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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용운 통일운동 원로, 건강악화로 UCI병원 긴급이동/멀리 캔터키에서 병문환 온 정영철선생의 의리는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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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10-10 13:27 조회618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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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시티=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왕용운 선생(미주통일운동 원로)이 10월9일 페부위 출혈로 오렌지 카운티 오렌지 시에 소재한 UCI 병원 긴급입원실에 입원하여 치료중이나 그 상태가 위급한 것으로 알려져 아리조나 딸과 오하이오주 등지의 지인들이 이날 병원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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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조나 딸과 사위는 8일밤 소식듣고 자동차로 달려와 9일 오후 1시에 병원에 도착했고, 켄터키에서 이 소식을 듣고 비행기로 달려온 정영철 선생과 김시환 미주양심수후원회 회장은  함께 로스엔젤레스에서 만나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측은 가족의 동의서를 받고 일단 방사능 치료에 의해 폐에서 나오는 출혈을 막고 그 다음 단계의 치료를 강구하고 있어 가족들과 지인들은 의료진의 진단과 차기치료계획에 대한 입장을 10일 오전에 듣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왕용운 선생은 그동안 3년동안이나 투석을 받아 왔기 때문에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으나 여기에 폐암까지 겹쳐 건강상태가 위험수위에 왔다는 것을 감지하여 온 것 때문에 왕선생 자신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무리한 치료를 받는 것을 반대해 왔다고 가족들은 설명했다. 

그 때문에 내일 10일 아침 가족들이 긴급입원실의 책임의사를 만나 9일 치료 전체 결과와 관련하여 향후 그 전망에 대해 진단내용을 청취한 다음에 향후 문제를 결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멀리 단숨에 달려온 정영철 선생의 의리에 감탄
학벌은 없지만 <인생박사>,<자동차 박사>로 호칭받아 왔다


나는 왕용운 선생이 위급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침 일찌기 오렌지 카운티 오렌지 시티에 있는 UCI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현장에서 위급한 아버지 소식을 듣고 사업을 전폐하고 달려온 딸과 그 사위의 따뜻한 효심에도 감탄했지만 멀리 캔터키에서 당일 비싼 표를 사가지고 왕용운 선생을 방문하고 몇시간만에 돌아간 정영철 선생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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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용운 선생이 눈을 감고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그 모습을 보고 하루 속히 깨어나기를 기도하는 그의 표정에서 인간에게서 가장 고귀한 의리를 엿볼 수 있었다. 수면제를 많이 복용시켰는지 침대에 누워서 산소호흡기를 입에 물고 하염없이 잠만 자고 있는 용운 선생이었다. 그는 언제 깨어날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 앞에서 여러시간 가족들과 지내면서 환자가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같은 날 늦은 밤 비행기를 타고 다시 돌아가는 정영철 선생의 <동지적 의리>에 대해 감탄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그리고 그가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곳 통일운동 원로들을 방문하고 현준기 선생과 양은식박사를 찿아 뵙고 깍듯하게 인사를 드린다음에 공항으로 나가기까지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정영철 선생의 삶의 족적을 알수 있었고, 그는 겉보기와는 아주 다른 <참인간>의 경지에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언행을 구사하기 때문에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경우들도 적지 않았으나 그의 인생행로를 듣고 나면 그의 사람됨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누구보다 독서를 많이 했다. 사회과학분야의 도서를 2천권, 그리고 자동차에 관한 도서들을 1천권 가량 읽었다. 그중에 4백여권은 지난 1998년 한국에 나갔다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재판을 받고 1년을 복역하는 기간동안 읽은 도서만도 4백여권이 넘었다. 

무엇때문에 한국서 감옥생활하게 되었는가를 묻자 정영철 선생은 (1)찬양고무죄, (2)잠임탈출, (3)회합교신이란 명목으로 한국 갔을 때 자신을 구속하여 재판에 넘겨 많은 사람들이 악법이라고 해 온 국가보안법에 걸어 1년을 선고받고 감옥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검찰이 그를 기소할때 무려 124건에 해당하는 죄목을 걸었다는 것이다.  

검찰의 수사과정이나 재판과정에서 김일성주석이나 김정일 국장위원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질문에서는 거침없이 조선의 영도자들은 사랑의 정치로 국민을 다스린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사업에 수완이 있어 경제사정에는 어려움이 없이 넉넉한 생활을 해왔다고 말하면서 전자제품이나 컴퓨터에는 소질이 없어 동영상이나 인터네트는 별로 접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취미중 하나는 도서를 읽는 일이라고 한다. 

정영철 선생은 한편 솔직담백한 성격이다. 자신의 학벌은 초등학교라고 대답하면서도 연세대학교를 비롯하여 서울의 대학교들에서 등록하지 않고 사회과학이나 흥미있는 강의실을 찿아가 학생도 아니면서 도강을 통해 많은 교수들의 강의 들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도서들도 4천여권에 달한다. 로스엔젤레스에서 <고려서점>이라는 책방을 하면서 이북책들이나 비데오를 판매하던 (고)김병주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책방에 가서 이북책을 한꺼번에 밴트럭에 가득할 정도로 구입했는데 그 때 현금 4천800달러를 지불한 이야기는 통일운동 진영 내부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때 구입한 책들 중에는 8권으로 되어 있는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1질을 포함하여 수많은 이북 도서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소장한 도서들 4천여권 중에는 남녘에서 출판된 도서가 80%가량되고 20%가 이북도서들이라고 귀띔해 준다.   

정영철 선생이 책을 아주 좋아하니까 통일운동진영의 원로인 현준기 선생도 이사갈때 자신이 보관했던 도서들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는 지난 2005년 시카고 김원유 선생과 함께 딱 한번 이북을 방문하였지만 자신이 이북을 깊이 있게 알게 된것은 <세기와 더불어>였다고 대답하면서 8권으로 되어 있는 이 도서들은 10번정도 읽었다고 말한다. 그는 여행할 때 마다 한권씩 가방에 넣어서 비행기에서 혹은 호텔에서 읽어왔다는 것이다.

그는 충남 홍성에서 1960년 10월30일에 태어났지만 자라면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도 역시 학벌은 초등학교이지만 윤보선 정치인 곁에서 정치생활을 오랜동안 하면서도 학벌 때문에 기죽은 적은 없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은 아버지의 이야기라면 이유를 막론하고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비록 자신이 한 살때 이혼을 하였기 때문에 친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5살때에 그 기회가 주었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과정에서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해 왔는데 그 직업과 해 온 일들을 꼽아보면 대략 100여가지 직업이 될 것이라고 돌이켜 본다. 

그는 그 만큼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종류의 일들을 해 왔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인생박사>라고 말하는 경우들도 많았다. 어떤 이들은 정영철 선생을 가리켜 <자동차 박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신은 <인생박사>쪽이 자신을 더 깊이 알고 말하는 것이라고 해설해 주기도 한다. 

정영철 선생은 그 누구가 가르쳐 주어 친북이 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 친북인물이라고 자부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34살까지 성장하면서 노동자, 농민, 재야인사들의 사건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었고, 사회전반이 개판이기 때문에 이것이 나라인지 아닌지 헷갈릴때가 많았다고 시사하면서 아버지가 군대입대 문제를 의논하였을 때 아버지도 나라가 없는데 무슨 군대이야기냐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도 한국이 주권도 없이 식민지 생활로 걸어 왔기 때문에 그 모순을 보면 볼 수록 한심한 나라라고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북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우리민족의 자존심은 이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북에 우리의 자존심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국가보안법이 뭐고 가리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미국이든 한국에 가서 눈치보지 않고 마음대로 이야기 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국보법에 의해 감옥생활을 한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정영철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의리를 갖고 있다. 때로는 거칠고 험한 행동을 보이면서도 인정이 많고 남을 돕는 일에는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돕는 성격이다. 그는 인생을 살면서도 자기 자신이 좋아한다면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식당을 경영하면서 자신의 식당안에 인공기를 걸어놓고, 김일성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모시고 손님들에게 당당한 자세로 해설해 준다.  

자신이 좋아는 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권리라고 해명하면서 이것 때문에 장사가 잘 안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 때문에 오히려 중국계 유학생들이나 진보적 인사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단골손님들이 된 경우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조선의 국경일인 경우, 예를 들어 4.15 태양절(김일성주석이 탄생한 조선의 최대명절)에 손님들에게 무료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들도 여러차례 있었다. 

그 누구도 정영철 선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의 부인을 비롯하여 자녀들, 친척들, 그리고 그 어떤 지인들도 그의 삶의 철학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자기의 길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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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손세영님의 댓글

손세영 작성일

왕용운 선생님
속히 쾌유하시길 간절히 빕니다.

오영칠님의 댓글

오영칠 작성일

기사고맙습니다.
왕용운 선생의 건강회복을 빕니다.
민족통신에서 상황을 계속 알려주기 부탁합니다.
시카고 오영칠

양은식님의 댓글

양은식 작성일

왕용운 선생의 쾌유를 빕니다.

컬버시티 양은식

현준기님의 댓글

현준기 작성일

정영철 선생이 라성까지 와서 왕용운선생 병문환하고나서
우리집까지 찿아와 인사해준데 대해 감사하고 입원중인
왕선생이 하루속히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현준기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얼마전까지만도 멀리서 찾아온 동지들을 지극히 환대해주고 온라인으로 운동을 지원해오던
애국자 왕용운 선생님의 건강이 하루속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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