해나가는 길을 걸어나갈 결심을 다지게 되였다.

고급부를 졸업한 2000년 8월에 문예동이 조국에서 진행하는 하기강습에 함께 참가하였다. 03년 5월에는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에 입학하여 가야금의 제1인자인 한동렬선생님한테서 지도를 받았다. 현지학생들이 한해동안에 배울 내용과 같은것을 단 2개월안으로 배워야 했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1 대 1의 철저한 지도를 받았다. 수업과목은 조선음악사, 화성학(和声学), 연주원리, 조선음악예술론 등 리론적인 내용이 많았으며 실기수업은 오후 마지막1강의뿐이였다.

<##IMAGE##> 숙소에 돌아와서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자면 첫째도 둘째도 사상이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과제를 풀면서 밤새 악기련습도 하였다.

4년간 통신교육을 받는 과정에 힘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겨울이 오면 난방이 없는 련습장은 -20℃까지 내려간다. 그런 환경속에서도 조국의 학생들은 쉽게 현을 튀겨 아름다운 선률을 울리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 환경에서 자라 훈련을 거듭해왔으니 저하고는 기초부터 달랐어요.》

기술이라는 높은 벽에 부딪쳐 정신적으로도 나약해지고 심지어는 가야금연주의 매력마저도 잊어버릴 지경이였다. 그러나 《동포사회에서 민족음악을 지켜 더 발전시켜나가기 위해서 절대 단념하지 않겠다.》고 자신과의 투쟁을 벌리였다.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 평양에 다녀 한동렬선생님을 찾아가 기술을 향상시켜온 그는 올해 2월 24일에 조국에서 진행된 《2.16예술상》에서 드디여 3위에 입상하였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그곳의 졸업생만이 받을수 있는 《공화국연주가자격》도 받았다.

《4년간 고생도 하였고 불안도 많았지만 그 노력이 인정된 결과 조국에서도 권위높은 이 상을 받을수 있어서 정말 기쁘고 영예스러웠다.》고 이야기하였다.

오늘까지 8년간 아무 걱정없이 악기련습에 몰두할수 있었던것은 다름아닌 부모님의 덕택이였다.

《부모님의 도움이 정말 컸어요. 음악의 길을 택한 저를 반대하신 아버지도 이야기를 거듭 나눈 끝에 저의 뜻을 리해해주시고 1분1초를 아낌없이 훈련하라고 격려해주셨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결코 혼자 걸어온 8년간이 아니였어요.》

또한 대학 4년간 즐거울 때도 힘들 때도 항상 곁에서 도와준 송철균지도원에 대하여 《침식을 같이하고 싸움도 자꾸 하였지요. 하지만 송지도원은 항상 곁에서 지켜주고 보살펴주었어요. 친형처럼 돌봐주고 주저앉고 나약해질 때마다 언제나 힘을 주었어요. 송지도원과의 만남은 저의 인생의 재산입니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토로하였다.

《오랜 기간 조국의 사랑을 받아온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실감하고있어요. 일본정부와 매체들이 우리 조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말살하려고 책동하고있지만 그러면그럴수록 동포들에게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다, 민족음악이 좋다는 신심을 안겨주고싶어요. 조국에서 다진 결의를 잊지 말고 사상과 기술을 련마하여 조국과 우리 조직을 지켜나가는 길에서 한몸 바쳐나가겠어요.》라고 굳은 결심을 다졌다.

(윤리나기자 rina@korea-np.co.jp)

201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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