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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김일성주석 서거 18주년을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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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7-07 18:33 조회3,0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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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편집인은 김일성주석 서거 18주년을 맞아 논단을 발표하면서 "오늘은 김일성주석이
서거한지 18주년이 되는 날이다. 서거한 그날 북녘 땅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세계나라들과 평화애호민들은
그의 서거에 애도하는 조문들을 보냈다. 김일성주석의 서거는 겹쌓인 과로 때문이었다.그는 1912년
4월15일 태어나 1994년 7월8일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북녘동포들은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주석님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신다》라고 생각하며 지금 이순간도 그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고 있다.
왜 그럴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회고하는 글을 올렸다. 전문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논단]김일성주석 서거 18주년을 회고한다



*글:노길남 편집인


<##IMAGE##> 오늘은 김일성주석이 서거한지 18주년이 되는 날이다. 서거한 그날 북녘 땅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세계나라들과 평화애호민들은 그의 서거에 애도하는 조문들을 보냈다.

김일성주석의 서거는 겹쌓인 과로 때문이었다.그는 1912년 4월15일 태어나 1994년 7월8일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북녘동포들은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주석님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신다”라고 생각하며 지금 이순간도 그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고 있다.

왜 그럴까?

김일성주석의 생활철학도, 지도자철학도 모두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의 좌우명은 “이민위천”이었다. 사람(인민)을 하늘처럼 떠 받든다는 뜻이다.

김일성주석의 한 생은 참으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렇다. 그는 한 시대에 두 제국주의자들과 대결하여야 할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인민의 힘을 믿고, 인민에 의거하여 인민의 나라, 주체사회주의를 건설했다. 그것도 조그만한 나라에서 큰 나라를 상대하여 싸워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주석은 일본제국주의주의자들과 대결하면서도 같은 동족내부의 파벌과 갈등까지 해결하며 투쟁해야 하였고, 분단시대에 들어와서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맞서 수십년 세월을 자체 힘으로 주권을 지켜내고 자주성을 실현하며 동시에 분단조국을 통일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온갖 노력을 쏟아 왔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통일조국의 문건에 날자를 명기하고 여기에 서명한 자욱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서거하기 하루전에 서명한《김일성, 1994.7.7"》이었다. 이 친필비가 김일성주석 서거 이듬해인 1995년 8월11일 8.15광복50돌 기념으로 판문점에 건립되었다. 이 친필비 뒷면에는 “민족분렬의 비극을 가시고 조국통일 성업을 이룩하기 위한 력사적인 문건에 생애의 마지막 친필 존함을 남기신 경애하는 김일성 주석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 가리”는 글발이 새겨져 있다.

항일투쟁시기와 해방정국의 주요업적들


김일성주석이 화성의숙을 중퇴한 이후인 10대 소년시기인 1926년 12월17일 이미 《ㅌㄷ》조직, 즉 타도일본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후 3년이후 김일성주석은 1930년 6월30일 카륜회의를 소집하여 조성된 정세와 향후 진로에 대해 동지들과 장시간 토론한데 기초하여 《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하면서 그 당시 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투쟁으로 규정했다. 이 때 이미 혁명이론과 오늘의 주체철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분석된다.

한편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1927년2월에 《신간회》를 결성하여 연합전선체를 운영해 왔으나 일제의 간교한 방해공작책동과 민족진영 자체 지도부역량의 한계성으로 1931년5월 이 조직을 폐쇄하고 말았다.

김일성주석은 그 이후 5년만인 1936년 5월1일 우리민족 반일투쟁역량을 묶어 《조국광복회》를 발족시켰다. 이 조직이 성장하여 해방정국에서 역량을 발휘하게 된 그 배경은 김주석의 지도력과 함께 그의 동지사랑과 인민사랑이었다.

해방정국을 맞아서도 진정한 해방은 23일 뿐이었다. 미 제국주의세력은 전범국인 일본의 허리를 짜르지 않고 식민지 36년의 피해국인 조국반도의 허리, 3.8선을 짜르고 그 이후 67년 세월을 남녘 땅에 눌러 앉아 남녘의 사사건건을 간섭하고 지배하며 분단을 영구화하기 위해 우리 민족을 괴롭혀 왔다.

<##IMAGE##> 김일성주석은 미제국주의 세력의 분열정책을 극복하기 위해 1946년 7월22일에도 민주주의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회의를 통해 공산당을 포함한 4개정당과 13개 대중단체, 6백여만명의 조직군중들을 묶어 세우는 한편 남녘의 여러인사들에게 친히 편지를 보내 민족대단결을 호소했다.

이에 대해 미제국주의 세력은 1947년 7월19일 서울 한 복판에서 민족자주사상과 민족대단결 사상을 지향하는 애국자 여운형선생이 민족분열주의자의 흉탄에 쓰러지는 사건을 보면서도 같은 해 9월 코리아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끌고가 부당한 결정을 내리게 하였고, 1948년 2월에 유엔소총회를 통해 남녘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할데 대한 결정을 강압적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김일성주석은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948년 4월19일 평양 모란극장에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주관했다. 여기에는 남녘의 민주한독당을 포함하여 남로당, 근로인민당, 신진당, 청우당, 근로대중당 및 남녘의 31개 정당, 사회단체들 대표들이 참가하였고, 북녘에서는 로동당,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을 비롯하여 3개정당, 12단체 대표들이 참가했다. 다시 말하면 남녘에서 미제의 지배에 동조하는 소수의 이승만 세력을 제외하고 백범 김구선생을 포함한 민족주의진영, 진보진영 및 좌우익 세력 거의 모두가 이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이 모임에 참가한 남북대표들의 숫자는 56개 남북의 제정당, 사회단체들의 대표 695명이었다. 이들은 당시 1천만여명의 조직성원들을 가진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의 대표였다.

김일성주석의 분단시대 통일정책


김일성주석은 항일투쟁시기나 해방정국, 그리고 분단시대에 들어와서도 우리민족끼리 단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민족대단결”이 반외세 민족자주투쟁에서 가장 으뜸가는 승리의 열쇠이며 비결이라고 강조해 왔다.

김일성주석의 통일정책은 언제나 일관적이었다. 시대나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았다. 그의 통일정책은 언제나 원칙다운 원칙에 입각하여 추진되어 왔다. 요약하면 그의 통일정책은 민족자주의 원칙이며, 평화통일의 원칙이고, 이러한 목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민족대단결”에 의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녘동포사회에서는 사대매국세력들이 발붙일 곳이 없다. 우리민족끼리 서로 손잡고 오손도손하게 힘을 합쳐 살 수 있는 그런 공간들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분열주의자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어떤 공간도 없다.

김일성주석의 통일정책은 투명성이 있다. 1972년에 남북 당국자간에 합의되어 동시적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발표한 7.4남북공동성명의 3대원칙은 민족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다. 1980년 10월10일 김일성주석에 의해 발표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의 내용 골자도 위의 3대원칙에 기초하여 만들어 졌다. 이 방안에서도 평화통일의 원칙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어느 쪽의 흡수통일도, 그리고 어느 쪽의 적화통일도 전쟁을 부르기 때문에 남과 북이 서로의 사상과 이념, 체제 등을 서로 존중하는 입장에서 만들어 진 합리적인 통일방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이 1993년 4월7일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들도 3대원칙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들


김일성주석은 북녘동포들 뿐만 아니라 그를 만난 미국 각계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지도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김일성주석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포함하여 독일의 루이저 린저 및 세계 평화애호 지도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흠모의 대상이 된다.

백범 김구선생과 여운형선생도 그를 만나본 이후 인생관이 바뀌었다.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선생을 비롯하여 재미동포 김성락목사(전 숭실대학교 총장), 날카로운 재미동포기자 문명자선생, 태권도 선구자 최홍의선생, 남녘의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최덕신선생, 남녘의 문익환목사, 통일교 교주 문선명목사 등의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마음들을 읽어 보려면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처럼 김일성주석을 직접 만난 사람들로부터 직접들어 보는 경우도 있지만 묘향산에 위치한 국제친선박물관에 가 보면 과연 김일성주석의 위대함이 얼마나 넓고 크다는 것을 알게된다.

김일성주석의 위대함은 또 그를 만나본 해외동포들이나 외국인들의 소감이 거의 대동소이한 점이다. 그를 직접 만나 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회자하지 않는다.

직접 만나면 우선 친근감이 있고 따뜻함을 느낀다. 공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위엄있고, 근엄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그의 소박한 마음과 품성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다. 나도 지난 1990년 8월18일 함경북도 주을온천(지금은 경성지역)에서 해외동포 대표들과 함께 제1회 8.15범민족대회를 마치고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은바 있었다.

1994년 7월8일, 김일성주석의 서거일을 돌이켜 보면 아직도 그분과의 접견때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분은 비록 서거하였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북녘동포들의 마음과 그를 만났던 세계인들과 해외동포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김일성 주석의 따뜻한 마음과 다정한 표정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생각된다.

김일성주석의 유훈정치와 오늘의 현주소


1994년 7월8일, 2011년 12월17일은 날자는 다르지만 북녘의 최고지도자들이 서거한 날들이다. 앞의 날자는 김일성주석이 서거한 날이고, 뒤의 날자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서거한 날자이다.

<##IMAGE##>여기에서 김일성주석의 유훈정치라는 것은 김일성주석의 후계자가 그의 국정철학을 그대로 받들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계자가 누가 되는가는 고인의 정책을 누가 가장 잘 받들어 운영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북녘사회의 후계구도는 세습이 아니라 ‘혁명의 계승’이라고 부르는게 적절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또 당대표자 회의나 최고인민회의에서 결정되는 사항들에서도 유훈정치의 혁명적 계승이라는 사실이 발견된다. 후계자가 선대 지도자의 직위를 이어받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켜 놓고 그 직위에 대해 존중하며 그 혁명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나가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것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시대에 그 전통이 수립되었고,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서거이후 후계전통에서도 똑같이 반영되었다. 수령이라는 직위 명칭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용하지 않았듯이 김정은 최고사령관도 국방위원장의 명칭직위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선대 지도자의 명칭으로 남겨 놓았다.

이러한 형식의 의미는 선대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존중의 뜻도 있지만 선대 지도자의 기조에 해당되는 정책을 임의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혁명을 계승하여 나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후계계승 작업과정에서 전혀 동요가 없었고, 오히려 후계과정을 통하여 새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층 더 단결단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북녘동포들은 불철주야 줴기밥에 새우잠으로 현지지도하며 쌓인 과로로 달리는 기차에서 서거한 김정일국방위원장에 대해 너무나 죄송하다고 울부짖으면서 “우리 인민이 더 열심히 일했다면 장군님께서 서거하지 않았는데…”하며 통곡하는 장면들이 여기저기에 발견되었다.

다하지 못한 그 죄송함을 새 지도자를 위하여 더 한층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의 마음들이 넘쳐나 있었다. 그리고 새 지도자는 인민을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고 잘 살수 있도록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드팀없는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 세상에 후계계승 문제가 이처럼 빠른시간에 세련되게 진행되는 나라를 지구촌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 같은 후계문제에 대한 기초도 김일성주석께서 이미 전통화하여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 김정은최고사령관의 영도력과 지도체계는 김일성주석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지금의 북녘사회도 선대 지도자들의 전통따라 지도자-당-군민이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이제는 서방언론들도 엉뚱한 이야기하기를 삼가고 있다. 북녘동포사회가 보여주는 현주소가 왜곡보도하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북녘은 이미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놀랄만한 무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4월 해외동포들에게 최초로 관람시킨 《무장장비관》에 진열 전시해 놓은 무기들을 보고서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전시관에 진열한 무기들이 전부는 아닌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마도 90%정도 진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10%정도는 무엇일까 상상하여 보기도 했다.

미국까지 날라가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를 보았지만 14,15, 16, 17 등은 볼 수 없었고, 이온무기체계로 개발하여 놓았다는 첨단과학 신무기들은 보이지 않았고, 미국의 핵침략 위협에 대응하여 만들어 놓은 핵억제력이 몇 개나 될까에 대해서는 궁금하기만 했다.

북전문가라고 하는 미국칼럼니스트를 포함하여 남녘과 해외동포사회 필진들은 북에 핵무기가 얼마나 될까에 대해 그 대답들이 중구난방이다. 10여개 된다는 사람도 있고, 수십개 된다는 사람도 있고, 150개 내지 250여기가 된다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미국과 핵전쟁이 붙었을 때 대결할 수 있을 정도의 핵무기는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분명한 것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시대가 끝났다고 하는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연설내용의 진위여부는 《무장장비관》을 참관하고 나오면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북녘의 현주소는 어디까지 왔나?


북녘은 이미 정치사상강국과 군사강국의 지위를 만들어 놓았고, 종합예술음악강국, 그리고 첨단과학기술강국의 지위를 터득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자체적으로 핵억제력을 만들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고, 인공지구위성 발사체를 만든다는 것은 첨단과학기술이 뒷받침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분야이다. 북은 이미 1992년 러시아제의 SU35 전투기 모델을 이용하여 자체 전투기 2대를 생산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지금 미그기와 같은 전투기, SUKHOI 전투기와 같은 주체형 전투기 수천대를 계열식 생산으로 제작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동안 군사예산에 들어갔던 예산들이 앞으로는 북녘동포들의 생활향상에 직결되는 경공업과 미래의 발전을 이끄는 첨단과학기술분야에 한층 더 투자될 것으로 예견된다.

게다가 북은 21세기의 첨단과학을 이끌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시스템을 12축이상 생산제작하며 앞으로 17축으로 끌어 올릴 계획이며, 21세기 산업혁명의 무기로 등장할 이른바 핵융합기술(Nuclear fusion Skill) 시험에 성공하여 앞으로 무궁무진한 전력을 포함하여 4차원산업 집단의 중심적 역할을 하기위해 동북아지역의 다국적 산업기지를 구상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토대와 기반은 모두 주체사회주의를 건설한 김일성주석의 업적과 이를 이어받아 선군정치로 다져놓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유훈정치 덕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기반에 토대하여 21세기에 부상할 조선의 위상에 대하여 이미 세계는 김정은총사령관을 향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의 정치는 김일성주석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유훈정치로 빛을 발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끝)


김일성주석 생애-1994년-1부: 북녘동포들의 그리움 동영상(8분)




김일성주석 생애-1994년 2부: 서거하신 그해에도 나라건설에 매진(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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