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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씨 38년만의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 무죄판결/"불법 구금으로 만들어진 공소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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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0-01-24 23:29 조회3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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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16일 불법구금으로 인한 공소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재심 판결 무죄를 받아낸 이재영씨는 많은 사람들이 재심 청구에 나설 필요가 있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고 통일뉴스 1월23일자가 보도했다.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불법 구금으로 만들어진 공소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

이재영씨 38년만의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 무죄판결...
'용기내서 반드시 해야 한다'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승인 2020.01.23  02:17:21

   

이재영-38년만에 무죄.jpg
▲ 지난 16일 불법구금으로 인한 공소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재심 판결 무죄를 받아낸 이재영씨는 많은 사람들이 재심 청구에 나설 필요가 있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79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그해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재영씨에게 1982년 3월과 4월은 악몽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그해 3월 18일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어 일단의 대학생들이 부산 대청동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요주의인물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해 가차없이 범인 검거에 나섰다.

처음엔 문부식씨가 수사선상에 떠올랐으나 잡히지 않았다. 그 다음 전국 수배령이 떨어진 이호철씨도 잠적 상태였다. 가장 긴장된 초기 수사 상황에 이씨가 제일 먼저 연행되었다.

이씨는 '부미방'(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일주일 후인 3월 25일 경남 창원의 39사단에 입대해 군번도 없는 '장정' 생활 3일을 막 끝내고 '훈련병'으로 첫날을 맞은 29일 보안부대를 거쳐 부산지역 보안부대(501보안대)로 끌려갔다.

당시 이씨는 대학 입학 첫해에 유급을 당한 후 부산으로 내려와 공장을 다니려다 시행착오를 겪고는 1981년 다시 복학을 했다가 당시로서는 강제징집 코스였던 '교련 학점 F'를 받고 이듬해 1월부터 부산에서 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처지였다.

부미방 범인 검거에 혈안이 되었던 '합동수사본부'(합수부)에는 이미 치안본부에서 넘어온 이씨 관련 자료가 있었고 군인신분이었던 그에 대한 조사를 위해 이 자료는 다시 501보안대로 넘어오게 된다.

조사를 받으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치안본부는 문부식씨와 생김새도 비슷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관련된 이씨를 3번째 용의선상에 올려놓았다. 자료에는 총책인 이태복과 전민학련 서부총책인 손형민, 그리고 이태복이 직접 지시하는 특별 도시게릴라 조직책 '이재영'을 그려놓은 조직도까지 있었다. 물론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진짜 주범이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501보안대는 이씨에게 '부미방'이 터진 3월 18일 전후 시점 행적에 대해 분초 단위로 추궁을 시작했다. 군 입대전 술마시고 놀던 고등학교 동기들이 줄줄이 관련자로 소환됐다.

부미방의 주범인 문부식씨가 자수(4.1.)하고 김현장씨가 원주에서 체포(4.2.)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조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이씨는 그곳에서 그렇게 총 22일간 구금된 상태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문부식씨가 자수한 이후 501보안대는 이씨에 대한 고문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격적인 고문을 가해왔다. 

처음에 집중적으로 당한 고문으로 인해 제대로 서있기는 커녕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상태에 있던 훈련병 신분의 이씨를 훈련소로 돌려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갖고 있던 책으로라도 엮으려고 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고문은 전기와 물, 고춧가루를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철제의자에 묶어 놓고 '방첩대 몽둥이'라는 길고 단단한 몽둥이로 사정없이 무릎과 허리 등을 후려쳐 골병을 들게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결국 이씨가 같이 술을 마시면서 사회주의 교양을 했다는 고등학교 동기의 조서를 바탕으로 보통군법회의에서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에 자격정지 10개월을 선고받고 군 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하는 것으로 그의 군대생활은 끝나게 된다. 

군 형무소에서도 그는 바른 자세로 앉아 있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야만 했다. 

훗날 정형외과 의사들이 그의 허리 상태를 보고 요추 1, 2번은 의도적으로 충격을 가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될 수 없다고 할만큼 너무나 명백한 고문의 흔적이 있었다.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 정상적인 보행이 되지 않는 것도 그때의 후유증이다.

38년만의 재심 무죄판결...'허무하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한다.'

   
▲ 이재영 씨가 지난 16일 서울고법에서 재심 무죄판결을 받고 법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이재영]

지난 1월 16일 서울고법 형사 13부(구회근 강문경 이준영 부장판사)는 불법구금과 고문 피해자인 이재영씨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검찰도 지난해 12월 19일 재심 재판에서 이례적으로 무죄를 구형한터라 이씨의 재심 무죄판결은 확정되었다. 38년만의 일이다.

개인의 억울하고 기막힌 사연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씨의 재심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통상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 재심 대상이 '조작 간첩단'을 비롯한 조직사건인데 비해 사건 관련자가 당사자 1명 뿐이고 그동안 관행적으로 덮고 넘어갔던 불법 구금을 무죄 판결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 때문이다.

앞서 이씨는 지난해 8월 재심청구를 신청하면서 501보안대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여기서 사령부 지시로 이씨가 3월 29일 연행된 사실, 창원 소재 502보안부대에서 부산 501보안부대로 이첩하라는 지시, 그리고 4월 19일 영장 발부를 비롯해 22일간의 부당한 불법구금을 입증할 수 있는 내부 문서를 찾아냈고 고문 정황도 확인할 수 있었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당시의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고 그에 앞서 검찰이 무죄를 구형하는 보기 힘든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형사소송법이 정한 구금일수를 무시한 불법구금과 고문은 숱한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 사건 피해자들이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유사한 재심청구의 전범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눈길을 끌었다.

재심 무죄 판결 이후 이씨는 18일 기자와 만나 자신과 같은 억울한 희생이 하루빨리 끝나길 바란다고 하면서 재심재판 청구 과정을 자세히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보통은 생각을 하기 싫어한다. 친구들 다 불었지, 하염없이 깨지고 박살났지. 그러니까 생각도 하기 싫은 것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해야 한다. 힘내기 바란다."

스무살 무렵 두들겨 맞고 공판기록으로 남은 것을 기억조차 하기 힘들어 하는 이들을 위해 이씨는 무죄판결 이후 몇 가지 일을 더 계획하고 있다.

먼저, 판결문 확정이 되는대로 형사보상에 이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때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자신을 고문했던 자들을 전부 포함시켜 연대책임을 물으려고 한다. 국가배상권에 기대지 않고 개인들에게 강제집행하되 당사자들이 사망했다면 상속재산이라도 끝까지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재판이 힘들고 복잡해지는 건 잘 알지만 반드시 그렇게 할 생각이다.

국가가 고문을 지시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불법을 저지른 공무원에게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만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가해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명예 따위가 아니라 재산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법구금을 지시한 보안사령관과 501보안부대장 등의 이름이 공문으로 오고간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수월한 일이기도 하다. 
 

이씨는 무죄판결이 나면 전과기록이 삭제되는 것을 기대했는데, 해당 내용이 나오지 않는 범죄사실조회와는 달리 수사기관들이 수사 편의를 위해 열람하는 '수사자료조회'는 그대로 남는다는 걸 최근에야 파악했다고 했다.

수사기관에서 신원조회를 하면 무죄판결을 받은 수사자료가 버젓이 뜨는 것도 문제지만, 기한도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리고 이씨가 마음의 빚으로 생각하는 후배, 정성희의 추모집을 만들고 유품이라도 챙겨 양지바른 곳에 안식처를 만들어주는 것까지 하면 그의 일은 마무리될 성 싶다.

이씨의 강제징집 발단이 된 1981년 11월 25일, 그날 79학번 양경희씨가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는 유인물을 살포하던 중 진압경찰과의 실랑이 끝에 무악극장이 있는 학생회관 꼭대기층에서 중앙도서관 쪽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고 여러 후배들이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어 누구는 구속되고 누구는 그날 곧바로 군대로 끌려갔다.

군대로 끌려간 여럿 중에 이씨의 흥사단아카데미 후배인 정성희가 있었다. 그는 입대 이듬해인 1982년 7월 23일 초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으나 끝내 죽음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오랫동안 '의문사'로 남아 있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뒤 정성희를 포함한 군 의문사 중 상당수가 단순 자살은 아니고 업무상 관련이 있는 순직으로 처리되었다. 다만 국가의 잘못으로 인한 죽음으로 인정되지는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도 국가의 책임을 입증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생각이 있다.

20대 청년이 환갑을 넘기도록 40년 세월이 흘렀는데 어찌 재심 무죄판결만으로 그 전과 후가 180도 달라질 수 있을까. 이씨는 38년만의 재심 무죄에 대한 소회를 묻는 질문에 "재판 결과에는 큰 감흥이 없다.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허무하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했다.

(수정-23일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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