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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진영 후배들, <현준기선생 93세 생일만찬>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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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9-27 22:47 조회2,51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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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손세영/김백호 편집위원]현준기 선생의 93 생일을 맞아 926  시내 용수산에서 진행된 저녁 만찬 모임은 색다른 모습을 띄었다참석자들이 모두 생일축하카드를 준비해 와서 낭독하면서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참석자는 붓글씨로 생일을 축하해 주었고  참석자는 현선생님의 생애를 조명하는 수필을 써와 낭송하기도 했다.


https://youtu.be/kXEEb4JILxM


현준기생일.jpg
*용수산 식당에서 <민족통신>이 마련한 현준기선생 93세 생일만찬 행사의 모습


현준기83세생일.jpg
93세 생일을 축하하는 촛불을 끄는 현준기 선생 모습

현준기83세생일01.jpg
현준기 선생에게 드린 생일카드를 하나 하나 소개하는 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현준기생일01.jpg
*현준기 생일만찬때 미주양심수후원회 김시환회장과 왕용운 고문이 꽃다발을 전달하는 모습

현준기생일02.jpg
만면의 미소를 지으면 후배들에게 감사하는 현준기 선생 모습


현준기상패-원판사이즈.jpg
*현준기 선생이 몇일 전 북녘에서 받은 훈장 4개와 남녘에서 받은 훈장 1개를 달고 기념촬영한 모습


현준기상패-인터네트보는모습01.jpg
현준기 선생은 매일 체력단련도 하지만 인터네트를 통해 세상돌아가는 것을 점검하는 모습

현준기상패-훈장들웃저고리.jpg
**현준기 선생이 몇일 전 북녘에서 받은 훈장 4개와 남녘에서 받은 훈장 1개를 웃저고리에 달고 기념촬영


현준기-이활웅만남.jpg
*현준기선생(93)이 멀리사는 딸집으로 이사간 이활웅선생(95)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모습




 

이에 대해 현준기 선생은 감사의 말로 참석자들에게 답사를  주는 한편 기쁜 마음에 노래까지 불러주어  박수를 받았다이날 모임에는 뉴욕행사에 참석하느라고 참석하지 못한 백승배 목사가 인편으로 보낸 생일축하카드에 <김현환선생하용진선생정신화선생> 함께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현준기 선생은 1927 이북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선생을 하다가 1950 12월초 전쟁통에 월남하여 남녘땅에서 역시 학교선생을 하다가 1965 파라과이로 이민가서 11개월정도 거주하다가 다시 알젠틴으로 가서 9년동안 양계장 사업을 하다가 1974 미국으로 다시 이민갔었다고 회고했다미국생활 초기 미시건지역에서 식당업을 잠시 하다가 1979 로스엔젤레스로 이사하여 세탁업을 오랜동안 경영하면서 재미동포전국연합회 2대회장  재미동포사회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해  원로이다.

 

현선생은 올곧은 생활을 하면서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인정이 많은 어른으로 알려져 왔다그는 북이 어려울때에도 수만달러를 성금하여왔고재미동포 단체가 어려울때도 수만달러를 성금하여  실천하는 운동가 원로로 자리매김하여 왔다.

 

그러한 애국적 자세때문에 북과 남에서 상장과 훈장들을 받았다그는 얼마전 민족통신 기자를 불러 양복에 북녘에서 받은 훈장들과 남녘에서 받은 하나의 훈장을 모두 양복 웃저고리에 달고 사진을 부탁했다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연도별로 모아 놓은 해외통일운동 관계 사진 앨범들 10여권을 <민족통신> 영구보관하여 참고자료로 사용하라고 기증해 주기도 했다 상장과 훈장들 가운데에는 <조국통일상> 받은 경력그리고 <애국상> 받은 경력그리고 로력훈장국기훈장 1 메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선생은 생일기념 만찬자리에서 만으로 93우리식 나이로 계산하면 94세인데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여 왔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1)아침저녁 한시간씩 강아지와 함께 걷는것을 비롯하여 (2)맨손 체조 35가지를 일정하게 반복하여 왔고, (3)아령으로 근육을 단련하여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현준기 선생은 이날 모임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표하면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만간에 흥겨운 자리를 자신이 한번 마련하겠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기획7]<통일염원 대륙횡단반>드디어 뉴욕도착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9277#c_9282

[인물]현준기선생”미국문제 해결돼야 조국반도 해결”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681



[특집-2]서거3주기 추모대담-현준기 선생(동영상)



통일운동진영 원로들 아침산책하며 건강관리/ 유태영박사, 현준기선생,양은식박사 정기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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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작성일

현준기 선생, 8순기념 모임 ...『가슴이 찡했다. 』

23일 로스엔제레스 시내 용궁식당에서 열린 <청암> 현준기 선생 8순기념모임>은 한 개인의 생일잔치라기 보다는
통일운동 부흥회와 같은 뜨거운 감격과 감동이 교차된 모임이었다. 북부조국에서 축하문을 보냈고, 덴마르크,
서울 등에서 보낸 축하문도 있었다. 이 모임에는 또 뉴욕에서, 시카고에서, 마이애미에서도 참석한 통일운동
인사들이 있어 현준기 선생 8순모임은 마치도 남북 해외가 함께 축하하는 행사 같았다. 이용식 편집위원이
취재한 내용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청암> 현준기 선생 8순기념 모임 성황리에 진행


[로스엔젤레스=이용식 민족통신 편집위원]"가슴이 찡했다." 이것은 통일운동 원로 현준기 선생의 8순기념모임에 참석한 인사들의 반응이다. 이 모임은 특히 재미동포 진보단체들이 마련한 8순기념 모임으로 참석한 인사들이 가슴과 가슴으로 축하해 주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IMAGE##> 노길남 민족통신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각 테이블에서 샴펜을 터뜨리며 배강웅 범민련 재미본부 의장의 축배제의로 시작되었다. 8순을 축하하는 샴펜 잔의 부딪침으로 참석자들은 현준기 선생의 8순을 축하했다. 만찬이 끝나고 축하 케이크 짜르기 순서가 끝난 다음 양은식 박사의 <내가 본 현준기 선생의 80평생>, 북부조국 해외동포원호위원회가 보낸 축하문 소개 및 각지에서 보낸 축문들 소개, 유태영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상임고문과 윤길상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장의 축사, 8개단체 명의로 된 축하패 김영희 선생 전달, 홍순호 선생의 축하노래, 박천흠 선생의 축시 낭송, 방의경 선생이 특별작곡한 노래선물, 그리고 단체들을 대표하여 김영순 <평화를 사랑하는 여성들> 서부지역 대표, 박영준 남가주노동상담소 소장, 김현정 통일맞이 나성포럼 등 단체대표들의 축하 말, 그리고 이활웅 선생을 비롯하여 시카고에서 참석한 강상배 선생 등의 인사 말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8순을 맞은 <청암> 현준기 선생은 이 자리에 참석한 동포들과 해 내외에서 보내준 축문들에 대해 감사하면서 몇가지 당부 말도 전했다.

현준기 선생은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우선 평양과 서울에서 보내준 축문과 덴마르크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보내 준 축하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의 이 기쁨과 영광 그리고 사랑에 대해 너무나 감격스럽니다."라고 감사를 표명하고서 "오늘의 모임에 대해 3가지 의의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이 모임을 위해 수고해 주시고, 축하애 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고, 다른 하나는 오늘의 기쁨과 영광을 돌아가신 어머님에게 드리고 싶고, 마지막 하나는 오늘 모임의 비중을 통일운동권 부흥회로 삼고 싶다."고 피력했다.

<##IMAGE##> 그는 마지막으로 통일운동권에 드리는 말을 통하여 통일운동이 한층 더 발전하기를 바라면서 큰 것을 위해 작은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동지들간에 비난, 오해 등을 버리고 관용하자는 자세를 갖자, 세련된 언어와 상호인격을 존중하고 겸손해 지자, 동지들간에 충고를 달게 받고, 시행착오를 곧 수정하는 자세를 갖자. 언제나 일심단결의 자세를 웃자리에 두고 실천해 나가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현준기 선생은 단체들간의 연대관계는 공동으로 진행하는 통일강좌, 쟁점토론 등 공동행사를 통해 구체적인 실천으로 연대의 끈을 공고하게 만들어 나가자고 제언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서 나타난 몇가지 흥미로운 현상들이 있었다.

▲당초 40명으로 계획되었던 모임은 예상과 달리 50명으로 초과되는 바람에 여러분들이 다른 방에서 식사를 하고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태로 준비위원들이 진땀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다.

▲북녘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의 축하문, 남녘의 <남북정상회담경축국민대회> 공동추진위원회 박해전 공동대표겸 집행위원장의 축문, 덴마르크에 거주하는 림민식 범민련 공동사무국 사무총장의 축하문, 미주 각지역에서 온 축하문들(선우학원 박사, 리승만 목사, 함성국 목사, 리준무 선생, 정기성 선생, 조명지 목사, 구기번 선생, 김필주 박사, 박문재 박사, 최기봉 선생, 강은홍 목사, 송학삼 선생, 리금순 선생, 오영칠 선생 등)의 내용들이 다양했다.

▲현준기 선생의 80평생을 소개하기 위해 양은식 박사가 반나절을 보내며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위해 담화한 것도 드문일이었다.

▲서울서 열린 <남북정상회담경축 국민대회>에서 해외대표로 연대사를 발표하고 돌아오는 길에 현준기 선생 8순기념모임에 참석한 유태영 목사는 남부조국 국내 인사가 전한 축의금도 전달해 흐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 목사는 또 뒤풀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개최된 서울 행사에 관해 간단한 보고말도 전했다.

▲5시부터 시작된 8순기념모임이 1부를 식당에서 치르고 이어서 남가주노동상담소로 옮겨 뒤풀이가 계속되었는데 이것이 끝난 시간이 11시 이니까 총6시간 걸린 8순기념모임이었다.


*관련보도 자료...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북부조국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축하문


현준기 선생 앞


생일 80돐을 맞는 선생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현준기 선생님은 조국통일북미주협회 회장으로, 재미동포 서부지역련합회 회장으로, 재미동포 서부지역련합회 회장으로, 재미동포전국련합회 회장, 고문으로 재미동포운동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시였습니다.

생일 80돐을 맞는 선생님의 건강을 바라면서 아울러 현준기 선생의 생일 80돐 기념ㅎ식을 성대하게 마련하기 위하여 애써 노력한 여러 통일운동 단체들과 동포선생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주체 96(2007년) 9월20일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평양






<청암> 현준기 선생 8순기념관계 주요자료 소개


▲양은식 박사가 발표한 <현준기 선생의 삶 80년 세월>

현준기 선생의 생애



1 파란만장한 80 년

<##IMAGE##> 이미 민족통신에 자세한 일생소개가 있어

평전적인 인물론을 하고자 한다 .

현선생의 일생은 두 편으로 나눌수 있겠다.

하나는 출생 (1927년) 에서 1989년까지의 생활인의 생애,

둘째는 1989년에서 현재까지 통일운동에 투신한 통일운동가로서의

생애이다.

1989 년 현선생은 남은생애를 조국통일이라는 거대한 목표에 올인한다 ..

새로운 가치를 찾아 그창조에 뛰어든다 .

해외동포로 남미와 미국에 반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겪은 체험에서 울어나온

그래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결단이었다.

통일운동에의 투신은 전기 생애와 평행선의 연속선상에서 볼수없는

생애 세번째 탈출이었다

.

두편의 생애를 대조해 보려한다.



2 생활인으로서의 현선생 (1927-1989)



* 현선생은 1927년 편안남도 남포의 3000 석 소출의 지주의 집에 태어났다.

호남이나 황해도에는 만석군 지주들이 있었으나 평안도에서 3000 석이면

대지주 집안이다 .

할머니와 어머니 , 5형제에 누이 그리고 작은 아버지 부부와 3명의 사촌형제도

같이 사는 대형가정이 었다. 아버지는첩을 얻어 나가 살고 있으나 가끔 집에

들어 오시곤 했다 . 거대한 주택은 과수원에 둘러쌓인 부호의 집이었다 .



* 1940 년에 남포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

현선생은 유년시 부유한 생장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당시 부호인

부친의 첩살이 , 현선생을 무척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어머니가 봉건사회

풍습인 시어미니에게 구박 당하는 모습을 보며 예리한 소년은 속마음에

심각한 갈등이 움튼다

. 현선생의 정의감은 이때부터 날이 서 갔다.

이런 불화를 보기 싫어 집떠나 살고파, 남포에서 멀리 떨어진 개성의 명문

송도중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는데 예상외로 떨어진다.

14 살난 현준기 소년은 만주로 탈출한다.





* 14 살 소년이 부유한 생활환경을 뒤로 하고

아무런 친지도 없는 만주, 통화로 간것이다. 부모님의 후원아래 에 유학한것이

아니라"""

그러나 적수공권으로 통화제 3고둥중학교 졸업한다.

현선생은 어려서 부터 머리큐가 높은 수재였다.



* 1945 년 해방과 더부러 평양으로 나온다.

수재학교 평양사범학교 후신인 평양사범대학에 입학 해서 1948 년 졸업한다 .

성적우수학생에게 주여지는 소련유학 후보로 선발되었으나,

사정의 변화로 황해도 신촌고급중학교에 발령 , 생물교사로 2 년간 시무중,

6.25 전쟁으로 중단하고 남하 , 그때 나이 23세 .



* 남한에 내려오자 육군종합학교 , 육군보병하교 졸업, 육군참모총장상 수상 .

소위로 임관돼 수도사단 배치된다.

그런데 향로봉 근무시 , 전투에서 안면부상, 바른쪽눈 실명 중위로 제대하고

만다.



* 54 년 서울 수복후

한성고등학교 생물교사로 취직 , 같은 해 친지의 소개로 유달중씨와 결혼,

슬하에 세 아들 두게 된다.

생물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는데도 성실성을 평가받았지만, 학교측은 현선생의

교육관을 높이 평가 , 훈육주임으로 임명되어 열성적으로 이일을 수행했다 .

훈육주임으로서 학생들에게는 "호랑이선생 "으로 통하는 두려움의 대상

이었다. (나성에 사는 제자 이와같이 회상 )

젊은 현선생의 성실과 책임감이 크게 평가받았던 시절이다 .

64년까지 10 년 동안 근무하던 학교에서 재단이사회가 교장선임과정에

부정한 수단을 동원하자 타협을 거부하고 사임했다. 날카로운 정의감에서

였다.



· 파라과이로 농업이민 .

1965 년 파라과이로 가족대동 이민, 다음해 아르헨티나로 재이민 , 남미에서 9년간 양계업, 식품점경영에 몰두했다. 일요일도 없이 일을 했다 . 황야의

결투장같은 삶이었다 .

그러나 이시기 강도에게 전재산 탈취 당한다 .

권총강도 당한것만도 10차례 . 남미이민 생활은 험한 생활이었다고 회고한다 .



" 조국이 살만한 곳이었더면 왜 아이들 셋이나 끌고 이곳에 살겠다고 왔던고…

이역 수만리 가족의 새 터전을 잡을려고 못해 본일이없이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열심히 일하고 살았 건만… 조국이 원망스럽구나…" " 여기서 더는 못살겠구나 "

남미 생활을 접는다.



· 1974 년 미국으로 이민 , 동생 현준선 ( 태권도 9단 , 프로골퍼) 이 있는 미네아폴리스에 정착 식당경영



· 1980 년 로스엔젤리스로 이사 , 산타모니카에서 25 년간 세탁소경영.



· 2005 년 부인 유달중여사 암 수술후 간호하기위해 세탁소경영 정리.

근 5년간 유여사의 거듭되는 수술과 투병으로 병간호에 전념,

지금은 나면 끓이는데 전문가 되었다고 자평한다.

( 부인은 현재도 링겔주사로 연명, 링겔 한병에 $600, 하루에 한병 사용.

병도 병이지만 가정경제가 바짝 조여온다.)

그러나 현선생은 자신의 고통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3 통일운동에 투신 (1989- 현재)



* 남미이민 생활은 탈조국의 고달프고 외로운 생활 끝에

미국으로 건너온후 일본 월간 "세까이" 잡지를 구독하면서

조국의 역사와 전모가 다시 보이기시작 했다.

" 나라가 이래서는 안된다 "는 생각이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 이런 시각에서 보니

지난 생애는 잃어버린 세월이었고 잊고 싶은 세월이었다 .

이미 나이는 53세 초로에 들어서고 ,



로스앤젤리스에 와서도 생활기반 잡기 , 아이들 교육에 다른 겨률이

없었으나 , 마음은 언제나 조국의 미래와 관련하여 무엇인가 찾고있었다 .



· 친구의 권유에 따라 1989년 조국통일북미주협회에 입회한다 .

약칭 "통협" 은 해외에서 통일운동의 선구적 단체.

통협은 80년대 북과 해외동포간 여러 차레의 대화모임의 주축이던 이들이 조직한 단체이었다 . 북조국 바로알기, 이산가족찾기로 4000여명 이산가족을 찾아주고 북과 미국동포간 교류를 추진해온 유일한 미국동포 사회단체였다 .

그러나 80년대 미국동포사회는 지금으로 보면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이었다 .



" 통협에 입회하면 부담이 크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고 현선생은 회상한다.

이미 "통협 "의 회원들은 남한정부와 미국정보처에는 친북단체로

낙인찍혀있었기 때문이다 .



( 남한정부가 이토록 해외통일운동에 신경을 쓴것은 70년대 80 년대의 경우 유신치하의 군사독재정권이 안정을 잃고, 박정희가 암살되고 전두환 정권이 광주민중을 학살한 정치폭풍의 시기에 통일운동이 동포사회 확산되는것을 두려워하여 공작차원으로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남한정부는 통일운동이 동포사회에 퍼져나가지 않도록 긴장속에서 안기부와 영사관이 < 통일세력 박멸>이라는 정책으로 강력히 밀고 나갔다. 이일로 인하여 회원 당자는 물론 가족들 까지 연좌제로 감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현선생 가족들도 통일운동에 나서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 현선생은 회원으로 입회한지 불과 몇달지나 통혐의 사무국장,

93 년에 회장으로 선출된다 . 동지들의 신임이 그만치 깊었다 .

통협이 재미동포 전국연합으로 조직확대되자 전국연합 수석부회장,

서부지역 회장을 역임하다가2004 년에 "동포연합 " 전국회장으로 선출되었다.



* 현선생은 동포연합 조직이 체계를 구축하고 회원간에 단합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특히 뉴욕에 있는 동포연합 사무실에 자주 가야 할때, 평양에

여행를 떠나야 할때도 사업을 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 심했다.

그러나 미 전국에 서부, 동부, 중남부로 나뉘어 있는 동포연합조직을 제궤도에 올려놓았으며 통일운동 조직이 명실 공히 전국조직으로 가동하는데 기여하였다 .

" 통일운동센터"를 기획하여 많은 운동단체가 한 집웅아래서 일한다는 못토를 가지고 성사에 진력하였다 . 이 꿈을 이루지 못한것 아쉬운 일이다 .

2006 년에는 동포연합 회장직을 사임하고 고문에 추대되고, 615 미국위원회

서부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선출된다 .



· 2006 년에는 운동동지들의 힘을 모우고 종합적 정책산실을 꿈꾸며 한백회를 조직 회장으로 수고하고 있다. 주변에서는 이해를 못하나 현선생은 통일운동조직의 약점은 " 통일"이 안되는데 있다고 보며 80세 고령에도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 수호전의 "양산박" 같은 꿈을 기지고 있다.…



· 현선생을 미국통일운동 조직의 리더쉽을 담당해온 분이다.

인적자원도 재정도 별로 넉넉지 못한 시대의 운동지향과 조직운영을 온몸으로

감당해온 미주통일운동 지도자이다.



· 후기의 생애는 아들들이 대학을 마치고 둘은 엔지니어로 둘째는 컴퓨터전문

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군사과학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 따라서 아이들은

이젠 집에서 독립해 나가 살고 있지만

노동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어머니의 교훈을 실천해 살면서 일생을 검소와 부지런함을, 그리고 언제나 살아있는 어머니의 교훈 , 옳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명제는 현선생의 명심보감이다.



· 현선생님께 존경과 위로를 보내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친다.

건강하시기 바라며현선생님 100세때에는 성대한 잔치를 열어드리자.
.....................................................................................

▲윤길상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장의 축사

<##IMAGE##> 청암 현준기 선생님의 80세 생신을 축하하면서
항상 새로운 전환을 향한 선구자, 개척자로서의 삶을 살아오신 선생님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청암 현준기 선생님! 그리고 청암 선생님의 80세 생신을 축하하
위하여 함께 하신 여러분!

선생께서는 1927년 출생하셨으니 우리 민족과 이씨 조선이 봉건시대의 불합리한 사회정치적 구습과 취약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도 이전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그 치하에서 억압과 절망, 착취와 수모를 당하던 시대 출생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그시대는 또한 세계적인 경제공항으로 인하여 식민지 치하에서의 우리 민족의 생활상은 2중 3중으로 어려움을 당하던 시대입니다.

민족통신에 실린 현선생님의 90년 생을 읽으면서 저는 선생님의 삶 속에서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나타난 인격적 품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현실에 자족하고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내일과 보다 나은 환경, 정의가 이루어지는 바른 역사가 이룩되기 위한 한 길에서 개척자, 선구자로서의 80년을 살아 오신 어른이십니다.

첫번째로 1939년이면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고향산천을 뒤에 두고 만주로떠나셨습니다. 물론 당시의 12세는 오늘의 22세 이상가는 정신적 연령을 가진 나이라고 할 수 있었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역시 12세는 12세일 뿐인 어린 나이 였습니다.

선생님께서 68년 전 집을 떠나 이국 땅에서 5년동안 고등학교를 수학하신 그 의지와 결단인 선생의 일생을 통하여 일관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고향에 돌아와 사범대학을 마치시고 교사생활을 하시다가 전쟁을당하셨습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피란 길에 오르셨습니다. 당시 우리반도의 내란에 외국의 군대가 개입하여 우리 민족은 새로운 수난과 수모를 겪어야 하던 시대입니다. 그 속에서의 부조리와 부정. 사람의 목숨이 파리목숨만도 못하던 그 엄혹하던 시대환경을 우리 모두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현선생님께서는 다시 선구자, 개척자로서의 위웅을 나타내시었습니다. 암혹한 현실, 부조리와 부정이 지배하는 환경을 벗어나서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낯선 땅,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의 이민입니다. 말이 쉽지 1965년 38세의 가장이 어린 아들 3명을 이끌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남미의 나라로 이주를 결심하신 모습은 12세에 고향을 등지고 이국땅으로 가시던 선생의 선구자적, 개척자적 정신이 다시 구현된 실증입니다.

이제 남미에서 다시 미국으로의 재 이민. 그 얼마나 힘든 결단이였겠습니까?

세번째로 미국에 오신 현선생님께서는 1980년대 남쪽 고국 군사정권하에서 자행된 끔직스러운 사건들을 보시고 독서를 통하여 이민사회의 일반에서는 보기 드문 아주 희귀한 선구자, 개척자로서의 의식세계의 전환을 하시며 오늘에 이르셨습니다.

사실 이민 생활은 별을 보고 시작하여 별을 보고 끝을 맺는 일과를 살아가면서 생존의 엄혹한 싸움을 하여야 하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책을 읽고 자신의 지적, 정신적 발전을 위하여 시간과 정력을 쓴다는 것이 아주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런데 현선생님께서는 독서를 통하여 이번에는 생활의 터전을 옮기는 변화 보다 더 어려운 변화, 즉 세상을 보는 시각, 사회와 정치적인 문제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 생각의 전환을 하시였습니다.

개척자, 선각자가 어찌 두고온 고국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냉전시대에 형성된 생각,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미동포들의 현실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풍토속에서 선생님은 선구자, 개척자로서의 정신을 여실히 발휘하셨습니다.

일본에서 오는 <센케이> 잡지와 <통일평론> 등의 출판물을 통하여 조국의 현실을 직관하기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미주에서의 민족통일운동의 중심에서 20년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민족자주의 문제, 정의의 문제, 역사의식의 새로운 수평선을 바라보시면서 민족의 화해와 자주통일의 새날을 향한 운동의 선구자, 개척자로서의 외롭고 힘든 일을 담당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이렇듯 선생님께서 선구자, 개척자로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곧은 삶을 살아 오도록 하신 힘이 있으셨습니다. 이것은 어린시절 어머님께서 일러주신 삶을 향한 가르치심이였다고 봅니다. 험란한 여정을 승리로 이끌어 오도록 하여 주신 어머님의 가르치심:

 바르게 살아라! 올바른 삶을 살아라!
 책임 못 질 일은 하지 말아라!
 언제나 겸손하여라!
 항상 부지런허고 검소하게 살라!

우리 모두도 이렇듯 우리에게 산 모범이 되어 주신 선생님의 청아한 인격과 헌신을 닮아 배우면서 사심없이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향한 발걱음을 계속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머님의 고매하신 가르치심으로 80평생 민족과 조국을 위한 투쟁의 한 길을 걸어오신 청암 현준기 선생님의 건강과 보람이 넘친 여생을 축원하며, 더욱이 선생님을 내조 하시면서 많은 나날들을 홀로 지나시면서 현재는 병환으로 고생하시는 사모님의 건강이 회복 되기를 기원하면서 축사를 대신합니다.

2007년 9월 23일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장 윤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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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민식 범민련 공동사무국 사무총장의 축사


존경하는 현준기 선생님의 팔순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께서 간직하고 계시는 파란만장의 이민생활 이야기를 최근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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